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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sader Kings

[CK2]생존신고(42982자)

작성자디아나|작성시간23.10.01|조회수332 목록 댓글 6

사실 9월 24일이 주인공 생일, 9월 25일이 여주인공 생일이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지금 올립니다.

돈 벌고 오겠습니다.

(모바일로 읽어주세요! 문단 띄어쓰기는 돌아와서 다시 제대로 해 놓겠습니다.)


 날이 더워지자 돌림병이 다시 번졌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곳은 보르도와 앙굴렘에 인접한 페리고르였다. 페리고르의 젊은 백작으로 선대 대장군이었던 엔초 경의 유일한 아들인 체사레 드 사르반은 음식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맑은 구토를 반복하며 자리에 누웠다. 겨우 스물셋 젊은 나이이나 성품이 온후하고 학식이 깊어 인망이 높은 청년이라 내심 그를 재상감으로 고려하던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쾌차를 비는 서신을 보냈다. 역병으로 누이동생을 잃은 그가 세상을 떠나면 후계는 말문도 제대로 트이지 않은 어린 아들들에게로 넘어가고 만일 완전히 대가 끊긴다면 그 뒤는 왕가로 반환된다. 나로서는 선대 엔초 경과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왕가에 충성하는 좋은 관리자를 잃고 싶지 않으나 물길을 따라 번지는 돌림병이었기에 모든 경우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푸아티에 성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귀빈들을 맞이하느라 번잡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여기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졌나 봐요.”

 말투까지 파트리샤를 닮아가는 오라드는 어깨를 꾹꾹 주무르는 프레브라나의 손길에 “아야, 아야.” 하면서도 바로 늘어졌다. 프레브라나가 오라드의 까만 머리에 입을 맞추며 덧붙였다.

 “여기 오면 진주처럼 예쁜 아가씨도 볼 수 있지.”
 “그걸 기대하고 오면 실망할 거예요. 왕은 보겠지만요.”

 오라드는 킥킥 웃었다. 나는 내심 수긍했다. 아가씨는커녕 엄마에게 뺨을 맞대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다. 언제 크려는지.

 “네가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 둘게.”

 장자를 맡겨둔 고티에르 부부, 외손자를 보러 오는 닥스 백작 기랑드 경과 그 막내아들로 닥스 백작의 후계자 질베르, 닥스 백작의 장손 베아른 백작 바르톨로뮤, 병약해 그동안 알현을 미뤘던 새 뤼지냥 백작 오브리, 재혼을 알리러 직접 찾아오는 마르생 백작 리신다 부부, 자신의 조카딸 샤를로트를 돌보는 아르투아 백작을 만나러 오는 툴루즈 공작부인 알리노르, 처음으로 영지 바깥에 나서는 부르봉 공작 아샹보까지. 거기에 더해 아르마냑 백작도 지난달 셋째딸이 태어났음을 알리며 중요한 시기에 국왕을 보필하지 못함이 몹시 송구스럽다는 정중한 서신을 보냈다. 닥스 백작과 혈연으로 연결된 이들은 그렇다 쳐도 이만큼 사람들이 몰려든다면 시종장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를 만도 하다.

 “방이 부족하지는 않겠지요?”
 “……모르지.”

 다행히 줄리아나 공주가 머무는 중이니 앙굴렘 백작 자매의 거처와 비교해 더 나은 대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부인, 공작의 숙부이자 대행자, 그리고 공작 본인. 이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이들을 수행하며 올 사람들까지 짐작하면 그야말로 푸아티에 성이 터져나갈 것이다. 수도 보르도 왕성이라면 모를까.

 “아버지가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처음 들어요.”
 “아빠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할아버지 시절에는 어땠나요?”
 “내가 알기로는 이렇게 몰려온 적 없었어.”

 마침 보름 전 병영 시설 개축이 끝났으니 일부 호위병은 그곳에 수용할 수 있다. 가까이서 보필하는 나머지가 문제지. 손님을 맞이하거나 행사를 준비하는 등 성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일은 프레브라나에게 일임했으나 이번에는 솔직하게 사정을 밝히고 수행 인원을 제한해야 하니 내가 직접 해야만 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했다가 모욕당했다며 여기저기서 장갑이 날아드는 꼴은 상상하기도 싫다. 싸워 이길 자신도 없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래 봬도 나름 힘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 이야기냐면, 내가 지금의 오라드 나이였을 때 이야기다. 우리 4남매 중 갓 잡은 멧돼지를 갈라 뼈를 발라낼 줄 아는 건 나 하나였으니까. 비록 지금은 신병들에게 막대기 휘두르는 시범조차 보이기 어려운 지경이라도.

 내가 의기소침하거나 말거나 세상은 구경도 변변히 못 한 봄꽃들이 다 사라지고 여름의 짙은 색채가 재빠르게도 빈자리를 채웠다. 햇살을 담은 하얀 꽃이 포말처럼 번지는 그 아래로 수레와 마차가 바삐 굴렀다. 그중에는 앙주를 거쳐 노르망디로 향하는 행렬이 따로 있었는데, 일부는 노르망디를 거쳐 플랑드르로 향해 아르투아 백작의 이복누이 샤를로트가 이모 툴루즈 공작부인 알리노르를 만나게끔 푸아티에로 데려오려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이들은 노르망디 공작 시빌에게 늘 통행로를 빌려주는 감사와 함께 첫 딸이 무사히 돌을 맞은 것을 축하하는 사절이었다.

 노르망디의 내력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선대 노르망디 공 조슬린은 두 형의 요절로 노르망디와 랭커스터를 둘 다 상속받은 대공이었는데, 형들과 마찬가지로 23세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큰누이는 노르망디를 상속받고 작은누이는 랭커스터를 상속받았다. 게다가 남매의 어머니인 선대 노르망디 대공비는 요크 공작과 재혼해 지금의 요크 공 란셀린을 낳았으니 한 세대의 남매가 잉글랜드의 요충지를 각각 나눠 가진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노르망디 공 시빌과 선대의 남매 사이는 좋지 않았는지, 선대 노르망디 공 조슬린은 큰누이를 처음에는 스물둘이나 위인 워릭 백작의 후처로 보내더니 3년도 안 돼 사별로 혼인이 끝나자 다음에는 서른셋이나 위인 햄프셔 공작의 후처로 보내 2년 만에 과부로 만들었다. 왕실의 종친인 시빌은 아우가 죽고 나서야 마음 맞는 나이 비슷한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첫 결혼에서 얻은 장자 워릭 백작은 얼마 전 노포크의 여공작과 약혼했다고 하니 대가 바뀌면 노르망디는 다시 대공을 맞을 것이다. 같은 노르망디 가문인 잉글랜드의 소년 왕이 오라드의 재종 남매가 된다는 점을 제치더라도 노르망디는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어째서 노르망디 가문을 고르지 않으셨어요?”

 잉글랜드. 그리고 교황령 이남 이탈리아. 오트빌 가문의 한 살 어린 소년과 약혼하게 되었음을 알렸을 때 오라드는 그렇게 물었다. 신랑의 미추나 장점을 궁금해하기에 앞서. 육로로는 노르망디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플랑드르를 고려하면 노르망디 가문보다 더 좋은 혼처는 없었다. 물론 지금은 모든 것이 예전과 다르다.

 “나이가 맞아야지.”

 노르망디 공 기욤이 잉글랜드를 정복해 윌리엄 1세로 왕관을 쓴 뒤 노르망디 가문은 순식간에 가세를 불렸다. 왕비 마틸드가 네 아들과 다섯 딸, 총 아홉 자식을 남편에게 안겨주었으므로.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모두 요절해 평민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가 공위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는 오래 산 노인들의 빛바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노르망디 가문도 지난 역병으로 절반이 넘는 수가 죽어 살아남은 남자는 젖먹이 혹은 젖니를 갈아야 할 아이나 긴 세월 같이 산 아내를 잃은 이들 뿐이다. 후자는 있을 수 없다. 만일 내가 죽은 후에라도 내 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승을 지키는 천사들을 모두 박차고 뛰쳐나와 혼사를 추진한 작자들을 강바닥 깊숙이 처박아 물고기 밥으로 만들 것이다.

 ……제발 오래 살아라. 신랑도 얻고. 아이들 자라는 모습도 보고. 자식까지 먼저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저절로 내 손은 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정무 중이었기에 내 손목에는 차갑고 두꺼운 금속이 먼저 닿아 지그시 살을 눌렀다. 성가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삐죽삐죽한 고리를 집어 딸의 머리에서 치웠다.

 “아버지?”

 왕관을 뺏긴 오라드가 눈을 둥글게 뜨며 물었다. 나는 딸에게 답했다.

 “오늘은 이만 쉬어.”

 어쨌든, 알현을 미루겠다는 답신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정 오려거든 수행 규모를 줄이라는 다소 고압적인 내 말에도 반발 없이.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푸아티에와 가장 가까운 뤼지냥의 주인 뤼지냥 백작 오브리였다. 병치레가 잦다는 건 사실인지 왜소한 그는 흡사 잘못을 저지르고 야단맞으러 온 작은 소년처럼 소심하게 움츠렸다.

 “국왕 폐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목소리마저 작았다.

 “나의 친척, 정말 보고 싶었답니다.”

 내 딸은 그에게 살며시 다가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새 뤼지냥 백작은 오라드의 손에 입을 맞췄다. 익숙하면서도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경이 새 영주가 된 후부터 한 계절도 경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요. 푸아티에와 뤼지냥은 한 줄기이니 나는 언제든 경을 가족으로서 맞이할 겁니다. 왕가는 친척이 적으니 앞으로 종종 찾아오세요.”

 오라드는 생긋 웃으며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regína præclárus(레기나 프레클라루스. 고명한 여왕이시여).” 그의 짧은 찬사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오라드에게 수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내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군주의 총명함을 감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선대 뤼지냥 백작 위그 경도 함께.

 “선친에게 경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나는 오라드 대신 오브리를 일으켜 안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에 오라드는 새로 인사 온 봉신을 안아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기에. 나이 60을 넘기고도 몸집이 큰 편이었던 선대와 비교할 때 오브리는 소녀처럼 가냘파 보였다. 그리고 이 자리가 무척 긴장되는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존안을 뵈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폐하.”

 평민이든 귀족이든 대개 나를 보는 이들은 질문이 많다. 그러나 숫기 없는 젊은 영주는 마치 우리 부녀와 길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을 아꼈다. 어리고 상냥한 오라드가 불만을 샀을 리 없으니 내가 문제인가. 나는 최근 내가 봉신들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는지 돌이켜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맞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직접 와서 창백하게 표정을 굳히기 전에 다짜고짜 항의 서한이 들이닥치지 않았을까.

 이상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어졌다. 닥스 백작과 함께 온 마르생 백작 리신다는 입성하며 우연히 나를 먼저 마주쳤는데, 그이는 마치 성자라도 알현하는 것처럼 내게 무릎을 꿇고 옷자락과 손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글썽였다.

 “존귀하신 분, 부디 용서하십시오.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바로 앞에 선 닥스 백작보다도 멀리서 빤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오라드를 더 의식하며 그이를 일으켰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소.”

 하루에도 수천수만 마디를 읽고 말하는 내 머리는 그 짧은 답만 돌려주고 굳어버렸다. 반갑게 “기랑드 경!”을 외치며 펄럭이는 치마를 말아쥐고 오는 오라드의 목소리와 “할머니!”를 부르는 아드마르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듣지 못할 만큼.

 마르생 백작 부부의 알현은 마찬가지로 결혼을 알리러 온 아르투아 백작 부부의 알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겨우 서른 남짓한 아르투아 백작과 달리 이미 마흔을 앞둔 데다 조금 전까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던 마르생 백작이 죽은 두 아들을 대신할 새 후계자를 얻으리라 낙관하는 이는 없어 보였으므로. 남편인 줄리앙은 현 귀네즈 백작 보두앵의 형인데 그도 역병으로 처자를 잃었으니 상처가 깊은 이들끼리 만난 재혼이었다. “국왕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상투적인 인사를 받은 오라드는 마르생 백작의 손을 겹쳐 잡아 일으키고 꼭 껴안았다.

