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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1) 임청각 / 한국국학진흥원

작성자南齋|작성시간15.12.09|조회수27 목록 댓글 0

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1) 임청각 / 한국국학진흥원



   2015년 실학훼밀리 추계 역사기행-1)  

2015. 12. 4~5. 안동

임청각 / 한국국학진흥원



안동 까치구멍집 / 점심: 헛재삿밥


  실학훼밀리 회원들이 12일 코스로 안동 역사기행을 떠나는 날은 추위가 심하다는 일기 예보로 모두가 옷을 두껍게 준비하였다.


  이성무 회장께서 입원하시어 참석치 못한다는 걱정스러움이 있었고, 실학 박물관 김시업 관장께서 자칭 해설과 안내를 맡았으니 역사 탐방치고 최고 수준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번 코스는 김관장의 고향인 안동 내앞(川前)과 학봉 김성일 종가 방문이 끼어 있어 더 기대가 되며, 내앞과 학봉가가 의성김씨 문중이다.


  南齋가 반세기 전에 안동서 생활 할 때는 안동 양반으로 내앞김씨라고만 알았지 내앞김씨가 그 유명한 의성김씨임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윤형민 총무의 철저한 준비와 장문철, 민문영 두 학예사의 준비 속에 떠난 여행에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시작된 김시업 관장님의 즐거운 여행 가이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안동 땜 부근의 식당에 다달았다.



 

   임청각(석주 이상룡 군자정)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한 이 고택은 보물 제182호이며 임시정부 초개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로, 석주의 가문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이 임청각(臨淸閣: 별당채인 군자정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음) 고택은 일제강점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은 채 오늘까지 힘겹게 버티고 있는 문화재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인들은 고택 바로 옆에 철길을 건설해 독립운동가들이 유독 많이 배출되는 안동 지역을 직접 통치하고 관리하고자 했다.


   애초의 임청각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 선생이 이곳 지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터전을 잡음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건물을 지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구절에서 ()’ 자와 ()’ 자를 인용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철길과 방음벽으로 볼품없는 전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종환의 택리지에도 명승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사대부가의 대표적인 건물이자 강이 내려다 보이는 등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


   임청각은 사랑채의 당호로, 군자정 별당과 나란히 산의 지형에 E#k라 펼쳐저 있다. 이 가옧은 평면 형태가 특이하다. 풍수지리에 따른 주택의 길지를 잡아 집을 짓는데 있어 그 평면 형태를 일(), ()자와 같은 길자 형태로 하면 좋다 하였다. 이 가옥은 일(), ()자 또는 그 합자 형태인 용()자 형으로 되어 있다. ()자는 하늘을 나타내는 의미로,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生氣)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

 

  사랑채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 우물은 이 가옥의 혈이 있는 장소로, 훌륭한 인재 셋이 나온다는 전설이 깃든 특별한 우물이다. 지금도 항상 맑은 물이 우물 안에 가득하다. 하지만 외부의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사랑채 마당의 우물이어서 아녀자들이 빈번히 이용하기애는 불편했을 것이다. 따라서 별당인 군자정의 활용도는 또 그만큼 커질 수 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가옥은 참으로 다양한 면에서 한옥의 예술적인 멋이 풍긴다. 다른 집네서는 2hf tn 없는 특별한 부분도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랑과 안채를 연결하고, 안채 행랑과 연결된 건물의 아래에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넉살무늬 고정창을 만들어 사용하는 점이다. 그리고 대지의 높낮이를 건물의 높낮이로 표현하여 아래는 창고와 방으로 사용하고 위쪽은 다락으로 연결하여 장중함을 주면서 안채나 사랑채에 사는 사람들은 대지의 높이 차이를 느낄 수 없게 하였다. 목수의 기발한 배치 기술과 설계 방법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더욱이 공간과 공간사이를 불리하면서도 회랑같은 느낌의 통로를 건물 아래로 처리하고 2층을 받치기 위한 튼튼한 네모형의 방형 기둥을 두어 집 안의 장중한 분위기를 더 하고 있다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국보 제16호인 신세동 칠층전탑(新世洞 七層塼塔)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으로 높이 16.8m, 기단폭 7.75m이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성치하였다.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제작연대에 서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 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단층 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는 없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28cm, 너비 약 14cm, 두께 약 6cm, 회흑색 무문전(無文塼)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 옥신(屋身)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서 직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는데,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48cm의 네모난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1층 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이, 7층이라는 고층인데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미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8·7·6·5·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10·9·8·7·6·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이 탑은 1487(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있는 한국학 전문 연구 기관.

