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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사상과 교육 (3)

작성자南齋|작성시간17.12.11|조회수16 목록 댓글 0

     남명사상교육 (3)    

 

남명학회 2017 추계학술회의

2017.12.9..















春岡 송재훈 회장()임란공신충의선양회 회장),明山 양원석(부회장)

方隱 조온환 남명선생 宗孫, 月嵐 조종명 (남명학진흥원 이사)


方隱 조온환 남명선생 宗孫

조영기 전 농협 중앙회  이사, 月嵐 조종명 남명학진흥원 이사




明山 양원석, 丹雅 임재덕, 조구호 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春岡 송재훈 회장,



김영권 도봉유도회장 / 정용덕 도봉서원 원장




사회: 박성혁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학회장 인사말



조영달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기조 강연

우리나라 선비정신의 원천



허권수 경상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1 시작하는 말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이고, 대표적인 선비이다. 선비정신하면 남명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선비는 글을 알고, 아는 것을 실천해야하고, 국가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남을 보살피고 배려를 해야할 책임이 있다. 늘 세상을 교화(敎化)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명예와 물질적 부귀를 초월해야 한다. 이런 정신을 다 갖춘 선비가 바로 남명선생이다. 조선시대에 남명의 학문은 주자(朱子)의 학문을 벗어났다고, 순수한 성리학이 아니라고 깎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는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학문이 바로 남명의 학문이고 사상이다. 실천 위주의 학문이 책임지는 학문인 남명학을 다시 배워 활용할 필요가 절실하다.


2 남명 조식은 어떠한 인물인가?

 

남명은 1501(연산군 7) 경상도 삼가현(三加嘉縣:陜川郡에 병합) 토동(兎洞:외토리)에서 태어났다. 남명의 자는 건중(楗仲)이요 호는 남명(南冥)이다. 이름은 식()이다.

안동 예안(禮安)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 선생과 남명학파(南冥學派)와 퇴계학파(退溪學派)를 형성한다.

남명은 72세 되던 해에 지리산 아래서 숨을 거둔다. 사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문정(文政)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집은 남명집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다.

 


3 참된 선비의 길을 걷다

 

자신의 학문의 지표가 될 경()과 의()를 발견하고 자신의 학문의 특징으로 표방하게 된다. 주역(周易)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는 말이 있다. 남명은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에다가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명()을 새겼다.

 

우리 곁에 이 ()과 의()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 이 두 글짜의 의미는 만고의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4 명예를 초월한 열세 차례의 관직 사양

 

남명에게 처음으로 벼슬이 내려 진 것은 38세 때 참봉(叅奉)이다.

그 뒤 다시 전생서(典牲暑: 나라의 제사에 필요한 희생을 관장하는 부서) 주부(主簿:6)-조정에서는 파격적인 대우.

을사사화 이래로 바른 선비 2백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나니 윤원형(尹元衡) 일당이 남명에게 파격적 대우를 하여 벼슬을 내린 것이다.

남명이 50세 되던 해(1551) 조정에서는 다시 종부시(宗簿寺: 왕실의 족보를 만드는 관아) 주부(主簿:6)의 관직을 내렸다.

남명이 53세 되던 해(1553) 다시 전생서 주부(典牲暑 主簿:6) 등 보두 사양함




5 온 나라를 진동시킨 단성소(丹城疏)로 선비의 대표가 되다.

 

남명이 계속 벼슬을 거부하자, 55(1551) 때 조정에서 삼가(三嘉)와 바로 인접한 고을인 丹城縣: 오늘날 산청군에 합병된 고을)의 현감에 제수하였다.

지금까지 벼슬을 사양해 왔던 남명이 임금이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잘못을 지적하여 준엄한 필치로 상소하였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단성소(丹城疏: 정식제목:乙卯辭職疏)이다.

 

乙卯辭職疏 내용

-전략-

전하의 나라 일은 이미 잘못 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 반대로 돌아 섰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 나무를 1백년 동안 벌레가 속을 파 먹어서 진액이 다 말라 빠져버린 상태인데, 언제 폭풍우가 불어와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이 된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중략-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래 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술과 여색에만 빠져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거리면서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 모우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뭉크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內職: 중앙관서의 관리)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 한 마리가 독차지 하고 있듯이 하는 것 같습니다.