 “경에게 복되고 평온한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강건한 모습으로 나를 만나러 와주어 무척 고맙고 기쁩니다. 마르생과 보르도는 가까우니 이후로도 자주 찾아오세요. 언제든 경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이제는 내 딸이 나보다 더 말을 잘한다. 마르생 백작은 움푹 팬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오라드 말고도 이 자리에 모인 앙굴렘 백작 자매와 아드마르, 이제 열셋이 되는 베아른 백작 바르톨로뮤를 둘러보았다. 마르생 백작의 죽은 아들들은 이들의 또래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오라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몇 달째 같이 지내는 동무들이 모두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작고 해끔한 얼굴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어른처럼 피로해 보이기도 했다.

 “화내는 거 아니에요. 저도 저보다는 아버지가 더 좋아요.”

 내 딸은 옷을 입은 채로 드러누웠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녀에게 잠들 준비를 돕도록 눈짓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건네지 못한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버지뿐일 거예요.’라 할 것이 확연하기에.

 다음날 오라드는 언제 침울했나 싶을 만큼 얼굴이 환했다. 국왕의 하얀 손을 꼭 잡고 옆에서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다갈색 머리 동무는 어떤 감미로운 묘약보다도 탁월했다. 주군이니 봉신이니 그런 거창한 말 따위 저리 밀어두고, 친구에게만큼은 자신이 최고라는 당연한 사실을 어린 국왕은 의심하지 않았다.

 여자아이 셋과 남자아이 하나였던 무리에 남자아이 둘이 더 들어왔다. 여덟 살 숙부와 열세 살 조카였다. 나이 어린 외삼촌과 사촌 형을 만난 아드마르는 발에 날개라도 달린 양 경쾌하게 뛰며 즐거워했다. 다만 3년 뒤 성년이 될 베아른 백작 바르톨로뮤는 이성을 의식할 나이라 그런지 오라드나 시빌이 손을 내밀면 때로 머뭇거리며 주춤하곤 했다. 그 뒤로 나이 비슷한 아이들이 길게 따라다녀 성에서 일하는 이들은 멀리서도 국왕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몇몇 이들은 국왕을 굳이 주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라면 국왕이 있는 자리에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소. 국왕이 어질고 총명하니 굳이 내게만 알릴 필요는 없소.”

 뤼지냥 백작과 마르생 백작은 내 말이 석연찮은지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가스코뉴의 영주들이 들이닥치기 전부터 가스코뉴의 현재 작황이나 푸아티에 바로 옆의 뤼지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미 보고받은 터였으니 그들과의 대화가 새롭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이들이 나를 찾은 시간이다.

 “……아직 연소하시지 않습니까.”

 뤼지냥의 젊은 백작이 중얼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보았다. 이들이 온 후 정무를 보는 시간에 오라드의 자리는 비어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그 옆에 내가 있었을 뿐.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마르생 백작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폐하께서 국사를 관장하시니 아뢰었을 뿐, 국왕 폐하를 업신여기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부디 양해하십시오. 다음에는 꼭 분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첫날부터 계속 저자세인 마르생 백작도 어딘가 마음에 걸리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이 돌아간 뒤 아르투아 백작을 불렀다. 아르투아 백작의 신랑 외스타슈와 마르생 백작의 신랑 줄리앙은 당숙질간이니, 마르생 백작이 이 성에 도착한 이래 가장 가깝게 어울리는 귀족은 아르투아 백작이었다. 그러나 그이의 대답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폐하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차라리 연두색 멧돼지가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걸 봤다는 게 더 믿을만하다.

 “내가 뭘 어쨌기에?”
 “지극히 높으신 분을 경외함에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듣기 좋은 소리를 바라고 물은 게 아니지 않나.”

 다른 왕족이라면 몰라도 내게는 절대로 통하지 않는 말이다. 지위만으로 사람들의 순종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내가 아는 과거가 통째로 뒤바뀌었을 것이다. 내가 바로 받아치자 아르투아 백작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다른 답을 내놓았다.

 “제가 소임을 게을리한 사이에 보이신 단호한 대처가 조금 와전된 것 같습니다. 햇살이 따갑다고 해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없겠으나 지붕 밑에 몸을 숨기던 자들은 지레 겁먹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여기 관원들도 저들의 부패한 동료가 우르르 탑에 갇혔을 때 내가 보르도를 떠나기 전 목을 매단 죄인들부터 입에 담았으니. 탑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도르래 소리는 끔찍한 상상을 부풀리기에 충분했을 터. 거기에 내 딸의 재위 기간은 이미 처남의 재위 기간을 넘은 데다 나는 언제 어느 때라도 선왕의 배위이자 현왕의 생부이니, 설령 내가 사지를 끊어내도 그들은 감히 내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폐하의 명성을 해할 만한 소문은 아니다 싶어 말씀드리지 않았으나 만일 편치 않으시다면 다른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소문을 소문으로 덮는다. 아르투아 백작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애의 미덕은 오라드가 지니고 있으니 그걸로 되었네. 괜히 얕보여서 하나뿐인 자식 곁에 쥐새끼를 오게 할 수는 없지.”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뒤 소문을 개의치 않을 다른 손님들도 도착했다. 앙주의 고티에르와 부인 마르타, 그리고 아드마르의 세 동생들이었다. 올해 두 살이 되는 막내딸 게르베르가는 아빠 품에 꼭 안긴 채로 도착해 할머니 닥스 백작에게 넘겨졌다.

 “할머니.”

 두 팔을 벌리며 찰싹 안기는 통통하고 뽀얀 아기에게 닥스 백작은 뺨을 비비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

 함께 맞이하러 나온 아드마르는 엄마를, 베아른 백작 바르톨로뮤는 고모를, 질베르는 누나를 부르며 제각기 마르타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손이 빈 고티에르는 일곱 살인 큰딸 카트린과 다섯 살인 차남 아샹보의 손을 각각 잡고 다가왔다. 그러나 아빠가 제대로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오라드에게 손을 뻗었다.

 “예뻐요.”
 “응. 예뻐. 예뻐요.”

 작년에 만났을 때처럼 고티에르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안 돼.” 칭찬인데 왜 안 되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동그란 눈만 데록데록 굴리다가 다시 손을 뻗었다. 오라드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낮췄다. 아이들의 말랑한 손은 오라드의 새하얀 얼굴에 닿았다. 여전히 나이에 어울리는 화사한 혈기보다는 창백함이 더 느껴지는 얼굴에.

 “고마워. 너희들이 나보다 더 예뻐.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맛있는 거 해줄게.”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 나라 군주의 인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말을 하며 오라드는 아이들의 뺨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똑똑한 토끼도 있고 귀여운 망아지도 있어. 보러 갈까?”

 설마 공작의 가족들이 토끼와 망아지가 신기하겠냐마는 아이들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게 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드가 반지를 끼지 않은 검지와 중지를 붙여 내밀며 이끌자 아이들은 동그란 주먹으로 꾸욱 잡고 나란히 따라갔다. 졸지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 아빠에게는 훌쩍 자란 큰아들이 쪼르르 와서 낮게 팔짱을 끼고 씩씩하게 걸었다.

 국왕의 ‘맛있는 것’과 ‘토끼와 망아지’ 약속은 바로 지켜졌다. 오라드가 온 뒤로 아이들을 접대하는 데에 이력이 찬 시종들은 이미 손님들의 시선을 홀릴 맛난 간식들을 잔뜩 마련해두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똑똑한 토끼는 당연히 피니였지만 망아지는 정말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된 새끼였는데, 오라드는 그 새하얀 망아지를 아드마르에게 선물했다. 망아지가 아직 어리니 훈련을 시작한 뒤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직접 받은 아이보다도 함께 온 어른들이 더 반기는 선물이었다.

 “이 망아지를 마음껏 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언제든지 보르도로 놀러 와. 기다리고 있을게.”

 오라드는, 그리고 아드마르는 그 말을 얼마나 사람들이 바라는지 알고 있을까. 내가 고향에 살던 시절 국왕인 외당숙에게 한 번이라도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면 아키텐의 부마 자리를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아드마르는 그렇게 국왕의 시동에서 국왕의 빈객으로 돌아갔다. 앙주 사람들의 이번 방문 목적은 왕가가 아니라 닥스 백작이었으므로 우리 가족은 아드마르를 돌려준 뒤 물러서려 했다. 그때 마르타 부인이 한 말이 오라드의 발길을 잡아챘다.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이가 조심스레 묻자 나는 아마 아닐 거라는 뜻으로 오라드 대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오라드는 내 고갯짓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이에게 물었다.

 “미안합니다, 부인.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네, 폐하. 저는 폐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모습도 처음 걸음을 연습하시던 모습도 다 보았답니다. 선왕께서 혼인하시던 때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어머니 닥스 백작과 닮은 얼굴로 인자하게 미소를 짓는 마르타 부인을 멍하니 보던 오라드는 흘끗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맞아. 엄마와 오래 같이 지냈던 분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아이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은 옛 영화롭던 시절의 추억이었다. 오라드는 마르타 부인에게로 성큼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와 가까우셨다면 내게도 숙모나 다름없습니다. 부인과 함께한 소중한 추억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난 부인을 내내 그리워하며 계절마다 앙주로 마차를 보냈을 겁니다.”

 엄마라는 말만으로도 눈물이 나는지 오라드의 눈에 맑은 눈물이 글썽글썽 차올랐다. 아이의 눈물방울은 어른의 경계를 녹이고 겨우 잠잠해진 내 가슴을 다시 부숴놓았다. 나는 메이는 목을 감추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흐릿해진 시야에서 마르타 부인은 자신의 손을 잡은 채로 눈물을 참으려 몸을 떠는 오라드를 다른 손으로 감싸 품에 안고 다독였다. “늘 폐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어머님과 할머님을 무척 닮으셨어요.” 흐느낌에 섞인 말소리는 갈라져 피를 흘리는 심장을 적셨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닥스 백작이 슬며시 내 팔을 잡고 눈을 마주친 뒤 사위에게 고갯짓으로 신호했다. 고티에르는 재빨리 알아듣고 저 누나가 왜 우는지 어리둥절한 자신의 아이들을 슬쩍 이끌어 자리를 옮겼다. 오라드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바르톨로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어린 삼촌 질베르의 손을 잡았다. 그 곁에서 내가 같이 걸었다. 아드마르는 멀어져가는 아빠와 오라드를 달래는 엄마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다가 내 손짓을 보고 후다닥 따라왔다.

 점점 길어지는 낮이 끝난 뒤 나는 밤중에 혼자서 줄리아나의 방을 찾았다. 호출이었다. 오라드를 비롯한 아이들이 먼저 돌아갔으므로 줄리아나와 내가 식사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을 누구도 의아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새 손님을 맞이하느라 한층 더 풍성해진 만찬은 평소 모이기 어렵던 귀족들에게 좋은 대화 분위기를 제공했다. 이제 공개된 자리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미안해요. 오라드 때문에 오시라고 했어요.”

 국왕이 마르타 부인을 보고 크게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리더라는 이야기가 이미 여기저기 퍼진 모양이었다. 자리에 없던 줄리아나가 이렇게 바로 알 만큼. 줄리아나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오라드가 언니를 많이 그리워하나요?”

 내가 늘 엄마 이야기를 해줬다면 이렇게 아이가 바로 울지는 않았겠지. 나도 마찬가지로 말을 골랐다.

 “내게는 말을 잘 안 해.”
 “아빠를 최고로 여기는 딸이던데요.”
 “그래서 더 그런 것 같아.”
 “말해주실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역시 파트리샤의 동생이구나. 파악이 빠르고 집요한 점이 닮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자세를 고쳤다. 언니를 닮은 검은 머리도 오빠를 닮은 푸른 눈도 지금은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라드는 엄마를 잃은 날 나까지 잃을 뻔했어. 자기 눈앞에서.”

