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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 - 요나수사님

작성자시은|작성시간19.11.29|조회수679 목록 댓글 6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

- 2019년 11월 후원회 특강 -


이연학 요나 수사님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주제는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는 어떤 게 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는 말씀일까요? 제가 지어낸 말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거든요.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시는 장면 있지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참된 제사, 참된 기도,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가야 되고 저 산에 가야 되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 되고 그랬지만... 지금부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가 들려 드릴께요.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런 말씀을 주셨단 말입니다. 이제 기억나세요? 네, 이 말씀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음에 이것과 함께 묵상할 수 있는 말씀이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2장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기서도 예배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예수님 말씀하시는 예배와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예배의 공통점이 뭘까요? 우리에게는 예배라고 하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한다는 선입견이 있지 않습니까? 보통 예배를 어디서 드려요? 성당에서 하잖아요. 그죠?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에서 했을거구요. 그러면 예배를 언제 합니까? 미사시간이나 성체조배시간이나 이럴 때 하는 것이 예배다. 기도다 이렇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방금 우리가 들은 예수님 말씀이나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서는 여기에 대해 뭔가 다른 말씀을 해 주시고 계셔요. 여기까지 이해가 되세요? 제가 확인하고 지나가야 해요. 왜냐하면 여기까지 이해가 안되면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이해를 못하시기 때문이예요.

 

예수님이나 사도 바오로께서 예배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성당에서 성전에서 미사시간에 혹은 기도시간에 드리는 예배를 넘어서는 예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적 예배...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를 줄여서 우리는 영적 예배라고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가 어떤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때는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영적 예배의 반대말은 뭘까요? 형식적 예배, 형식적 의례 이쯤 생각해 보면 될 거 같아요. 외적 의식이나 형식으로서의 예배가 뜻이 없고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거기에 그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당할 때 성수로 성호 긋고-그건 좋은거지만- 퇴장할 때 성수로 성호 그으면서 들었던 모든 것을 다 밀어 놓고 다 까먹고 나가듯이... 다시 내 마음대로 사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우리의 삶이 관계없이 따로 놀 때 이것을 외적 예배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적 예배에 대해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고성 봉헌회에 출석하시는 분들은 이 예를 자주 들었을지도 모르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한번 더 들어 주시고요. 옛날 제가 수련자 시절에 몬떼 올리베또의 연피정에 예수고난회의 한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오셔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간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워낙 천천히 구수하게 말씀해 주셔서 이 이야기는 제가 알아들었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 중 하나가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창작인지... 그 할아버지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쨌든 진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진짜라고 믿습니다. 설혹 진짜가 아니라 해도 별 상관이 없어요. 들어 보세요. 이탈리아에 에우제니오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것 같은 그런 아이들이 있어요. 이 아이도 그런 아이였는데 어려서 소꿉장난 할 때에 자기 혼자서 미사놀이를 하는거예요. 초등학교 들어가서 부모님에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 왔습니다.’라고 인사말을 해야 할 순간에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고요. 너무 착하고, 보고 있으면 하느님의 그림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 언뜻 드는...그래서 부모도 자기 아이지만 경외심을 느끼게 되는 그런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열 대여섯살, 우리 식으로 하면 고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급성 혈액암에 걸립니다.  치료를 받아도 안되는거죠. 나중에는 가망이 없는 수술을 하게 되어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는데  너무 불안해 하며 수술실까지 따라 오는 엄마의 손을 잡아주며  ‘엄마 너무 염려할 필요 없어요. 이것은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바치는 내 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방금 웃으시는데 제 이야기를 알아 들으셨어요?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예요. 아이가 '세상을 위해 바치는 내 몸'이라고 이야기하는거예요. 애초에 가망이 없는 수술이니 만큼 사람들이 바라는 기적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세요.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예요. 이 경우에도 사람들이 바라는 기적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으면서 슬퍼하는 엄마 아빠 할머니를 안심시켜 주면서 몸은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차분할수 있을까 싶은 목소리로 어떤 마지막 말을 하는가 하면 ‘이제 평화롭게 돌아가십시오 내 미사가 끝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거예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는 통상 미사 마지막에 이렇게 많이 하지만 이태리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미사가 끝났으니 평화로이 가십시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웃기는 이야기고 어떻게 보면 과장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저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 모릅니다만 그 할아버지 신부님에 따르면 진짜로 있었던 일인거예요.

 

