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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징비록'... 韓·日·中에서 인기인 이유?

작성자아미에|작성시간15.04.05|조회수64 목록 댓글 1

류성룡의 '징비록'... 韓·日·中에서 인기인 이유는?

⊙ 《징비록》, 임진왜란에서 明나라의 역할 강조하는 조선 후기 사관(史觀) 속에서 드물게 이순신과
조선 민관의 역할 강조
⊙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 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 1695년 교토에서 《조선징비록》이 출판된 후 널리 읽혀… 이순신에 대한 평가 등 일본인의
임진왜란 인식에 큰 영향
⊙ 19세기 말 淸나라에 전해져서 明나라 중심 시각의 임진왜란 인식에 변화 가져와

김시덕

⊙ 40세.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수료. 日국문학연구자료관 박사.
⊙ 저서: 《히데요시의 대외전쟁》 《그들이 본 임진왜란》 《교감 해설 징비록- 한국의 고전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으로》 《그림이 된 임진왜란》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근간)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 한반도·유구·오호츠크해 연안》 (근간).
⊙ 수상: 2011년 일본고전문학학술상 수상, 2015년 동방문학비교연구회 석헌학술상 수상.

글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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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작년에는 영화 〈명량〉이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금년 들어서는 KBS 드라마 〈징비록〉이 그러한 관심을 이어 가고 있다.
 
  임진왜란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이순신(李舜臣)이 있었다.
 
  1793년 7월 21일, 정조(正祖)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追贈)했다. 정조는 1년 뒤인 1794년에는 직접 이순신을 기리는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1795년에는 실학자로 유명한 유득공을 감독으로 명하여 이순신의 유고(遺稿) 전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하게 했다. 그런데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면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아, 신종(神宗) 황제가 우리나라를 구원하여 다시 있게 해 준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 (중략) 덕을 본받고 공을 갚는 데는 나라의 밝은 법규가 있는데, 더구나 작은 나라 배신(陪臣)으로서 명(明)나라의 은총을 입어 천하의 명장(名將)이 된 사람은 바로 이 충무공이다.〉 (《정조실록》)
 
  즉, 임진왜란을 겪고도 조선이 살아남은 것은 명나라 덕분이며, 이순신의 활약 또한 명나라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서인(西人)에 속하는 신경(申炅)이 집필하여 1693년에 출판한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라는 책은 제목부터가 ‘종주국(宗主國) 명나라가 번국(藩國) 조선을 다시 만들어 준 기록’이라는 뜻이다.
 
 
  조선이 明나라에 매달린 이유
 
일본군이 한양에 접근하자 북쪽으로 도피하는 국왕 선조.(근세 일본의 대하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 중에서)
  이처럼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명나라와 이순신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임진왜란을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키워드 가운데에도 이순신보다 명나라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가 처한 ‘정당성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선조는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의주까지 도망한 것으로도 모자라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었다. 그러는 동안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정권의 정당성을 명나라에서 찾으면서, 필사적으로 ‘명나라’에 매달렸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도움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순신과 의병(義兵)·승병(僧兵)의 활약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명나라 군대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오히려 조선군의 작전수행에 방해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명나라 군대는 임진왜란, 특히 육전(陸戰)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명군(明軍)의 참전은 일본군이 전쟁의지를 꺾고 수세적(守勢的)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역사인식은 구한말(舊韓末) 이후 형성된 민족주의 사관(史觀)의 소산이다.
 
본문이미지
류성룡 초상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활약을 중시하는 경향이 조선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즉,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민관(民官) 양측의 활약이 전쟁 승리의 양대 요인이며, 그중 더욱 중요한 원인은 이순신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민관이라는 것이다.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징비록》은 임진왜란 7년의 경과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한 책이다. 1598년 정계에서 밀려나 낙향한 류성룡은 1604년에 이 책을 완성했다. 이 류성룡 친필의 ‘초본(草本) 《징비록》’은 현재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후 이 ‘초본 《징비록》’의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작성한 각종 공문서를 묶은 총 16권짜리 《징비록》이 1647년경에 간행되었다. 이를 ‘16권본 《징비록》’ 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초본 《징비록》’을 대폭 수정한 좁은 의미의 《징비록》(권1~권2)과, 각종 에피소드 및 류성룡의 병학(兵學) 논의를 엮은 《녹후잡기(錄後雜記)》(권 16 중 일부)를 합친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을 ‘2권본 《징비록》’이라 부른다. 이 책은 17세기 중기 이후 조선사회에서 널리 읽혔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징비록》 은 바로 이 ‘2권본 《징비록》’ 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류성룡을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즉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 임진왜란을 이끈 위인이라 기억한다. 《징비록》에 대한 평가도 높다. 하지만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1607년 5월 1일 자에 실린 류성룡에 졸기(卒記)를 보면, 당대에는 류성룡이나 《징비록》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서인은 남인인 류성룡과 당파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북인(北人)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남인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졸기의 전반부는 “그와 같은 재주는 쉽게 얻을 수 없다”며 류성룡을 높이 평가한 신흠(申欽, 1566~1628)의 말을 소개한다. 이어 날선 비판이 뒤따른다.
 
