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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은행 동우회 한문반에서

작성자南齋|작성시간17.12.12|조회수32 목록 댓글 0

외환은행 동우회 한문반에서  





밤 사이 금년 들어 제일 많은 눈이 내렸다.

외환은행 서소문지점에서 慕圓 이원재 훈장께서 한문 강의하는 날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 살다보면 태양의 고마움을 잊고 살기 마련이다.

3년 이상 나름대로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의병도대정 김면장군 현창사업에 신경 쓰다 보니 옆을 돌아 볼 기회조차 없었다.

며칠전 慕圓 훈장님과 통화를 하다 보니 南齋의 사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경북중고등학교 在京40회 동기회 사무실이 떠 올라 오늘 고마운 樂民 장달수 님과 東郊堂 유강하 동문과 함께 서소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의 즐거움 속에 설친 지난 밤.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얐게 변해 있어 기분이 좋다.








이 한문반은 외환은행 출신 동호인과 경북중고등학교 40회 동기들이 함께 공부하는 곳이다.




약속 시간에 외환은행 임원실에 도착하니 귀에 익은 慕圓 선생의 강의 소리가 들린다.

慕圓 선생은 금년이 11년째 되는 사회봉사로 漢文 知識 才能 기부 천사이시다.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참된 교육자이시다.

오늘 따라 南齋가 참석한다니까 조금이라도 南齋에게 도움이 되라고 孟子 思想을 강의 자료를 택했다는 고마우신 말씀이다.





南齋의 시간이다

月前에 발간한 』 책자를 나누어 드리고

(준비한 책자가 모자라 동기 몇 분은 며칠 뒤 동창회 모암에서 드리기로)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을 뵈온지 2여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며칠전 慕圓 이원재 훈장님과 통화를 한 후 수년 전 선릉 동창회 사무실에서 慕圓 훈장님께 漢學4~5여년간 배우던 생각이 나고 오늘날 제가 추진하는 역사속에 뭍혀 있는 임진왜란 의병도대장 松菴 金沔 선생 顯彰사업의 징검다리가 된 사연을 여러분께 보고를 드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여 저에게 歷史 史料를 찾아 주신 樂民 장달수님과 東郊堂 유강하 동문을 함께 모시고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임진왜란 의병도대장 松菴 金沔 선생 13代 後孫 南齋 김재호입니다. 선릉에서 漢學을 배우던 마지막 時期에 같이 공부하던 東郊堂 유강하 동문이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류한성 회장과 사무실에 찾아와서 선양회에 송암 김면 선생의 門中이 가입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듣고 가입비 500만원을 만들어 선양회에 가입하였기 때문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 50여 임진왜란 의병장 중 3대 의병장이신 역사속에 묻혀있던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선생의 현창사업에 눈을 뜨게 되고 나름대로 성과를 얻었기에 그 진행 상황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松菴 金沔 선생은 高靈在地士族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령에서 倡義하시어 居昌에서 의병활동을 하셨습니다.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하시면서 萬余石 재산을 軍費에 충당하셨고, 함안 죽현, 의령 마진과 정암진, 고령 개산포와 茂溪, 성주성, 김천 지례와 금산, 그리고 거창 우척현과 사랑암 많은 지역의 陸路와 낙동강 水路를 오르내리시며 크고 작은 30여차례 왜적과 전투에서 싸워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만, 그 공적들은 역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1978년 저자 김도윤 선생의 義兵都大將 松菴先生實錄머릿말에 노산 이은상 선생은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면이라며 극찬을 하였습니다.

 

각종 壬亂史 기록에 의하면 의병도대장 김면, 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입니다. 3대 의병장의 의병 규모와 현창사업 실태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의병 규모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의병도대장 김면 5000, 좌장 곽재우 2000, 우장 정인홍 3000입니다.

현창사업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좌장 忘憂堂 곽선생은 경남 의령과 대구 망우당공원 등 엄청난 성역화가 되어 있으며,

우장 萊菴 정선생도 2001년에 60억원이상 예산으로 합천임란창의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의병장 중에서도 전공이 크신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선생은 전국 어디에도 戰績碑조차 선 곳이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정만진 사학자는 이래서야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 준 우리 선조들의 倡義정신과 선비정신을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기리고 있단 말인가?” 하고 개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좌장 우장 이름은 게재되어 있으나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01210월부터 201312월까지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역사교과서 출판사를 수시로 여러차례 다녔으며 사학자 200명 이상 명단을 뽑아 자료를 보내어 하소연 하였습니다.