제가 영적 예배라는 말을 하면서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 이해가 좀 되세요? 이게 영적 예배입니다. 미사는 미사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예요. 미사시간에 하는 예배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거기에만 그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관점에 따르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참된 예배 참된 미사는 나무나 돌로 된 제대 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몸 위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그 아이는 그걸 알아들었던 거죠.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내 몸,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내가 날마다 지고가는 고통과 수고와 아픔과... 이런 것들이 다 내 미사도구입니다. 내가 쉬는 숨 하나하나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 내가 하는 생각 하나하나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미사동작이예요. 신학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사제예요. 보편사제직이라고 아시죠? 미사시간에 벌어지는 사제직은 직무사제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 영적 제사는 우리 모든 보편 사제들에게 주어진 거예요. 미사를 왜 하느냐?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라고 하는 거예요. 영적 예배가 일상에서 벌어지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겁니다. 이건 뭐 자기자신을 실제로 죽여가지고 장작불에 올리라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몸이라는 이야기는 인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시간이라는 이야기예요. 내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하느님께 바치는 거라고 이야기하시는거죠. 이게 ‘영으로 바치는 예배’입니다. 이제 알아들으셨죠? 영으로 바치는 예배가 뭐 기도 중에 온갖 체험을 다 하고 영적인 체험을 하고 이런 게 아니예요. 성경에서 영으로 예배를 바치라고 할 때 우리 삶으로 예배를 바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리고 지금이 그 때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 지금이 언제예요? 이천년 전이예요? 그 지금이 ‘지금’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지난 달에도 김요한 신부님이 들으셨는데 쉽지 않고 아주 어려운 이야기인데 정말 놀라운 것은 여기 모인 분들이 제 이야기를 알아듣더라는거예요. 저도 그 이야기를 가만 듣고 보니 놀랍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올거예요. 아마 다른데 가서는 이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할텐데 여기서는 할 수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조금씩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 안에서 바치는 예배는 뭘까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성경해석은 학문적이고 성서학적인 해석이 아니예요. 영적인 해석입니다. 진리 안에서 바치는 예배는 이런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기억하세요? 6장인가 그럴겁니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예요?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진리를 실천하는게 뭘까요? 진리는 뭘까요? 도대체. 진리가 뭐죠? 진리는 진실이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진실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은 정직입니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말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어떤 사람이 진실을 알아차리고 그걸 인정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직한 사람들이 있는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도 해석할 수 있는가 하면 -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 어떤 사람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인가 하면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설혹 남에게는 좀 숨기기도 하고 그런다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기자신 앞에서는 아주 정직한 상태로 있을 때, 속이지 않을 때 지금 여러분 좀 그런 상태에 계시나요? 좋은 말 할 때 그런 상태에 계세요. 왜 그런가 하면 아무도 안봐요. 하느님만 보십니다. 하느님과 나만 보면 됐죠. 사람이 살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좀 숨겨야 할 것도 있어요  그렇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숨긴다는 그 자체가 가능하지 않죠. 그런데 그 가능하지 않은 일을 우리가 하면서 살아요.  꿩이나 새사냥하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하거든요. 마지막에 궁지에 몰리면 새들이 풀숲에 대가리를 박는다는거예요. 저만 안보면 다른 누구도 안본다고 생각하는거죠.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정말 그렇게 사는 거 같아요.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고요 하느님의 현존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예전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이런 비슷한 말로 신자들을 기도에 초대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쏘우라는 베네딕도 회의 신부님, 인도에서 사셨던 신부님인데 아주 훌륭한 기도에 관한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얼마나 어리석고 꿈같은 이야기이냐.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앞에 나아가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거냐.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자. 하느님 현존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냐’고. 가능해요? 안가능하죠? 지금 이순간도 우리는 그냥 하느님 현존 앞에 있어요.  그죠? 그런데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 새들이 머리가 나쁘지 않은데 닭들이 머리가 나쁘지 않은데 닭대가리 새대가리라고 하곤 하는데 - 그 닭 대가리 새 대가리처럼 우리도 우리 대가리를 - 죄송합니다- 마치 내가 안느끼고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하느님 현존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거예요. 그래서 내가 고백하고 내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고 그래야만 하느님 현존 앞에 서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기도를 자기 노력으로 해야 되고 자기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거죠. 여러분 여기까지 알아들으셨으면 정말 수준이 높으신거예요. 여기까지 알아들으셨으면 기도도 자기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들으신 거예요.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없어요. 기도는 하느님 앞에 현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게 그리 쉽지 않아요. 일단 두렵습니다. 두려워요. 그리고 말할 수 없이 쪽팔려요. 들킬까봐... 그게 뭔지 모르지만... 왜 ‘뭔지 모르지만’이라는 표현을 쓰느냐? 자기자신도 정말 알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음을 있는 그대로 그냥 드러내 버리는 겁니다. 내 모습이 어떻고 옛날 내가 뭘 잘못했고 그런 것을 하나하나 다 따져보지 않더라도 정말 하느님 앞에서 발가벗고 서는 그런 자세로 있는거죠. 어차피 발가벗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되는 이유가 뭐라고 그랬어요? 제가 유명한 유행가 가사를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요. ‘당신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은 사랑말고는 그 어떤 것도 아니예요. 우리가 그 앞에 서 있는 현존이 마지막에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마지막에는 자비예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 시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옷을 벗어도 되는거예요. 내 있는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제 말에 공감이 가시나요? 지금 그 상태로,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덧붙이지도 말고 꾸미지도 마세요. 그리고 ‘앞으로 내가 더 열심히 해서 자격을 갖추고 나가겠습니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는 분이라고 믿죠?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제일 먼저 용서를 통해 드러나거든요. 용서는 뭐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풀어준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있는 그대로 나일 수 있어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실천하고 있는겁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거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나쁜 일이라고 그랬어요? 좋은 일이라고 그랬어요? 좋은 일이예요. 은총지위에 사람들만이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미 은총지위에서 너무 멀어진 사람들은 양심이 무디고 딱딱해져 버렸기 때문에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아요. 그렇게 되면 어떤 얼굴로 산다고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얼굴을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이 없어요? 세상에 그런 얼굴을 하고 살기 때문에 부끄러운 짓들 참혹한 짓들을 저지르고 다니고요, 자기 안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늘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부끄럽고 참혹하고 잔인한 짓은 하지 않아요. 그렇죠.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겁니다. 두려워할 줄 아는 것도 좋은 일이예요. 공포에 떠는 것이 아니고요. 흔들릴 줄 아는 거. 그런데 그게 끝까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남아있지 않아요. 하느님의 자비의 현존 앞에 그 빛 앞에 내가 있는 그대로 ‘진리를 실천’하면서 - 이제 그 말씀의 뜻을 알아 들으시죠?- 있는 것도 굉장히 쉬운겁니다. 어떤 사람들 앞에는 불가능한거고요. 지금 이 말씀을 알아듣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없어요.

 

