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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 정시한 선생의 기행문-산중일기의 학술적 가치

작성자南齋|작성시간15.12.12|조회수16 목록 댓글 0

우담 정시한 선생의 기행문-산중일기의 학술적 가치





우담 정시한 선생의 기행문

산중일기의 학술적 가치 공동 학술심포지움

원주역사박물관  2015.12.10.











정해성(나주정씨 월헌공파 종회 문화부장)


曰: 우담 정시한 선생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족보상의 어느 위치인지?

그리고 우담 해좌 다산선생의 생졸년을 말씀드립니다.

우담 정시한선생- 성리학자 (1625-1707),

해좌 정범조선생- 문장가 (1723-1801),

다산 정약용선생- 실학자 (1762-1836)


나주정씨(羅州丁氏) 시조 고려 중엽의 인물 고려검교대장군 정윤종

(丁允宗) 아래 나주정씨 최초 문과급제자 11세 자급(소격서령공), 그 아래 12세 수곤(교리공) 수강(월헌공) 형제중 월헌공 아래 13세 옥경(문화공) 옥형(공안공) 옥정(첨정공) 삼형제중 옥형아래 14세 응두(충정공) 아래 15세 윤조(전첨공) 윤희(고암공) 윤우(초암공) 윤복(대사헌공) 4형제중 윤복아래 16세 호약(참봉공) 호공(정랑공) 호관(사성공) 호선(동원동) 호서(병사공) 호제(진사공) 호익공 이상 7형제가 있습니다. 다섯째 호서(병사공)는 월헌공의 장손 집안 대를 잇기위해 출계하였습니다. 셋째 호관(사성공) 의 손자가 바로 우담 정시한 선생이 되십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넷째 호선(동원공) 아래 후손이 됩니다.

우담 선생의 저술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사칠변증(四七辨證)입니다. 성리학에 관한 것입니다. 학자들이 평가하길 퇴계(이황-李滉)를 사숙한 학자로 분류합니다만, 스승없이 혼자서 책을 많이 읽어보고 성리학의 궁리를 터득하신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평소 산행을 좋아하셨습니다만, 부모가 살아계실 적에는 즐겨 하지 못하시다가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후 60세 넘어서 약 3년에 걸쳐 네차례에 걸쳐 전국의 산과 사찰을 다니시며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해놓은 것이 바로 산중일기(山中日記)입니다. 산중일기는 우리나라 불교미술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또한 퇴계(이황-李滉)학의 학맥을 잇는 갈암 이현일선생 그리고 고산 이유장선생 등과의 만남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갈암 이현일과는 성리학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은 언급이 있습니다.


우담선생 년보(年譜)에 갈암 이현일 아들 밀암 이재 선생이 우담선생을 찾아오는 기록도 있으며, 성호이익선생의 형님 이잠 선생이 우담선생을 찾아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담선생 사후 1717년에 도동서원이 완성되어 우담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불타고 없다고 합니다. 다시 건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담선생의 저술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알기위해서는 우담선생 문집을 많이 읽어봐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타던 차(그레인져)













정시한 [丁時翰, 1625~170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나주(羅州). 자 군익(君翊). 호 우담(愚潭). 독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 원주(原州)에 은거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집의(執義) ·사업(司業)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뒤에 진선(進善)에 올라 1691(숙종 17) 앞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일을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가 삭직,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96년 희빈(禧賓) ()씨의 강호(降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를 초월하여 자기 소신을 밝혔다. 1704년 노인직(老人職)으로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정약용(丁若鏞) ·이익(李瀷)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주의 광암사(廣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술에 우담집을 비롯하여 산중일기》 《임오록(壬午錄)》 《관규록(管窺錄)》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변무록(辨誣錄)등이 있다.

 




개회사: 김언종 (고려대학교 고전번역학회장)


환영사: 김영민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장)


축사: 박수조 (원주문화원장)



기념촬영


1부 사회 이상인(연세대)


기조발표 우담 정시한선생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산중일기(리기용)

기조발표 리기용(연세대)






산중일기 [山中日記]

 

 

본문

필사본. 22.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1686(숙종 12) 313일에 원주(原州) 본가를 출발하여 청주 공림사(空林寺)를 거쳐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등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각 도의 명산과 고찰을 돌아보고, 겸하여 저자의 친척집을 두루 방문한 다음 1688919일 원주 대야(大野)의 본가로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이다. 이 정확한 기록은 당시의 사찰(寺刹) 현황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우담선생문집(愚潭先生文集)1920에 수록되어 있으며,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민영규(閔泳珪) 교수의 집교(輯校)로 인문과학자료총서(人文科學資料叢書) 1집으로 영인(影印) 간행하였다.