접촉한 7개 교과서에 모두 등재하는 성과를 올려 2014년 중학생들이 송암 김면 선생의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방문할 때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 근무한바 있는 東郊堂 동문이 동행하여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송암선생의 많은 文籍들은 당시 시기심 많은 判官松菴精舍에서 모두 탈취 燒却하여 하나도 없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송암 김면 선생의  유품은 단 하나 남아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돌아가시기 3개월 전 남명 선생 문중에 보낸 문안편지 한 통이 경남 산청 남명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복사해서 보내 주신 月嵐 조종명 이사님 덕분에 山淸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남명선비문화축제에는 매년 빠지지 않고 참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진년 7주갑(420)되는 2012년 국학진흥원 카렌다 7월호에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송암선생 간찰]이 실렸다는 소식을 東郊堂 유강하 동문과 선양회 유한성 회장으로부터 전화로 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임진년 臘月(12) 19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金沔 선생이 포수와 화약을 많이 보내 달라는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 내용이었으며 카렌다에는 수취인 未詳이라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해 12월에 국학진흥원에서 발간힌 陶山諸賢遺墨에는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게 보낸 편지로 밝혀졌습니다.

 

남명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편지와 카렌다 글씨를 비교해 보니 필체와 手決이 꼭 같았습니다. 우리 문중에는 보물인 이 카렌다를 3권 밖에 얻질 못했는데, 총무처 장관과 경북도지사를 역임한 바 있는 尋溪 심우영 동문께 부탁해서 카렌다 20부와 탁상용 카렌다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板刻해서 남명기념관과 한국국학진흥원, 그리고 거창 박물관에 기증해서 현재 모두 전시되고 있습니다.

 

몇 해전 제가 2여년간 송암선생의 전쟁터를 踏査하면서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겨 세계 각국의 도서관에도 보낸다는 생각으로 임진왜란 義兵都大將 김면 장군 및 8인의 親族義士책을 發刊하면서 序文日語, 中國語, 英語, 독일어, 서반아어 5개 국어로 번역하고 일류 디자인에게 맡겨 편집비만 별도로 500만원 지급하고 2500권의 책을 만들어 배부했습니다.

 

420년이 지나 없으진 전쟁터 지명이 居昌 新倉’ ‘함안 竹峴’ ‘의령 馬津입니다. 新倉은 김면 선생이 김천 開寧에서 돌아가시고, 거창 신창에서 發喪한 곳으로 지금의 거창군 웅양면입니다. ‘함안 竹峴’ ‘의령 馬津을 찾지 못했는데, 작년 남명선비문화축제에 가는 길에 두 곳을 찾는 행운도 가졌습니다.

