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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동아시아]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와 일본인 타운에 대한 뒷 얘기

작성자자유로운자|작성시간24.04.11|조회수248 목록 댓글 0
  • 처음 일본으로 부터 도항
  •  
  •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  
  • 외국인 아파트의 건설
  •  
  • 일본인 학교

 

1945년 8월 15일의 일본의 패전시, 미군이 패전 처리를 담당하는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50만명 가까운 일본인이 거주를 했다. 이것이,

 

"히키아게샤"로 인해 1945년말에는 일본인은 2만 8000명 정도가 되었고, 다음 해 봄까지 거의 모든 일본인이 철수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일본

 

인 이란, 이른바 내지(본토), 현재의 일본의 주권 영역내에 본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당시는, 혼인과 양자 이외에도 본적을 옮기는 것은 엄청 어려

 

웠다. 특히, 내지(본토)와 조선의 본적은 엄격히 구분이 되어 관리가 되어왔다. 그것도 있었고, 일본의 패전을 했을 때, 조선으로 부터 철수를 해

 

야할 사람은 쉽게 축출을 할 수 있었다. 조선인과의 혼인으로 조선 호적을 손에 넣은 일본 여성은, 일본에 돌아갈려고 해도 히키아게의 대상이 되

 

지 않았고, 조선에 잔류했다. 미군 정부가 허가를 한 소수의 일본인도 잔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부터 한반도에 대한 공적인 도항은 단

 

절이 되었다. 

 

초기의 일본에서의 도항

 

공적인 루트에서의 전후 첫 도항자는, 6.25전쟁의 취재로 한국에 입국을 한 일본의 각 신문사 및 통신사의 특파원 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국 정부의 도항사증이 아닌, UN군(미군)의 도항 허가를 얻어서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6.25 전쟁 휴전을 한 후도 일본인 기자는 UN군의 증명으

 

로 한국내에서 취재를 이어갔다. 하지만, 1956년 11월에 한국의 이상만 정권은 일본의 언론 각사의 기자에게 철수 명령을 냈다. 일본의 매스컴

 

몇 회사가 한국 정부에게 취재 도항을 신청을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인정을 처음으로 일본에서의 도항자는, 총리 기시 노부스케 개인 특사로써 1958년 5월 19일에 방한을 한 국책 연구회의 야츠기 카

 

즈오였다. 야츠기 에게는 주일 한국대표부의 유태하(류태하) 공사가 동행을 하여, 26시간 서울 체재중에 이승만 대통령과도 면담을 하고 있다.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이 넘어가고 나서, 5월 3일에 한국 정부는 일본의 특파원의 한국 입국을 허용하는 걸 표명하여, 5월 16일부터 5월 17일

 

에 걸쳐서 15명의 일본인 특파원이 서울에 들어왔다. 반도 호텔(현재의 롯데 호텔의 장소에 있었다)에 각자의 취재 거점을 두고서, 광화문 교차

 

점의 국제 전보국(현재 공사 중인 KT 광화문 빌딩의 장소)로 부터 기사를 일본에 보냈다. (블로스 재한 특파원 참조)

 

일본 정부의 관료로 최초로 방한을 한 것은, 외무성 북동아시아과의 젊은 외교관 이었던 마치다 미츠구 였다. 1960년의 9월에 반도 호텔에 숙박

 

을 하여, 한국 외교부의 에스코트로 지방도 시찰을 했다. 다음해에는, 북동 아시아 과장 마에다 토시카즈도 방한을 했지만, 한국측은 일본 정부의

 

서울 연락 사무소 개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도 주재는 없이 단기 채류로의 출장이 반복이 되었다. (마치타 미츠구 "서울의 일본 대

 

사관으로 부터" 1999년 문예춘추)

 

이 시기부터, 한국측으로 부터의 초청장이 있다면 단기의 도항 비자가 발급이 되었다. 경제 관계의 대표단과 시찰단, 친선교류와 문화교류의 방

 

한, 거기에다가 스포츠 교류시합을 위한 도항이 점점 늘어났다. "조선일보"가 1963년부터 1966년 4월까지의 일본인의 출입국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1962년에 아시아 영화제가 서울에서 개최가 되었다. 아시아 영화 제작 연맹의 회장이었던 나카타 마사이치 이하, 토에이, 마츠타케, 토호, 닛카

 

츠의 간부가 마키 노리코, 아라타마 미치요, 마츠바라 치에코 등의 여배우와 함께 영화제에 참가를 했다. 이 영화제 에서는, 닛카츠의 "위를 향해

 

걷자" (사카모토 쿄, 하마다 미츠오, 요시나가 사유리 등이 출연) 등이 상영이 되었다. 

 

 

또, 1963년 6월에는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링 선수단이 방한을 하여, 한국의 여자 프로레슬링 선수와 대전을 했었다.