 같은 집에 있었으면서도 한 달을 넘게 만나지 못한 채 떠나간 엄마. 손수 깎아 보낸 마지막 생일선물을 끝으로 볼 수 없게 된 삼촌. 갑자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빠. 울면서 헤어진 뒤 임종조차 너무 늦게 안 할머니. 딸의 초롱초롱한 눈이 삽시간에 공포로 질리는 걸 내가 몰랐을 리가. 나는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우리 부녀와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그 뒤로 파티는 내 꿈에도 나오지 않아.”

 바꿔준 목숨, 서로의 눈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겨울밤과 가족 눈사람, 현실보다 더 생생히 기억하는 마지막 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줄리아나는 이미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도 목이 메어 잠시 멈추며 손을 뻗어 처제의 눈물을 닦았다. 울음을 참느라 꼴사납게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티가 투아르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님은 이미 위독하셨대. 자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죽어가는 부모를 두고 달아날 수 있는 자식이 몇이나 있겠어.”

 성에 전염병이 퍼지면 국왕은 병자와 멀리 떨어져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떠난다. 다음 왕위 계승자도 만일을 대비해 국왕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동생이 못다 한 진압을 마치고 돌아올 신왕을 기다리던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왕대비의 방을 가로막았다. 아마 그 순간 파트리샤는 자기 생명을, 나와 오라드가 기다리는 미래를 포기했을 것이다. 평생 사랑을 베풀어 준 어머니의 마지막 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꿈도 왕좌도 버리고. 그리고 어머니마저 떠나간 집에서 쓸쓸히 6일을 더 지내다 그리운 가족들 곁으로 떠나갔다. 오직 나와 오라드를 살리겠다는 의지 하나로 살이 거무죽죽하게 썩어들어가는 고열과 신의 자비조차 제칠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을 버텨내면서.

 “……그건 아닐 거예요.”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들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들으면서도 잠자코 있던 줄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형부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거예요.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을 거예요. 마지막까지요. 남은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워할 걸 알면서 쉽게 죽음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에요. 어머니 곁에 있는 대신 딸을 포기한다거나 어머니를 버리고 딸이랑 함께 산다거나 그렇게 모진 마음 먹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저 힘이 다해서 돌아오지 못한 거예요. …형부보다는 제가 더 언니랑 오래 지냈잖아요.”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만일 내 곁에 앉은 이가 동생이 아니었다면, 저 문 바깥에 아무도 없었다면 목에서 피가 터지도록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미쳐서 머리를 쥐어뜯고 언어를 잃은 채 야수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내 몸은 벼락을 맞은 나무처럼 끔찍하게 파들파들 떨었다. 바깥에서 자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여름밤이건만 나는 한기를 느끼며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왼팔의 팔꿈치 조금 위를 움켜잡았다.

 다음 말을, 다음 말을 해야 한다. 이제 알려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사실 저는 어머니와 언니가 떠났다는 걸 알았어요.”

 줄리아나는 내 왼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꿈을 꿨거든요. 우리가 같이 앉던 식탁이 텅 비어 있었어요. 그리고 알바라신의 주인이 바뀐 지 오래 지났는데도 보르도에서 저를 데리러 오겠다는 소식이 없어서 짐작했어요.”

 스물넷의 젊은 영주와 열아홉 공주의 혼인은 사계절을 두 번도 맞지 못하고 끝이 났다. 전국 어디나 사흘이면 도착할 거리가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었다. 기근이 들지도 않았는데 노상에는 거두지 못한 시신이 널려 구더기가 끓고 야생의 짐승이 달려들어 배를 채웠다. 도시에서는 살아남은 자를 세는 게 죽은 자를 세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많이 무서웠을 텐데.”

 선왕의 승하를 감추려, 어린 신왕을 보호하려 굳게 닫은 성문. 청상과부가 된 막내 공주의 생사를 확인하고 왕성으로 모시려 목숨을 걸 사람은 없었다. 나는 겨우 다음 이야기를 이었다.

 “…나와 오라드는 여름이 되어서야 탑을 나왔어.”

 어려서도 못 받던 과보호를 받느라 내가 먹을 음식이 한입 크기로 죄다 잘려있었다고 말할 때 줄리아나는 피식 웃었다. 침대의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모든 가구와 물건이 싹 불살라진 파트리샤의 방 대신 우리가 종종 같이 쓰던 내 방을 대신 보존하고 새 방을 구했다고 말할 때는 내 손을 꼬옥 잡았다. 폐위된 사촌오빠가 행려병자들과 같이 불에 타고 신왕을 보호하려 국왕 승하 공표를 막았던 선대 앙주 공이 울며 떠나가 처자를 따라 죽음을 맞은 부분에서는 나와 같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라드를 위해 자문회를 다시 열자마자 첫 재상이 된 선대 뤼지냥 백작과 고문인 닥스 백작이 내게 재혼부터 권했다고 할 때는 오빠를 닮은 푸른 눈을 깜빡이며 넌지시 말했다.

 “아이가 엄마 없이 자란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나 때문이야.”

 나는 누구에게도, 프레브라나에게도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내 곁에서 살아남은 단 하나뿐인 가족. 아이가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면 그제야 나는 하루를 무사히 마쳤음에 안심하며 잠이 들었다. 아이가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나와 멀어질 날이 오기까지 늘 이러고 싶었다. 그 이후 내게 나 모르는 곳에서 무슨 말을 붙였는지 떠올려보면 위험천만한 바람이었다. 내가 재혼하지 않았더라면 악랄한 오명은 천진난만한 내 딸을 향했을 것이다. 줄리아나는 내가 우연히 자문회 구성원의 대화를 들은 부분에서 정색하다가 물었다.

 “그게 왜 형부 탓인데요. 형부 대신 언니가 살아남고 오라드가 남자였다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줄리아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 더 물었다.

 “리비야는 알아요?”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툭 하고 더 얹어졌다.

 “나는 말 안 했어. 그런데…, 아는 거 같아.”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건 언제나 당사자가 가장 뚜렷하게 느끼는 법이다. 나를 위해 고향을 등진 새신부에게 나는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주지 않았다. 멜게일에서 야히드를 보내기 전에는 하루하루 야위어가는 딸을 보고 절망에 잠겨서, 혼인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증서를 써 줄 테니 떠나도 좋다고 했다가 그 서글서글한 다갈색 눈에서 아예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기도 했다. 싫어요, 그러지 말아요, 포기하면 안 돼요, 아이 아직 살아있잖아요. 아키텐의 말을 처음 배우던 시절처럼 더듬더듬 토막말을 하며 울던 프레브라나는 나를 덥석 부둥켜안고는 “당신이 좋아요. 가기 싫어요.”라 되풀이하며 눈물 젖은 얼굴을 비볐다.

 “잘못했네요.”
 “……잘못했지. 그때는 그게 나은 줄 알았어.”
 “매일 안아주고 열 짚어주고 곁에 꼭 붙어서 재워주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면 애는 얼마나 상심하겠어요.”

 기운 없이 열에 달뜬 녹색 눈동자 옆에 겁먹은 다갈색 눈동자가 나란히 붙었다. 행여 내가 억지로 보내기라도 할까 두려웠는지 프레브라나는 그림자처럼 오라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내 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기에 나는 밀려드는 정무에 치이면서도 틈만 나면 오라드를 보러 다녀갔는데, 짧은 만남 중 태반은 나란히 베개를 베고 똑같은 표정으로 잠든 두 얼굴을 보고 돌아 나왔다. 아주 가끔 그이가 스스로 나를 찾아올 때도 있었으나 그때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려주고 지시를 듣자마자 바로 나가기 일쑤였다. 마치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에만 맞추려는 듯이. 내가 거슬리지 않도록.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배우자의 온정에 의지할 뿐 온전히 믿을 사람 하나 없는 타국에서 버티는 게 어떤 건지 잘 알면서.

 “지금은 잘 지내. 우리 둘 다 괜찮아.”

 이기적인 나는 오라드가 차도를 보인 뒤에야 그 착한 여자의 가족이 되어줄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직접 상대를 위한 선물을 고르고 둘만 지낼 시간을 냈다. 돌려보내질 거라는 불안에 떨지 않도록 결혼기념일을 챙기고 꽃향기 은은한 방에서 너무나 늦은 초야를 보냈다. 그때 프레브라나는 떨리는 눈과 어설프게 더듬거리는 입술로 입을 맞추면서도 내게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짧은 한마디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기뻐할 거였으면서.

 “다른 건 몰라도 잘 지낸다거나 괜찮다는 소리는 동의 못 하겠어요. 아무리 오빠라도 이렇게 살았다간 당장 양위한다고 성을 뒤집어놨을걸요.”
 “아키텐에서 나보다 더 신세 늘어진 사람이 있으려고.”
 “잘도 그러겠네요. 아키텐에서 가장 바쁘다고 알려진 사람이.”

 줄리아나는 참 딱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받아쳤다. 언니를 닮은 그리운 말투가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나는 씁쓸한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할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새 아내와 정답게 지내는 하루도 총명한 딸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내게 묻지 않았는데 자식 없이 두 번이나 과부가 된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연히 내 혀는 가정의 소소한 이야기는 빼놓은 채 선대 뤼지냥 백작과의 마지막 만남이나 오베르뉴 이단 봉기 진압, 그 외 자질구레하기까지 한 여러 이야기를 마저 늘어놓았다. 대부분 듣는 사람의 표정을 굳히고 때로는 한숨도 쉬게 하는 이야기였다. 단지 혼인으로 맺어진 동군연합을 제안하러 온 나바라의 사절들을 물리치느라 왕가의 보물을 만찬연에 일반 식기처럼 선보이고 오라드의 할머니가 대공비로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도 오라드가 매일 차고 다니게 했던 부분만은 다행스럽게도 줄리아나를 웃게 했다.

 “재무장관에서 안 잘린 게 다행이네요. 오빠였어도 형부를 해고했을 거예요.”
 “오라드도 정확히 그렇게 말했어. 자기 아빠만 아니었어도 당장 해임했을 거라고.”
 “피는 못 속이네요. 언니는 어땠을까요?”
 “아마 녹봉을 확 깎아버리고 더 열심히 굴렸겠지? 대신할 사람을 찾을 때까지.”
 “그게 더 너무한데요? 언니는 왕실 재산 규모를 남이 아는 걸 싫어하니까 사실상 종신 감봉이잖아요.”

 내 가족이 웃을 수 있다면 광대가 되어도 좋다. 나와 내 딸의 지난 이야기는 결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았기에. 기나긴 회상을 좀 더 잇고 나자 바깥에서 발소리가 여럿 울렸다. 불침번을 설 위병들이 교대하는 소리였다. 나는 창으로 새어드는 하얀 달빛을 흘끗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문은 닫지 않았으나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리비야에게 가시게요?”

 아무 특별한 것도 없는 말 한마디가 내 심장을 쇠사슬로 묶어 묵직한 추를 매달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내던져버렸다.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돌아갈 곳은 이제 이 사람의 언니 곁이 아니다. 세상의 법은 더는 이 사람을 내 누이라 부르지 않는다. 첫 결혼반지도 6년 전부터 목걸이 메달이 되어버렸다. 체온으로 내 잠자리를 데우고 잠이 들 때까지 아이 자라는 이야기를 속삭이는 검은 머리 여자는 다갈색 눈동자다.

 “말솜씨가 없는 편이라서. 지루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잘 자고 내일 보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방을 나섰다. 도망쳤다. 그러나 어설픈 허세는 오래 가지 못하고 겨우 몇 발짝 더 걷자마자 다리가 풀려 크게 휘청였다. 엉겁결에 내 손은 어쩐 일인지 문밖에 나와 있던 낡은 서랍장의 모서리를 짚었다. 그 순간 머리까지 찌릿하게 통증이 느껴지더니 바로 손날이 홧홧해졌다. 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따르던 이가 황급히 몸을 낮추며 나를 부축했다. 보르도 왕성의 서쪽 탑에서부터 내 곁을 지키던 이였다.

 “취기가 올라와 발을 헛디뎠을 뿐이네. 나는 괜찮네.”

