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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맞게방이 점점 재미없어져가는 이유 (feat. 비트겐슈타인, 도킨스)

작성자서현&규환아빠|작성시간23.06.06|조회수2,205 목록 댓글 44

착시에 관한 유명한 그림이죠.

 

어떤 사람은 오리 머리로 보고, 어떤 사람은 토끼 머리로 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읽어보려다가 어려워서 진즉에 포기했지만, 그가 한 얘기 중 딱 하나 머리에 남은 게 바로 이 그림에 관한 얘기입니다.

 

대상과 해석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그 전까지 (지금도 대부분) 과학자들은 대상이 있고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면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상을 보는 행위 자체가 해석이 전제된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볼 때 이미 머릿속에 어떤 해석의 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오지의 원주민이 문명 세계에 처음 와서 가정에 놓인 식탁을 보면 제단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요.

 

 

리처드 도킨스도 <이기적 유전자 > 서문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지요.

 

 

이것은 네커 큐브(Necker cube)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19세기 스위스의 네커가 그림).

 

처음에는 이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계속 들여다 보고 있으면, 이렇게 보입니다.

 

계속 더 들여다 보고 있으면 또 처음 그림으로 보입니다.

 

순서는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 그림으로 도킨스가 말하려고 한 것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두 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었죠.

 

(그가 말한 대상은 자연 선택입니다. 진화에서 일어나는 자연 선택에 유전자의 관점과 개체의 관점이 있고 둘 다 맞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해석과 저 해석 사이에 어느 것이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은 내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현대의 논리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정설은 없다고 합니다.

 

그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의 다수가 인정하는 것을 따르는 실용적 선택이 있다고 할까.

 

 

물론 토마스 쿤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어 가는 혁명을 통해 과학이, 인류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과학이 어떤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간다고까지 생각하지는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전의 패러다임보다 반드시 낫다고 볼 수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도킨스는 이보다 더 급전적이어서, 진화에는 어떤 목적도 없고 그저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할 뿐이라고 하지요.

 

 

저는 젊은 날, 인류가 굴곡을 겪으며 발전하고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칸트, 헤겔) 아직도 그러한 경향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의 진보에 기여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고요.

 

하지만 도킨스를 읽고 그의 생각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을 보며, 제 생각도 결국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도킨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이미 여러 사람이 하고 있지만, 시대가 더 지나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쌓이면 또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할 겁니다.

 

그러면 지금 생각도 낡은 것이 될 거고요.

 

여기까지 생각하면, 생각의 우열을 가리키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기에 말년에 이런 말을 남긴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될까.

 

그건 각자 판단할 문제겠지요.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그림이나 도킨스가 인용한 네커 큐브의 요지는, 말은 곧 관점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남녀 관계에 관한 농담을 많이 하는 사람은 관계를 그렇게 해석하는 관점이 남보다 강하다는 표시겠지요.

 

인간 관계를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사람은 가벼운 말에서도 그런 관점이 배어납니다.

 

이해 관계보다 옳고 그름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또 같은 일에 대해서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객관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옳지만 다음 번에는 틀릴 수도 있고요.

 

그나마 조금 나은 방법은 맥락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런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니 이렇게 판정하고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겠다.

 

물론 이 때도 누구 입장에서 최선이냐는 문제는 남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물론 나의 입장입니다.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이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서 파생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

 

여기서부터는 윤리의 영역이 되는 거지요.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요는, 맞게방이 점점 재미없어지는 이유가 자기 관점을 고집하는 경향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주이용자 연령층이 높아지는 것과 상관없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자신의 완고해지는 면을 돌아보게 하는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활용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나마 맞게방이 좀 더 재미있어지려면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에 관한 글이 올라와야 하고, 의견 차이가 좁혀질 것 같지 않은 문제는 굳이 꺼내지 않는 약간의 절제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생각이 완고한 사람의 글에는 대응하지 않는 것도 요령이고요.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큰 흐름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압니다.

 

그래도 이 글에 공감하는 분들도 소수라도 있으면 맞게방 분위기가 약간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몇 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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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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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디227 | 작성시간 23.11.07 공감합니다
  • 작성자시장가 | 작성시간 23.11.08 정말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 작성자뭉개구름7 | 작성시간 23.11.09 공감합니다
  • 작성자dipom | 작성시간 23.11.22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구름둥둥둥 | 작성시간 24.02.20 가입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게시판에 너무 노골적인 정치얘기가 간혹 보이더라구요~ 본인과 뜻이 같은 다른 곳에서 하시면 더 신나게 얘기하실 수 있으실텐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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