아니 그럼 세상이 지가 있는 그대로 있지 없는 상태로 있어요? 지가 지어낸 상태로 있습니까? 우리는 늘 있는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어요. 그죠? 하느님의 자비가 이 ‘있는 그대로’를 씻어 주시고 덮어 주시고 껴안아 주시고 거듭거듭 그렇게 해 주시고 그래서 용서가 필요한 부분에는 용서를, 위로가 필요한 부분에는 위로를, 치유가 필요한 부분에는 치유를, 소독이 필요한 곳에는 소독을, 힘이 필요한데는 힘을 주시고 하느님 현존으로부터 늘 그런 일을 해 주셔요.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그 상태를 조금만 감당하고 견딜 줄 안다면 그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늘 기쁨으로 성변화합니다. 그런데 내가 한 짓이 아무 것도 없어요. 내가 노력해서 인생을 바꾸지도 않았고요, 좋은 사람이 되지도 않았어요. 그냥 부끄러워할 줄만 아는거예요. 내가 하느님 앞에 잘난 사람이 아닌거예요. 그렇게 훌륭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아니고... 그냥 내가 사람들 앞에 나 자신 앞에 양심을 숨겼어요. 이런 마음으로 내가 서 있을 때, 그렇게 내가 내 진리를 실천하고 있을 때 나는 빛 앞에 나온겁니다. 에페소서에  “빛의 비추임을 받은 것도 다 빛입니다.”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아니지요? 어두운 자리에 빛이 비추어지잖아요? 빛이 비추어진 그 어두운 자리가 이제 밝아요? 어두워요? 밝죠. 그래서 저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는 말씀을 가장 잘 풀이하는 성경말씀이 에페소서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빛을 받은 것도 빛이 된다. 빛을 비추는 것만 빛이 아니고요 그 빛을 받는 그 자리도 빛입니다. 많은 경우에 빛을 받는 그 자리는 밝고 빛을 받을 만 하고 아름답고 이런 자리가 아니라 어두운 자리예요.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걸 숨기지 않고 자기 어둠을 치장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펼쳐 놓고 있으면 그래서 빛이 충분히 자기를 쪼이도록 허락해 드리면 그 자리가 빛이예요. 그래서 지금 있는 그대로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빛이예요.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는 대략 크게 이야기하면 이런거고요.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고 싶네요.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머리를 많이 쓰시거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잘 못알아 듣겠는 건 그냥 잊어버리시면 돼요. 진리를 실천한다는 말은 이제 알아 들으셨죠? 진리를 실천하면서 앉아계시기만 하면 돼요. 빛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는, 나를 비추시지 않을 수 없는 그 빛에 노출되어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를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말은 성찬 혹은 성체성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예배는 성체성사예요. 미사잖아요. 그죠? 성찬이잖아요. 그런데 성찬이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에우카리스티아 Eucharistia라고 해요. 그리스 말로 에우카리스티아는 원래 ‘감사’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쓰신 글들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에우카리스티아는 명사인데 똑같은 말을 동사형으로 사용하셔요. 우리에게는 약간 이상하게 들리지만 ‘모든 일에 성찬을, 성체성사를 거행하십시오’라고 직설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어요. 성체성사를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감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제일 먼저 뭐 하셨어요? 감사하셨죠 그죠? 빵을 들고 감사하시고 포도주를 들고 감사하시고... 그래서 사제가 미사할 때 똑같이 하잖아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하실 때 감사하셨잖아요. ‘감사’는 예수님의 인생 전체를 요약할 수 있는 딱 한마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감사 그 자체이셨을 거예요. 이 말씀도 여러분들은 수차례에 걸쳐 들으셨습니다마는 듣고 또 들으면서 우리 뼈 속 깊이 되뇌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출발점이 무엇일까요? 감사는 내가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지가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감사하는 것도 그냥 억지로 하는 부자연스러운 노력에 불과해요. 그런데 내가 정말 받은 줄을 알면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감사함이거든요. 영어로 고맙다고 할 때 'thank you' 그러잖아요. 어떤 때에는 ‘I appreciate it’ 이런 말도 쓰거든요. appreciate, appreciation이란 말은 일상용어에서는 ‘고맙다’ 이렇게 쓰이는데 원래 의미는 ‘음미한다’는 뜻이예요. 뭔가를 꼭꼭 씹어 먹으면서 맛을 음미하는 것. 아주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나 경치가 있을 때 ‘아! 정말 아름답구나.’하면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그 디테일까지 내가 다 들으면서 ‘야, 이게 이렇게까지 아름답구나!’하고 감상할 때 - 우리나라 옛 어른들은 완상玩賞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 어쨌든 음미하고 감상하는 것이 appreciate예요. 그러니까 감사의 출발은 음미하고 감상하는거예요. 우리 경우에 뭘 음미하고 감상해요? 내가 지금 얼마나 받고 있는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지, 이게 얼마나 놀라운건지, 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그걸 내가 새삼 알아듣고 알아차리고 음미하고 감상하고 꼭꼭 씹어 먹는거예요.

 

그럼 뭐가 생길까요? ‘경탄驚歎"이 생깁니다. 놀라워요. 제가 진짜 어려운 말했거든요 지금.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면 알아들은 분은 다 철학자예요. ‘경탄’은 철학의 출발이예요. 그럼 무엇 때문에 경탄하느냐? 아무 것도 없어도 되는데 왜 있느냐?는 거예요. 감사는 뭔가 내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발생하는 게 아니고요. 아무 것도 안생겼어요. 그런데 이미 생겨있단 말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이미 뭐가 생겨 있어요? 내 인생이 없어도 되는데 있잖아요. 내가 있네요 그죠? 물론 내가 살면서 고통도 많이 겪었고 기쁨도 많이 느꼈지만 그런 거 저런 거 나에게 생긴 일을 따지기 이전에 내가 이렇게 그냥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꼭 있어야 돼요? 사실 없어도 되잖아요. 그죠?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만들어낸 인생이 아니잖아요. 내가 있게 된 것이 내가 원해서 내가 계획해서 내 의지로 얻어낸 게 아니잖아요. 전라도 사투리입니다만 고스톱치다가 광 팔아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요시 내가 태어나서 세상에 좋은 일 한번 해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죠? 그럼 어떻게 태어난거예요? '그냥'이예요. 그냥 태어난 거예요. 그죠? 그러니 내가 태어났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예요. 태어나진거예요. 그게 안놀라와요? 놀랍잖아요 그죠? 그게 놀랍기 시작하면 우리는 감사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한겁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야, 내가 있네. 없어도 되는데 있네. 아, 참 신기하네.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너도 있네. 너도 나만큼이나 신기한 물건이네. 너와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있네. 참 신기하네 세상에는 고통도 많이 있지만 아름다운 것도 얼마나 많아요 그죠?

 