 빈말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얼핏 본 그의 눈은 밤의 복도를 비추는 작은 불빛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촉촉하게 젖어 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잔뜩 소리를 죽이며 코를 훌쩍였다. 소매로 거칠게 슥슥 눈가를 문지르는 소리도 훌쩍임에 겹쳤다. 쓸데없는 구설수를 피하려 열어둔 문이 그만 밖에서 지키던 사람들의 해묵은 상처를 헤집은 모양이다. 내 발걸음은 성벽을 쌓는 벽돌처럼 무거워졌다.

 “……미안하네.”

 같이 살아남은 이들의 눈물을 모른 척하기에는 나약한 가슴이 버티지 못했다. 긴 위로는 붙이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침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따사로운 불빛 앞에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눈을 보면 왜 울었는지 물을 텐데.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들어가자마자 바로 불부터 꺼야 하나.
 다짜고짜 불부터 끄는 건 아예 의심해달라고 외치는 꼴이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용기를 내 문을 열었다. 안 하던 짓을 하지 말자. 괜히 더 불안해할 테니. 마음을 굳히고 절반쯤 문을 열자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내린 프레브라나가 졸음이 가득한 눈을 끔뻑이며 서 있었다.

 “왜 바로 안 들어오셨어요?”

 반달 같은 다갈색 눈에 바로 웃음이 번졌다. 프레브라나는 두 팔을 뻗어 나를 덥석 껴안고 목덜미에 머리를 기댔다. 잠들기 직전까지 참고 기다렸는지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갗이 따끈따끈했다. 나는 늘 그렇듯 손을 들어 그이를 마주 쓸어안았다. 그러나 내가 무어라 입을 열어 대꾸하기도 전에 프레브라나는 흠칫하며 나를 놓고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때서야 나는 “윽.” 하며 짧게 신음했다.

 “왜 이래요? 리키, 누가 이랬어요? 무슨 일이에요?”

 내가 짚었던 프레브라나의 어깨에 새빨간 피가 선연히 뱄다. 축축해서 알아챘을까. 프레브라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깥을 향해 당장 깨끗한 물과 수건을 가져오고 야히드를 불러오라며 다급히 부탁했다. 조금 전 온화하게 웃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애처로이 흔들렸다. 나는 내 손목을 꼭 잡은 그이의 손을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감쌌다.

 “이러다가 아이들이 깨겠소. 대단한 상처도 아니고 나는 괜찮소. 여기까지 오면서 아픈 줄도 몰랐고.”
 “안 믿어요. 안 들을래요. 안 믿어요.”

 프레브라나는 피를 흘리는 나보다 더 창백히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마찬가지로 새하얗게 질린 젊은 시종이 허겁지겁 대야와 수건을 받쳐 들고 들어와 내 손바닥을 불그죽죽하게 물들인 피를 씻어냈다. 물기가 스민 상처는 새 피를 울컥 뱉어내며 깨끗하던 수건을 적셨다. 국왕인 오라드 곁을 지켜야 할 시종장도 자다 깬 부스스한 머리로 야히드보다 앞서 와 내 상처를 살폈다. 의외로 피가 쉽게 멎지 않았다. 야히드는 수건 하나를 더 붉게 물들여 치운 뒤에 허겁지겁 도착해 손가락에 힘을 주고 상처를 벌리며 내게 물었다.

 “폐하, 뭐에 다치셨습니까?”

 아르마냑 백작이 보낸 도수 높은 증류주가 상처 위로 졸졸 흐르면서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모르겠네. 조금 전까지는 멀쩡했어. 저 친구들과 같이 왔으니 저리 물어보게.”

 쉬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어쩔 줄 모르던 위병들은 지목을 받자 내가 복도에 나와 있던 낡은 서랍장에 손을 부딪쳤다고, 나조차도 그 말을 듣기 전까지 깡그리 잊어버렸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시종장이 낯빛을 흐리며 그 서랍장이 낡아 칠이 벗겨지고 갈라졌으므로 줄리아나 공주가 다치기 전에 우선 내놓고 내일 내게 수리 여부를 물으려 했음을 알렸다. 야히드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다치게 한 부분이 목재인지 금속인지 살펴보고 돌아와 끔찍한 선고를 내렸다.

 “상처가 계속 벌어지지 않으려면 꿰매셔야 합니다. 이후 보름간 손을 움직이지 않으셔야 살이 붙습니다.”

 시종장이 말리려는 듯 말했다.

 “오른손이시오.”
 “그래도 하셔야 합니다. 상처가 깊어 이대로 두면 고름이 찹니다.”

 야히드는 시종장을 올려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나는 내 살갗 밑의 붉은, 아직 피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단면을 남의 것인 양 멍하니 보았다. “리키. 그렇게 해요.” 프레브라나가 불러서야 정신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바늘을 달궈 오게.”
 “잠시만요. 제가 준비할게요. 한 번도 안 쓴 새것들이 있어요.”

 프레브라나가 바늘을 가져오러 일어섰다. 그제야 나는 아무리 지근을 지키는 사람들이라지만 다른 남자들이 아내의 잠옷 차림을 대하고 있음이 껄끄러워져 두리번거리며 걸칠 것을 찾았다. 내 표정을 바로 읽었는지 시종장이 뒤따라 일어서 넓적한 어깨걸이를 찾아 새하얀 얼굴로 돌아오는 프레브라나에게 둘렀다. “걸치십시오.” 프레브라나는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야히드에게 바늘 뭉치를 넘겼다. 야히드는 그 가운데 세 번째로 작은 바늘을 골라 끝을 불에 달구며 말했다.

 “물고 계실 것이 필요합니다. 수건도 좋고 나무토막도 좋습니다.”

 그때 나는 취기에서든 무지에서든 오기를 부렸음이 틀림없다.

 “괜찮네. 그냥 하게.”

 야히드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찢어진 상처와 나, 프레브라나를 번갈아 보더니 그새 배어 나온 피를 다시 닦고 식힌 바늘에 실을 꿰었다. 프레브라나는 내 왼손을 꼭 잡고 “저를 봐요. 곧 끝날 거예요.”라며 속삭였다. 이어 쇠바늘이 살을 뚫고 바늘이 낸 길을 따라 얇은 실이 미끄러지듯 슥슥 파고들어 지나가는 꺼림칙한 감각이 다섯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저절로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살을 지그재그로 꿰뚫은 실이 한 번 더 살짝 잡아당겨졌다. 바느질을 당하는 옷감의 기분을 실감하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경험이 단단한 매듭을 끝으로 짧게 끝났다. 습기가 차지 않도록 느슨히 동여맨 붕대도 같이.

 “잘 참으셨습니다. 되도록 손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정무를 보시기 전에 부목을 준비해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야히드는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무척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는 그의 피로를 고려해 가까이에 방을 따로 내줄까 싶었으나, 그러자니 아침에 그가 오가며 들일 수고가 두 배로 늘어날 테니 “수고했네.”라는 말로 보냈다. 시종장도 내 옷을 갈아입히고 방을 나갔다.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줄자 삽시간에 피곤이 몰려왔다.

 “공주님하고 무슨 이야기 했어요?”

 조금만 더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우리 이야기.”

 프레브라나가 반달 같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웃음기가 가득했다.

 “매일 보는데 새삼스레 설명할 일이 따로 있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

 프레브라나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나는 습관대로 내가 누웠던 자리에 누우려다가 “아, 안 돼요. 반대로 가세요. 손을 잡아야 해요.”라며 프레브라나가 제지해 자리를 바꿨다. 프레브라나는 내 위로 이불을 덮은 뒤 곁으로 들어와 늘 그랬듯 손을 잡았다. 따끈하던 온기는 그새 식었다.

 “촌닭이었다고 흉본 건 아니라고 믿을게요.”

 그 말에 갑자기 장난치고 싶어졌다.

 “손목만 잡아도 깜짝 놀라며 수줍어하던 이야기를 해줄 걸 그랬지?”
 “안 돼요. 그것도 하지 말아요.”

 왼손을 잡은 작은 손에 꾹 하고 힘이 실리다가 풀렸다.

 “좀 더 좋은 이야기 있잖아요. 함께 바다에 갔을 때나, 우리 셋이 몰래 시장 구경 갔을 때요. 오라드 몰래 토끼 털가죽으로 장갑 만들어드렸던 것도 있고요.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데요.”

 프레브라나는 새침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이의 뺨을 쓰다듬으려다 앗 하고 잇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차가운 눈을 만지던 손을 갑자기 난롯불 가까이에 쬐었을 때처럼 얼얼한 통증이 손바닥 전체로 퍼졌다.

 “얌전히 있으랬잖아요.”

 프레브라나는 몸을 일으켜 내 손목을 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많이 놀랐었는지 필요하다면 침대에 묶어놓기라도 할 기세였다. 문득 조금 전 좋지 않은 경험을 시켰던 게 떠올라 나는 정말 뒤늦은 후회를 말했다.

 “……경황이 없어서 나가 있으라는 말을 못 했소. 보기 끔찍했을 텐데.”
 “그것보다 더 심한 상처도 봤는걸요. 그리고 여자가 왜 피를 겁내겠어요. 금지옥엽으로 살아 고기 손질할 일 없어도 한 달에 며칠은 꾸준히 보는데.”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씩씩한 대답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프레브라나는 “우스우세요?”라 물으며 두 손으로 내 뺨을 살짝 누르다가 놓았다.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개선할 수 없는 불평이었다.

 그다음 나는 꿈조차 꾸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을 감았다 뜨니 방에 하얀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처남 생전에 보르도의 방비를 맡을 때부터 쌓인 습관이 이런 지경에서도 늦잠 한 숨 못 자도록 제시간에 나를 깨웠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프레브라나는 내가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며 정무를 쉬라고 권했다. 아니, 부탁했다. 야히드도 내게 붕대를 다시 감고 부목을 받쳐 천을 목에 둘러매 팔을 고정하면서 조심스럽게 프레브라나의 역성을 들었다. 그 달콤한 부탁을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앙주 손님들이 온 지 겨우 하루밖에 안 지났고, 둘째로 아직 재상을 임명하지 않아 내가 멈추면 아키텐의 모든 정무 결재가 미뤄지고, 셋째로 내가 나가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열세 살 내 딸이 혼자 자리를 지키게 된다. 착한 내 딸이 나를 존중해 회답을 미뤄 결정을 부재중인 내게 넘긴다면 몇몇은 국왕의 영민함을 의심하거나 우유부단하다고 속단할 것이다. 손 하나가 아니라 두 다리가 아예 떨어져 나간대도 그런 사태를 초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오라드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이렇게 물었다.

 “이모랑 싸우셨어요?”

 문득 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처제와 내가 결투를 벌이는 모습을 상상하고 풋 웃고 말았다. 물론 열 살 때부터 가족으로 같이 지냈던, 그것도 발까지 불편한 막내 처제와 진심으로 싸울 일이 있을 리는 없다.

 “이모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니야. 아빠가 혼자 실수해서 넘어져 긁혔어.”
 “그러면 어제 번을 선 사람이 누구예요?”

 이러다 운 없는 사람들이 나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월급이라도 깎일 판이다. 내가 얼버무려도 이 아이는 간단히 어젯밤 성 전체의 근무 명단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딸의 작은 어깨에 멀쩡한 왼손을 얹고 시선을 맞췄다.

 “아빠 사람들이니까 아빠가 알아서 할게. 응? 네가 화내지 마. 오히려 어제 아빠 때문에 많이 놀라고 불안했을 거야.”

 내 딸은 실수를 책망할 만큼 엄격한 성격이 아니다. 다친 사람이 내가 아니라 자기였다면 반대로 내가 국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인을 잡아내고 내 딸이 나를 말렸을 것이다. “알겠어요.” 오라드는 내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 착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떠난 후 간밤에 얼마나 놀았는지 있어야 할 사람 몇이 자리에 없었다. 허약한 뤼지냥 백작은 아침 참관을 하는 날이 적었으니 그렇다 치고 고티에르까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닥스 백작에게 사위의 부재를 물으려다가 혹여 추궁으로 느낄까 싶어 그만두고 각 부서 행정관의 보고부터 들으려 했다. 그때 이마가 새빨간 아드마르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뛰어 들어왔다.

