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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토론

Re:유가의 제왕학vs법가의 제왕학 당신의 선택은?

작성자Draka|작성시간20.04.03|조회수196 목록 댓글 12

제자백가가 성립한 시기를 선진시대라고 보통 통칭하는데, 흔히 말하는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주 왕조의 봉건적 기반이 붕괴한 혼란기지요.


제자백가가 왜 성립했는가, 왜 하필 그 시대에만 그토록 많은 주의주장이 피어났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지요.

천하가 어마어마한 혼란기였으니까요.

흔히 치세에는 예술이 발달하고 난세에는 철학이 발달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 또한 별 것 아닙니다.

인간은 먹고 살만해지면 눈과 귀와 입이 즐거운 것을 찾고, 먹고 사는게 힘들면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든지 고찰하거든요.

더불어 어떻게하면 좀 덜 힘들어질지 그 방법론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백가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제자백가는 당시의 천하를 난세라는데 동의했고, 어떻게하면 치세로 나아갈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고 논의하고 성찰한 집단입니다.

'인간의 도덕성 상실에 난세의 원인이 있으므로, 인간 개개인의 도덕성을 회복하면 치세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 유가입니다. 유가에서 인간의 성품을 고찰하고 성선이니 성악이니 하는 논의가 나온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면 그 선을 본성에 따라 키워주면 되는 것이고, 본성이 악하다면 악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교화해주는 것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얘기도 파고들면 엄청나게 복잡해지는데, 기본적으로 유가에서는 사람의 성을 선하다고 봅니다. 성선, 성악이라는 것은 본성이 선하고 악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는가' 혹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는가'의 논의에 가깝습니다.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반드시 교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고, 그 교화는 강제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악설의 순자 문하에서 법가적 논의가 발생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고, 성선설의 맹자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아성(亞聖)으로 칭송받았는데 순자는 도통에서 제외된 이유도 이러한 근본적 곤란함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최초로 도덕을 완성한 성인군자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난감한 물음도 생기거든요.

아무튼 따라서 유가는 도덕성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고, 따라서 개개인의 수양이 중요해지며, 수양을 통해 도덕성을 회복한 성인 군자들에 의해 백성들이 교화되는 것을 치세로 나아가는 도리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유가적 치세는 일종의 귀족정에 가까워집니다. 교화를 시키는 대부와 교화 대상인 백성이 구분되고, 이에 맹자는 노력자와 노심자라는 이중적인 계급제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 내에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 유가적 치세의 이상향입니다. 소위 말하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운 사회이지요. 다만 모든 개인에게 도덕성이 요구되므로 부단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법가는 '지금 난세인데 그런 식으로 어느 세월에 치세를 이루겠는가'라며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사회에 극한의 효율성을 적용하려 노력하므로, 모든 개인을 사회의 부품으로 만들고 개인의 욕구와 인성을 말살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법을 수단으로 삼는 것 또한 개인마다 다를 수 밖에 없는 욕구나 성격 등을 획일화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한소후가 잠깐 잠들었을때 군주가 감기에 걸릴까봐 모자 담당 관리가 옷을 덮어주었다가, 왜 의복 담당 관리도 아닌데 월권했냐고 처벌당한 것을 '잘했다'고 칭찬하는데 이릅니다(당연히 의복 담당 관리도 태만했다고 처벌받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소임을 다하는 것은 유가와 동일하나 강제적이라는게 차이죠. 게다가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 또한 조직을 해치는 것으로 보아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정무적 판단은 오로지 군주만 할 수 있는 것이고, 휘하의 행정조직은 모두 그 손발이라는 부속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따라서 모든 군주는 과도한 업무가 강요되고, 또한 모든 피치자보다 우위를 반드시 점하고 있어야하므로 플라톤적인 '철인'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때문에 법가적으로 구성된 조직은 그 수장이 과로에 시달리다 과로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제갈량의 사인만 봐도...


때문에 형이상학적 논의와 그에 따른 이념의 구축이 가능한 유가와 달리, 법가는 효율성이라는 한 면에만 극단적으로 치중했으므로 이념의 구축도 사상의 확장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법가가 현대까지 살아남았다면 100%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경도되었을겁니다. 참고로 개인적인 견해지만 묵가는 공산주의, 도가는 무정부주의로 흘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경쟁에서 유가가 살아남은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법가도 따지면 신도의 세, 신불해의 술, 상앙의 법으로 나뉘고, 나중에 이걸 정리한 한비자가 법에 방점을 찍었으므로 법가라 불리는 거지 현대의 법치주의와는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초월적 존재인 왕이 '법'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통치하는 통치술이라서...


후대에 법가적인 요소를 통치에 활용한 군주는 많았으나, 대놓고 법가를 표방한 군주가 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체주의가 욕먹는 것은 2차대전 후의 트렌드가 아니라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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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rak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4.05 young026 도가나 묵가가 아닌 이상 군주권 보장은 디폴트 옵션입니다. 고대 국가는 기본적으로 독재죠.. ㅋ

    그리고 법가적인 통치 체계는 진의 몰락 이후로 대놓고 표방하는 국가가 사라집니다. 법가는 통치 체계가 아니라 기술로 살아남았어요.
    유가적 시스템에 법가적 스킬이 조합된 것이 중국의 통치였습니다.

    명은 좀 특이한 경우인데, 명(과 그를 이어받은 청)은 군주권이 과도하게 강해서 유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여길만한 시스템이 아니었습니다.
    유가에서는 천이 민을 대변하고, 그 천에 의해 권위를 받는게 천자인 군주라고 보는데 그 권위를 극대화시켜놓은게 명이었습니다.
    반대로 법가는 권위가 군주 스스로에게서 나온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Drak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4.05 Draka 그래서 명은 과거 당송대에 비해 언로가 막혀 있었고, 이어받은 청에서는 문자옥까지 줄줄이 터지죠.
    그러나 어쨌든 민-천-천자로 권위의 근거를 세워놓았으므로 민심에 어긋나면 맹자식 역성 혁명이 가능하다는 점이 열려있습니다.
    명 시조인 주원장이 맹자의 해당 구절을 극혐했던걸 생각해보면, 주원장은 배운 적이 없었음에도 법가적 스킬을 감지하고 있었을겁니다.

    아무튼 해당 부분은 법술세의 '세'에 해당하는데, 이는 유가에도 어느 정도 이론적 배경이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히 법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신하들에게 정무를 떠넘기고 방구석에 처박힌 만력제는 술을 방기한 '법가적이지 못한 군주'가 되죠.
  • 답댓글 작성자young026 | 작성시간 20.04.06 Draka 제가 든 예에서 법가라는 사상보다 독재 시스템이 주요 요소인 건 맞습니다. 다만 그게 말씀하신 대로 유가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는 체제이고, 중국에서도 이외에 한당송과는 체제상 차이가 있었고 결과도 달랐다는 점이 눈에 띄어서 얘기를 꺼냈습니다. 명이 환관의 횡포가 극심했던 왕조로 유명하지만 후한이나 당에서 환관이 황제를 세우고 끌어내리던 것 같은 건 어림없었죠. 후한, 당(그리고 많은 단명왕조)은 체제 내에서 힘을 키운 실력자에게 제위를 빼앗겼고요.
  • 작성자커넬 샌더스 | 작성시간 20.04.05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법가가 생각한 것과 다르군요 ㅎㅎ
  • 작성자삼한일통 | 작성시간 20.11.11 법가, 유가에 대해서 요즘 https://askeverything.co.kr/#!/web/intro
    여기서 가르쳐주는걸 보니 흥미롭긴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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