모든 것이 다 사라져가요 그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누구나 다 죽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죽기는 하지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죽는다고 느껴질 때 인생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가끔 드시지요? 만일 안죽고 끝까지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안아름다울거예요. 지겹기 짝이 없을거예요. 그렇지만 잠시 살다 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귀한거예요. 시간도 귀하고 나도 귀하고 너도 귀하고... 그렇게 귀한 거예요. 그리고 아름다운거예요. 그죠? 그럴 때 뭐라고 한다고 그랬어요? “뭘 이런 걸 다...”라고 그랬잖아요. “뭘 이런 걸 다...”라는 말이 일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경탄’입니다. 내가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없는데 - 내가 마땅히 누려야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그 속에 들어와 있어요. 초대받아서 들어와 있다구요. 그래서 감사는 어떤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내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하는 특정한 행위가 아니고 어떤 사람의 인생을 사는, 인생을 바라보는 전반적인 태도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분명히 그 전반적인 태도가 감사더라구요. 제가 보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사는 전반적인 태도가 감사가 아니고 불만이예요. 이상해요. 똑같은 부모님 밑에서 똑같은 조건에서 자라난 자녀들인데도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감사하고요, 어떤 아이는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늘 입이... 이럴 때는 주둥이가 이만큼 튀어나와 있는거예요. 신기합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떻게 그렇게 태도가 다를 수 있는지. 더 놀라운 건 뭔지 아세요? 객관적으로 볼 때 조건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도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에 있는 사람인데도 감사와 경탄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예요. 이게 공감이 가세요? 내가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옛날에 사지가 다 잘린 사람들, 일본사람, 서양사람이 와서...‘오체불만족’이런 책도 썼어요 그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보니까 그런 분들이 쇼로 행복한 척 하는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사지 멀쩡하고 남들이 안가지고 있는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돈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고 그런데 자기 손으로 삶을 끝내버리는 사람도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인생을 자기 손으로 끝내지도 못해요, 손발이 없어서. 도움이라도 받아야 해요. 그런데 그런 생각 안하고 얼굴이 만족함으로 빛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살면 살수록 제가 보니 그런 극단적인 예가 있더라구요. 제가 본 것 중 하나가 그런 거예요. 그렇게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가들의 말씀, 성경말씀의 가장 깊은 이치가 담겨 있는 그런 말씀을 누가 잘 알아듣는가 하면 고통 한 가운데 있고 굉장히 가난한 상황에 빠져있는 사람이 잘 알아 들어요. 직관적으로 알아 들어요. 그런데 많이 누리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은 못알아 듣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감사라는 말이 고통이 없다는 말과 같은 게 아니예요. 고통은 늘 있어요. 감사는 늘 고통 한 가운데서 하는거예요. 고통 한 가운데서 살아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내 인생 자체가 받은 거고 받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지금도 내가 받고 있어요. 지금도 내 생명을 받고 있어요.  이게 존재예요. 그래서 주고 계시는 분이 안계신다면 ‘없는’거에요. 지금도 나는 끊임없이 받고 있기 때문에 ‘있는’거 거든요.그 사실을 내가 점점 더 깊게 알아듣게 되고 인식하게 되고 감사하고 음미하게 되면 비록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아도 내가 감사드릴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가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되고 그 감사가 차고 넘치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나요? 첫 단계가 뭐예요? 음미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받고 있는지, 받아서 생기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음미하고 감사하는 것이 appraciate라는 것이예요. 그렇게 충분히 음미하고 알아차리면 감사하게 되고요, 그 감사가 차고 넘치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드렸나요? 고성의 봉헌자 분들은 이 대목에서 대답이 탁 튀어 나왔어야 되는데...내가 정말 받았잖아요. 그래서 너무 고마워요 그죠?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데 받았으면 뭐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게 까지는 안고마울텐데 생각해 보면 받을만한 자격이 없어요. 마땅히 당연히 내가 그래야 할 뭐가 아니예요. 그런데도 받고 있어요. 특별히 하느님의 용서 같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은 용서해 주실 의무가 없어요. 그런데 받은게 있기 때문에 제가 지금 살고 있는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조금 느껴진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제 고마워지는 거예요. 그죠? 이 때 이 고마움 속에 어떤 감정이 들어 있습니까? 이 감사 속에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고, 당연하지 않고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받고 있잖아요.

 

그럴 때 느끼는 내 감정을 뭐라고 그래요? ‘미안함’이라고 그러잖아요. 그죠? 안미안해요? 미안해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은 참 인간같지 않은 인간들이예요. 모든 진실한 감사의 감정 한가운데 박혀서 꿈틀대고 있는 것은 ‘미안함’입니다. 미안한거예요. 제가 보기에 미안함이 없으면 감사가 아니예요. 그죠? 왜 안미안해요. 미안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더 고마운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 어떻게 하고 싶어져요? 계속 그냥 받고만 있을래요? 저절로 주게 되는거예요. 안주면 못견딜 것 같은 마음이 생기는거예요. 그게 뭐하고 비슷한가 하면 엄마가 되어서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든 분유를 먹이든 간에 젖을 안줄 수 있나요? 그런 거랑 비슷해요 안주면 안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받은 줄 아는 만큼, 자기가 정말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감정입니다. 받은 것을 다시 내어놓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 잘 대답할 수 있도록 공식으로도 정리해 드렸잖아요. 제가 미얀마 가기 전에 총정리해 드리는 거예요. 공식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먹은 만큼 게워낸다’고 그랬잖아요. 사람은 먹은 만큼만 게워내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존재와 현존을 빛을 받고 누리고 쬐고 먹은 만큼만 감사하고 게워냅니다. 거의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걸 게워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돼요. 그 상태에서 사도 바오로가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재앙이 생길거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았기 때문에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그런 감정, 그런 욕구는 지극히 자연발생적인 것이예요.

 

받았기 때문에 다시 바쳐드리는 것을 ‘봉헌奉獻’이라고 해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세요? 지금 제가 영적 예배를 이야기하면서 성체성사에 대한 말을 하고 있거든요.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바치시는거잖아요. 바치는 것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겁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드리는 것만이 아니예요. 받은 것에서부터 출발하는거예요. 예수님은 자기가 얼마나 받고 계시는지 늘 알아차리는 분이셨고요, 그것을 끝까지 음미하고 감사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놀랍고 너무 고마운거예요. 예수님에게 있어서 모든 중요한 일은 감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감사가 순정하고 진정하기 때문에 감사가 차고 넘쳤었지요. 우리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가 뭐 잘났다고 하느님께 자기를 바쳐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기에게 바치셨는지 지금도 얼마나 바쳐지고 계신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알아먹은 사람들 한테서만 발생하는 일이 ‘봉헌’ 혹은 ‘투신’ 혹은 ‘나눔’, ‘베품’ 이런 거예요. 그렇지 않을 때 내가 한 봉헌의 행위는 생색내는 거예요. 심한 소리같지만 전부 다 지 자랑하는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자기 노력으로 하는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알아 주면 성을 낸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안알아주면 화를 낸다구요. 그래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과 '감사하는 것'과  '봉헌하고  바치는 것'이 세 가지 동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 하나의 동작의  세 가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아 들으셨지요? 이게 영적 예배의 구조입니다. 이거는 미사 때 예배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잘 보여지고 있는 것이지만 이게 우리 삶 전체의 구조예요. 이걸 에우제니오라는 아이가 잘 표현해 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한 가지 덧붙일 이야기를 들고 왔습니다. 이 봉헌, 진정한 봉헌을 순정하게 바치는 사람들은... 어제 복음이 뭐였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봉헌이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예요. 예수님이 성전에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부자들이 돈을 많이 냈어요. 그런데 가난한 과부가 와서 동전 두 닢을 탁 집어 넣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가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더 많이 봉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예수님이 이유까지 설명하셨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 일부를 덜어내서 바쳤지만 그 일부라 하더라도 큰 돈인거예요. 그런데 이 과부는 지닌 것 전부를 바쳤다는거예요.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렙톤 두 닢은 얼마 안되는 돈이예요. 김밥천국에 가서 라면 두 그릇 사먹으면 없어지는 그런 돈이예요. 그 정도 돈일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닌 돈이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이 여자에게 전부였기 때문에 하느님에게도 전부인 거예요. '양量'이 아니고 '질質'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것 중에 어떤 것을 바쳤어요. 그런데 이 여자는 뭘 바쳤습니까? 자기가 소유한 것을 바쳤어요? 전부를 바쳤다는 말을 조금 어려운 말로 바꿔서 이야기하면 '자기 존재存在'를 바친거예요. 자기자신을 바쳤다는 이야기예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바친 것이 아니고요. 그것도 물론 귀하고 소중합니다마는 정말로 받은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 것을 바치는 게 아니고 자기자신을 바쳐요.