 “아드마르?”

 나와 오라드는 거의 동시에 그 아이를 불렀다. 아드마르는 “살려주세요!”라 외치며 할머니 닥스 백작을 제치고 내 뒤로 숨었다. 이어 고티에르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장남을 쫓아 들어오다가 우리 부녀를 보고 멈칫했다.

 “폐하, 송구합니다.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잘못을 시인하는 고티에르를 보며 나는 오라드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내 딸은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반가워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오라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티에르에게 물었다. 고티에르가 대답하기 전 아드마르가 외쳤다.

 “아버지가 저를 막 때리고 이를 다 뽑아버리려고 해요!”

 그 말에 나를 포함해 모든 경위를 파악한 이들 몇이 풋하고 웃음을 흘렸다. 대부분 자녀를 키우거나 어린 손주가 있는 이들이었는데, 기록의 보조를 맡은 젊은 서기관은 아직 미장가임에도 짚이는 바가 있는지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입술을 앙다물며 웃음을 참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고티에르는 평소답지 않은 말투로 어버버하며 변명을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아이 이가 자랄 때가 되었다 싶어 아침에 만져보니 둘이나 흔들거려서, 그래서 덧니로 자라기 전에 젖니를 뽑으려 했을 뿐입니다. 처음 건 성공했는데 그다음에는 옆의 멀쩡한 걸 잘못 뽑아서…….”
 “그리고 때린 데를 또 때렸잖아요.”

 아드마르의 볼멘 대꾸에 오라드가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나도 어떤 모습이었을지 그려져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아드마르는 숨을 사람을 잘못 골랐다. 대개 이를 뽑을 때는 뽑히는 사람이 너무 아파하지 않도록 주의를 흩트리려 이마를 치는데, 오라드의 이가 흔들렸던 때에는 다들 아무리 작은 여자아이라도 국왕의 이마를 치기 두려워해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면 아빠보다 나를 더 무서워할 텐데.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가자, 아빠한테 오렴.”

 내 옷을 움켜쥔 작은 손의 힘이 느슨해졌다. 오라드는 내 쪽을 한번 흘끗 보더니 하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다려요. 둘 다 그냥 있어요. 경은 모르겠지만 그동안 자주 그랬거든요.”

 제지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고티에르는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습관대로 오른손을 움직여 자리를 권하려다가 다친 부위가 살이 당기면서 열기가 오르듯이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잠자코 있던 베아른 백작 바르톨로뮤가 “고모부, 제 옆으로 오세요.”라며 의젓하게 고티에르 부자를 이끌었다. 조금 전까지 졸린 눈을 하고 있던 아이였다.

 비바람과 강풍으로 공사에 투입될 목재 일부가 썩었으니 왕가의 숲에서 추가 벌목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방수포의 관리 소홀을 따져 책임자를 징계해야 한다는 의견과 현장의 사기를 저해할 수 있으니 이번에는 넘어가자는 의견이 대치했다. 나는 일부러 가만히 있었는데, 오라드가 공사에 차질이 없도록 우선 벌목을 허가하고 조사관을 보내 상세한 사정을 알아보자고 빠르게 일단락을 지었다. 이어 수도 보르도를 비롯한 국왕 직할령의 역병 확산세, 새 수로 공사 진행 상황, 그리고 이동을 허가한 유대인 난민 중 일부가 영업 허가증을 요청한 일 등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그중 예전처럼 고기잡이를 계속하려거나 이베리아 북동부와 교역을 트려는 상인은 항구 지역의 정착 허가를 원했기에, 마침 가스코뉴 지역의 닥스 백작과 마르생 백작이 여기 있으니 두 영주를 접견할 자리를 따로 만들기로 했다. 병으로 사직한 관원들을 대신해 승진할 후보들의 이력을 적은 명단도 제출되었다. 역시 몇은 직접 만나봐야 할 사람이었다.

 “제가 대신 쓸게요. 아버지 서명을 적으면 되죠?”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오라드가 작은 손으로 펜을 쥐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이름을 쓰렴. 내가 널 대신했던 거니까.”

 그때 나는 사실 반쯤 졸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자. 식사 따위는 안 받아도 좋다. 설령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공작새 구이를 준비했대도 필요 없다. 자고 싶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소신을 밝힐 수 있게 돕는 것보다는 졸음에 절은 혀로 헛소리를 하며 고개를 처박지 않도록 하는 것에 더 힘을 기울였다. 팔에 감은 부목은 막대기가 아니라 돌을 깎아 붙인 양 점점 더 무거워졌다.

 “아버지, 잠깐만요.”

 멀쩡한 척 그만하고 드디어 자러 가려는데 오라드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냐고 물을 틈도 없이 내 작은 아이는 내 이마와 목에 차례로 손을 턱 얹었다.

 “편찮으신 거 아니죠? 심하게 열이 나거나 피부가 뻣뻣해지면서 경련과 마비가 온다거나 하는 거요. 상처가 부풀지는 않으셨어요? 가려운 것도요.”

 자식의 지식이 점점 느는 건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비록 쓰러지기 직전이라도.

 “아니야. 너도 가서 자.”
 “네?”

 나는 딸에게 설명을 피하고 곁의 시종장에게 오늘 이 뒤에 있을 라틴어 수업과 역사 수업을 다른 날로 미루게 했다. 아이 안색이 좋지 않다는 내 말에 시종장은 즉시 그렇게 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실로 돌아가 부목을 풀고 간밤에 내가 누웠던 자리에 널브러지듯 누워 눈을 감았다. 프레브라나는 없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태양은 두 뼘이나 서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젊은 시종이 내게 물을 따라주면서 그사이 아르투아 백작의 누이 샤를로트가 도착했음을, 그리고 내 딸이 나를 다치게 한 서랍장을 밖으로 끄집어내 직접 망치를 내려치고 위병들을 시켜 도끼로 산산조각 내 장작으로 쓰게 했음을 알렸다. 잠이 덜 깬 나는 솔직한 의문을 입에 담았다.

 “대체 누가 그 작은 여자아이 손에 망치를 쥐게 했나?”
 “에, 에릭 경입니다.”

 시종은 내 말이 질책으로 들렸는지 삽시간에 낯이 하얗게 질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에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그 친구가 왜?”
 “국왕께서 도끼를 휘두르려고 하셔서….”
 “……손도끼를?”
 “아닙니다. 수문병이 쓰는 긴 도끼입니다.”
 “…그래서 에릭 경이 그걸 휘두르려던 내 딸을 막았다는 뜻인가? 도끼 대신 망치를 줘서?”
 “그렇습니다, 폐하.”

 대체 나머지는 무엇을 했기에 아이가 흉기를 들도록 내버려 뒀단 말인가? 비록 쉽지는 않았으나 나는 오라드가 가냘픈 팔로 도끼를 움켜쥐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러나 짧은 상상 속에서조차 내가 기겁하며 딸의 손목을 잡아채 그 끔찍한 무기를 뺏어 들었다. 도끼든 망치든 횃불이든 안 된다. 아무리 도끼가 군권을 상징한다지만 그건 예장용일 뿐이다. 제 부모를 해친 흉물을 박살 낸다며 흉기를 든 국왕을 가로막는 부담감이야 이해하지만, 그래도 열세 살 소녀 아닌가.

 “그 자리에 용감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군. 알려줘서 고맙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부목을 감고 방을 나섰다. 문득 간밤에 시종장이 그 서랍장의 수리 여부를 물으려 했던 점이 떠올랐으나 바로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유서 깊은 가구였더라도 이제는 장작이 되었으니 생각해봤자 시간 낭비다. 적어도 나는 그 서랍장의 내력을 들은 적이 없다.

 도끼를 든 내 딸을 말려준 용감한 이의 얼굴은 해가 붉게 물들어갈 무렵에 보게 되었다.

 “지시하셨던 라 로셀 항 인근의 토지와 건물의 모든 매입을 마쳤습니다. 다만 매매금을 치렀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이들이 몇 있기에 새로 조치하실 때까지 잠시 머물게 했습니다. 어린 자식을 키우는 과부나 거동이 불편한 병자가 대부분입니다. 이방인도 몇 있었습니다.”

 에릭은 남은 이들을 추린 명단을 내밀며 고개를 한 번 더 숙였다. 이미 대장군의 대우를 받는 마르탱이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는 명단을 집어 들었다. 내 곁에서 차분하게 보고를 듣던 오라드는 석연찮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다른 집을 살 만한 돈을 줬는데 갈 곳이 없다니?”

 에릭은 적갈색 콧수염이 두툼한 입을 뻐끔거리며 오라드를 보던 시선을 살짝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고정된 손 대신 왼손을 들어 그를 멈추게 하고 대신 대답했다.

 “거기 사는 사람이 진짜 집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야. 예를 들어 에릭 경이 이 성을 사려고 값을 치른다면, 우리 가족은 그 돈으로 새 성을 얻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새 주인이 받아주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지? 상속 문제가 얽혀서 전 주인의 가족이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기도 하고. 단순히 세를 놓았을 수도 있겠지.”

 내 딸은 또래 아이들보다 조숙하고 영리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곱게 자란 공주님이다. 아빠 설명을 들으며 깜빡깜빡하는 초록빛 눈동자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뺨을 쓰다듬을 뻔했으나 우리 부녀를 지그시 주시하는 여러 눈동자가 내 손길을 멈춰 세웠다. 공무 중이다.

 “나를 대신해 살피고 오느라 노고가 컸네. 바닷가에 지은 건물은 내륙보다 부식과 뒤틀림이 심하니 그에 관해서도 듣고 싶군. 얼마나 살릴 수 있을 것 같은가?”

 푸아티에에 도착한 지난가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줄곧 폐허가 된 거주지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번은 정비가 아니라 새로 가도를 놓고 여러 시설을 세워 상주인구의 증가를 꾀하는 확장 공사다. 안타깝게도 푸아티에에는 공사를 지휘해 전담할 만큼 경험을 쌓은 관료가 죽고 없어 내가 기획과 감리를 모두 맡는 형태가 되었다. 이방인이라도 언어가 통하고 경륜이 있다면 기꺼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나, 이미 출세해 지위를 쌓은 자가 제 고향을 등지기란 참 드문 법이다.

 “2년 전에 보강했다는 곡창과 어판장만이 쓸만합니다. 갑작스러운 상속을 감당하지 못해 내놓은 건물은 대부분 제값보다 보수비가 더 나갈 만큼 황폐합니다. 가도의 확장을 고려해도 아예 철거함이 더 나은 누옥이 여럿입니다.”
 “자네가 말하는 곳에 사람은 몇이나 살고 있는가?”
 “고기잡이하는 이들이 두 채를 잠시 쉬어가는 막집으로 쓰고 있습니다.”

 나는 가도와 거주 구역, 주요 건물의 위치만을 단순히 표시한 그 지도 위로 내가 아는 여러 시가지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중에서도 강을 끼고 초승달 모양으로 도로와 건물이 펼쳐진 보르도가 가장 먼저였다. 그곳도 왕성의 보수를 마치는 대로 성곽과 거리를 정비해야 한다. 그 찰나 갑자기, 내 삶에서 가장 혹독했던 스물여섯의 겨울날에 왕성의 서쪽 탑 창으로 내려다보던 참상이 내 앞의 사람들을 지우며 선명히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으면 새로 만들기가 더 수월하겠지.”

 눈구름으로 뒤덮인 하얀 하늘을 뚫고 곳곳에서 치솟던 검은 연기. 수레 가득 실려 천조차 제대로 덮지 못한 새까만 시체. 불에 타는 것처럼 고열이 끓으면서 산 채로 살이 썩는 고통이라고 했다. 나는 내 가족들이 마지막 가는 길도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

 제 엄마와 무척이나 닮은, 그렇지만 그녀가 내게는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잡아챘다. “어, 왜?”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한 뒤에야 나는 오라드를 비롯해 참석한 이 모두 걱정을 가득 실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오라드는 고개를 홱 돌렸다.

