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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프레지던트 온라인에서 올린 세계2차대전 말기 일본의 상황

작성자자유로운자|작성시간23.10.30|조회수210 목록 댓글 2

日本軍は8月17~18日に「敗戦はウソだ」というビラをまいた…「負けを認めたくない人たち」の異常な行動(プレジデントオンライン) - Yahoo!ニュース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을, 당시의 일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가쿠슈인 대학원인 이노우에 토시카즈 교수는 "군은 8월 15

 

일 이후도 철저히 항전을 호소하는 선전 전단지를 뿌린 적이 있고, "쇼와 천황의 옥음 방송은 선동이다" 라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

 

었다" 라고 한다. 


*본 기고는, 이노우에 토시카즈 "전쟁과 거짓말, 만주사변에서 일본의 패전까지" 의 일부를 편집한 것 입니다.


■국민에게 패전을 알리는 중대한 라디오 방송

이 때에도 전황은 일본의 패전은 불가피했다. 

 

6월 23일, 오키나와의 수비대가 전멸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되었다. 8월 8일, 소련이 대일 선전을 포고한다. 다음 날,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된다. 같은 날, 이번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파된

 

다. 원폭 2개의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은, 일본 정부에게 패전을 받아들이게 한다.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여, 연합국에 신청을 했다. 

 

문제는 일본의 항복을 어떻게 국민에게 전하느냐 였다. 거기에 생각을 해낸 것이 옥음 방송 이었다.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

 

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일부는 철저히 항전을 할 자세를 보였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우려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정확하고

 

가장 정식적인 내용의 국가의사를 전달할 수단 이었던 것이 라디오 였다. 


옥음방송은 예고 되었다. 전날 오후 9시와 당일의 오전7시 넘어서 였다. "중대한 라디오 방송" 이라고 예고를 한 것만으로도, 전쟁

 

종결의 내용이 라고는 전혀 몰랐다. 

 

■소련의 선전포고와 오해하는 사람도...

드디어 8월 15일 오후 12시, 시보 뒤에, 라디오가 중대발표를 전했다. 자세를 바르게 하여 옥음방송을 들은 국민의 어느 정도가 그 내용을 정확

 

하게 이해를 했을까? 난해한 한어를 섞은 조서의 의미는, 라디오의 잡음 때문이기도 하며, 듣기 어려웠다. 그 안에는 중대발표의

 

음미를 대소 대전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야마다 세이야(작가 야마다 후타로)는 옥음방송을 대중 식당 안에서 들었다. 식당의 아주머니가 야마다씨에게 물었다. "\

 

어때? 선전포고지? 어떤데?"

여기에서 선전포고 라고 할 정도도 아닌 소련에 대한 것이었다. 



■일본이 질 것이라곤 상상하지 않았다.

야마다는 식당의 아주머니의 오해를 라디오 상태가 나쁜 것과 난해한 표현이었다는 것, 혹은 항복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

 

던 것이 아니라, 일본의 패전이 "믿을 수가 없었다" 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야마다는 옥음방송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저건 포츠담 공동선언 입니다. 미국, 영국, 장제스의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를 선언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식당의 아주머니는 "부, 분하다" 라고 단말마를 외쳤다. 전쟁 종결을 알고 있어도 해방감은 없었다. 식당에서는 "모두, 죽었다고 할

 

정도로 침묵을 하고 있었다. 대 부분 처참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몇 분간 그러했다." 

 

국민은 아마도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진다는 실감에도 부족했었다. 어떻게 전황이 악화가 되어도, 마지막 한 명까지

 

되어서 싸운다.

 

그러한 결의는 옥음방송 하나로 잃어버렸다. 이렇게 전쟁은 끝났다. 


■옥음방송을 믿은 사람은 국적 취급으로

 

이 패전을 알리는 옥음방송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가사키현 에서는 헌병대가 대원을 트럭에 나눠 태워서, 시민에게 나눴다.
 
"오늘의 라디오 방송은 선전 방송이며 적의 모략에 넘어가지 말며 군은 점점 군비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니이가타 현 카시와자키시의 병원의 병상에 있던 어떤 남성은, 옥음방송을 들어도 믿을려고 하지 않았다. 혹은 가고시마현 아마

 

미오의 어느 마을에서는 두 명의 병사가 우체국 국장을 힐문하고 있었다. "네 놈은 국적이다. 말도 안 되는 선동을 퍼뜨렸다. 살려

 

둘 수 없다. 라디오의 방송은 적의 모략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우체국 국장은 옥음방송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주위에도 흘렸다.

