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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한 하루

작성자恩波 안균세|작성시간23.10.19|조회수182 목록 댓글 0

요즘, 우리 집의 아침은 늦게 밝는다.

팔순의 언덕에 선 우리부부가 사는 집은 아침회의도 없는 우리 집, 남쪽 창의

햇살이 커튼 사이로 눈부실 때까지 늦잠에 취한다. 그러나 이제는 얼마든지

게을러도 괜찮은 늙음의 나이, 늦은 아침마다 나에게 찾아온 노후를 예찬한다.

 

23층에 있는 우리 집 거실소파는 높은 위치에 전면이 유리창이라 찻잔을 들고

건너다 보면, 막힘 없이 바로 앞산의 숲과 나무와 꽃들, 아파트 남쪽정원이

마치 내 집 앞마당처럼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가꾸는 수고 없이, 그 안에 가득한 꽃과 나무를 매일 공짜로 즐긴다.

소유하지 않으면서, 분주하지 않으면서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

오늘날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 이들에겐 어림없는 늙음의 특권이다.

 

그런데 요즘 가을날씨는 왜이리 청명한 지, 집에서 편안한 여유로움에만

취해 있는 것이 무언가 게으름 같아 미안하고 못마땅하다.

 

유례없이 연일 폭우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긴 여름은 지나고, 가을이 짙어진

10월 중순의 청명한 어느 날, 집안에 갇혀 있으니 도망가듯 달아나는 세월의

흐름을 붙잡아 손짓하는 가을의 정취와 그 유혹에 이끌려 무작정 차를 몰아

어디든 자연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교통 복잡한 연휴와 주말을 피해 평일에 큰딸부부가 자기들이 다녀왔다는

서울근교에 위치한 북한강변의 아름다운 레스토랑, ‘왈츠와 닥터만’을 소개하며,

그곳의 하나뿐인 야외테라스 좌석과 점심식사를 예약했다며,

두 분이 오붓하게 다녀오시라 한다.

 

화창한 지난 주중, 멋 내 꾸며 입고 집에서 한 시간거리인 그곳을 향해 기분 좋게

자가 운전하여 출발했다. 도착해보니, 바로 북한강변의 넓은 마당과 꽤 큰 3층

건물인데, 입구간판부터 예술적으로 꾸며져 있고 금요일마다 음악회를 연다 한다.

아름다운 건물과 강변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는 동안 안내양이 와서

예약좌석으로 안내한다. 곧 준비된 주 메뉴(안심 스테이크와 왕새우요리)와

몇 차례 나오는 메뉴순서마다 설명한다. 눈을 들어 건물 안쪽을 바라보니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은 창가에 몇 쌍이 다정하게

식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는 흘러가는 세월과 북한강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오늘은 가을을 음미하는 여유와 자유를 만끽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커피는 강변산책 후 마시기로 하고, 내가 즐기는 블루 마운틴을 아내가 주문했다.

한잔에 3만원인데, 식사하신 분에게는 50%할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식당 앞 강변 산책길을 손잡고 걷는데, 눈에 들어오는 강변 주위의

풍광전체가 서서히 ‘가을 병(病)’에 걸려 변해가고 있었다. 나무도 잎도 풀도

색깔은 누렇게 되어가고 꽃은 마르고 바람도 약간 차가워지고 하늘은 높고

행인들의 옷과 표정도 두터워지고 삼라만상이 온통 변해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때가 되면 찾아오는 감성과 변화의 ‘가을 병(病)’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어김없이 걸리는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자연현상인 모양이다.

 

산책을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오니 주문한 커피, 블루 마운틴을 가져왔다.

커피 중에서도 나는 "블루 마운틴"을 제일 좋아하며 어딜 가나 즐겨 찾는데

값이 좀 비싸고,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보통 커피 점에서는

잘 팔지 않는다. 설탕과 프림을 넣지 않고 마시는 이 커피에서, 나는 순수한

커피 향을 그대로 느끼며, 그 맛을 옛부터 즐기며 좋아한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약60년 전 학창시절, 대학로에 가면, 샘터건물 1층에 

커피 전문점이 있었는데,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죄다 모아 놓은 것같이,

벼라 별 커피가 다 있었다. 거기서, 나는 처음 "블루 마운틴"을 맛보고, 평생

그 맛에 푹 빠지는 애호가 되어, 그 후 문득문득 그때의 분위기와 맛이 그리워

지면, 젊었을 때는 가끔 아내와 그곳을 찾아 블루 마운틴을 마시곤 했다.

