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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라왕의 종형 김일성은 어떻게 지냈을까?

작성자삼한일통|작성시간24.01.29|조회수227 목록 댓글 0

때는 2010년 西安에서 신라 왕족인 金日晟(713~774)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사후에 ‘은청광록대부 광록경 증연주도독’으로 추증된것으로 당에서 예우를 했는 모양인데 묘지명에 나온 그의 프로필과 논문

「8세기 중엽 신라의 對唐關係 -在唐 新羅人 金日晟 墓誌銘을 중심으로-」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추정해보도록 하자.

김일성은 누구의 종형이었나?

그렇다면 다른 왕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의 생몰년간 재위했던 왕들 가운데서 혜공왕을 제외하면 성덕왕(재위 702~737), 효성왕(재위 737~742), 경덕왕(재위 742~765)이 있다. 우선 성덕왕은 김일성이 출생하기 이전 이미 즉위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성덕왕의 종형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 효성왕과 경덕왕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두 왕은 동복형
제로 성덕왕의 두 번째 부인인 炤德王后의 소생으로 그녀가 納妃된 시점인 720년 이후 출생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713년 출생이므로 이 두 왕의 종형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한다. 따라서 묘지명의 언급된 신라왕은 혜공왕이 아닌 효성왕과 경덕왕일 가능성이 높다

타당해보이는 추론이라 생각한다.

다른 논문에서도 이 부분은 대체로 이 인물이 성덕왕의 조카이자 효성왕&경덕왕 형제의 종형이라고 언급되어있다.

당시 정세

○ 당나라에서는 신라에게 패강지역의 군사주둔을 허용하였고 신라는 행정구역 편입을 목적으로 하였다.

○ 신라는 당에게 발해 공격을 위한 출병을 언급하였고 이후 패강 이남 영토를 승인받았다

○ 8세기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독자적 항로를 개척해 단독으로 당에 사행하여다

○ 734년 파견된 신라 사신이 신라를 ‘王城國’이라 칭함으로58) 인하여 나・일관계는 급속도로 경색

⇒ 당의 패강지역 사여와 더불어 일본과 외교경색이라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자 성덕왕은 왕족인 김일성을 파견

해당 논문에서는

견당사로 간 왕족 중에 왕의 손윗사람보다는 王子, 王弟, 王從弟, 王姪 등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김일성은 효성왕대나 경덕왕대가 아닌 왕질로 있던 성덕왕 연간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김일성의 입당시기와 관련하여 눈여겨 볼 점은 견당사 金相이 부임 도중 사망한 사건이다.68) 김상은 성덕왕의 從弟였으므로 이와 비견해도 괜찮을 만한 왕족을 다시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때 김일성이 입당하
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업을 이어받아 앞 사람의 누가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일성의 당나라 장기체류 요인

기존 연구: 경덕왕의 정치적 배제 때문

논문에서는

숙위 질자의 귀국은 당 측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도리어 타당해 보인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722년 당 玄宗이
諸蕃의 숙위 자제들을 본국으로 방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80)
또한 727년에는 勅을 내려 “발해의 왕자 등이 숙위한지 오래되었으니 마
땅히 돌려보내라” 하였다.81) 이후에도 806년 당 憲宗이 金獻忠을 귀국하
게 한 사건이 있었다.82) 귀국 역시 당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26년간 당에
체류했던 金允夫는 副使로서 돌아가길 청하였으나 거절되고 이후 告使가
되어 귀국했다.83) 즉, 신라 측에서 숙위 질자에 대한 정치적 배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당에 장기 체류를 시킬 수 없다는 것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생략)
또한 김일성은 光祿卿이었는데 730년 이후 파견된 견당사들이 대체로 九寺의 관직을 받
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숙위학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묘지명 기록에 ‘유업을 이어받았다’와 마지막 銘부분의 ‘만리를 건너 입조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가 단순한 유학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입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질자로서의 역할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숙위의 원래 목적은 당 황실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당에서는 질자들을 儀仗의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新唐書 기록에 따르면 ‘천하가 안정되어 번영을 이루었고 번국의 군장들이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숙위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92) 중국 중심의 華夷觀 속에서 번국들의 숙
위는 곧 천하질서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연례행사는 아니었지만 封禪과 같이 천하질서를 공고히 하는 의례에 여러 번국의 신하들을 참석시킴으로써 황실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金仁問의 경우 당 高宗이 九成宮 순행을 할 때 시종하던 관원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일성과 같은 숙위 질자들은 이처럼 각종 의례 및 행사에 참석하면서 의전을 담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애장왕대 梁悅의 사례로 보아 숙위 질자들은 황제 근처에 머물면서 행차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에서 김일성의 당나라 삶을 유추해보면 이와 같다

○ 숙위를 하면서 순행이나 의례를 할 때 참석하면서 의전을 담당했을 것이다.

○ 체류하는 동안 신라에서 온 하정사 및 조공사 파견하면서 김일성은 당나라 내부의 알짜 정보를 공유했을 것이다

○ 당나라 황제에게 신라에 대한 대변자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 본국에 온 사신들에게 당나라 문화나 제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

○ 그가 올랐던 광록경은 국가제사에 있어 음식과 술 등을 관리하고 주관했기에 생전에 해당 직무를 맡았을 것이다.

○ 태묘와 원구 제사 때 필요한 업무를 맡았을 것이다

○ 외국사신 접견 업무까지 맡았을 것이다(국가 의전+외국 사신 접대까지..)

○ 종 3품이기에 규정대로 비단 100단과 조 100석을 받는다(묘지명에서는 100필 옷 10벌인데 단으로 따지면 200단이라고 한다)

○ 장씨 성을 가진 여인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고 혼인을 했을 것이다.

○ 천보 연호 시기에 당현종이 망가진 뒤 안녹산+사사명 난이 일어나면서 황제와 같이 피난 떠났을 것이다.

이 시대를 훗날 사극에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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