 

그 쪽이 정말이었다.  


히로시마 에서 중국 대륙에 파견되었던 어떤 부대는, "불온과 공포의 유언비어의 의심암귀"에 빠져 있었다. 그렇더라도 "항복을

 

불만으로 하여,굴종하지 않는 동지를 규합해서 "모아서" 조국을 재건하자" 라는 모습 이었다. 

 

옥음방송을 모략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던 배경에는, 8월 15일 전후의 철저 항전을 호소한 군의 선전 전단지의 살포가 있었

 

다.
 
이 날, 도쿄 아카사카의 아오야마 욘쵸메 부근에서, 육군 장교의 동승하는 바이크의 사이드카로 부터 전단지가 살포되었다. 거기

 

에는 "국체보지"를 위해서 8월 15일 새벽쯤을 기해서 궐기를 하여, 우리들 장병은 전군 장병과 함께 국민 각 위에 알리는 취지로,

 

쓰여져 있었다. 


■ 특공대는 항복하지 않으니까, 국민이여 안심하라

혹은 토요시마구의 카나메쵸 부근에서는 해군의 비행기로 부터 "대일본 제국 해군 항공기의 전단지가 투하 되었다. "단호하게 싸

 

워서 앉아서 망국을 기다릴 것인가? 싸워서 명예를 지킬것인가?" 육군의 비행기도 17일과 18일, 도쿄의 신주쿠 역 상공에서 전단

 

지를 살포했다. 

 

"조서는 간발되었다 (나왔다) 하지만 전쟁은 종결 된 것이 아니다/대일본 육군"

 

작가인 타카미 준은, 패전시, 카나가와현의 카마쿠라에 살고 있었다. 패전의 다음 날, 타카미는 친칙으로 부터 도쿄의 세타가야 에

 

도 비행기가 전단지를 뿌렸고, 거기에는 "특공대는 항복하지 않으니까 국민이여 안심하라" 라고 쓰여있었다고 들었다. 


다음 17일에는 요코스카 진수부(해군의 근거지)와 후지사와 항공대 등도 "어디까지나 항복 반대"로, 불온한 분기가 넘쳤지만, "부

 

모가 항복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항복하지 않는다" 그러한 전단지가 뿌려지고 있었다. 혹은 도쿄의 역에도 항복 반대의 전단지가

 

붙여져 있어서, "땐 사람은 총살한다" 라고 쓰여져 있는 뜻도 알고 있었다. 

■ 천황폐하는 사형 당한다 라고 하는 전단지도

전단지는 차례대로 살포 되었다.

이 날(8월 17일) 도쿄의 미타마 지구에서 비행기와 자전거로 부터 뿌려지는 전단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없다/ 국민이여 분기하

 

라" 라고 호소하고 있다. 혹은 도쿄의 시나가와 역 앞에 케이큐 백화점 앞에서 살포 된 전단지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적은 천황폐하를 전쟁의 책임으로써 사형을 한다고 방송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항복이 되겠는가? 일어나고 일어나서 충실하고

 

선량한 신민 항복 절대 반대, 절대 반대"


우에노 역에서도 하사관 몇 명이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전단지를 뿌렸다.

 

"동포에게 고한다!! 항복은 절대로 진정한 평화가 아니며/독일의 비참한 현장을 보라 육해군 궐기부대"


옥음방송 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은 거 같았다. 의대생인 야마다 세이야가 같은 대학의 학생 수십명과 격론을 하고

 

있다. 그 안에서의 한 명이 말했다. 

 

"군은 반드시 일어난다. 반드시 일어나고 항공대는 전단지를 뿌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에 응해서 깨닫고 뛰어나가자. 적의 상륙

 

지점이 즉 전장이 된다."

 

■거짓말을 믿은 일본인은 보복으로 불타올랐다.

군의 선전 전단지의 효과는 곧 나타났다. 거짓의 전단지를 믿은 사람이 있었다.
 
8월 27일, 야마다의 앞으로 삼촌으로 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8월 15일, 갑작스럽게 중대 성명의 발표가 있으며.. 오늘부로 보복의 준비를 할 수 밖에 없다"
 

야마다는 다음 날의 일기에 "삼촌 같은 인간은 지금 전 일본에게 충만하고 있다" 라고 쓰고 있다. 일본은 8월 15일을 기점으로, 복

 

수전을 할 것 같았다. 