 

‘바쳐라 바쳐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그러죠. 그래서 하느님에게 이렇게 대들고 싶어요. ‘하느님, 나한테 뭘 줘 놓고 그런 이야기를 해 보시지. 준건 하나도 없으면서 바치기는 뭘 바치라는 말입니까?’ 혹시 누가 그런 맘이 드세요? 네, 진리를 실천하시면 돼요. 대답 안하셔도 될 거 같아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이 뭔가 하면 바칠 게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예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에게 바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그죠? 하느님께는 바치는 액수의 크고작음이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 하느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이예요. 자기자신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바칠게 없어요. 좀 줘 놓고 바치라고 해 보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잘못 알아듣고 있는거예요. 바칠게 없기는 왜 없어요? 바칠게 없다고 툴툴대고 있는 그 '물건' 자체를 바쳐야 해요. “여러분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이게 최고의 봉헌입니다. 이게 최고의 제물이예요.


이 가난한 과부가 자기 소유所有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바쳤다. 여기까지는 알아 들으셨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과부는 자기 생활비를 전부 던져 넣었다” 이게 직역입니다. “생활비를 넣었다” 이게 우리 번역이잖아요? “자기 생활을, 자기 생명을 던졌다” 이게 원문 직역입니다. 존재는 생명이예요 그죠? 자기 생명을 지거라고 지가 만들어 내고 지가 어찌어찌 해나가고 있는 거라고 지 인생을 그렇게 알아듣는 사람들은 지 인생을 안 바치고... 안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못 바쳐요. 그런데 지가 받았다고 알아들은 사람들은, 받은 게 너무 고마운 사람들은요, 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치는 게 아니고요 지가 가지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칩니다. 그 가난한 과부에게 동전 두 닢은 자기 자신이었던 겁니다. 자기 생명이었던 거예요. 자기 존재였던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그 복음을 우리가 영적으로 잘 이해하면 이 과부는 누구보다도 많이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나게 받고 있다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appreciation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 생명에 대해서 자기 삶에 대해서 ‘아,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사는게 힘들고 고단하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내 거라고는 하나도 없네요. 고맙습니다.’ 이해가 되세요? 그런 사람만 바쳐요. 그런 사람만 자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 바치는거예요. 바치고 자기가 바쳤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겠어요? 제가 고성 수도원에 있을 때 많은 은인들을 만나곤 했는데 가장 큰 은인이 두 분 계셨어요. 두 분 다 지금은 할머니들이세요. 그런데 그 두 분의 특징이 뭔가 하면 수도원에 한번도 안나타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고마워서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할머니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 지금은 자기 소유를 다 우리 같은데 봉헌하시고 양로원에 계셔요 구십이 넘은 분도 계셔요 - 우리가 찾아가니까 반가와하고 고마워는 하셨지만 이런 말씀 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아까운 마음이 전혀 없었겠어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셨다. 그게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내가 뭐 큰 것을 드렸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니까 내가 뭐 중요한 일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 하시더라구요.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이야기할 때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거든요. 가슴이 쿵 떨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그런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 제가 지금까지 강의에서 어지간한 이야기는 다 했지만 하지 않았던 부분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정신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가난, 겸손 이런 표현을 쓰고요, 성경에 나오는 말씀부터 인용해 드릴께요.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받은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다시 오실 때에 종들에게 요구하시는 말씀, 당신이 종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종들에게 그런 자세로... 당신이 먼저 그렇게 사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거죠. 이게 쉬워요 어려워요? 안쉽습니다. 우선 어떤 용서를 봉헌을 희생을 베품을 나눔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게 뭔가 하면 그걸 자기가 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예요.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보고 하라고 하셔요. 왜? 자기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쓸모있는 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쓸모를 내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쓸모없는 종이 해야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 하여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리고 또 댓가를 바라지 말고 베풀라는 말씀이 얼마나 자주 나와요? 너희는 손님을 초대할 때 니가 초대하면 니한데 갚아줄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지 말고 너한테 절대로 못 갚을 사람을 불러서 베풀라고... 기억나시죠? 참 어려운 가르침이예요. 베네딕도 규칙서에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손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특히 가난한 나그네들 안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셔요. 똑같은 말씀입니다. 절대로 너에게 갚아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라는 것이예요. 그럴 때에만 ‘하늘에 보화를 쌓는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한국의 대승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경전이 금강경金剛經이라는 경전입니다. 금강경에 대한 좋은 해설서가 많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 무비無比스님이라는 분이 쓰신게 좋고요, 제가 여러분에게 권유해 드리고 싶은 것은 유명한 법륜法輪스님의 금강경 강의가 있습니다. 좋아요. 아주아주 명쾌하고 쉽고 감동적이면서도 핵심만 건드리고 계셔요. 이 금강경 - 우리는 11장이라고 하는데 - 11품에 무위복승(無爲福勝)이라는 말이 있어요. 승(勝)이란 가장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이긴다는 말이잖아요. 무위복(無爲福)과 반대말은 유위복(有爲福)이예요. 유위복은 뭔가 지가 한 거예요. 지가 해서 지어낸 복인거예요. 무위복은 지가 하긴 해도 지가 하지 않았다고 느끼는거예요. 그래서 정말 지가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기는 복은 무위복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무위복은 새지 않는 복이라고 해서 무루복(無漏福)이라고도 하고요, 유위복은 다 새어 나간다고 해서 유루복(有漏福)이라고도 해요. 이건 중요하지 않고요.