 “오늘은 그만하죠. 부지는 확보했으니 주요 시설의 구체적인 규모와 위치는 마르탱 경이 수석 건축가와 의논해 다른 날 올리도록 하고요. 경들은 이만 돌아들 가세요.”

 ‘자, 잠깐!’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나는 국왕으로서 하는 이 아이 말을 막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 때문에 국무가 중지되었다는 이 상황이 흡사 머리 꼭대기에 찬물을 냅다 끼얹은 것만 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다른 이들은 쩔쩔매며 시선을 점점 아래로 떨구더니 “물러가겠습니다.” 하며 마르탱을 시작으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때 내 딸의 온화하던 눈초리가 절반이나 위로 치켜 올라갔음을 알아챘다.

 아, 그렇지.

 “에릭 경은 나가지 말고 기다리게. 전할 말이 있으니.”

 이미 한 발을 바깥에 걸치고 있던 에릭은 내 말에 즉시 돌아왔다. 다른 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나는 늦은 인사를 전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 딸이 크게 다칠 뻔했다고 들었네. 이 아이의 아비로서 자네에게 감사하네.”

 에릭은 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약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분명 ‘위험하지 않았다.’라며 반박하고 싶어 할 오라드는 이제 몸에 밴 자제심으로 잠자코 있었다. 나는 다음 말을 꺼냈다.

 “말도 설고 물도 설은 곳에서 수고가 많네. 지낼 만은 한가?”

 그러자 다소 굳어 있던 에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를 위한 표정임은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두 분 폐하께서 받아주지 않으셨으면 여전히 산골짜기를 쏘다니다 도적들 칼에 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던바에 비하면 여기는 매일 천국을 거니는 듯합니다.”

 임관해서 작년까지 긴 시간을 외무와 내사 담당관으로만 보낸 사람이 돌연 갑옷을 입고 칼을 부딪치게 되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갓 스물이 된 청년도 알 것이나, 그에게는 주군의 노골적인 처우를 항의해 줄 가문은커녕 남들 같은 가족도 없었다. 나는 그가 살인이나 간음, 방화 등의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전 주군에게 왜 밉보였는지 묻지 않을 작정이다. 그만큼 요란한 잘못을 했다면 내 얼굴을 보기도 전에 아르투아 백작 선에서 망명을 거부했을 테고, 그럴 일이 아니라면 굳이 내가 그걸 그의 흠으로 기억해 둘 필요가 없다.

 “유능하고 선량한 이가 무고하게 고초를 겪어서야 안 될 일이지. 나도 고향 사람을 봐서 반갑네. 지금처럼 성심을 다한다면 국왕의 난롯가에는 늘 자네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걸세.”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운을 띄운 후 나는 조금 전 중지된 화제를 다시 이었다. 상인은 장사가 편하도록, 농민은 운반이 편하도록 넓은 통행로와 광장을 원하고 군인은 방비가 편하도록 좁은 면적을 원하니 머릿속으로 전체 조감도를 백 번은 그렸다가 지워 보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나 물이었다. 병영이나 제강소 등 여럿을 수용하는 시설에서도 평범하게 밭일하며 실을 잣는 민가에서도 매일 엄청난 물이 쓰인다. 기존 수로가 실어 나르는 수량을 낮추지 않으면서 더 넓은 면적으로 물을 퍼트릴 공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주 조금, 내가 이미 떠나온 지 십수 년이 지난 고향의 여러 사례를 묻곤 할 때마다 스코틀랜드 왕족과 귀족들의 이야기가 나오며 옆길로 새곤 했으나 대화 주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 올 때까지 변함없었다.

 “저 사람이 마음에 드세요?”

 평범한 질문이라도 내가 자식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움찔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내 딸은 눈에 띄게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미안.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이제 안 그럴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안 하는 게 나아요. 괜히 기분만 더 상하니까.”

 이럴 때는 내 아이라서 다행이다. 제 삼촌만 되었어도 국왕을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하고서 말 한마디로 무마되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오라드는 내 대답이 필요 없는지 조금 낮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다른 데 보내면 안 되겠어요. 저렇게 아는 것이 많으니 이미 여기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예요. 아버지 연세보다 더 많은데 가족이 없다는 건 정말인지 다시 확인해보셨어요? 만약 두고 온 가족이 있는데 우리가 놓친 거라면 위험할 수 있어요.”

 가족은, 특히 어린 아이는 그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아이가 인질이 되면 어른 대부분은 무력해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알려줬었다. 그러나 임관한 지 겨우 반년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국왕을 거스른다는 용기를 내며 자신을 보호했던 이에 관해 내리는 판단이라는 것이 인적 드문 길에서 야수의 눈빛을 느낄 때처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오라드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있겠니. 그렇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넌 어떻게 하길 바라니?”
 “간단해요. 아키텐 여자랑 결혼하라고 하세요. 중혼이 아니라면, 그리고 아키텐에서 계속 살 작정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겠죠. 저 사람은 아버지를 가깝게 여기는 것 같으니 수상하지 않다면 배제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요직을 주고 싶으시다면 그게 제 유일한 조건이에요.”

 나는 바로 끄덕이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말하는 이의 어린 외양과 그 대답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러나 나를 꼭 빼닮은 얼굴과 제 엄마를 닮은 검은 머리에 초록빛 눈동자가 내 정신을 돌려놓았다. 내가 아키텐 공주와 결혼해서 얻은 내 아이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 아이의 외숙모도 프르셰미슬 왕가의 귀공녀였고 이모는 크레타의 대공비였다. 나바라와 잉글랜드로 시집간 대고모들까지 갈 거 없이 새엄마도 루테니아 사람이니, 현지인과 가정을 꾸리면 정착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관점은 오라드의 세상에서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이다.

 “그래.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가장 먼저 뭐부터 짓는 게 좋을까?”

 나는 지도에서 거주 구역과 이웃한 공터를 가리켰다. 아마 계속 이 화제를 이어간다면 오라드는 ‘만일 거부한다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일 테니 없애야 한다.’라며 말할 테고, 아무리 그래도 어린 딸의 입에서 살인 지시를 듣는 건 내키지 않았다.

 “학교와 병원이요. 일하는 사람들도 편히 다닐 수 있게 밤에도 운영했으면 좋겠어요. 학교는 상주 인원을, 병원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수용하도록 좀 더 부지를 넓혀서요. 전에 마르탱 경이 성문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자에게 보초를 맡긴다고 했는데 이번 일에도 반영하면 여러 상이자를 도울 수 있을 거예요.”

 소신 있게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낭랑한 목소리가 조금 전의 싸늘함을 슬며시 걷어냈다. 나와 단둘이 탑에 있었을 때도 악랄한 소문으로 이성을 잃은 내게 손 하나 댈 수 없어 우리 부부 사이에 치여 처벌받을 위병들을 헤아려 나를 말렸던 아이다. 남의 처지를 파악하고 배려할 줄 아는 고운 마음씨를 천성으로 지녔으니 조금 전은 내가 너무 속단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서워해야 할 여자는 하나 더 남아있었다.

 “다망하신 분이라 이제야 얼굴 뵙네요. 잘 지내는 게 아니라는 제 말 이제 좀 믿음이 가요?”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내내 나를 기다렸다며 줄리아나가 눈을 흘겼다. 일반 알현을 신청할 때처럼 번호를 받아야 하는 줄 알았다면서. 나와 줄리아나 사이에서 식사하던 오라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히잉.” 하는 어린 목소리로 이모에게 작은 머리를 폭 기댔다.

 “아버지가 저를 괴롭혀요. 쉬지도 못하게요. 배고프고 지치고 서럽고 힘들고 이모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울고 싶었어요.”

 큰언니의 하나뿐인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며 약한 소리를 하자 이모가 한 마디 더 얹었다.

 “외동딸이 굶는데 뭐가 그렇게 바빠요?”

 째려볼 기세였다. 평소 같으면 내 역성을 들어줄 프레브라나도 ‘어쩌다가 그러셨어요?’라고 묻는 것 같은 눈을 하며 잠자코 있었다. 완전히 죄인이다. 내 가족들인데도 여기에는 내 편이 하나 없었다.

 “다음에는 안 그럴게. 정말로.”

 오늘 하루 이 말을 몇 번 하는지 모르겠다.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 대부분이 하얗게 센 노부인이 하프를 켰다. 그 곁에서 노부인과 눈매가 닮은 갈색 머리 소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연가를 불렀다. 시찰을 나갈 때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유행가였는데, 가사 중 “물결치는 갈색 머리”는 “부드러운 검은 머리”로, “달콤한 입술”이나 “불룩한 가슴” 같은 노골적인 가사는 “우윳빛 피부”와 “다정한 심성” 등으로 달라졌다. 나는 앞을 보는 척하며 주위의 어린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많으니 개사는 당연하겠지만 왜 굳이 갈색 머리를 검은 머리로 바꿨을까?

 소년은 흔들림 없이 상냥한 눈길로 중앙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아. 익숙한 기시감에 나는 그 ‘아름다운 소녀’를 흘끗 보았다. 오라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나 긴 치마를 말아쥐고 나아가 소년의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어전에서 재주를 선보일 기회를 얻어 왕족에게 칭찬을 받으면 장래를 위한 좋은 발판이니 십 년 전에도 젊은 국왕의 손을 이끌어 같이 놀던 예인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때도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라거나 장밋빛 뺨을 말하는 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궁정 생활이 긴 편이지만 여군주를 모셨던 적은 없다. 그래서 내 반추는 전적으로 내 과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처남 시절에도 다른 귀족들이나 예인들이 어린 왕비에게 찬사를 바치곤 했고, 공주와 왕대비의 기품과 우아함을 칭송하기도 했다. 공주에 한해서는 거기까지였다. 발이 불편한 막내 공주를 배려하기도 했고, 내가 곁을 지키는데 내 아내에게 추파를 던지는 무모한 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아마 파트리샤는 결혼으로 엮어두지 않았으면 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겠지만.

 “샤를로트 양은 방을 따로 줬어요.”

 프레브라나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내게 소곤소곤 속삭였다. “언니랑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아르신드 경이 신혼이니까요.” 그이는 눈짓으로 아르투아 백작 옆의 어린 소녀를 가리켰다. 나도 프레브라나의 시선을 따라서 보았는데,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커다란 지네괴물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내가 저 아이를 겁먹게 할 만한 짓이라도 했나?’

 저절로 내 눈은 그 옆의 아르투아 백작을 향했다. 목을 축이다가 내 시선을 알아챈 아르투아 백작은 움츠린 동생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동생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나는 그 자매를 두고 앙주 가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리 배치가 기묘했다.

 “아드마르는 왜 떨어져 있지?”

 몇 달 만에 돌려받은 큰아들이 부모와 가장 멀리 앉아 뤼지냥 백작 오브리 옆에 붙어 있었다. 가운데에는 고티에르 부부의 큰딸 카트린이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자리했고, 부부 사이에는 다섯 살 꼬마 아샹보가 통통한 작은 손을 까딱거리고 있다. 닥스 백작과 어린 베아른 백작 사이에는 늦둥이 질베르가 있어 아드마르의 위치는 사촌 형과 뤼지냥 백작 사이였다. 어린아이들은 손힘을 조절하기 어려우니 당연히 부모 곁에 앉혀야 하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멀었다.

 “어른들이 잘못했어요. 엄마는 손목 힘이 없어서 이마만 때리고 이를 뽑지 못했고 아빠는 아침 일 때문에 안 미더우니까 결국 할머니가 뽑았거든요.”

 프레브라나가 내게 다시 속삭이면서 작게 킥 웃었다. 나는 멀쩡한 왼손을 뻗어 그이의 따끈한 작은 손을 살짝 주물렀다.

 “오늘도 수고했소. 무척 피로할 텐데.”

 나 혼자였다면 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말에 프레브라나는 머리를 기울이며 바로 답했다.