■선전으로 부터 읽을 수 있는 천황제의 불안

패전 직후의 여러가지 선전과 유언 안에서, 눈에 띄는 것이 천황제의 행방에 관한 것이다. 
 

8월 17일, 20일 이틀, 이케부쿠로 모토후지 마루노우치의 각 경찰서의 관내의 상공으로 부터, "우군기" (아군의 군의 비행기)가 전

 

단지를 살포했다. 황육해군 이라는 이름의 전단지는, "적은 황공하옵게도 천황을 오키나와로 옮겨야 한다고 방송을 하러 올 것이

 

다"

 

이러한 사실은 없고, 진짜 선동 이었다. 8월 19일에 우에노 역 부근에서 뿌려진 "육해군 정예 7생의군"의 전단지는, 천황거단/황족

 

섬 흘리기/실행할려고 하는 멕아더는 이 폭학을 선언하러 왔다" 라고 하고 있다. 사실무근 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혹은 카나가와 현 지사 이름의 문서 "대동아 전쟁 종결에 따른 민심의 동향에 관한 건"은, 천황제의 행방에 관한 카나가와 현민의

 

동향으로써,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실의 존속과 국체를 보지하여 얻은 것은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있는 것도 장래가 보이지 않기에 상당히 불안한 기색이 있다."

 

천황제의 행방은 불확실했다. 

천황제의 행방에 관해서, 경시청 보안과 정치계가 10월 3일에 정리한 문서에 의하면, 그 최대 공약수적인 "선전적인 억측은, 천황

 

이 "전쟁 책임자" 로써의 양위하여, 황태자는 미국에 유학한다, "친미영적인 지치부노미야 전하가 섭정"이 된다, 라고 하는 것이었

 

다.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천황제가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전은 있어도 일본의 국민은 천황제

 

의 존속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안다. 

 



■천황제가 절대로 유지되는 것은 제한되지 않았다.

선전 안에는 보다 극단적이고 황당무계한 것도 있었다.
 

톳토리현의 중앙부와 톳토리 시내의 일부에서는 "천황폐하는 자해 하거나". 아니면 "천황은 황태지 전하에게 양위 되어 오키나와

 

로 행행 되었다", 또는 "지치부미야는 적국의 스파이로 있었기 때문에 병이라는 명분으로 연금되어 있었다" 라는 선전이 있었다. 

그 외에도 도쿄 도에 있었던 선전의 예로써, 키타고에 공업 주식회사 사장인 타나베 마사타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기록되어 있

 

다.

 

국민은 일본이 항복을 하더라도 천황의 신분에 대해서는 불변 할 것이라고 안도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순진한

 

생각으로 통할 리가 없다"  

 

이 발언을 선전으로 정하는 것은 할 수 없다. 왜냐면 연합국 안에서는 소련과 영연방 제국(호주와 뉴질랜드) 같이, 천황제에 대해

 

서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황 퇴위를 원하는 국민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외의 선전이 선전으로 있었던 것은, 9월 27일에 알게 될 것이었다. 이 날, 천황 멕아더 회견이 예정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의

 

신문은, 거친 스타일의 멕아더와 모닝 코트로 기립하고 있는 천황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 사진을 권력이 멕아더의 점령군에 있다

 

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천황제의 존속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보안과 정치계의 작성 문서에 의하면, 이 회견에 있어서, 천황은 "퇴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라고 하는 억

 

측이 "꽤나 광범위하게 다듬어 진체 유포 되었다는 것을 간취(보고 그것을 알게 되는 것) 되었다. 


억측과 선전이라도, 국민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반영 되어있다. 천황제의 존속을 전제로 하면서도, 천황은 전쟁 책임을 가져서

 

퇴위를 해야한다, 국민의 평균적인 의식은 그랬던 것이 아닌 가? 추측할 수 있다. 

 

 

 

최근에 발견한 칼럼 같아서 올려 봅니다.. 이렇게 보면 결사항전을 했었다면, 일본 전토는 정말로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황폐화 되는 것도 더불어서 인민재판이 이루어 졌을 거 같습니다.... 참 현실을 부정하는 건 어디에나 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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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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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irus | 작성시간 23.10.30 핵을 덜 맞았음
  • 답댓글 작성자자유로운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0.30 그럼요.. 정말 보고 있으면, 저짝 애들은 저 버릇을 못 고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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