 

전년인 1962년 12월에, 일본 프로레슬링 커미셔너를 맡았었던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가, 한국으로 부터의 요청도 있었고, 방한을 해서 박정

 

희와 회담을 했다. 그 직후의 다음해 1월 8일부터 11일까지, 리키도잔이 한국을 방문을 했었다. 이 때, 리키도잔은 일본 국적을 취득을 했었고,

 

일본의 여권을 소지해서 도항을 한 것이었다. 

 

 

대한뉴스 제 445호-영친왕 환국)。

 

오는 1963년의 11월 22일에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귀국이 허용되지 않아서 도쿄에 체재를 하고 있었던 이은 방자(마사코) 부부가 JAL 특별기

 

로 귀국을 했다. 그 일이 있은 3일후인 25일부터 12월 2일에 걸쳐서, 오오야 쇼이치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한국을 방문했다. 카지야마 토시유키

 

는 "문예춘추"의 1964년 2월호에 박 대통령 하의 제2의 고향"을 기고했다. 카지야마는, 경성 중학교 재학중에 경성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기업

 

소설과 풍속소설 등과 함께 족보와 이조(조선) 잔영 등 조선을 제목으로 한 소설도 썼다. 이 방한을 했을 때, 카지야마가 경성에서 살았던 신당정

 

(신당동)의 집을 보러 가기도 했다. 

 

 

이 방문기 안에는 요정인 청운각에 간 얘기가 나온다. 청운각은 원래 미츠비시의 어떤 지점장의 사택이었던 모양으로, 여기에는 온돌도, 열기가

 

통하는 파이프를 얇은 콘크리트 바닥으로 메워서, 스팀식 이었다.

 

일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기생은, 대 부분 30세를 넘었고, 그녀들이 제일 처음으로 얘기를 한 단어는, "언제 한국에 왔어요?" 라고 하는 질문이

 

었다. 이것은, 일본의 상사맨이, 마루베니를 시작으로 한 많은 사람들이 출입을 했었기에, 먼저 제일 첫 질문에 의해, 신선도를 점하는 것이었다.

 

부임을 해서 얼마 안 있으면,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청운각은, 해방후에 조차임이 시작을 한 요정으로, 종로구 청운동 53-26, 현재의 자하문 터널의 앞이었다. 정제계의 요인이 이용을 하는 고급요

 

정으로,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를 했을 때의 외교부 정관 주최의 초연도 여기에서 열렸다. 그 요정에, 1963년 시점에서 일본의 상사맨들이

 

출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전년의 1962년 가울에는,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 KCIA(국정) 부장 김종필 사이에서 "청구권"을 둘러 싼 금

 

액의 얘기가 나온 것이 보도가 되었다. 이 돈을 목적으로 일본의 상사 등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후, 한일의 요인이 일본측

 

기업으로 부터 환수와 리베이트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 때 이미 청운각 등에서 관계를 깊게 하고 있었던 것일까? 

 

주한 일본 대표부의 서울 개설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1964년부터는 일본의 외교관의 서울 주재가 인정이 되게 되었다. 상술의 서울의 일본 대사

 

관으로 부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그 후, 출장으로 몇 번이나 한국에 발을 들였지만, 서울에 처음으로 주재를 한 것은 1964년(쇼와 39년)이다. 아직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아서, 반

 

도 호텔에 사무소를 두고, 외무성의 직원이 교대로 주재를 했다. 이 때까지는, 일본의 대형 매스컴의 특파원이 서울에 주재를 해서 보도를 했었

 

다. 또, 대형 상사원들의 모습도 살짝씩 보이게 되었다. 

 

일본인 특파원도 거의 단신 부임을 했었고, 우리들과 같이 반도 호텔에 거주지를 준비했었다. 양쪽 같이, 한국의 정치 정세와 사회 상황을 취재하

 

는 것이 목적이었고, 나가는 것도 식사를 할 때도, 마음에 맞는 동료들이 몇 명씩, 같이 행동을 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1965년 12월 18일에 일본과 한국의 국교가 수립이 되었다.

 

 

도쿄에는 주일 한국대사관이 개설이 되었고, 주한 일본 대사관은 반도 호텔 5층에 설치가 되었다. 서울에 주재를 하는 외교관과 특파원, 상사의

 

주재원 등의 일본인은, 대 부분이 단신으로 호텔에 살고 있었다.

 

1967년 1월 18일의 마이니치 경제 신문(매일 경제 신문)에, 한일 국교 정상화의 처음 1년인 1966년의 외국인 방한자의 숫자가 있으며, 거기에 일

 

본인의 한국 도항자 숫자도 보도가 되어있다. 

