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길로 2023년, 검은 토끼띠의 해, 계묘년( (癸卯年)이 간다.
을씨년스런 찬 겨울 눈비 맞은 감나무 가지를
툭 건드리며 시큼하게 간다.
이 길로 2024년, 청룡띠의 해, 갑진년(甲辰年)이 온다.
누가 시키지도 안 했는데 낙엽 다 떨구고
손바닥만한 햇볕에 얼굴 비비는 촌 늙은이처럼 낮은 키로 온다.
간다고 우는 사람 없어도, 온다고 반기는 사람 없어도,
갈건 가고 올 건 온다.
세상 모든 건 아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돌아간다는 걸 잘 안다.
뒷다리 잡고 안간힘 다해 늘어져도, 눈 붉혀 두 팔 벌려 앞을 막아도
갈건 가고, 올 건 온다.
인간의 의지와 희망에 개의치 않고, 세상은 제갈 길로 잘 돌아간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한 해의 시간이 오건 가건 관계없이
열매는 맺을 것은 맺고 떨어질 것은 떨어지고
올 인생은 오고, 갈 인생은 간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세상의 이치를 동네 나무들에게서 배웠다.
그걸 아는 이 마을은 그래서 나무처럼 조용하다.
100년도 채 못사는 인간들만 조용하면, 이 세상은 모든 게 조용하다.
조용하게 살라고 아이들은 어른에게 배웠고,
어른들은 조상에게 배웠고, 조상은 나무로부터 배웠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세상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오랜 세월 동네나무에 매달려
한 세월을 ‘웅~ 웅~’거리며 시끄럽게 살다간 바람이 알려줘 알았다.
그런데 요즈음, 이 세상은 너무 시끄럽다.
동네나무는 어디 가 버리고,
산에 있어야 하는 바위를
갈 건 가고 올 건 오는 동네어귀까지
인간들이 굴러와
부딪치는 소리, 깨지는 소리만 들린다.
동네 골목 집집마다 산해진미 가득 쌓아놓고
이놈 저놈 편갈라 삿대질하며
담장너머 저 멀리 고함소리 들리니
지나가던 객이 찡그리며 귀를 막는다
휴식의 잔디밭과 자연스런 오솔길은 어디 가고
광장과 아스팔트 대로변에서만 고함지른다.
동네 밖, 저 동네 불량배들이 총칼 들고 몰려온다 해도
싸리문 열어놓고 마당 멍석에 둘러 앉아
돈 따먹기 놀음에 다투는 소리, 목청을 높이니
부엌 아궁이 불, 마루에 튀는 줄 모른다.
바람이 불면 바람소리를, 비 오면 비 소리를
나지막한 토담이 죄다 흡수해 버렸는데.
높게 쌓아 올린 시멘트 벽과 그 위 쇠창살은 공명시켜
더 큰 소리를 만들어낸다.
보암직 먹음직한 홍시 어데 가고
잎 없는 감나무가 보이는 동네 흙 길을 걷는다.
지나온 일년을 지나쳐 걷는다
메마른 담쟁이는 더 이상 갈 길을 묻지 않으려 하지만,
인간인 내 발길이 아직도 바쁘다
인생의 삭풍이 발길을 재촉한다
떠나가는 계묘년(癸卯年)과 오는 갑진년(甲辰年) 의 시간보다
내가 더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