외직(外職: 전국 각도의 감사, 각 고을의 수령)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멋대로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 뛰는 것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신이 자주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처다 보고서 답답해 하면서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大妃:文定王后)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고아일 뿐입니다. 백 가지 천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은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중략-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邊境)에 일이 있어[왜구 침략으로 전라도 일대가 함락된 을묘왜변을 말함]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 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신은 이 일이 벌써 이 십년 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神聖)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 내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장수 가운데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고 성에는 지킬 군졸이 없었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어찌 이상한 일이 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들어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 속이나 배 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 속이나 배 속의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 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하소연하여 군사를 불러 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라 일을 정리하는 일은, 자질구레한 형벌제도 같은 것에 달려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 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 하십니까? 소인을 좋아 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로 깨닭아 분연(奮然)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대하여 얻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敎化)도 그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고, 나라의 위기도 안정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재를 취하여 쓸 때 전하께서 솔선수범하실 때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임금님께서 사람을 취해 쓸 때 솔선수범하신다면 전하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취해 쓸 때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한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 하고는 모두 전하를 속이거나 저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소견 좁은 신하인들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후략-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상소의 줄거리는 대략 다섯가지

 

1 조정의 형편은 거의 망할 지경-대소 관원들이 모두 파당만 짓고 자기 이익만 챙김

2 왕권이 무력해서 국가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가 없다.

3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면 왕 자신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것

4 임금 스스로 학문을 닦아 정치의 바른길을 가야 한다

5 이상의 정치적 폐단이 바로 잡히면 자기도 나아가 정치에 나설 용의가 있다.

 

6. 산과 물에서 배우다.

 

김해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삼가 토동 뇌룡사(雷龍舍)와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강학을 한지 12년이 되는 1561년 지리산 덕산(德山)으로 강학의 장소를 옮겼다.

열 한차례 지리산을 살펴서 마침내 덕산 사륜동(絲綸洞)에 강학할 산천재(山天齋)를 마련하였다.

산천(山天)’이란 주역대축괘(大畜卦)로 산을 상징하는 간()괘와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로 합성되어 있다.

대축괘(大畜卦)군자가 굳세고 독실하게 공부하여 그 빛이 날로 새로워 진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자기의 학문과 경륜을 크게 쌓아 쓰일 때를 기다린다는 남명의 의지가 담겨 있다.

산천재(山天齋) 네 기둥에 덕산복거(德山卜居)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를 써서 주련(柱聯:판각하여 기둥에 다는 시구)을 달았다.

 

春山底處無芳草 (춘산저처무방초)

봄날 어느 곳엔들 향그런 풀 없으리오만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근재거)

다만 하늘에 닿은 천왕봉 마음에 드누나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

빈 손으로 들어와서 무엇을 먹을 건가?

銀河十里有餘 (은하십리긱유여)

십리에 뻗은 은하수 같은 물 먹고도 남겠다

 

장중한 천왕봉(天王峯)의 기상과 맑은 덕천강(德川江) 흐르는 물을 남명은 살아 있는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다.



산천재 앞에 상정(橡亭)이라는 초가로 지은 정자에는 이런 시를 지어 달았다.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천 석 들이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아선 소리가 없다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어떻게 하여야 두루산처럼

天鳴猶不鳴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7. 실천을 강조한 학문태도

 

남명은 실천에 바탕을 둔 학문을 강조하였다.

 

 

8. 민본사상의 선구자

 

남명은 민암부(民巖賦: 백성이 위험할 수 있다)의 글을 지었다

 

민암부(民巖賦)

 

배는 물 때문에 다닐 수 있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

나는 안다네 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

위험이 바깥에 있어 좀체 가까이 하지 않지만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인지라

위험이 안에 있어 쉽게 가까이 한다네

 

- 중 략 -

 

원한이 마음에 사무치면 생각이 날카롭게 되나니

비록 보잘 것 없는 아낙네일지라도 부르짖으면 하늘이 감응한다네

하늘이 감응하는 건 다른 이유 없나니 하늘은 이 백성들 통해서 보고 들으니까

백성들 하고자 하는 바는 꼭 들어 주기를 부모가 자기 자식 돌보는 것처럼 한다네

원한 가진 아낙네 비록 애초에 보잘 것 없지만

끝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갚아 주기 바란다네

그 누가 감히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리

실로 하나님의 험함은 뛰어 넘기 어렵다네

만고에 걸쳐 험함을 베풀어 두었는데도

얼마나 많은 임금님들이 예사로 보아 넘겼던가?