 

이 경전에 대한 해설 중에 법륜스님이 경전에 적혀있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데, 한번 들어 보세요. 옛날 부처님이 자주 가시던 성 중에 사비성(혹은 사위성)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사비성의 왕이 아주 열심한 불자였어요. 부처님이 우기 석 달 동안 자기 제자들과 수행을 할 때 그 왕이 침구와 옷과 음식을 다 제공했어요. 안거가 끝나고 부처님이 제자들과 같이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데 그 때, 수 만개의 등불을 켜서 연등회를 베푼겁니다. 그런데 이 사비성에는 아주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고 해요. 아주 성실한데 등골이 휘어지도록 가난한 사람이예요. 이 여인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품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을 해요. 어느날 온 성 안이 축제분위기로 넘쳐 나니까 물어본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을 위한 연등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 여인은 ‘왕이 큰 복을 짓고 있구나. 나는 돈이 없어서 뭘 해드릴 수는 없지만 등은 꼭 하나 해 드리고 싶다.’ 이런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된 겁니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해요?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 주고 동전 두 닢을 받아요. 두 닢이라는 말에 제 몸에 소름이 돋더라구요. 왜요? 루가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여인의 동전 두 닢과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예요. 이 여인이 동전 두 닢을 가지고 기름장수에게 갑니다. 기름장수가 이 기름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부처님에게 나도 등을 하나 바치고 싶다고 이야기하죠. 그렇게 해서 자기 밥과도 같은 그 등을 만들어 부처님 처소로 갑니다. 그런데 이미 남들 눈에 보이는 중요한 자리에는 등이 가득 차 있어요. 이 여인은 저 구석 보이지도 않는 자리에 등을 갖다 놓습니다. 이 여인은 그 등을 달면서 무슨 큰 복을 빈게 아니예요. ‘잘 살게 해 달라’ 이런 복을 빈 게 아니고요, 심지어는 ‘굶주림을 면하게 해 달라’는 당연한 복을 빈 것도 아니예요. 단지 ‘이 작은 등불 하나를 부처님에게 바침으로써 이번 생에는 안될 지라도 다음 생에는 자기도 성불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어요. 부처님이 잠잘 시간이 되고 부처님의 제일 사랑받는 제자 아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사도 요한 같은 분이 숲 주위의 불을 하나하나 꺼 나갑니다. 등불을 다 껐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저 쪽 귀퉁이에 등불이 하나 깜빡이고 있어요. 낮에는 안보였는데 밤이 되니 보이는거예요. 아난다가 가서 불을 끕니다. 그런데 안꺼지는거예요. 불어도 보고 덮어도  보지만 온갖 짓을 다해도 안꺼져요. 그 때 부처님이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아난다에게 말합니다. “아난다야 헛수고하지 마라. 그 불은 안꺼진다. 절대로 안꺼진다. 그것은 가난한 여인이 밝힌 작은 등불에 불과하지만 그 공덕이 진실로 무한하니 그대의 힘으로는 끌 수 없다. 이 여인은 그 등불을 켠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음 생에는 부처가 될 것이라는 부처님의 예언을 일컬어서 불교의 전문용어로 수기(授記)라고 해요.

 

이 가난한 여인은 세속에서 희생하고 살면서 자기에게 당연히 와야 할 최소한의 복마저도 바라지 않은거죠.  그리고 자기 정성에 대해서도 자기가 이런 정성을 바친다 부처님 알아주십시오 이런 생각도 안한거예요. 그냥 자기 진심만으로 그렇게 바쳤던거죠. 이게 ‘무위복’이예요. 하고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겁니다. 그런데 그 왕은 정말 엄청난 공덕을 베풀었잖아요? 부처님이 그 가난한 여인에게 등불 하나 바쳤다고 칭찬을 해 주는 것을 보고 가서 ‘부처님, 나는 어찌 됩니까?’ 하고 물었던 거예요. 부처님이 나무라지는 않으시지만 ‘공덕이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고, 많이 바친다고 많은 공덕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조근조근 설명해 주셔요.


불교에서 보시(布施)라고 그러잖아요? 포(布)자를 쓰고 한국식 발음으로 ‘보’라고 하고... 보시는 보시인데 어떤 게 최고의 보시인가 하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해요. 약간 생소하게 들리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꼭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법륜스님이나 무비스님의 강론을 듣고... 왜냐하면 법륜스님이나 무비스님의 글을 읽고 그 강연을 듣는 불자들이 수준이 엄청나게 높은거예요. 제가 보기에... 우리 천주교나 개신교 신자들 보다도 수준이 높아요. 그 어려운 이야기를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봉헌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못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설명하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알아듣고 계셔요. 한자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선 제가 한자의 뜻을 설명해 드릴께요. 무주(無住)라는 말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머무름이 없다는 뜻이예요. 상(相)은, 금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가 저 ‘상’입니다. 서로 상인데 모양 상이라고도 해요. 이 밑에 마음 심(心)자를 붙이면 생각 상(想)자가 되지요. 실제 뜻은 생각 ‘상’입니다. 그러니까 보시를 했을 때, 지가 베풀었을 때, 지가 나누었을 때, 지가 봉헌했을 때, 봉헌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봉헌하면 그건 생각이 있는 보시인거예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아는 거예요. 그런데 봉헌을 하고도 지가 봉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상(想)이 없는, 생각이 없는 보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예요. 여러분 알아 들으셨죠? 여러분이 알아들으실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한자 뜻을 알아들으신 것이 아니라 말뜻을 알아들으신거예요. 제가 보기에요.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이 훌륭하기 때문에 봉헌하고 나서도 너무 겸손해서 ‘아니야 나는 아무 것도 안한거야. 겸손해야지. 나는 아무 것도 안한거다. 이렇게 생각하자.’ 이렇게 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게 아니예요. 이건 불가능해요. 그럼 어떻게 해서 저것이 가능할까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나에 대한 생각 자체가 굉장히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은 남이다. 힘들지만 내가 너한테 해 준다.’ 이렇게 생각하면 암만 노력해서 큰 걸 준다 하더라도 내가 해 주었다는 상(想)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앞에서 기도해 나가면서 어떤 체험을 하는가 하면 ‘꼭 남이 아니구나.’ 이런 체험을 하게 돼요. ‘너와 내가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떨어져 있고 그렇게 분리되어 있지 않구나. 우리가 남이 아니구나.’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교회’라고 해요. 교회는 ‘큰 나’예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는 심지어 태양도 형님이고 달도 누님이예요. 그런데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 자매들은 훨씬더 가까운 자기 몸의 일부처럼 느끼셨을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요? 우리가 다 하느님에게서 나왔잖아요. 그죠? 하느님에 대한 감각이 희박해지면 하느님이 나하고 떨어진 분으로만 느끼면요, 저 멀리서 나를 다스리기만 하고 상을 줄 때는 상을 주고 벌을 줄 때는 벌을 주고 이렇게만 느끼면 나하고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전부 독립된 개체들로만 느끼게 되는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빛을 받는 것도 빛입니다’  라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경험하게 해 주시는 때가 있어요. 내가 아무 것도 안했는데도... 그럴 때 내가 동시에 알아듣는 것은 시편 말씀입니다. “주님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뵈옵습니다.” 이미 내가 그 빛 안에 들어가 있어요. 하느님의 빛의 비추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빛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고 심하게는 하느님께서 나를 하느님이라고 선포해 주고 계시는거예요. 하느님과 내가 그렇게 떨어져 있는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걸 우리 신비가들은 합일(合一)의 체험이라고 그래요. 네 들어 보셨지요? 제가 지금 이단 이야기하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내가 하느님 앞에 현존하는 때에는, 내가 진리를 실천하면서 빛을 받고 있음을 경험하는 그 때에는 하느님과 내가 얼마나 둘이 아니었는지를 알아차리는 자리예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나하고도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둘이 아니구나 하는 새로운 감각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른손이 왼손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때, 그게 남한테 하는거예요? 지가 지한테 하는거예요? 지가 지한테 하는거죠.