 





우담 정시한의 지리산과 덕유산 유람 - <산중일기>

 

1686 숙종 12년 병인,

 

3  퇴계학파 성리학자 원주 거주 우담 정시한 영호남 여행.

 

4 11일 아침에 거창 출발, 사근역에서 말 먹이 주고 저녁에 함양읍 냇가 서쪽 서원촌(백연서원) 김후달(金後達) 집에 도착, 군수 심도명(沈道明,沈澈)이 방문, 같이 숙박.

12일 냇가 방축 구경.

13 최고운과 김점필을 모신 백연서원 참배, 심원록(尋院錄)에 서명. 이은대에 등람, 식후에 서계 유람.

14일 아침에 매일 동숙하던 군수와 작별, 오후에 안양사(安養寺: 휴천면 문정리 법화사)에 도착.

15일 여암(驢巖), 삼성대(三聖臺), 용유당(휴천면 용유담) 유람, 오후에 군자사 도착, 향로당에서 숙박.

16일 진사 박세혁 내방, 저녁 금대암 방문, 안국사 향로전에서 숙박.

17일 벽송암 종장 천륜(天倫) 내방, 저녁 서암 방문, 노승 정찬 영접.

19일 아침 두타암, 무량굴, 상무주 방문, 묘적암 수좌 사철(思哲) 내방.

20일 묘적암 방문, 상무주로 귀환.

21일 윤판옥 수리, 견성암 종장 자징(自澄), 묘적수좌 사철 내방.

22일 군자사 승통 법안 내방.

24일 지리산 산불.

25일 상무주암을 떠나 천인암(千人菴), 상고대암(上高臺菴방문, 오후 실상사 도착.

26일 고철불 관찰.

27일 저녁 천인암으로 이거.

29일 영기 수좌 실상사로 귀환.

4 1일 견성암 왕래.

17일 도솔암에서 천왕봉 등정, 반야봉 유람, 저녁 칠불암 도착.

19일 금류동(金流洞) 도착.

 

5 1일 삼일암 왕래.

6 28일 군선요어(群仙要語) 3자 읽음.

7 4일 황정경오장도 6, 도장초(道藏抄) 10장 읽음.

5일 황정경채취도 이하 수십 장 종편 읽음.

23일 황정 오장도, 도장초 심신론(心神論) 읽음. 30일 저녁 연곡사 가서 비전의 선각선사비를 보다.

8 4일 황정 도장초 17장 다 읽음.

6일 황정 채약도 등 10여 장 재독.

20일 불일폭포 관람. 화개동을 지나 구례현 화엄사 향로전 숙박. 부도암에 올라 연기(烟起)조사 석상, 선각조사 모친 석상 관람.

22일 운동 비전 참배, 실상사 도착.

24일 부도전에서 쉬고 견성암에 오르다.

25일 천인암과 상무주암에 오르다.

 

9 2일 묘적암 방문, 박광선(朴光善: 함양읍내 서원<백연서원>촌에 산다고 함) 내방.

3일 묘적암에서 천인암으로, 견성암으로 하산하여 군자사 도착. 저녁 후에 말 타고 금대암 방문.

7일 금대암 출발 등구창촌(登龜倉村) 도착, 안국동암 각자승(刻字僧) 채간(綵侃) 동행 오도재 넘어 제안역촌에서 비를 만나 무릅쓰고 전진, 함양읍 냇물 서쪽 백연서원촌 김후달(金厚達) 집에 도착. 저녁 사근찰방 우홍성(禹弘成)과 함양군수 내방.

8일 아들 정항, 김후달과 이은대에 올라 함양읍내를 바라보고, 걸어서 학사루에 가서 등람. 군수와 작별하고 개평촌에 도착, 상주 출신으로 장가온 생원 황재겸 집에 숙박.

99 정일두선생과 노옥계 집터를 참관, 안음현을 지나 화림동 동구에 도착향교 앞 긴 다리를 건너 점풍루에 등람, 심진동과 화림동의 큰 내가 합쳐지는 경계에 반하여 이사와 살고 싶어 함. 일두선생 유람처인 군자대(군자정) 도착, 신평 전좌수촌에서 말 먹이고 옥산창촌(玉山倉村) 김진추 집에 숙박.