 “우리도 아이 키우는 부모잖아요.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을요. 어른이 되면 분명 아키텐 최고의 미인이 될 거예요.”

 그때 혀가 실수했다.

 “……저 아이가 그렇게 예쁜가…?”
 “네?”

 방글방글하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듣도 보도 못한, 마치 소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냐는 진지한 주장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다. 깜짝 놀란 얼굴이 꼭 개구리를 닮았다. 프레브라나는 내 이마와 목에 손을 턱 짚으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 멀쩡한 왼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리키, 제가 당신을 정말 존경하고 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세상 사람 중에 제가 가장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 아시죠?”

 이럴 때는 주의해야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너 지금 헛소리하고 있어.’라 말하고 싶을 때의 완곡한 밑밥이다.

 “구슬보다 더 예쁜 딸에게 왜 그러세요?”

 친부인 나보다 훨씬 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기억도 희미한 어머니에게 추궁을 당했다면 이런 기분일까.

 “…내게는 그저 귀엽게만 보여서. 아직 작잖소.”
 “맞아요. 그렇지만 곧 열넷인걸요. 저는 저 나이에 벌써 아기 엄마가 된 경우도 봤어요.”

 그건 또 어떤 정신 나간 작자야?

 “아기 아비는 몇 살이나 먹었기에?”
 “같은 나이였어요.”
 “…….”

 할 말이 없어졌다. 상대도 안 해주겠지만 그 나이 즈음에는 연상을 좋아하지 않느냐는, 내 경험과 일반론에 비춘 견해가 슬그머니 고개를 디밀다가 목구멍에서 가라앉았다. 내가 대꾸를 못 하자 프레브라나의 눈에 다시 웃음기가 감돌았다.

 “제가 예쁘다고 하셔서 안심했는데, 사실 눈이 엄청 높으신가 봐요? 그러고 보니 누구 가리켜서 예쁘다고 하시는 걸 본 적이 없네요. 처음 보르도에 올 때는 신부 외모 안 따지는 분이시려나 했는데.”
 “나는 복이 많아서 언제나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신붓감을 얻었소. 거기 남자들이 다 보는 눈이 없는 거지.”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은 그이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때는 역병이 극심해 아들 다섯이 있다 한들 한 아들도 살아남기 어려워, 아들이건 데릴사위를 들일 수 있는 딸이건 남의 가문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아키텐 국왕의 계모 자리는 기실 푸아티에 왕가와는 관련이 없다. 신랑은 영주도 아닌데다 작위 상속권도 멀고 고향을 등져 친가와 연계가 옅어 사돈에게 얻을 이득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이의 보호자였던 유리예프 남작이 사이 돈독한 친누이 대신 이복누이를 적당히 치워버렸음을 알고 있다.

 “고마워요. 그래도 오라드에게는 절대로 듣기 안 좋은 말씀은 하시면 안 돼요. 예민한 때잖아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무지무지 속상할 거예요.”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오라드가 중앙으로 마르생 백작을 씩씩하게 이끌었다. 마르생 백작은 쑥스럽고 당혹스러운지 나를 보았다가 닥스 백작을 보았다가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라드는 이어 아르투아 백작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소년 가수는 웃음을 가득 띤 얼굴로 다른 곡을 불렀다. 아름다운 신부에게 보내는 행복한 청혼가였다.

 아, 그렇군. 사회생활의 일환이었나.

 며칠이 지나자 내 오른손은 물결무늬가 눈에 두드러질 만큼 주름이 허옇게 일었다. 야히드가 매번 찾아와 살피며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젖은 수건으로 손을 닦아줘도 종종 메마르고 가려웠다. 게다가 아예 오른팔을 쓰지 못하니 괜히 한동안 하지 않았던 힘 쓰는 일들이 하고 싶어졌다. 손목이 약해진 뒤로 형편없는 실력을 들킬까 싶어 제쳐두었던 활쏘기를 하고 싶어졌고, 처남처럼 조각칼을 들고 아무거나 만들거나 교외로 나가 말을 실컷 달리게 해주고도 싶어졌다. 시쳇말로 좀이 쑤셨다.

 “글쎄, 안 되십니다. 이 자리에서 저를 파직하신대도 그리 모실 수는 없습니다.”

 파직하지 못할 걸 알고서 직위를 거는 것도 충심 어린 간언인가? 재판 참석을 겸해 말에 올라 시찰을 나가겠다는 나를 만류하는 마르탱의 얼굴은 전혀 비장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대들은 이것보다 더 심한 상처를 입고도 무기를 쥐지 않소.”
 “그때는 싸우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전시니까 그렇지, 장병들도 살갗이 찢기면 나을 때까지 쉽니다. 폐하께서도 그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그대도 내 옆에서 마차를 같이 타든가.”
 “자꾸 그러시면 국왕 폐하께 고하겠습니다.”

 오랜 사이는 이런 점이 불편하다. 나를 너무 잘 안다. 초임 장관이던 스무 살 조무래기 시절을 기억하는 귀한 사람은 이제 손에 꼽을 만큼 남았으니. 나는 더 우기지 못하고 순순히 마르탱의 부축과 호위를 받았다. 나라 최고의 장군이 내 마차에 딱 붙어 말을 몰며 지켜주는 모습은 나쁘지 않으나, 나는 대외적으로 모습을 보일 때 항상 말 위에 올랐기에 꼭 내가 지금 몸이 불편하다고 널리 알리는 꼴이었다. 겨우 손 하나를 다쳤을 뿐인데.

 “보르도에서 새 갑주를 거의 다 만들었으니 한 번 더 검토해 주십사 전갈을 보냈습니다.”

 새 대장군 취임이 늦어지는 이유다. 전례를 따라 대장군에게 갑주와 보검을 수여하려 하는데, 그 주석 배합과 제조 과정 기록이 반란과 역병을 거치며 소실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선대 대장군의 갑주마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아키텐 왕국의 첫 대장군 페리고르 백작 엔초 경은 이탈리아의 평민 출신으로 선대 영주가 참수되고 가산을 몰수당했던 자신의 영지와는 인연이 깊지 않았다. 그 탓인지 지금의 백작 체사레가 어린 나이로 선친의 작위를 계승한 후 혼란 중에 여러 재산을 도난당했고, 포상금까지 내걸고 찾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다음 대장군이 된 시몬 경은 제대로 된 취임식을 열지 못하고 역병으로 숨을 거뒀다. 첫 제작 때 감독했던 자는 물론이고 참여했던 장인들 거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지출에 관해 최종 승인을 한 당시의 재무장관도 내가 아니라 파트리샤의 전임인 선선대 베아른 백작이니 겨우 20년 만에 당시를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아 재현이 아닌 고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마르탱에게 물었다.

 “이쪽으로 가지고 오겠다고 했소?”
 “하명하시면 그리될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 한 벌밖에 없는 귀한 것이다. 아무리 길이 평탄하다 하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파손되거나 미처 잡지 못한 도적을 맞닥뜨릴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만일 보완하게 된다면 기존 제련소가 있는 보르도가 수월하지, 푸아티에까지 오고 가는 수고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왕성의 보수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볼 겸 내가 잠시 다녀오도록 하지. 경도 동행하는 게 좋겠소. 가서 처리할 일도 있고.”

 그러나 기꺼이 그러겠다는 수긍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 부상 중이십니다. 여기에는 영주들도 여럿 오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그들은 나를 수종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오. 우리 부녀보다는 서로 친목을 다지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니. 오라드가 명석해 이제는 내 도움이 없어도 웬만한 일은 맡아 주재할 수 있고 보필할 이들도 여럿 있어 내가 며칠간 자리를 비워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소. 정 다급하면 바로 연락할 테고.”
 “그래도 궁의의 의견을 들으십시오. 요사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신 것을 압니다.”
 “그야 이맘때면 매년 그러지 않소.”

 가을걷이를 앞두고 있으니까. 포도 수확은 이미 시작되었고. 게다가 약 한 달 뒤면 아키텐 국왕의 탄신을 맞아 상인들이 대목을 준비함은 물론 각국의 사절단도 수행 상단과 같이 오니 바쁘지 않을 수가 없다. “알겠소. 오늘 만나면 묻도록 하지.” 그렇지만 이이의 말을 더 받아쳤다가는 착한 사람에게 괜히 근심만 더할 것이다.

 나는 프레브라나와 함께 야히드를 밤에 만났다. 평소 진찰을 받던 시간보다 더 늦어 남들은 이미 잠을 청할 시간이었으나 그는 어제와 다름없이 내 호전을 살피고 곧 실밥을 빼겠다는 희망적인 선고를 내렸다. 아울러 오라드가 성장기이고 머리카락의 무게를 견디기 버거워하니 상한 부분도 다듬을 겸 한 뼘 정도 잘라도 되겠냐며 허락을 구했다. 머리를 풀면 이불을 한 채 더 어깨에 두른 느낌이라며 내 주위 여자들이 힘들어하던 게 떠올랐다.

 “자네의 노고에 보상하는 뜻으로 작은 성의를 표하려 하네. 보르도 왕성의 남쪽 블라이에 포도밭이 딸린 작은 목장이 있는데, 내가 장관 시절에 선선대 국왕께 사적으로 받은 것으로 왕가에 속하지 않은 온전한 내 것이지. 이제 그 집과 토지가 모두 자네 것이 되었네.”

 나는 수년간 그에게 특정한 거주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 말은 실상 죽을 때까지 아키텐에 머물러도 좋다는 영주 허가였다. 눈물은 보이지 않더라도 감격에 겨워할 모습을 예상했는데, 야히드는 눈과 입술을 덜덜 떨더니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 과분한 하사품 대신 다른 것을 청해도 되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야히드는 자세를 고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발치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디 제 친지들을 살려 주십시오! 무고한 자들이 창칼을 피해 언제 꺼질지 모르는 목숨을 겨우 붙들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아키텐으로 줄지어 오는 선박 행렬에 잠시 몸을 실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서쪽 해안으로는 군대와 기독교 국가에 막혀 갈 수 없고 동쪽 해안으로는 툴루즈 공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왕실을 섬긴 후 처음으로 부탁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입니다!”

 


 아키텐에서 계속 살고자 한다면 가장 바랐을 것을 주건만 다른 것을 원한다니 이미 짐작했다. 성가신 것일 줄.

 


 “자네가 살리고자 하는 이들은 자네처럼 무슬림인가?”

 


 야히드는 다소 머뭇거리더니 여전히 조아린 채 답했다.

 


 “…구해 주신다면 아키텐 왕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살게 하겠습니다. 만일 바라시지 않는다면 다시 어디로든 떠나겠습니다. 하오나 폐하, 저희의 조국은 여러 패로 갈라져 서로에게 눈 없는 칼을 휘두르고 같은 신앙을 지닌 이방은 불시에 나타난 자에게 간자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다른 기독교 국가는 역병과 괴질의 책임을 물어 이미 여럿을 태워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도마 위에 오를 운명만 남은 그물 속의 물고기나 다름없습니다.”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 등지로 넓게 영역을 뻗친 알모라비드는 정권 다툼과 지방의 할거 등으로 혼란스럽다. 술탄 야햐 6세의 비호 아래 신앙을 유지하던 기독교인들은 짐을 챙겨 아키텐령 알바라신이나 나바라, 지중해의 다른 섬 등으로 피난길 행렬을 잇는다. 반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어린 청년부터 허리 굽은 노인까지 떼죽음을 당한 마을도 여럿이다. 내가 최근에 받아본 전황에서 큰 변화가 없다면 서쪽을 통해서는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지 않음에야 아키텐으로 올 수 없으니 동쪽을 통해야 하는데, 그쪽이라면 천혜의 방벽 피레네산맥을 운 좋게 넘든 지중해를 건너 입항 신청을 하든 툴루즈 공의 영역에 반드시 도달하게 된다. 선대 공작 자매를 셋 다 죽인 역병과 지긋지긋한 사주전 유통으로 국왕 직할령보다 더한 철통방어를 자랑하는 곳에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이교도 이방인으로서.