 

내가 남한테 좋은 거 해 줄 때, 제일 좋은 거는 용서입니다. 그 담에 좋은 게 나눔이예요. 그 담에 친절하고 베풀고 인내하고 이런 것들이 다 들어 갑니다. 내가 그렇게 했다고, 내가 남한테 좋은 일 해 주었다고, 내가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내가 도움이 되어 주었다고, 내가 뭔가 중요한 일을 했다고 느끼지 못하는 그 자리가 가능한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한테 한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교의에 따라서도 가능한 이야기인거죠. 여러분, 다는 못알아 들으셨어도 어느 정도는 알아 들으셨죠? 그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고 정말로 하기 어려운 용서도 하고, 정말로 주기 어려운 것도 주고... 다 했어요. 그죠? 한거예요? 안한거예요? 안한거예요. 그런 것을 일컬어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다’고 하시고, 쓸모없는 종의 이야기 ‘해야만 하는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이야기하시는거고, 금강경에는 ‘무주상보시’ 라고 표현하는겁니다. 제가 왜 성경이야기만 하면 되지 불경이야기를 끄집어 냈느냐, 어떤 때는 우리가 자극을 받아야 돼요. 불교신자들이 굉장히 수준이 뛰어난 분이 많아요. 제가 아는 어떤 자매님 한 분은 불교의 보살이었어요. 공양주 보살도 했어요. 그러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셨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더라구요. 옛날에 하시던 걸 그대로 하시는거예요. 굉장히 수준높은 신앙생활을 하시는거예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불교신자들이 우리보다 수준이 높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불교신자들이 우리보다 수준이 높을 수 있겠다는 말씀을 굳이 드리는 이유는 좀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경쟁하자는 것이 아니고요. 모든 진실한 가르침은 다 통하잖아요? 그런 불자들은 정말 신앙인들이예요. 쉽지 않은 일을, 쉽지 않은 이야기를 알아듣고요, 쉽지 않은 일을 실천해요. 알아 들은 사람만 실천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는 분들이 많아요, 눈에 잘 안보여서 그렇지.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겁니다.


이 이야기를 못알아 들으면 불가능해요.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느냐고... 그런데 이 이치를 알아듣게 되면, 그래서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현존의 빛을 받고 단순한 기도를 통해서, 그냥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어서 나오는 이런 체험이 익어가고 깊어가면 나와 남에 대한 감각도 점차 달라지게 돼요. 그렇다고 해서 내 고유성이 없어지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와 남의 구분은 있지만 그 구분보다 어떤 때는 더 강하게 우리가 얼마나 하나인가, 이걸 우리 고유어로 ‘내남없다’ 이런 표현을 씁디다. 혹시 들어보셨어요? 나와 남이 따로 없다는 뜻이예요. 금강경의 전문용어로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없다. 아(我)는 나라는 뜻이고 인(人)은 남이라는 뜻이예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이 없다 이런 표현이예요. 여러분 제 말을 알아 들으세요? 대단하세요. 불자들도 알아 듣더라니까요. 잘 배운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런데 알아듣더라구요. 우리도 알아 들어야죠. 못알아 들을 이유가 뭐가 있어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이 없어져요. 그 다음이 중생상(衆生相)이라고 해요. 중생상은 ‘부처님은 깨달았는데 나는 중생이구나’하는 이런 생각입니다. 자기 한계에 대한 의식, 열등하다는 의식이예요. 열등감 같은 거. 그 중생상도 없어지게 되고, 수자상(壽者相)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건 수명이라는 뜻이예요. 내가 한계가 지어진 인생이구나 하는 그 생각도...


 제 식대로 이야기하자면 빛을 받아서 빛이 되어 있는 그 자리에서는 나도 없고, 남도 없고요. 피조물도 없고 하느님도 없어요. 그냥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 하느님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말씀을 듣고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바로 고대 교부들이 이야기하는 신화(神化)의 교의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사람이 되셨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신다는 이 말은계속 반복되어 오는 공식 같은 거 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과 내가 본질이 똑같아진다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그냥 지옥불을 면하고 천당에 들어가는 그 정도가 아니예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알아 들으세요? 천당에 들어간다는 말의 더 깊은 뜻은 나하고 하느님하고 합일의 은총을 받아서 - 많은 성인들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하느님은 본질로 하느님이고 나는 은총으로 하느님이다.” 이것은 교부들과 성인들이 하신 이야기여서 아주 정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성당에 나온 것은 그런 엄청난 것을 바라서가 아니고 그냥 좀 너무 안힘들게 살려고 나왔습니다. 나한테 너무 큰 거 바라지 마세요.’ 그래요. 그런데 큰 거를 바라지 않으면 고통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큰 거 바라야 돼요. 그리고 큰 것도 아니예요. 이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나 사비성의 그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를 보세요, 그게 어떻게 나는 못하고 그 사람들만 가능한 이야기예요? 그렇지 않아요, 큰 거 아니예요. 좋은 말 할 때 설득 당하세요.