10일 덕유산 영각사 도착, 저녁 후 절 뒤 2리 은경대암(隱鏡臺菴) 등람, 천순 수좌 방문, 아들 정항도 와서 같이 숙박, 암승은 일천(一天)선찬(善贊: 영각사 표석비<숙종10,1684>에 보이는 선찬임)이다.

12일 강선암에 내려가다. 영각사 문을 지나 남현(남령)을 넘어 월성촌(月城村)에서 말 먹이고  농소막에 도착, 긴다리 건너 마정현 지나 옛 안음현 관창촌를 바라보고, 강남불촌의 가섭암에 숙박.

133좌 가섭상을 참관.

14일 고현을 지나 올라가 수송대 유람, 다시 고현을 지나 거창읍에서 말 먹이고 가조현 문좌수 남로(文南老집에서 숙박. 이하 생략(1997923일 화요일 우담전집에서 함산 초록)

 






정범진 나주정씨 대종회장

(전 성균관대총장, 한시협회 회장, 소수서원 원장, 우담기념사업회 회장)

우담정시한 선생연보가 최근 발간되었음을 알림

 





주제발표 1 우담 정시한의 산중일기와 도학자의 삶(김낙진)


2부 사회: 이채문 (우담정시한기념사업회)


김낙진 (진주교대)


(어머니의) 服喪이 끝나자 마침내 우리나라의 산천을 두루 돌아볼 뜻을 두어,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예순은 넘어 양친을 영원히 이별하였고 선조들을 위한 일(墓道事)도 대략 거행하였다. 만약에 다시 자식들에게 연연하여 쓸데없는 일에 골몰한다면 나의 일생을 저버리는 일이 될것이니, 책을 가지고 산에 들어가 내가 즐기는 것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막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읽은 책은 古箴銘(고잠명)· 仙經(선경)· 心經(심경)· 讀書錄(독서록)· 黃庭經(황정경)· 群仙要語(군선요어)· 發揮心經(발휘심경/심경발휘)· 北溪字義(북계자의)· 聖學十圖(성학십도)·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이다


우담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한마디로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있었다

금류동암에서 기록한 일기 거처하는 곳은 지극히 기묘하고 조용하니 한가로웠다. 오른쪽에는 반석(盤石)이 있어 폭포를 구경할 수 있었고, 왼쪽에는 사찰이 있어 도의 유행을 말할 만하다. 장차 일과에서 하는 일이 있으면서 이곳에 여러 해를 묶을 수 있어 매일 같이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세상 밖에서의 맑고 소박함이라 할 것이고, 더럽혀진 마음의 어둡고 막힌 것을 씻어 낼려는 바람이 이루어질 듯한데, 하늘이 과연 나의 소원을 들어줄까?


김낙진 (진주교대) / 김용헌 (한양대)




 

주제발표 2 산중일기에 보이는 17세기 불교문화유산(신대현)


신대현 (능인불교대학교



해인사 삼화상 영정(해인사)



신대현 (능인불교대학교)  이진용(연세대)






仍往弘濟庵四溟堂 先觀惟政碑 次觀影子 似有失眞處 問之 云 辛亥年間 見偸眞本 更爲摹寫 後聞放賣在釜山倭館也 人心可駭

잉왕홍제암사명당 선관유정비 차관영자 사유실진처 문지 운 신해년간 견투진본 경위모사 후문방매재부산왜관야 인심가해

 

홍제암 사명당(四溟堂)에 갔다. 먼저 유정(惟政)비를 본 다음 영정을 보았다. 그런데 (그림에서) 다소 옛날 모습이 안 나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처음 신해년(1671)에 진본을 읽어버린 뒤 (근래) 다시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들으니 부산 왜관(倭館)에서 그 잃어버렸던 것을 팔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시로 해괴하기만 하다.”

 




해인사 소장 세조 영정





법주사 대응보전 삼존불


법주사 전경



 



석굴암 전경


석굴암 전경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환성 지안 진영(통도사)



침굉 현변의 글씨를 새긴 경소제선우(敬訴諸禪友)’ 현판(선암사 성보박물관)

 


글 말미에 산중일기의 문화 종합서로서의 가치는 하나하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소중한 기록물에 대한 활용이다.

산중일기만한 것은 드물다 하더라도 이러한 기행문은 주위에서도 제법있다.

이들 기록을 번역하여 국문학 또는 국어학의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 다수다.