요즈음에는 남한산성의 카페 “아라비카”나 홍대 앞 전문커피 점을 찾아 맛보곤

한다. 그 커피 향과 함께 기분 좋은 추억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조용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 후, 퇴근시간을 피해

귀가하려고, 아내가 계산대로 갔다가 황급히 돌아와 “여보, 어떤 부부가 우리

식사대를 가만히 계산하고 갔대요”한다

 

사장님이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시라 했지만 “자기들이 누구라고 이야기하지 말고,

저기 앉아 식사와 커피를 하시는 노부부의 정다운 모습과 이런 분위기 좋은

곳을 찾아 즐기는 여유와 행복이 자기들의 롤 모델이며 자기들도 저렇게

늙고 싶다”고 말하며 음식값을 대신 치르고 조용히 가셨다 한다.

(그 부부는 자기네 음식점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이라 함)

 

오늘, 우리부부는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고 생전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

감동 벅차고 흥분되는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커피를 마시다가 옆의 젊은 손님의 다정한 모습이 좋거나 예뻐 보이면,

차 값은 내가 내고 갈 터니 좋은 시간 보내라고 인사하는 경우는 들었어도,

오늘같이 전혀 모르는 분에게 십여 만원의 적잖은 음식값을 대납하고 아무런

인사나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저렇게 갈 수가 있느냐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그야말로, 오늘은 인생길에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아름답게 인정받은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은 날이라 생각되어, 서로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을 저 하늘로 띄어 보냈다.

 

우리가 식사할 때, 중년부부가 유난히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도 그분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했다.

오늘의 호의는 감사히 받지만 답례할 방법이 없어, 아내가 YWCA명함을 꺼내

뒷면에 “참, 감사합니다. 꼭 뵙고 싶습니다.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메모를 적어,

사장님께 그 분들에게 연락해 주시든지 다음에 오시면 꼭 전해달라 당부 드렸다.

 

그 중년부부가 분위기에 불을 질러 그런지, 추가로 사장님이 직접 블랜딩한

커피와 서빙한 직원도 색다른 자그마한 커피박스를 선물로 주며 배웅하기에,

우리가 감사하다 하며 다음 기회에 꼭 한번 더 들리겠다고 말했다.

 

앞에 가신 그분들이나 주인과 안내양이 보기에, 노부부가 청명한 가을날씨에

북한강변을 드라이브하여 경관 좋은 이곳까지 찾아와서 식사와 커피를 나누며

다정한 얼굴로 여유를 즐기는 행복한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이고 부러워하며

앞으로 그렇게 닮기를 원했던가?

 

인생의 치열한 삶의 논리에서 벗어나 초연해지는 것이 늙음의 여유인가,

바램인가, 은총인가? 기대와 욕망은 사라지고 과욕이 씻기어 간 자리에 감사와

행복이 고운 상념으로 번져간다.

 

인생에서 어느 시기를 가장 좋은 때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도착한 ‘지금의 노후’는 감사가 넘치는 행복의 땅이라 말하고 싶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고, 비로서 ‘평화와 자유’가 바로 보이는 축복의 영토였다.

책임과 의무에서도 자유로운 나이, 늙음의 시간, 세상에 묶이지 않은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

 

오늘의 귀가 길은 생애에 가장 행복감을 맛보며, 우리부부가 이렇든 저렇든

긴 세월,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성도들에게, 주위의 많은 지인들에게

세월과 삶의 변곡점을 거치면서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낸 멋진 인생을

살아왔다는 감사와 감격 속에서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계획하는

참 행복한 하루였다.

 

결혼 반세기를 훌쩍 넘긴 우리부부, 긴 세월이 흘러, 이제는 늙어 옛 건강이나

열정, 꿈은 흘러가고 주름진 얼굴과 백발이 머리를 덮은 우리 부부는 젊은 시절과

또 다른, 따뜻하고 정다운 눈빛으로 서로 고마운 마음과 이겨낸 세월을 바라본다.

그리고 두 손잡고 우리에게 행복한 노후를 허락하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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