불교에는 이것과 비슷한 말인데 회향(廻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 보셨나요? 제가 불교사전을 찾아보니까 “자기가 닦은 공덕을 남한테 돌려서 자타가 공히 열매를 얻기 바란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기가 쌓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이익을 주려 한다.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거다. 얼마나 수준이 높은거예요? 지가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부처님이 하신 거고, 남들이 한거라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것도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예요. 생각 자체가 삶 자체가 달라져야 될 자리가 있어야 되는데 그 삶 자체가 내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고 이런 생각 자체가 달라지는 자리가 어디겠어요? 기도입니다. 기도가 아니면 그 상(想)은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 기도할 때 내 노력하는 만큼 기도체험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서 간절하게 앉아 있는거예요. 그럴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내가 내 머리로는 못알아 듣고 내 노력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 차리게 해 주시고 건너가게 해 주시는 때가 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반드시 와요.


그래서 우리가 몇 달 전부터 마라나타maranatha 기도를 해 왔잖아요. 그죠? 그게 그렇게 만들어 주는 아주 좋은 도구인 거 같아요. 실제로 제 체험입니다. 그 전에 저는 제 방식대로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계속 그렇게 하거든요. 그리고 최근에 안젤모 수사님을 양곤에서 만나기 전에 말레이시아에서도 그 기도로 침묵피정을 참석하고 왔는데요, 저는 거기서 아주 ...한 체험도 하고, 야무진 꿈을 꾸고 갔지만 제가 바라는 만큼의 그런 체험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너무너무 고마워요. 끝나고 나서 피정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데 저는 뭐라고 했는가 하면 “더 감사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어요. 제 진심입니다.


왜 그렇게 좋으냐?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이게 아무 것도 아니고 바보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바보가 되어야 돼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보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바보가 되면 좋아요. 기도에 대한 표현 중에서도 바보라는 표현이 최고의 표현인 거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제대로 하는 기도는 모르는 상태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대로 하는 기도의 상태에서는 생각이 벌어지지 않아요. 저 상(想)이라는 것이 벌어지지 않아요. 그냥 모르는 거예요. 내 지나온 일도 모르고 이런저런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것도 내가 모르고 - 모른다는 말과 까먹는 다는 말이 비슷합니다 - 몰라요. 내가 남에 대해서도 모르고요, 나에 대해서도 몰라요. 그럴 수 있을까요? 왜 그럴 수 있다고 그랬죠?  보통은 알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떤 때 내가 몰라도 된다고 느끼는 때가 있거든요. 언제, 왜 나는 몰라도 돼요? 예를 들어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이 노래 부르실거잖아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런 거 우리가 체험하잖아요. 그런데 왜 몰라도 돼요? 왜 몰라요? 몰라도 되니까요. 정확한 대답입니다. 몰라도 돼요. 하느님이 아시니까요. 하느님은 나를 다 아시는거예요. 그래서 나도 나에 대해서도 인생에서 벌어지는 많은 어려운 일이나 나와 관계된 남에 대해서도 다 알 필요가 없어요. 그게 얼마나 통쾌하고 간단한 일입니까? 알려고 노력해 보세요. 아는 만큼만 알지 절대로 시원하게 알지 못해요. 그런데 하느님의 대답은 뭔가 하면 ‘내가 니 다 알게 해 줄게’ 이게 아니예요. ‘몰라도 돼, 왜 다 알아야 되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이 얼마나 사람을 통쾌하게 만들어 주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해방인 거예요. 그런데 왜 몰라도 돼요? 하느님이 아시잖아요. 그럼 내가 알아야 될 것은 뭔가 하면 하느님이 아신다는 사실만 알면 돼요. 나는 모르는 상태에서 편안하게 있는거예요.


모르는 상태에서 편안하게 있는 것을 일컬어서 '휴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상태에서만 쉬어요. 알 때에는, 생각이 굴러갈 때에는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잠들 때에도 꿈을 꾸잖아요. 꿈은 뭔가를 알려고 하는 상태예요. 어떤 때에는 꿈도 없이 자는 때가 있어요. 그 때 잘 쉬잖아요. 그죠? 네 기도할 때에는 그렇게 잘 쉴 수 있거든요. 모르면 돼요, 그냥, 그런데 자꾸 알고 싶어져요. 그리고 생각이 자꾸 따라 붙고요. 계획이 자꾸 따라 붙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좋은 강론거리가 하필 그 순간에 떠올라서 기록하고 싶은 유혹을 느껴요. 그럴 때에도 그냥 ‘마ma’ 한마디에 내려 놓고, ‘라ra’할 때 내려 놓고 내가 발음하는 그 단어에 귀를 기울여요. 그 한마디와 함께 지금 이 순간에만 있겠습니다. 이런 지향을 지녀요. 그럴 때에 고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뚜렷하게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 정말 몰라도 되는구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쉬고 있어도 되는구나. 내가 알려고 용을 쓸 때 한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었지’ 그런데 그것도 생각이예요. 이런 생각이 들 때에도 그냥 내버려 두는거예요. 그런데 이게 살짝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게 얼마나 강력한 자기 일상생활에 보탬이 되는 도구인지를 체험하게 되고요, 그래서 영적 예배,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의 강한 도구 중의 하나가 됩니다. 옛날 사막 교부들이 하던 ‘되새김’, 렉시오 디비나에서 하는 되새김 아시지요? 그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제 그쳐도 될 것 같습니다. 영광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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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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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시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12.07 저야말로 거의 가지 못하니까 이 한 번이 소중해서... 한 말씀 한 말씀을 뼈에 새기듯 녹취를 풀었습니다.
  • 작성자보석 | 작성시간 19.12.02 잘 읽고 감사 드려요
  • 작성자요안나 | 작성시간 19.12.03 참석할수 없어서, 카페에서 특강 동영상이라도 올려주셨으면 했는데.. 이렇게라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엠이 | 작성시간 19.12.11 정말 감사합니다
  • 작성자바람 | 작성시간 20.01.10 늦게야 읽은 ~
    존경하는 요나 신부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성령의 힘이 감도는 강의 올려주신 시은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넘 행복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 영광!!!

    ''뭘 이런걸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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