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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10일 거창 우척현 전투

작성자南齋|작성시간17.10.14|조회수6 목록 댓글 1

1592710일 거창 우척현 전투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휘하의 별군 1500명은 소백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 이동하여 지례방면을 통해 우척현을 넘어 거창을 거쳐 전라도 장수로 진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척현 고개에는 경상도 의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김면(金沔)이 지휘하는 의병 2000여명1592619일 우척현에 진을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1592710일 김면의 의병들은 우척현 고개 좌, , 중앙에 병역을 분산 배치하고 일본군을 기다렸습니다.

 

거창 우척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병들은 15926월 낙동강변에서의 수많은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의 병참과 수비군에게 타격을 주어 한편으로 경상도의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입하지 못하게끔 하였으며 크고 작은 수 많은 전투를 통해 단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병들을 지휘하는 김면(金沔)은 철두철미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개전되었을 때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라고 말하고 1592510일에 정인홍과 함께 합천 숭산동에서 회합하고 고령에서 의병을 창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 등을 휘하에 두고 거창에서 박성을 통해 군량을 모우는 한편, 4~5일간 집안의 종 700명을 포함하여 2000여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들을 지휘하는 김면(金沔)은 군진에선 모든 뒤치다꺼리를 감당하였으며, 오직 구국의 의지로 전투에선 항상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김면(金沔)의 가산은 의병으로 인해 모두 탕진되었고, 그의 처자는 김면이 가사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걸식하기에 이르렀지만 김면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런 의병들과 의병장은 우척현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그기에 소백산맥에 활동하는 산척(산에서 약초 채취나 사냥을 주업으로 삼는 백성) 수십명과 김성일이 보내 준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 관군 장수들도 참전하였습니다.

김면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포위망 안 사정거리에 진입하자 일제히 활을 쏘았습니다.

일본군 선봉대가 고갯마루에 이르고 일본군이 의병들의 포위망에 모두 진입하니 화살이 삼면에서 일제히 발사되었고, 화살들은 일본군 대열을 휩쓸었습니다.

일본군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당황하는 동안 의병들은 계속 화살을 쏘았고 일본군 대열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마침내 일본군은 우척현 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퇴각하는 일본군 뒤로 계속 화살이 발사되었고, 매복하고 있던 의병들은 3면에서 물러가는 일본군의 뒤를 후리쳤습니다.

일본군은 시체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황급히 도주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수많은 전사자들을 우척현 고개에 남겨두고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그들이 처들어왔던 지례 방면을 통해 김천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김면은 김성일로부터 거창과 안음현 식량 통제권을 부여받고 거기에 거창, 함양, 산청, 합천 지역의 군대 지휘권까지 얻어 병력이 30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김해부사 서예원과 금산 의병장 여대노, 판관 김시민 등의 군대까지 김면과 함께 연합전을 전개하게 되면서 일본군의 경상도 방면을 통한 전라도 진출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조선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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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呑亞 김종갑 | 작성시간 17.10.14 幕府軍 1500명 vs 鄕軍 2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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