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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장군공원 (어인마을 방문기)

작성자南齋|작성시간16.02.05|조회수21 목록 댓글 0

    김면장군공원 (어인마을 방문기)    


보름 전에 어인마을을 '창조적마을만들기'로 농림축산부에 올렸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눈이 많이 와서 방문 할 수가 없었는데...

2월 2일에야 시간을 내어 마을을 찾게 되었다.




423년 전 임진왜란시 호남지역으로 침투하려던 왜적을 막을 당시 의병들이 마시던

우물이 아직도 맑은 1급수 물이 흘러 이름도 '김면장군 우물'이라 마을 사람들의 지었다.

추운 날이고 미끄러워 물은 마시지 못했으나 '김면장군 우물'이라는 표석을

어디에 어떻게 세울가를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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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령 정상에서 차를 돌리다 눈에 바퀴가 빠졌다

이장춘 이장님과 김영배님이 삽을 가져와서 차 밑의 눈을 제거하고서

세사람이 힘껒 밀어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 도로도 앞으로 확장이 된다니 임진년 당시 이정도의 추억도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아

속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차가 빠져 있는데도 이장님 삽 가지러 간 사이 설경을 촬영하기 위해

안으로 파고 드는 石靑





고생 끝에 웃음이 난다

石靑, 김영배, 이장춘 이장





이장춘 이장이 마련한 마을회관이 눈에 쌓여 별장 같이 아름답고 전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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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양면이 임란 때 송암 김면 장군의 발상(發喪)지 신창(新倉)인데,

면장을 비롯하여 면직원 전부가 '신창'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면에 들기 전에 길가는 행인들에게 물어 봐도 '신창'을 알지 못한다.


[거창박물관]





[100여장 프린트 해서 나누어 준 김면 장군 서사시]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때는 임진壬辰 1592년 4월 13일
포악 무도한 왜구들이 부산을 침탈할 제
남명 · 퇴계 양문에서 수학하신 송암松菴 김면金沔선생께서
분연히 일어나 창의倡義하시고,
만여석萬余石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셨다.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 선봉장 김홍한장군
외 8인의 친족의사
 
나라가 위태롭고 국왕이 파천播遷하니
‘君有急而臣不死면 烏在其讀聖人書也’라
‘군유급이신불사   오재기독성인서야’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무계茂溪에서 승첩. 합천군수로 제수되시니 교서에
揚兵鼎津則遁賊褫魄하고 接刃茂溪則流屍混江이라
양병정진즉둔적치백     접인무계즉유시혼강

정진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러니 적의 시체가 강을 덮었다


함안咸安 죽현竹峴, 의령宜寧 마진馬津,
고령高靈 개산포開山浦거쳐 성주성星州城을 탈환하고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과 사랑암沙郞岩전투에서 적을 쳐부순 후
돌격으로 김천金泉 지례知禮 적을 섬멸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관官·의병義兵 통솔하여
금산金山의 적을 토벌.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적의 야욕을 분쇄하였고, 도망가는 선산善山 적을 치려던 중
과로過勞로 병을 얻어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셨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국왕이 애통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시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錄勳.

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셨다.

‘只知有國 不知有身’
‘지지유국 부지유신’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 몰랐다는
송암 김면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 충의지심忠義之心
거룩하신 선비정신은 영원히 우리 겨례의 사표師表가 되리라
                           
   을미乙未 납월臘月 29日    남재南齋 근서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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