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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蕉堂)기념관 개관 1주년 기념 영사회를 마치고 문경 토끼비리에서

작성자南齋|작성시간16.07.11|조회수18 목록 댓글 0

  초당(蕉堂)기념관 개관 1주년 기념 영사회를 마치고 문경 토끼비리에서  




  7월 3일






















실미도 염대장의 獅子吼같은 大喝一聲





【시조】- 길재(吉再)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글 / 南齋......... 


때는 임진壬辰 1592년 4월 13일
포악 무도한 왜구들이 부산을 침탈할 제
남명 · 퇴계 양문에서 수학하신 송암松菴 김면金沔선생께서
분연히 일어나 창의倡義하시고,
만여석萬余石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셨다.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 선봉장 김홍한장군
외 8인의 친족의사
 
나라가 위태롭고 국왕이 파천播遷하니
‘君有急而臣不死면 烏在其讀聖人書也’라
‘군유급이신불사   오재기독성인서야’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무계茂溪에서 승첩. 합천군수로 제수되시니 교서에
揚兵鼎津則遁賊褫魄하고 接刃茂溪則流屍混江이라
양병정진즉둔적치백     접인무계즉유시혼강

정진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러니 적의 시체가 강을 덮었다


함안咸安 죽현竹峴, 의령宜寧 마진馬津,
고령高靈 개산포開山浦거쳐 성주성星州城을 탈환하고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과 사랑암沙郞岩전투에서 적을 쳐부순 후
돌격으로 김천金泉 지례知禮 적을 섬멸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관官·의병義兵 통솔하여
금산金山의 적을 토벌.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적의 야욕을 분쇄하였고, 도망가는 선산善山 적을 치려던 중
과로過勞로 병을 얻어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셨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국왕이 애통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시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錄勳. 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셨다.

‘只知有國 不知有身’
‘지지유국 부지유신’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 몰랐다는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 충의지심忠義之心
거룩하신 선비정신은 영원히 우리 겨례의 사표師表가 되리라

   을미乙未 납월臘月 29日    남재南齋 근서謹書....... 






인왕산 도사의 잡아함경雜阿含經과 공자가어가 맑은 산 공기에 메아리 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낸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

 




[孔子家語]

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君子修道立德 不爲困窮而改節

지란생어심림 불이무인이불방 군자수도입덕 불위곤궁이개절

지초 난초는 깊은 숲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없다고해서 향내를 감추지 않는다.

군자는 도를 닦고 덕을 세움에 곤궁하다고 하여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

 

 



 

8정도가 생각난다.

바르게 알기正見· 바르게 사유하기正思惟· 바르게 말하기正語· 바르게 행하기正業· 바르게 생활하기正命· 바르게 노력하기正精進· 바르게 알아차리기正念· 바르게 집중하기正定

 

인왕산 도사의 가르침을 혼탁한 사회에서 잘 새겨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진남교반 일원은 1933년 대구일보가 주최한 경북8경 선정에서 일경으로 꼽힌 곳으로서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옛길의 1번지답게 지난 2007년 명승 31호로 지정된 토끼비리 옛길이 있으며, 길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주막, 길손들의 안녕을 빌었던 성황당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지역은 교통관련 유적지 뿐만 아니라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5세기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쌓은 고모산성과 고부산성, 조선시대의 관성인 석현성 등의 성곽유적이 남아 있다.

한 지역에 이헣게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거너편에서 바라 본 토끼비리














여기서 잠깐 !!!


이 토끼비리가 번털 개털의 주장대로 경상도에서 충청도에 가는 유일한 길이라면 왜 임진왜란 당시 여기를 방어하지 않고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를 지켰을까?

이곳을 방어한다면 지형상 오직 외길인 이 길은 마차도 다닐 수 없는 길이다.

아래는 낭떨어지요 낭떨어지 아래는 토천강이 흐른다.

오직 이 길 밖에 없음은 당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 난 주막과 성황당이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실미도 염대장이 그 당시 조선시대에 살았다면 실미도 대원 31명만 여기에 배치해서 바위로 앞을 막고 궁수들을 동원 했다면 수만의 왜적들도 능히 쳐 부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 본다.

 

의병도대장 김면장군은 거창 우척현에서 이 보다 훨씬 넓은 길에서 왜적들이 김천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왜적들을 막아 임진왜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참고로 김천 거창 우척현 지도(김천의 마을과 전설) 사진을 올린다


인진왜란 당시는 지금 이 길보다 더 좁지 않았을까?

아래서(김천) 위(거창)를 보고 촬영 [산 위가 김천-거창 地境임] 
























有志竟成(유지경성):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 (출전: 후한서 경엄전)





실미도 염대장의 건배사

토끼비리를 볼 수 있게 안내한 박갑노(범털 개털)의 범털로 승격을 위하여~

"개털 ~ 범털"








12일의 蕉堂 장회장님의 蕉堂記念館 1주년 행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蕉堂 장회장님과 오늘 참석하신 모든 회원님!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의 가정에 행운이 항상 가득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많은 일들이 밀려 늦게 사진과 글 올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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