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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하반기 실학훼밀리 역사기행-2) 보길도

작성자南齋|작성시간16.11.23|조회수34 목록 댓글 0

2016년 하반기 실학훼밀리 역사기행-2) 보길도  














뒤에는 두륜산 땅끝마을 전망대가 보인다



















































관광객이 도착하자 상인들이 점포 문 열기에 바쁘다










부용(芙蓉)이라 이름했다

















부용동(芙蓉洞) 팔경(八景)

 

1연당곡수(蓮糖曲水) 곡수당의 연꽃

2은병청풍(銀屛淸風) 은병 석벽에 부는 맑은 바람

3연정고송(然亭孤松) 세연정의 홀로선 소나무

4수당노백(水塘老柏) 곡수당터의 늙은 동백

5석실모연(石室暮煙) 석실에 감도는 저녁 연기

6자봉귀운(紫峰歸雲) 격자봉을 두른 해운

7송현서아(松峴捿鴉) 솔재에 둥우리를 튼 갈가마귀 떼

8미산유록(薇山遊鹿) 미산에 뛰노는 푸른 사슴











[세연정]















해설사 강석근



  

 











세연정(洗然亭)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란 뜻으로, 고산연보(孤山年譜)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 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洗然亭), 동쪽에 호광루(呼光樓), 서쪽에 동하각(同何閣), 남쪽에 낙기란(樂飢欄)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




세연정에는 온돌방이 있다.


























사면이 모두 산으로 병풍이 쳐저 있다





어린 황칠나무-다 자란 황칠나무

황칠나무는 어릴때는 삼지창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자라서는 잎의 모양이 변해버린다.

해설사는 어릴적에는 나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삼지창 모양을 갖는다고 한다.

동행 중 한사람은 이곳에는 황칠나무가 잘 살아도 육지에 이식을 하면 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좌측 건물은 전사청이고, 우측 건물이 서재이다




















배 3층엔 조타실과 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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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 대종회 고문 안병주님의 저서 사간공천곡선생유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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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齋의 유인물]


  존경하는 실학페밀리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난 數年間의 저의 자그마한 經驗談을 몇 자 報告 드리려  합니다

  임진왜란 7주갑(420년:2012년) 되는 해 歷史속에 묻혀 있는 의병도대장 松菴 金沔(김면) 선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歷史를 바로 잡기 위해 혼자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의병도대장 김면,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인데 좌장 우장은 게재되어 있어도 의병도대장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제가 1년간 뛰어 다니며 노력한 결과 다행스럽게도 접촉한 7개 역사교과서에 모두 수록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 9일에는 松菴 金沔 선생의 최대 勝捷地 중 하나인 居昌 牛脊峴에다 김면장군공원을 마련하고 戰蹟碑를 세웠습니다. 그 후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의병도대장 김면장군공원이 있는 於仁마을이 창조마을로 지정되게 되면 5억원의 資金이 내려저 忠義路(김면장군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스토리텔링보드와 포토죤이 형성)가 건설되며, 篤志家가 나와서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銅像건립이 결정이 되고, 居昌군의회에서 牛脊峴戰蹟碑를 세우겠다는 공약(칠곡 다부동전적지와 같이)을 했으며, 山淸 남명기념관에 의병도대장 전시실을 년말까지 개설(기념관장 約束)하기로 결정하고 居昌博物館에도 내년에 전시실을 마련키로 하였습니다.

  사학자들이 울분의 史料로 글을 쓰고, 거창문화원 화보에도 크게 실리고, 고령신문에도 1面으로 6회에 걸쳐 한달 반 가량 기사화 되었습니다.

  몇 안 되는 於仁마을 주민 들이 지난 8월 15일 임진란 전승 424주기 기념행사를 牛脊峴에서 지내고, 사학자가 세미나를 갖었으며, 전혀 알지 못했던 居昌 군민들에게 많이 홍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거창군 관광지도에 ‘의병도대장 김면장군공원’ 표시가 되기로 약속되기도 하였습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落水가 바위를 뚫런다고 微弱한 힘이 큰 보람으로 남게 됨은 항상 옆에서 돌봐 주시는 실학페밀리 가족이 있었기 때문으로 思料됩니다.

  지난 11월5일 조촐하게 전적비 건립 1주년 행사도 가졌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6. 11.  義兵都大將 金沔將軍 13代  傍孫 南齋 再拜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 南齋

 

지금으로부터 424년전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을 총 지휘한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다니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아래 의병좌장을 맡은 사람은 홍의장군 곽재우였고, 의병우장은 1612년 광해군 4년부터 1623년 광해군 15년까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바 있는 정인홍이었다.

그런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다면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 준 우리 선조들의 창의정신과 선비정신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무엇을 기리고 있단 말인가

 

의병장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의병도대장 김면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이 현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사학자 정만진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때는 임진壬辰 1592413일 포악 무도한 왜구들이 부산을 침탈할 제, 남명 · 퇴계 양문에서 수학하신 송암松菴 김면金沔선생께서 분연히 일어나 창의倡義하시고, 만여석萬余石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셨다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 선봉장 김홍한장군, 8인의 친족의사

 

의병장으로 현풍 곽준, 함양 조종도, 고령 박정번, 선무원종일등공신 김홍원 장군

 

거창출신 의병장, 참모장 서기 문위, 윤경남, 유중룡 선봉장 변혼, 돌격장 정용, 군관 장응린, 박이장

기병유사에 정유명, 성팽년, 김경근

그리고 변희황, 신수, 오희남, 오명상, 전팔고 전팔급 형제 

 

나라가 위태롭고 국왕이 파천播遷하니

군유급이신불사君有急而臣不死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오재기독성인서야烏在其讀聖人書也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무계茂溪에서 승첩. 합천군수로 제수되시니 교서에

양병정진즉둔적치백揚兵鼎津則遁賊褫魄하고

정진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접인무계즉유시혼강接刃茂溪則流屍混江이라

무계에서 칼을 휘두러니 적의 시체가 강을 덮었다

 

함안咸安 죽현竹峴, 의령宜寧 마진馬津, 고령高靈 개산포開山浦

거쳐 성주성星州城을 탈환하고,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과 사랑암沙郞岩전투에서 적을 쳐부순 후 돌격으로 김천金泉 지례知禮 적을 섬멸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관·의병義兵 통솔하여 금산金山 적을

토벌.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왜구들의 야욕을 분쇄하였고, 도망가는 선산善山 적을 치려던 중 과로過勞로 병을 얻어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셨다

 

~~통재嗚呼痛哉

국왕이 애통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시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錄勳. 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셨다.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 몰랐다는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 충의지심忠義之心 거룩하신 선비정신은 영원히 우리 겨레의 사표師表가 되리라

 

   을미乙未 납월臘月 29    남재南齋 근서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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