 

법무부 출입국 관리 당국은, 작년 (1966)한국에 입국을 한 외국인 86,349명 중, 일본인이 16,871명으로, 해마다 급증을 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외국인 입국자 전체의 20%를 점하는 일본인은, 미국인의 30,126명에 다음으로 2번째로 많고, 입국 목적별로는, 관광이 10,773명, 상업 관계가

 

3.237명, 문화 및 체육관계가 999명이 되어있다.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1962년에 24,348명의 외국인이 입국을 한 것에 대해서, 1965년에는 48,562명으로 199%증가하여, 1966년에는 380%증

 

가를 한 86,349명이 한국으로 입국을 하게 되었다. 관광이라고 하는 투어 리스트 비자에서 도항자로, 1월~4월까지 2,728명이었던 것이 연간에

 

는 1만명을 넘었다. 구 조선 재주자 등의 재방이 많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 도항자도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1966년 6월 16일) 

 

또, 1967년에는 한국 정부 초청 유학생으로써 이케카와 히데카츠와 후지모토 유키오가 서울대학의 대학원에 유학을 하고 있다. 그 이후로, 국비

 

와 사비로의 일본인의 한국 유학이 점점 늘어났다. 1981년 10월 시점에서, 한국 전토의 일본인 유학생수는 약 100명이 되었다.(재한 일본 대사관

 

일문일답 1983년 11월)

 

상용 비자로의 도항도 증가하고 있고, 1967년 7월 20일에는, 서울 일본인 상공회가 발족했다. 회장 및 부회장에는 미츠비시 상사, 이토츄, 마루

 

베니의 서울 지점장이 이름을 내걸고 있다. 

 

 

 

이처럼,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인의 단기 도항 뿐만이 아닌 장기 재류가 증가를 했지만, 가족을 따라서 체재에는, 아직 벽이 높았다. 하나는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학령기의 아이들의 교육은 당초는 현지 학교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거주 문제였다. 일반의 한국의 가정에서

 

는 목욕탕과 화장실 등 물을 쓰는 것과, 거기에 겨울의 온방 등 불편함 점이 많았다. 거주비의 지불도 한국 특유의 전세가 많았고, 정해진 현지 통

 

화를 준비해야 했고, 일본식의 주택 수당에는 대응이 어려웠다. 

 

외국인 아파트 건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국 정부는 외국인을 위한 주거, 즉 난방 및 온수 등이 집중관리가 된 맨션형의 임대식 집합 주택의 건설을 진해ㅐㅇ

 

하고 있었다.  

 

한남동의 한강 하구의 고대에는, 대한 주택 영단이 관리를 하는 미군 및 UN 군사 관계자의 주택지인 UN 빌리지가 있었다. 원래는 일본 통치시대

 

(일본제국 식민지 시대)에 택지화 된 화경대 였다고 한다. 

 

 

이 UN빌리지 동쪽에, 1968년 10월에 빌드 외국인 아파트가 완성을 했다. 그 후 1990년대에는 외국인 주택에는 없어졌고, 2002년 대규모 개수가

 

되어서, 현재는 빌드업 트레져 아파트가 되어있다. 

 

 

게다가, 1969년 6월에, 이태원에서 남산에 오른 순환 도로가 포함이 된 16층 건물과 17층 건물의 2동의 남산 외국인 아파트의 건설에 착수하여,

 

1972년 12월에 완성했다. 

 

 

위에 있는 사진은, 1972~3년의 겨울, 남산 외국인 아파트의 완성 직후의 사진일 것이다. 게다가, 사진 하부에 제3 한강교(현 : 한강 대교)는 1969

 

년에 개통하여, 1979년에 영업을 시작을 한 하이앗트 호텔은 아직 없다. 

 

남산 외국인 아파트는, 1994년에 폭파 해체가 된 흔적은 현재는 공원이 되었다.

 

 

이제 한 곳, 외국인을 위한 주택이 만 들어진 것이 동부 이촌동 이다. 동부 이촌동의 하천 토지의 주택화 개발이 시작이 된 것은 1964년의 일이

 

다.

 

 

1966년부터 1970년에 걸쳐서, 공무원 아파트, 민영 아파트, 한강 맨션 등의 집합 주택과 같이 외국인을 위한 주택 리버 사이드 빌리지가 건설되

 

었다.

 

 

이러한 외국인 주택, 외국인 아파트는, 대한 거주 공사가 관리를 했었기에, 전세가 아닌 월세, 즉 집세는 월 지불이다. 일본인 주재원 에는, 다액

 

의 외자를 원으로 할 필요도 없이 주택 수당으로 처리를 할 수 있는 메리트가 컸다. 주택은 상하수도에 도시가스가 완비가 되었고, 난방과 온수는

 

집중 관리를 했다. 넓이는 일본의 주택 보다도 넓을 정도로, 식모로 불리는 가정부와 운전수도 고용을 하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리버 사이드에

 

인접한 한강 맨션은, 당시로써는 일반 시민의 손에 닿지 않는 고급 분양 주택이었다. 그 나름대로의 지위와 재력의 한국인이 구입을 했다. 복수

 

호수를 구입을 한 소유자 안에는 일본인을 위한 월세로 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강 맨션 이외의 동부 이촌동의 아파트 에서도 그러한 임대를

 

빌려주는 예가 늘어났다. 

