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유래(由來), 풍속(風俗), 놀이, 음식(飮食)],만두(饅頭)'유래

작성자건강지킴이|작성시간24.02.09|조회수105 목록 댓글 0


[설날의 유래(由來), 풍속(風俗), 놀이, 음식(飮食)]

1. 설날의 유래(由來)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 명절로 지내게 됐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始祖) 등 명왕 사당에 참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 때에도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포함된 큰 제사를 1년에 6번씩 지냈다고 하는데 이를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설을 9대 명절의 하나로 즐겼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을 4대 명절의 하나로 지냈는데
이미 이 때에 설이 지금처럼 우리 겨레의 큰 명절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설날의 풍속(風俗)

 1) 차례(茶禮)


 설날 아침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조상님들에게 드리는 차례다.

차례는 간략한 제사(祭祀)를 뜻하는데 '차(茶)를 올리는 예(禮)‘라는 뜻에서 차례(茶禮)라 했다.

 설 차례는 설날 아침 조상에게 올리는 세배(歲拜)의 의미도 있다.

차례 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家門)에 따라 다르다.

설에는 밥 대신 떡국을 제수로 올린다.

 2) 세배(歲拜)



 세배(歲拜)는 설날 아침 차례가 끝난 후 웃어른에게 절을 올리는 새해 첫인사이다.

세배하면서 덕담(德談)을 나누게 되는데, 옛날에는 세뱃돈 대신에 덕담을 주고받았다.

3) 설빔

 설날 아침에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 옷을 '설빔'이라 한다.

설빔은 나이와 처지에 맞게 마련했다.
형편이 좋으면 옷 일습(한 벌)을 장만 했지만, 그렇지 못하면 버선이라도 마련했다.

 4) 복조리(福笊籬)와 상징(象徵)


 새해의 복(福)을 담는 징표(徵標)가 복조리다.

조리(笊籬)는 쌀로 밥을 지을 때 모래와 잔돌을 걸러내는 도구다.

 새해에는 복조리 장수에게 조리를 사서 벽이나 문 위에 걸어두었다.
이러한 풍속은 먹을 쌀이 없어서 굶을 때 많았던 시절,
설날에 산 복조리로 일 년 내내 쌀을 일 수 있고 한 해 동안 먹을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길하다고 여겨 새벽에 대문에 던져 놓기도했다.
그리고 복을 사는 것이라 하여 값을 깎거나 물리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3. 설날에 하는 놀이

 1) 윳놀이

2) 연날리기

3) 널뛰기

4) 팽이치기

5) 제기차기

4. 설날에 먹는 대표적(代表的) 음식(飮食)

 1) 떡국

2) 모듬전, 동그랑땡

3) 잡채

4) 갈비찜

5) 삼색나물

6) 만두 국

7) 경단

8) 수정과

9) 식혜

10) 약식

5. 설 명절에 복(福) 많이 받으세요!

 우리민족(民族) 최대(最大)의 명절(名節)인 설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고 있지요!

 “설은

 1. 한 해의 시작(始作)인 음력(陰曆) 1월 1일(정월 초하루)로 지난 ‘묵은 해’를 보내고 ,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意味)를 담고 있으며,

 2. 새해 첫 날에 일 년 동안 가족(家族)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지내게 해달라고 소망(所望)하는 의미를 지니고,

 3. 그래서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바른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를 지닌 날이다." 고 하지요!

 다가오는 설 명절 연휴 내내 온 가족(家族)분들과 친지(親知)분들,
그리고 친(親)하게 지냈던 벗들과 함께 따뜻한 정(情) 나누면서 행복한 설 명절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울님 그리고 가족분들 모두 설 명절(名節)에 복(福)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만두의 유래-


 

🎁 만두의 역사

🍲 고려시대부터 먹어 온 별식 '만두'

만두는 우리에게 매우 정겨운 음식중의 하나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사람들이 매우 즐겨 먹는 음식이다.

한자로는 다같은 표기를 하지만, 일본에서는 '만주'라고 읽고,
중국에서는 '만터우'라고 읽는다.

만두는 신의 노여움을 잠잠케 만들었을 정도로 특별한 맛을 자랑하는 아주 오래된 요리이다.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게 오리고 고기와 채소를 섞은 소를 넣어 빚은 만두는 잔칫상 또는 제사상에 올리거나 겨울철에 즐겨 먹었던 별식이다.

만두를 빚어서 장국에 넣고 끓인 것은 만둣국,
쪄서 국물없이 먹는 것은 찐만두,
차게 식힌 장국에 넣은 것은 편수라고 불린다.

🥟 제갈량(諸葛亮)의 기지로 탄생한 만두

만두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위ㆍ촉ㆍ오가 있던 중국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촉한(蜀漢)의 제갈량이 남만(南蠻, 베트남) 정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노수라는 강가에서 심한 파도와 바람으로 인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사람들은 노수에 황신이라는 신이 사는데 그 신이 노한 것이니, 마흔아홉 사람의 목을 베어 강에 던져야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억울한 생명을 죽일 수 없었던 제갈량은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고 그 안은 소와 양의 고기로 채워 황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얼마 후 노수는 잠잠해졌는데, 남만인들은 제갈량이 바친 음식 때문에 잠잠해진 것으로 생각하여 '기만하기 위한 머리'라는 뜻의 만두(饅頭)'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람 머리 모양의 만두가 북방으로 전해져 오늘날 중국의 대표 음식 중 하나가 되었고,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해져 세 나라 국민 모두가 즐기는 별미 음식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도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우리나라에도 조선 후기에 만두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두는 크게 포자(包子)와 교자(餃子)만두로 나뉘는데, 제갈량에서 유래된 것은 포자만두이다.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으로 빚으면 '포자만두'

생반죽으로 빚으면 '교자만두'라고 한다.

교자만두의 경우 2세기 무렵 중국 한나라 때 의사였던 장중경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장중경(張仲景)은 추운 겨울 동상으로 귀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사람 귀 모양으로 만두를 빚은 후 뜨거운 물에 끓여 국물과 함께 나눠 주었다.

만두를 먹고 속이 따뜻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상에 걸리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다는 민간에서의 속설이 이때부터 전해진다.

🥟 고려 사람들도 열광한 만두의 맛

충혜왕 4년 '왕궁의 주방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 먹는 자를 처벌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만두를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때로 추정한다.

당시에는 밀가루 반죽 안에 야채나 팥 등의 소를 넣어 찐 음식을 '상화(霜花)'라고 하였는데, 고려 속요 <쌍화점>은 만두가게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의 속요인 <쌍화점(雙花店)>은 당시 위구르인이 고려에 들어와 만두를 파는 '상화가게'를 열었고, 만두가게를 배경으로 사랑과 연애를 스케치한 노래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에로틱하고 야릇한 사랑이 만두가게에서 이루어졌을까?

손대면 터질 듯 얇은 피(皮)아래로, 소와 육즙 가득 머금은 만두를 먹는 것은 사랑만큼 무언가를 먹는 행위도 에로틱하다고 표현한 것일까?

고려사람들이 만두를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는 몇 줄 안되는 '쌍화점' 1절을 감상해보자!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몽골인)아비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 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그 전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상화가 아닌 만두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1643년에 발행된 <영접도감의궤>로, 여기에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만두를 빚어 대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만두는 궁중 잔치에도 종종 차려져 대표적인 궁중음식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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