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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예천아리랑의 발자취 공연전-1)

작성자南齋|작성시간16.02.03|조회수22 목록 댓글 0

창극 예천아리랑의 발자취 공연전-1)


창극

예천아리랑의 발자취 -1) 공연 전






대본/기획연출-장경자

사회-박보미

한국무용-최승윤      고수-장주영

음향-박수홍            영상, 비디오-정지수

          2016.1.30.. 오후 2

예천청소년수련관 대강당

 




자주 들릴 기회가 없는 예천이라 길도 설었는데 서울서 버스로 2시간 30분 거리이니 하루 생활권이다.

충효의 고장 예천은 경북도청 이전 환영 플랜카드가 시가지를 축제분위기를 하고 있다.

한천 다리 아래에 교육지원청에 볼 일이 있어 들렸다가 한천 도효자(都孝子) 공원이 있어 들렀다. 전에는 없던 곳이다.

 

작년에 한천 고향의 강 사업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니 도효자와 예천아리랑과는 깊은 관계가 있어 사전에 먼저 정리해서 올려 본다.

국악인 예천아리랑 보존회 이사장 장경자께서 10여년의 세월 동안 정성을 다해 공을 들여오고 예천 후진들을 가르치며 오늘 예천아리랑의 발자취창극 공연이라 기대가 크며 앞으로 유네스코에도 무형문화재로 등재되기를 기원해 본다.

 








이 곳은 충효정신을 계승하고

웅비 예천을 염원하고자 한천

고향의 강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하였다     2014. 5.

예천군수

 


 

하늘이 낸 효자 도시복(都始復) 이야기

무릇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예천은 충효의 고장이라 하여 많은 열사와 효자를 배출 하였으며 34가지 효****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특히 명심보감 효행편에는에는 도효자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도시복은 조선 철종 때 실존인물로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야목마을에 살았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이 어질고 효심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엔 혼신을 다하여 병간호 하였고 항상 예를 다하였으니 늦은 시간에 솔개가 집으로 고기를 날라다 주었고 철 아닌 홍시를 구할 수 있도록 호랑이가 먼길을 인도하였으며, 엄동설한에 잉어를 구하고 수박을 구할 수 있었으니, 고을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탄복을 하였다.

그의 효행 기록이 명심보감 속편에 실릴만큼 우리나라 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늘이 낸 효자(孝子) 도시복(都始復)