(). ()가 탕(). 무왕(武王)에게 망한게 아니고

평범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에 망한거라네

한나라 유방(劉邦: 한나라 고조)은 보잘 것 없는 백성이었고,

()나라 호해(胡亥: 진시항의 아들)는 높은 황제였다네

필부(匹夫)로서 만승천자(萬乘天子: 곧 항제) 되었는데,

그 커다란 권한이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 백성들의 손에 달려 있었나니

겁낼 것 없는 듯해도 매우 겁내야 할 존재라네

아아! 촉산(蜀山: 중국 서남쪽 四川 지방에 있는 험한 산들)의 험준함인들

임금을 넘어뜨리고 나라를 엎을 수 있으리오?

그 위험함의 근원을 찾아 보건대

정말 한 사람의 백성에 지나지 않는다네

못된 임금이 어질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기서 위험이 가장 크게 된다네

임금이 궁궐을 넓고 크게 짓는 것은 백성들을 성나게 하는 시초이고,

임금이 여자들을 자주 접하는 것은 백성들이 성내게 되는 과정이고

가혹한 세금 거두어 들이는 것은 백성들의 노여움을 쌓는 것이라네

탐관오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을 들고 일어나는 길로 인도하는 것

형벌을 멋대로 쓰는 일은 백성들의 성냄을 돌이킬 수 없도록 만드는 것

바록 그 위험함이 백성에게 있긴하지만 어찌 임금의 덕()에 말미암지 않겠는가?

강이나 바다보다 더 큰 물은 없지만 큰 바람이 없으면 고요하다네

백성들 마음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지만 폭군만 아니라면 다 같은 동포인 것을

- 후 략 -

 

   

9. 의병의 정신적 원조

 

남명은 69(1569) 때 남해안에 왜적의 침입이 잦은 것에 우려를 갖고서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후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의 제자 가운데 송암(松菴) 김면(金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죽유 오운(吳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송암(松巖) 이로(李魯), 모촌(茅村) 이정(李瀞) 등은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등은 조정의 중신으로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밖에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도 관계에서 큰 활약을 했다.

 


10. 조선 선비의 대표

 

남명은 저서도 많지 않고, 벼슬도 한 적도 없고, 평생 시골에서 묻혀 지낸 선비이다.

 

허권수 교수는 남명이 선비로서 추앙받는 이유로 다음과 같이 이유를 든다.

 

첫째: 언행이 일치가 되었다

둘째: 명예와 이익을 초월하였다. 

셋째: 선비들의 의견을 결집하여 대변하였다.

넷째: 국가와 백성들을 걱정하였다.

다섯째: 성리학(性理學)에만 매몰된 공허한 학문이 아니고, 현실에 쓰일 실용적인 학문을 했다

여섯째: 교육을 중시하였다.


 





[창녕조씨 중앙화수 회장 인사]

창녕조씨 중앙화수 조병욱 회장



  발표 1  

남명 조식의 천인합일 사상과 유학적 가치 체계 고찰












  발표 2  

교과교육 분야 남명학 연구에서 이해된 남명사상















  종합 토론  

발표 1 토론자: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발표 2 토론자: 박성혁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발표 2 토론자: 박성혁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발표 1 토론자: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특히 이 분의 윗대 할아버지께서 남명선생 제자 두 분이 계시는 데 한 분의 고서 문집이 있다며 학회에서 필요하다면 제공 해 드리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랍니다.

 








전영태 (사)임란충의선양회 임원, 김영권 도봉유도회 회장



이병준 도봉서원 원장 / 정용덕 도봉서원 원장



전철에서 핸폰에 집중하고 있는 귀여운 어린이들과

60년(1갑)이 지난 사회 공헌하는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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