 

일본인 학교

 

일본 대사관은, 1968년 4월에 중학동에 770평의 토지를 구입하여, 건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 새롭게 완성한 대사관으로 이전하여, 동

 

시에 이 대사관 내에 "일본인 보습교"를 개설했다. 

 

1972년 5월, 한남동의 예식장의 2층에 일본인 학교 서울교가 개교를 했다.

 

 

 

대사관 직원과 특파원, 기업 관계자 등 장기 체류자가 거주를 하는 외국인용 주택의 조금 중간 지점에 있는 일본인 학교가 설치가 되어있다.

 

그 후, 경우에 따라서 일본인의 장기 체재자가 증가를 한다. 단신 부임자의 일부나 유학생은 하숙으로도 살았지만, 증가를 하는 기업 관계자는

 

"외국인 주택"을 원했다. 하지만, 남산 외국인 아파트와 빌드업, UN빌리지, 리버 사이드 빌리지는 호수에 한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인 학교

 

에 통학의 편의도 있었고, 동부 이촌동의 한강 맨션, 거기에 삼익, 점보, 왕관, 렉스 등의 한국인 소유의 멘션 거주도 개별로 임차 계약을 맺어서

 

거주를 하는 일본인 세대가 많았다. 

 

일본인 학교의 학생수도 증가를 하여, 1979년에 한강의 남측의 개포동에 토지를 구입해서, 1981년에 신교사를 건축해서 이전했다.

한국 생활 사전 시로마 출판(1987)

 

 

일본인 학교의 스쿨버스 루트의 관계에서, 아이들이 있는 일본인 세대는 점점 동부 이촌동으로 집중을 하게 되었고, 1980년대에는 동부 이촌동

 

은 "일본인 타운"으로 불리게 까지 되었다. 한강 쇼핑을 가면 일본의 미소시루와 쇼유, 큐피 마요네즈, 즉석 요리를 샀다. 쟈운 제과에 가면, 생크

 

림 케이크를 샀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서울에 거주를 하는 일본인의 재류 자격도 다양화 하여, 거주 지역도 광범위 하게 늘어갔다. 동시에, 한국의 주택 사정도

 

크게 변화하여, 외국인을 위한 주택을 제공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빌드업"은 1980년대에 대한 주택 공사로 부터 민간에 매각되어, 잠깐동안

 

은 외국인에게 임대가 계속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에 2채를 빼고 1채로 개장을 해서 고급 맨션으로써 한국 부유층에게 분양이 되었다. "강

 

남 외국인 아파트"는 1994년에 폭파 철거가 되어 소멸했다. 동부 이촌동의 "리버사이드 빌리지"도 1999년에 민간의 고층 고급맨션으로 탈바꿈

 

을 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2003년에 LG 한강 자이 아파트가 세워졌다.

 

그럼에도, 주재원의 주거에 이어진 관계와, 부동산업이 일본인 에게 임대를 하는 것에 익숙한 것 등, 거기에 일본인 학교 스쿨 버스의 경로의 관

 

계도 있었으며, 기업의 주재원 등을 중심으로, 꽤 많은 수의 일본인 거주자가 동부 이촌동에 거주를 했었다. 일본인 학교는, 2010년에 개포동으

 

로 부터 상암동의 디지털 미디어 시티로 이전을 했다. 이것에 의해, 일본인의 거주 지역에도 변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서울 주재 일본인 수(대사관에 재류 신청을 낸 인원수)는, 알 수 있는 범위에서는 이하처럼 되어 있다. 

 

2003年  7,357人
2018年12,137人
2019年14,920人
2020年12,201人
2021年12,665人
2022年12,967人
2023年13,546人

외무성 영사국 정책과

해외 재류 일본인수 조사 통계

2019년의 국민일보의 기사에서는, "1000여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는 동부 이촌동"이 되었고, 서울 전체의 재류 일본인 수부터 보면 결코 많지 않

 

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길게 써온 것처럼의 경위도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부 이촌동에 대한 "일본인 타운"의 이미지는, 서울 주재의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 거기에 한국인의 사이에서 지금도 역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거 같다.

 

ソウルの「日本人タウン」形成史 | 一松書院のブログ (ameblo.jp)

 

한일 국교의 정상화와 그에 따른 일본인 타운 등에 대한 해설이라 가져 옵니다.. 이 모든 일이 결국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을 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냉전에서 미국이 얼마나 다급 했는지를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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