 


 “자네의 친지라면 자네처럼 의약을 하는 자들인가?”
 “하나만 그렇습니다. 칠십을 앞둔 노부모와 다리 저는 어린 자식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으나 대부분은 빵을 굽고 신발을 만들어 내다 파는 평범한 이들입니다.”

 


 탈출할 도리가 없을 만도 하군. 자신들은 삶을 벗어날 재주가 없고 다른 곳에서는 굳이 원하지 않을 테니 바람 부는 대로 휩쓸릴 수밖에 없겠구나. 도울 가치는 없을 것이라 자인하다시피 한 야히드는 애처로울 만큼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자네는 그들의 전갈을 언제 받았나? 내 딸은 자네를 아끼니 그 아이라면 분명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도우려 했을 텐데. 설마 오라드가 거절해서 나를 찾았나?”

 


 야히드는 망설이지도 않고 답했다.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폐하, 황공하옵게도 어리신 국왕 폐하께서 친근히 대해주시나 제 주인이 누구신지는 한날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를 거두신 분께 처음으로 말씀드립니다. 부디 가엾이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프레브라나는 연민 어린 눈길이었으나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결론을 말했다.

 


 “자네의 사정은 측은하나 나로서는 자네 한 사람을 위해 특혜를 줄 수는 없네. 개국 이래 처음으로 추기경이 나왔고 칠십을 훌쩍 넘긴 교황은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힘들 지경으로 쇠약해졌으니, 이런 때에 이교도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여 아키텐의 처지를 난처하게 할 수 없네.”

 


 내게 거절을 받았다면 오라드에게 가더라도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것을 충분히 알 텐데도 야히드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운을 띄웠다.

 


 “그자들 가운데 학인이 둘 이상은 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을 터. 아키텐에 아직 전파되지 않은 책도 있겠지? 잘됐군. 그걸 내가 사도록 하지. 되도록 의서가 있으면 좋겠군. 특별히 내 주문을 받아 움직이는 것이니 도중에 분실하지 않도록 일을 도울 사람도 여럿 필요할 테고. 담당관은 타국의 언어를 잘 모르니 자네가 맡아서 들여오도록 하게. 필요한 것들은 내일 아침에 마련해 둘 테니.”

 


 그들은 이제부터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상단이 된다. 내 말을 바로 알아들은 야히드는 “천지를 만드신 신께서 폐하를 영원히 축복하실 것입니다.”하며 눈물 젖은 얼굴로 내 옷자락에 입을 맞췄다. “아내와 쉬고 싶으니 이제 나가 보게.” 나는 손짓으로 그를 내보냈다.

 


 “들어주실 거라고 알았어요.”

 


 프레브라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 목을 감았다. 문득 궁금해져 나는 그이에게 물었다.

 


 “믿은 것이 아니라 알았다고?”
 “저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거든요.”

 


 그건 곤란한데. 내가 멋쩍어하자 프레브라나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나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내 사소한 버릇이나 기호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생선 요리가 나오면 꼬리부터 먹거나 피로에 절어 자면 어느새 팔 한쪽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자는 것까지.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다만 그것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울며 나간 야히드가 오라드에게 위해가 될 짓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주저 없이 없앨 것이므로. 우리 부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혀를 끊고 절대 살아날 수 없도록 목을 칠 것이다.

 


 이틀 뒤 나는 마르탱을 포함해 나를 수행할 인원 몇만 데리고 약 1년 만에 보르도로 향했다. 게다가 조용히 다녀오려 했으나 오라드가 성문까지 새하얀 말을 나와 나란히 몰고 나오며 배웅했다. 내 딸은 어느새 웬만한 기수 수준이었다.

 


 “이모랑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으렴. 식사 잘하고.”

 


 그래도 아이를 두고 며칠씩 집을 비우게 될 때 하는 말은 다 비슷한 법이다. 예정에 없이 뤼지냥 백작과 앙주의 고티에르가 짧은 방문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뤼지냥 백작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내셨던 곳을 보고 싶습니다.”라며 부탁했고 고티에르는 “배울 점이 많은 분이십니다.”라며 이해 안 될 이유를 들었다.

 


 “과찬이오. 오히려 내가 경들에게 더 배울 점이 많소.”

 


 진심이었다. 그때 나는 가족을 떠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어 우울할 지경이었으므로. 물론 지금 가는 보르도 왕성은 십수 년을 살아온 ‘우리 집’이나 그곳에는 부드러운 품으로 나를 안아주는 아내도 없고 내 손을 잡으며 활짝 웃어주는 아이도 없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호기롭게 나섰건만, 그리고 외근이 처음도 아니건만 ‘앞으로 가족들을 한동안 만날 수 없다.’라는 사실이 의욕을 팍 꺾어버렸다. 힘든 하루를 마쳐도 수고했다며 토닥여줄 아내와 눈을 빛내며 무엇이든 배우려 하는 딸을 볼 수 없다. 하루 이틀, 길어야 사나흘을 지내고 올 때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깜빡 잊었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지.’

 


 지금 느끼는 허전함만큼은 어떤 금은보화와 천상의 미녀를 안겨줘도 채울 수 없다. ‘나오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을 나는 절절히 이해한다. 십수 년을 가족 곁에서 일해 버릇해서 잊고 살았지만.

 


 조용히 떠나 조용히 도착하겠다는 계획은 성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와르르 무너졌다. 낟알이 익어가는 평지에서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농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길가에 서서 시시한 행렬을 구경했다.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이는 아낙도 몇 있었다. 성으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 인파가 되었다. 누군가는 두 팔을 벌리고 말 앞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해 서기관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행렬이 더뎌지자 아이를 안고 나서서 축복을 청하는 노인과 젊은 부모도 여럿 나타났다. 나는 신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냈으므로 오라드가 해야 할 일이었다.

 


 길지 않은 여정 끝에 우리는 예정 시각을 훌쩍 넘긴 일몰 후에야 왕성에 들어섰다. 귀한 손님이 둘이나 있었으나 이런 때에 호화로운 만찬은 오히려 피로를 더할 뿐임을 시종들은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1년 만에 내 방으로, 다른 이들은 제각기 보수를 마쳤거나 아직 먼지와 나뭇조각이 흩날리지 않은 방 중 좋은 방을 배정받았다. 쉴 수는 없었다. 지친 내 발은 이번에야말로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곳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쉿, 누구야?!”

 


 문에서 등을 돌린 거구의 중년 사내가 잔뜩 낮춘 걸걸한 목소리를 올렸다. 다듬지 못해 탑삭나룻으로 자라버린 수염에 회색 모래가 앉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의 앞에는 그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여성이 얼룩덜룩한 두건으로 질끈 묶은 머리를 풀지도 못하고 간이침대에 누워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옆에는 머리 기른 남성과 갸름한 여성의 목탄 스케치가 여러 장 흩어져 나뒹굴었다.

 


 “내 분명 자네들에게는 가장 좋은 대우를 해주라고 했을 텐데.”

 


 나는 스케치를 한 장 집어 들었다. 누구를 그리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비록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다르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면 바로 나를 찾지 그랬나.”

 


 작년 왕성의 보수를 지시하며 두 분 선왕과 왕대비의 석상을 같이 세워달라고 오라드 몰래 부탁했었다. 그러나 살아남아 불려온 석공들은 자신이 조각해야 할 이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거나 보았더라도 너무 멀어 얼굴의 특징을 세세히 기억할 수 없었다. 조각을 맡은 이가 보르도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선왕을 지근에서 모셨던 이를 찾는다는 소식이 얼마 전에야 내게 들어왔다. 중년 사내는 내 뒤에서 무슨 눈짓을 받았는지 얼굴이 새하얘지며 입을 벌리고 부랴부랴 잠든 이를 흔들었다. 아마 꿈도 못 꾸고 까무룩 잠들었을 여성은 눈을 뜨자마자 나를 알아보고 마찬가지로 새하얘졌다. “폐하.” 그들은 두려워했으나 역시 소리가 컸다.

 


 “편히 있게. 나도 편하게 왔으니.”

 


 그들은 대대로 석수 일을 이어 하는 집안의 남매였다. 다만 가족들이 참화를 당하기 전 오라비는 타지에서 다른 일을 했고 누이는 겨우 내 모습만 멀리서 두어 번 본 게 다였다. 보조할 어린 도제들은 조금 전 식사하러 나갔다고 했다.

 


 “내가 세심하지 못해 자네들이 마음고생이 심했겠군. 핀 기스킹 경이라면 30년 전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니 자네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만나지 못했나?”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나를 능가할 사람은 없으나 보르도에 먼저 온 사람은 그쪽이다. 내 물음에 석공 남매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누이가 입을 열었다.

 


 “그 어른은 너무 아름답게만 말씀하서서……. 웃으실 때면 주위에 밝은 꽃이 피는 것 같았다거나 초저녁 초승달처럼 고왔다는 찬사로는 조각이 어렵습니다.”

 


 주의해야겠다. 나도 그렇게 말할 것 같았기에. 나는 누이에게 목탄을 들게 했다.

 


 “그래. 수염을 짧게 기르셨네. 어린 나이에 즉위하셔서 나이로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기르셨었지. 물결 같은 곱슬머리셨는데 그것도 어깨까지. 손바닥을 가로로 펴서 손가락 넷을 붙여보게. 그만큼 나보다 키는 크셨는데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어. 체격은 건장하셨고. 내일 모레 체형이 비슷한 이를 찾아서 데려와 주겠네. 파트리샤는 반대로 아버님을 많이 닮았는데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늘었지. 손목이 약해서 어린 딸을 들어 올리지도 못할 정도였네.”

 


 누이는 목탄으로 빠르게 내 말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 옆에서 오라비는 특징을 간추려서 적었다. 나는 그들을 앞에 둔 채로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 가장 밝고 눈부셨던 순간 속에 멈춰 있었다. 손 내밀면 만질 수 있었고 서로의 숨결과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 속에. 아. 문득 무엇인가가 떠올라 나는 설명을 멈추고 다른 말을 건넸다.

 


 “자네들은 서두르지 말고 며칠 뒤 나와 같이 푸아티에로 가세. 줄리아나 공주와 오라드를 보면 용모를 유추하기 더 수월하지 않겠나. 내 자네들이 지낼 곳을 따로 마련할 것이나, 자네들이 왜 왔는지 진짜 이유는 내 딸에게 밝히지 않도록 하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 다음 말은 석공 남매의 화색을 멈추고 다시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잘 봐두게. 그려도 좋고.”

 


 목탄이 멈췄다. 석공 남매는 선뜻 그러겠다며 답하지 못하고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죽은 사람을 추도할 목적으로 만드는 석상이다. 아마 이들은 내 묘비에 새길 장식을 지금 미리 궁리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내 말대로 하게.” 나는 그들에게 굳이 목적을 설명하지 않고 재차 다짐해두었다.

 


 지금의 모습이라면 언젠가 그 사람 곁에 서도 비슷한 나이로 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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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3.10.01 제가 글쓰면서 이것저것 어떻게든 고증 지키려 한적 있는데...

    용어나 당시 쓰인 물건이나 비슷한 사진,영상 등등 찾을라면 미치죠...
  • 답댓글 작성자디아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01 931117 그것도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시점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현대를 배경으로 할 때 스마트폰을 쓰면서 스마트폰의 원리와 작동 방식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꼴이 나버리져…… 본문에서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3.10.01 디아나 저같은 경우엔 유로파로 조선 연재할때 식민지 건설 부분에서 일일이 한자로는 뭐라고 부르는지를 찾아봐야 했던게 생각나는군요 지금 당장은...

    연감에서 조선시대가 배경일 경우엔 실록 사이트를 켜놓고 음력 계산기까지 동원하기도...
  • 작성자콤콤 | 작성시간 23.10.04 아이고 언제 오시나했더니 연휴중에 돌아오셨군요. 오늘 확인하자마자 재밌어서 다봐버렸네요.
    간만에 맛있는 글 잘 먹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디아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04 제가 정말 면목이 없어서 콤콤님께 아무 연락도 못 드렸습니다……… (대역죄인)(저는 언제나 카페챗과 카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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