사찰의 역사와 문화는 불교계와 사찰문화 전공자들이 앞장서서 나서야 한다며,

산중일기를 통해서 이런 문화의식이 좀더 공고하게 자리 잡았으면 하고 바램을 가져 본다

 






주제발표 3 중국 전통사대부의 산수 인식과 우담의 산중일기(권석환)


권석환(상명대) 중국어 문학과 교수


권석환(상명대)  /  민경삼(백석대)


0 전통 사대부의 유람의식의 변화 과정으로 본 산중일기

0 인문지리적 관점에서 본 산중일기

0 유기의 표현형식으로 본 산중일기

0 결론

 


결어에

명말청초에 이르러 산수자연을 노니는 대상으로 여겼고, 자의적으로 유람을 떠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도로망이 정리되고 운송업이 발달하는가 하면 유람을 안내하는노정서의 출판이 유행하였다.

다양한 형식의 유람기가 창작되는가하면 역대 유람기를 정리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유람에 대한 평론을 통하여 진정한 유람이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의 현상과 유사한 면이 있고, 따라서 <산중일기>는 이러한 시대의 유람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산중일기>는 당시 유기들이 인문지리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추세에 따랐다.

우담은 유기 속에서 별유천지혹은 명당의 관념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과 산수 지세의 융합을 도모하였다.

<산중일기>에 기록된 석각, 전설, 고사, 풍문, 사찰, 서원, 민가, 부도 등은 모두 인문지리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산수자연에 대한 인문경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산중일기>는 일기체 유기로서 유종원, 육유, 왕사성, 서하객 등의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 산수자연에 대한 과도한 감정 이입과 자연 경관에 대한 화려한 묘사를 억제하였으며, 의론을 제기하기 보다는 유람의 여정 기록에 집중하였다.

 



나주정씨 다산 정약용선생 종부 이유정

(많은 행사에 참여함)



정해성 문화부장의 사진촬영


주제발표 4 13,000리 산중일기를 답사하다(이동진)


 



원주시 박물관장(이동진)

 










3인이 13,000리 답사하고 차를 폐차하였으며, 13,000매의 사진 촬영을 하였다는 설명


[이후 사진은 화질이 좋지 않아 남재 또는 인터넷 검색 사진임을 이해해주세요]


최고운과 김점필을 모신 백연서원 참배, 심원록(尋院錄)에 서명






안양사(安養寺: 휴천면 문정리 법화사)








여암(驢巖), 삼성대(三聖臺), 용유당(휴천면 용유담)



군자사 절터




금대암



벽송암





상무주암




지리산 연곡사




불일폭포





묘적암



등구창촌(登龜倉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강 건너 요수정

 

 

  

수송대(수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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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도산서원




 

유람을 떠나기 1개월 전 16872월 임금께 올린 상소에서

신은 중년이후로 계속해서 자손을 12명이나 연달아 잃어 마음의 병이 크게 도져 실성한 듯 했는데, 해가 가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뱃속엔 번민이 가득하여 열기가 상승하면 마치 불꽃이 몸을 태우는 듯 정신이 혼몽하고 마음이 울렁거려 곧바로 미친 듯 달리고 크게 소리 지르며 스스로 산과 못 사이에 몸을 맡기고자 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16901~4차에 걸친 여행을 마친 뒤 올린 상소에서


오십 이후에는 또한 온 몸에 고름이 차고 종기를 앓는 병증을 얻어 지금에 으르기까지 해마다 고생을 했는데,

매번 미친 듯이 달려 높은 봉우리나 산꼭대기에 오른 이후에야 심화(心火)가 조금 가라앉고 비로서 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종합토론 좌장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질문자 1   정해창


1 질문:“우담 선조님께서 3년간 많은 여행을 다니셨는데, 그 당시로는 가계가 넉넉지 않으셨을텐데 어떻게 그 먼길을 여행할 수 있었을가요? 요사이 같이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는데, 여행 할려면 지리를 찾는데도 어려울텐데...?”



 答曰영천(경북)에서는 하인이 재물을 보급해주기도 하고, 조정에 관련 안하셔도 유명인사이기에 지방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찾아오고 대접하기도 하였다

 答曰그 당시에는 절(사찰)은 여행하는 사람들의 숙박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질문자 2   정해원                   질문자 3        정해영 


2 질문:“도동서원을 건립하려면 원주시에서 지원을 받을 수 없는지?”

 



폐회사(정범진 회장)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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