  〈그러나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朋黨)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 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그 뒤로 《징비록》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 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징비록》에 대해 편파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이미 이 책이 널리 독자를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징비록》은 조선사회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하는 표준적인 틀이 된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부각된 것도 이순신의 유력한 후원자였던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그의 활약을 강조한 영향이 크다.
 
 
  《징비록》의 정교한 스토리 라인
 
명나라 장군들을 영접하는 류성룡. (《에혼 다이코기》 중에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명나라 군대가 먹을 군량미를 마련하느라 자신이 얼마나 진력(盡力)했는지 강조한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징비록》을 읽으면, 왜 이렇게 군량미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곧 보급이다. 20세기 전기의 제국주의 일본군을 비롯해서,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군대는 모두 패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의 최고 실무책임자였던 류성룡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류성룡은, 국왕 선조를 비롯한 여타 조선 지배층과는 달리 명나라 군대만이 임진왜란의 유일한 승리 요인이라고 간주하지는 않았다. 《징비록》을 꼼꼼히 읽으면, 조선군 패배 기사 뒤에 명나라 군대의 승리 기사가 놓여 있고, 그 뒤에 명나라 군대의 패배와 이순신 수군의 승리 기사가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백의종군(白衣從軍), 명량해전의 승리와 노량해전에서의 전사(戰死)가 《징비록》의 클라이맥스를 이룰 수 있도록 팩트를 드라마틱하게 배치한 것이다.
이처럼 설득력 있는 스토리라인 때문에, 필자는 《징비록》을 번역하면서 ‘《징비록》은 그대로 대하드라마로 촬영해도 상당한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어지간히 역량 있는 작가가 아니라면 《징비록》의 임진왜란관(觀)과 스토리라인을 능가할 수 있는 임진왜란 대하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징비록》
 
한산도 해전 당시 분전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은 이순신. 필자가 확인한 근세 일본 문헌 가운데, 이순신의 모습이 가장 크게 그려진 장면이다. (19세기 중기에 간행된 《조선정벌기》 중에서)
  ‘2권본 《징비록》’은 17세기 후반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징비록》이 일본에 유출되었음을 알려주는 첫 흔적은 1683년에 제작된 쓰시마 번주(藩主) 도서관 소장 서적 목록인 《덴나 삼년 목록(天和三年目錄)》이다. 여기에는 《징비록》과 《서애선생문집》을 비롯해서,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서 성립된 문헌 상당수가 보인다. 조선 전기 문헌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었다면, 17세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합작해서 조선 문헌을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쓰시마와 가까운 규슈 후쿠오카 번의 저명한 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1630~1714)이 후쿠오카 번을 지배한 구로다 집안의 사적을 정리한 《구로다 가보(黑田家譜)》를 편찬할 때 《징비록》을 이용한다. 엣켄은 이 ‘2권본 《징비록》’을 일본의 문화 중심인 교토(京都)의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베에(大和屋伊兵衛)에게 소개한다. 그리하여 1695년에 일본판 《징비록》인 《조선징비록》이 교토에서 출판된다.
 
  《조선징비록》은 ‘2권본 《징비록》’을 4권본으로 바꾸고, 엣켄의 서문과 조선의 행정구역표, 조선지도를 붙였으며, 한문에 일본어식 읽기 부호(훈점)를 붙여서 일본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편집했다. 엣켄은 서문에서 이 문헌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조선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그 밖에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와 같은 책은 비록 한자가 아닌 일본 글자(히라가나)로 쓰였지만 이 역시 방증(傍證)으로 삼기에 족하다. 오로지 이 두 책만이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조선징비록》이 출간된 이후, 《징비록》에 나타난 임진왜란 인식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조선징비록》이 간행된 10년 뒤에 출판된 《조선군기대전(朝鮮軍記大全)》에는,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징비록》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류성룡이 영웅을 천거하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이순신을 천거한 자신의 공을 강조하고자 한 류성룡의 ‘《징비록》 사관’이 일본 사회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에도시대 일본의 출판문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에스파냐 가톨릭 세력이 전래한 인쇄기술과 조선 인쇄기술의 영향으로 대량 상업출판이 시작되었다. 세계 문화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근세 일본의 지적(知的) 르네상스기에, 출판인들은 일본의 옛 문헌과 중국·조선·네덜란드 등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책을 찍어 상품으로 판매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데 열중한 일본 독자들 역시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당시 일본에서 많이 읽힌 대표적인 조선 서적으로는 《징비록》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의보감(東醫寶鑑)》, 그리고 이황(李滉)의 저술 등을 꼽을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역사학이나 의학 등 해당 분야의 일본인들이 읽는 데 그쳤지만, 유독 《징비록》은 일본 대중이 널리 읽었다.
 