몇 년간 수소문 한 결과 함안 竹峴대나무밭 고개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어 대나무 ‘’고개 이다는 直感으로 지번을 찾아서 밝혔으며, ‘의령 馬津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국회도서관에서 국방부가 발행한 임진왜란 당시 전쟁터 지도에서 현재 창녕보 부근인 합천군 초계면 말징나루 즉 馬津을 찾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힌 의병도대장 김면 선생의 현창 사업으로 임진년 山岳戰 戰勝 聖地인 거창 우척현 전적지에 201599松菴선생의 우국충정과 선비정신은 이 시대에 귀감이 된다며 항상 강조하시던 이태근 전 고령군수께서 추진위원장이 되어 [김면장군 전적비]를 세웠습니다이곳은 425년전 김면 선생이 의병 2000여명을 인솔하여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적 1500명을  물리친 곳입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왜군들이 기가 꺾여 더 이상 호남 진출을 못하지 않았나 여겨 집니다. 전적비를 세우고 나니 남명학진흥원 智南 조옥환 이사장님께서 남명선생 제자 3대 의병장 중 송암선생이 묻혀있었는데 이제사 빛을 보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국가예산과 지방예산 5억원으로 김면장군 공원에서 봉우산 정상 烽燧臺까지 松菴 金沔 선생의 얼이 서려있는 忠義路를 개설하고, 송암선생의 스토리텔링보드 포토죤, 송암어인쉼터등의 공사가 내년 연말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2022년도에 거창 김천간 직선화 도로공사가 완공되면 우척현 정상에 [김면장군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며,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거창에 의병장으로는 참모장 서기 문위, 윤경남, 유중룡, 선봉장 변혼, 돌격장 정용, 군관 장응린, 박이장, 기병유사에 정유명, 성팽년, 김경근 등 기라성같은 의병장과 수 많은 無名 義兵들의 넋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居昌義兵戰績碑를 세울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좌장 忘憂堂선생의 현창 규모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우장 萊菴선생의 규모라면, 정부에서 100억이상 투자를 해야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남명선비문화축제가 1967년부터 행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제가 처음 참관했을 때가 38회였는데 40여년간을 .곽재우와 남명이라는 제목으로, 연극의 내용은 곽재우와 정인홍 위주로 줄거리가 짜여져 왔는데, 각 의병장기가 등단을 하면서 송암 김면 선생의 의장기가 가장 마지막에 나와서 앞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의병도대장기가 어떻게 꼴찌에 나오느냐?고 건의를 하였더니 智南 조옥환 이사장님께서 지시를 해서 39회 행사 때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송암 김면 의장기를 들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금년에는 행사 명칭도 [곽재우와 남명]에서 [의병 출정극]으로 변경되고 의병도대장 김면이라고 명칭도 바뀌어 나왔습니다. 앞으로 수년 내 남명학진흥원에 의병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라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 스승 아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많은 세계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의병장들이 현창되면 남명 선생은 저절로 현창이 되기 때문에 의병기념관은 꼭 필요하다고 思料됩니다. 그 때는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위상을 본 위치로 찾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3주 후면 저의 나이 산수(傘壽) 80입니다. 지금까지의 삶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 왔습나다만 노년에 들어서 民草가 이런 큰 일을 해 내고 人生을 마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비록 경제적으로는 부담이 되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주위에서 많은 분들의 물심양면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오늘이 있기까지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신 慕圓 이원재 訓長님을 비롯하여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게 해 주신 東郊堂 유강하 동문, 임진란 史料들을 찾아 주신 樂民 장달수 사학자 및 김면선생후원회 임원 여러분들과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한문반 여러분들의 가정에 행복과 건강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하면서, 국회에서 愛國詩 낭송 대상을 받아 거창문화원과 한국선비문화원, 덕천서원 등 여러 곳에서 낭송한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를 여러분께 바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25년전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의병을 총 지휘한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다니,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아래 의병좌장을 맡은 사람은 홍의장군 곽재우였고, 의병우장은 1612년 광해군 4년부터 1623년 광해군 15년까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바 있는 정인홍이었다. 그런 의병도대장 김면장군 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다면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 준 우리 선조들의 창의정신과 선비정신은 도대체 누가 어디서 무엇을 기리고 있단 말인가 의병장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의병도대장 김면장군조차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이 현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사학자 정만진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때는 임진壬辰 1592413일 포악 무도한 왜구들이 부산을 침탈할 제, 남명 · 퇴계 양문에서 수학하신 송암松菴 김면金沔선생께서 분연히 일어나 창의倡義하시고, 만여석萬余石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셨다좌장 곽재우, 우장 정인홍, 선봉장 김홍한장군 8인의 친족의사. 의병장으로 현풍 곽준, 함양 조종도, 고령 박정번, 선무원종일등공신 김홍원 장군.

 

거창출신 의병장 참모장 서기 문위, 윤경남, 유중룡. 선봉장 변혼, 돌격장 정용, 군관 장응린, 박이장. 기병유사에 정유명, 성팽년, 김경근. 그리고 변희황, 신수, 오희남, 오명상, 전팔고 전팔급 형제

나라가 위태롭고 국왕이 파천播遷하니 군유급이신불사君有急而臣不死.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바치지않는다면 오재기독성인서야烏在其讀聖人書也라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무계茂溪에서 승첩. 합천군수로 제수되시니 교서에

양병정진즉둔적치백揚兵鼎津則遁賊褫魄하고

정진을 들이치니 달아나는 적이 혼을 잃었고,

 

접인무계즉유시혼강接刃茂溪則流屍混江이라

무계에서 칼을 휘두러니 적의 시체가 강을 덮었다

 

함안咸安 죽현竹峴, 의령宜寧 마진馬津, 고령高靈 개산포開山浦거쳐 성주성星州城을 탈환하고, 거창居昌 우척현牛脊峴과 사랑암沙郞岩전투에서 적을 쳐부순 후 돌격으로 김천金泉 지례知禮 적을 섬멸하였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관·의병義兵 통솔하여 지례知禮 적을 토벌. 호남 곡창지역으로 침투하려는 왜구들의 야욕을 분쇄하였고, 도망가는 선산善山 적을 치려던 중 과로過勞로 병을 얻어 진중陣中에서 순국하셨다

 

~~통재嗚呼痛哉

국왕이 애통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시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錄勳. 정헌대부이조판서로 가증加贈되셨다.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

오직 나라있는 줄만 알았지 내몸 있는 줄 몰랐다는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 충의지심忠義之心 거룩하신 선비정신은 영원히 우리 겨레의 사표師表가 되리라

   을미乙未 납월臘月 29    남재南齋 근서謹書





樂民 장달수

“daum cafe 장달수에 많은 先祖들의 자료가 있으며, 누구든지 퍼 갈 수 있도록 개방해 두었다는 요지로 인사를 대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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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장에서]








차창 밖의 雪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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