한국학 자료 중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에 흩어져 소장되어 멸실 위기에 직면한 자료의 수집, 보존,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95127일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1995년 설치사무소를 개소하였고, 1997년 본관인 홍익의 집 공사를 착공하여 2001430일 준공하였다.

국학 자료 조사·수집 및 관리·보존 사업, 국학 연구 사업, 교육 연수 사업, 문화콘텐츠 개발사업, 유교문화박물관 전시 사업 등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재 조직은 원장, 이사장, 부원장, 기획홍보실, 연구부, 한국유교문화박물관, 인성연수원, 사무국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중 연구부는 국학연구실·고전국역실·디지털국학실로, 한국유교문화박물관은 국학자료실·전시운영실·목판연구실로 구성되어 있다.

 















































모원당(慕遠堂) 목판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樂民 장달수


모원당(慕遠堂)

모원당은 임진왜란 후에 세워졌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에 종가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래서 여헌 선생은 15년 동안이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를 중심으로 한 종인들이 선조 39(1606)에 불탄 자리에다 2칸 방 하나에 2칸 마루 하나인 작고 단순한 서향(西向)집을 지었다. 그리고 양쪽에 반 칸짜리 가재기를 달아서 북쪽 것은 부엌으로 사용하고 남쪽은 서책(書冊)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집이 완성(完成)되자 여헌 선생은 이 집을 모원당이라 명명(命名)하고 기문(記文)을 직접 찬술(撰述)하셨는데 그 기()에는 추원보본(追遠報本 먼 조상을 그리워하고 근본에 보답함의 뜻)이 담겨 있다. 이 부분을 국역(國譯) 여헌집(旅軒集)에 실려 있는 모원당기(慕遠堂記)에서 발췌(拔萃)해 본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父母)이고 부모를 낳은 이는 조부모(祖父母)이고 조부모를 낳은 이는 증조모부(曾祖母父)이니, 미루어 올라가면 십대(十代), 백대(百代), 천대(千代), 만대(萬代)로부터 저 옛날 원초(原初)에 인류(人類)를 낳은 조상(祖上)에 이른다. 그렇다면 원초에 인류를 낳은 조상은 우리 몸이 처음 시작해 생겨난 것이니 그 이하 백, , 만 대가 쌓여 내려옴은 다만 그 신체(身體)를 바꾸었을 뿐이다. 오직 그 기맥(氣脈: 서로 통하는 낌새)은 백, , 만대를 내려오면서도 한 기맥을 전하였는데, 형세(形勢)가 미치지 못함이 있고 정()이 다하기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제사(祭祀)는 한계(限界)가 있고 효도(孝道)는 미치기 어려우나 무궁(無窮)한 이치(理致)와 무한(無限)한 효성(孝誠)은 어찌 대()가 쌓였다 하여 혹 그칠 수 있겠는가?

 

나의 몸을 가벼이 여김은 나의 선조(先祖)를 가벼이 여기는 것이요, 나의 몸을 소홀(疏忽)히 함은 바로 나의 선조를 소홀히 하는 것이니, 하물며 가벼이 여기고 소홀히 할 뿐만 아니라 혹 그 몸을 욕()되게 하고 혹 그 몸을 패망(敗亡)하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그 선조를 욕되게 하고 그 선조를 패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에게 사랑의 이치(理致)를 다하고 효성(孝誠)의 도()를 지극(至極)히 하는 것이 과연(果然) 자기(自己) 몸을 아껴 공경(恭敬)하고 소중(所重)함에 벗어나겠는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박승윤과 박순(국학진흥원 목판 전임연구원)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이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 보낸 간찰()




사흘 동안 연이어 보내주신 답장은 분부하신 뜻이 모두 사의(事宜)에 합당하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의리에 더욱 감복하여 사례할 길이 없습니다. 강포한 왜적은 섬멸하기가 쉽지 않고 호남의 병사 또한 의지하기 어려움은 진실로 영감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구구한 저의 생각은 앞서 보낸 편지에 이미 진달했으니, 지금 다시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호남의 여러 군사들이 모두 성주(星州)로 간다하니, 회동할 기일에 미쳐 오지 못할까 염려스럽고, 상주(尙州) 또한 원조하러오기를 허락했으니, 피차간에 약속한 날짜가 어긋나서 거사를 도모하지 못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만일 과연 거사를 도모한다면 감히 영감의 말씀처럼 십분 신중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진산(晉山)의 포수 또한 말씀하신대로 독책하여 보내주시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화약이 몹시 부족하니,아울러 넉넉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앞 편지에서 올린 말씀에 들어있으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임진 1219일 면 재배






제비원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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