  이러한 사실은 숙종 때인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유한은 당시 활짝 핀 일본의 출판문화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가장 통탄할 것은, 김성일의 일본견문록 《해사록(海槎錄)》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기록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같은 책은 나라의 기밀에 속한 것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이라 공개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모두 대판(오사카)에서 출판되었으니 이 어찌 적정을 정찰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다르겠는가. 나라의 기강이 엄숙하지 못하여 역관들이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징비록》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전근대(前近代) 일본이 경험한 가장 큰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과 《징비록》을 통해, 왜국(倭國)이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663년에 나당(羅唐) 연합군과 충돌한 백강 전투 이래 거의 1000년 만에 중국 군대와 맞붙은 일본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의 어떤 용맹한 장군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는지 알고자 했다. 상대편이 유능한 장수일수록, 그들과 싸워 이긴 일본 장군들이 더욱 빛나는 법. 이러한 일본 측의 수요를 충족시켜 준 것이 《징비록》을 통해 영웅화된 이순신이었다.
 
 
  중국인의 임진왜란觀도 변화시켜
 
굶어죽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를 보고 류성룡이 슬퍼하다. (《에혼 다이코기》 중에서)
  이처럼 이순신을 영웅시하는 한일 양국의 계산은 서로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한일 양국이 공히 합의할 수 있는 영웅이 되었다.
 
  류성룡의 ‘《징비록》 사관’은 일본을 거쳐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청(淸)나라의 초대 주일공사였던 하여장(何如璋·1838~1891)을 수행해서 일본에 건너간 청말의 대학자 양수경(楊守敬·1839~1915)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몰락한 일본의 옛 지배층이 헐값에 내놓은 중국의 희귀 서적을 수집, 이를 《일본방서지(日本訪書志)》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이 책의 권6에 《징비록》에 대한 언급이 실려 있다.
 
  여기서 양수경은, 일본 학자 가와구치 조주(川口長孺)가 1831년에 간행한 《정한위략(征韓偉略)》에서 류성룡을 간신(奸臣)이라고 비난하는 명나라 문헌의 주장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류성룡에게서 두보(杜甫)와 같은 우국지사(憂國之士)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서술한 대목을 인용한다. 그는 ‘일본판 《조선징비록》이나 《정한위략》을 읽으니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과 같은 명나라 문헌이 조선의 국왕 선조 및 류성룡 등을 비하하고 명나라 군대의 일방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되었다’고 적는다.
 
  《양조평양록》 등 명나라 문헌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들과 직접 교섭한 류성룡·이덕형과 같은 사람들을 나쁘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이들이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조선의 국익(國益)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양수경의 기록은 류성룡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여 세상에 던진 ‘《징비록》 사관’이 일본을 거쳐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결국 중국인들의 임진왜란관도 변화시켰음을 보여준다.
 
 
  기록을 남기는 자가 승자(勝者)가 된다
 
  1598년 11월 19일. 이날은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날이자, 류성룡이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해서 나라를 망쳤다(主和誤國)”는 정적(政敵) 북인(北人)들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削奪官職)된 날이다.
 
  정치투쟁에서 패한 류성룡은 고향인 안동 하회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변론했다.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양대 승리 요인을 명나라 군대와 이순신의 활약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논리의 배후에는, 명나라 군대가 먹을 군량미를 조달한 것도 자신이고 이순신을 천거하고 옹호한 것도 자신이라는 주장이 깔려 있다. 물론 이것은 류성룡 개인의 관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부합했고, 《징비록》이라는 책 자체가 탁월한 설득력을 지녔기에, 류성룡의 임진왜란관, 즉 ‘《징비록》 사관’은 그 후 조선은 물론 일본, 중국에까지 전파(傳播)됐다.
 
  흔히 승자(勝者)는 역사를 쓰고 패자(敗者)는 문학작품을 쓴다고 한다. 그러나 류성룡과 《징비록》의 사례는, 승자가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자가 승자가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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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amsan | 작성시간 15.04.05 궁금했던 점에 대한 자세한 정보 고맙읍니다
    이제서야 징비록에 대한 의문이 풀리네요
    감사드리며
    편안한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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