 경북 예천에 도효자(都孝子)는 이조 철종(哲宗)임금 때 사람으로 그 효성이 너무 지극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숯을 구워 팔고 나무를 해다 팔아서 근근히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면서 살았습니다. 장날이 되면 나무를 지고 장에 가서 팔아 고기반찬을 사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한번은 나뭇짐을 부려 놓아도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 늦게까지 있다가 헐값으로 팔았습니다. 그래 아주 늦게서야 다음 장날까지 잡수실 고기를 사가지고 지게 꼭대기에 달아매고 부지런히 오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걸음아 빨리 가자, 우리 어머니 배고프실라 지게 끝에 매인 팔자 어느 때나 배부르게 해 드리리-」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길을 걸어오는데 지게 끝에서 뭐가 획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깜짝 놀라 지게를 벗어보니, 지게 끝에 매어달고 오던 고기가 간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주저앉아 통곡하였습니다. 「에이, 무심한 짐승들아! 우리 어머니는 뭘 잡수시라고 하필이면 이 고기를 빼앗아 가느냐?」한참동안 울고 앉았다가 어머니가 기다리실 것을 생각하고 부지런히 길을 갔습니다. 다른 때에 비하여 근 두 시간이나 늦어서야 비로소 집에 도착하니 역시 부인과 그의 어머니께서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리 늦었습니까?」 「무슨 변이나 생기지 않았나 걱정하였다.」 그러나 시무룩히 말 한마디 않고 있는 남편을 보고 부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예, 큰 변이 생겼소. 어머님께 드리려고 사오던 고기를 무엇이 훔쳐갔소.」 「아이, 그 고기는 벌써 와서 저녁에 드셨는데요.」 하고, 석쇠위에 남은 고기를 가리켰습니다. 어머니가 거들었습니다. 「오늘 고기는 유난히도 맛이 있었다. 짐승이 물어다준 고기라서 그렇겠지?」 도효자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어머님 공양시간이 되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 당신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솔갱이가 무엇을 가슴에 안고 가다가 뚝 떨어뜨리지 않겠어요. 들여다보니 늘 당신이 사가지고 오던 그만큼의 양이더군요. 그래서 당신이 먼저 솔갱이 한테 보낸 것으로 알고 재주도 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 새 짐승도 내 마음만은 이해하고 있었구나.」 생각하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있다가 어머님께서 병환이 나셨습니다. 오뉴월 염천에 드러누워 며칠을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데 공교롭게도 홍시를 잡수시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오뉴월 염천에 홍시감이라니- 어디에 그런 것이 있을 것인가.」「이름난 장터에는 다 가보아도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 날도 도효자는 구하다 구하다 못하여 혹 산에 있는 감나무에 홍시 꼭지라도 붙어있지 않을까 해서 산에 가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 개울을 건너려고 하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길을 막았습니다. 효자가 소리쳤습니다. 「이 어리석은 짐승아, 우리 어머니는 지금 감을 구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고 있는데 이것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집에 가서 이 말씀이나 알려 드리고 나면 나타날 일이지 만일 어머님께서 기다리시다가 병환이 더하시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호랑이는 어슬렁어슬렁 앞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 체하였습니다. 이상히 생각하여 우두커니 서있었더니 마침내 그의 옆으로 와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효자가 망설이다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니 비행기처럼 날으듯 달려갔습니다. 새벽 두시쯤 되어서야 어느 집 문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호롱불이 반짝반짝하여서 주인양반을 찾으니 상복을 입은 상제가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날이 저물어서 하룻저녁 신세를 질까하여 왔습니다.」 예 잘 오셨습니다. 오늘 마침 아버님 기일입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하고 막 제사지낸 음식을 한상 차려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오뉴월 성하(盛夏)인데도 그의 상에는 아직 싱싱한 홍시가 두어 개 놓여 있지 않은가. 효자는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상제님, 음식을 주신 것은 고마우시나 어머님 생각이 나서 혼자 먹을 수 없습니다.」 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거참 그곳에도 우리 처지와 같은 분이 있군요. 우리 아버님께서 제일 좋아 하시는 것이 감(홍시)이랍니다. 그래서 집 주위에 감나무를 심어서 늘 그 감을 드렸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드릴 수가 없어 토굴속에 깊이깊이 간직해 놓았다가 제삿날이 되면 놓아드린 답니다. 두어 궤짝 놓아두면 3분의 1은 쓸 수 있게 되거든요. 여기 더 있으니 안심 하시고 잡수십시오. 어머님 드릴 것은 따로 싸서 드리겠습니다.」 도효자가 안심하고 음식을 먹고 나자 감을 끈보따리 싸 주었습니다.

아직도 날은 밝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보니 동천에 밝은 별이 동해바다에 쏟아질듯 박혀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요, 고을이나 알고 갑시다.」 「강릉 경포대 입니다.」 「경북 예천에서 강릉까지는 천여리가 다되는 곳인데 어떻게 이렇게 왔담. 또 거까지 가는 날이면 감이 모두 물러 풀어져 버리겠지.」 하고 걱정하자 조금 전에 타고 왔던 호랑이가 그 앞에 다가서며 타라는 시늉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효자는 삽시간에 집에 이르러 어머니를 구하고 또 감씨를 울타리가에 심어 백이십세가 되도록 어머니를 봉양하니 천하제일의 효자로 명망이 높아져 임금님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출처]하늘이 낸 효자(孝子) 도시복(都始復) |작성자 강 문화관 이야기




예천아리랑 노래비

 

아리아리 아리아리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요

 

아리랑 고개서 알을 베어

몰실랑 고개서 몸을 풀어

 

니 잘랐다 내 잘랐다 도투지 마라

연지찍고 분바르면 다 잘 났지

충신정탁 효자시복 우리의 자랑

자자손손 길이 길이 이어가리

2014. 11.

 


예천아리랑의 유래

예천아리랑은 김도령과 처녀가 아리랑고개에서 정사를 나누어 임신을 한 후 몽실랑 고개에서 몸을 풀었으나 김도령이 죽음으로써 비극을 맞은 사랑 노래와

우리 고장의 아낙네들이 힘든 농사일과 고된 시집살이의 서러운 한과 즐거움을 콧소리로 흥얼거리던 노래가 며느리나 딸에게로 전해오면서 오늘날까지 200여수의 예천아리랑이 전해지고 있다

 

 

 







아담해 보이는 컴퓨터실과 휴게실에 청소년들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리허설 중인 공연장 모습













蕉堂 장찬주 회장 / 박갑로


유니카 장찬주 명예회장님은 장스하우스가 예천인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위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초당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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