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아빠를 위한 육아일기 - 임신 6주까지

작성자아빠나무|작성시간21.02.03|조회수533 목록 댓글 29

내가 이 일기를 쓸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나는 오늘 (정확하게는 2021년 2월 1일) 나와 아내의 유전자를 절반씩 섞은 생물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의사임에도 현대의학의 대단함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초음파 기계는 아무 고통 없이 34mm짜리 아기집을 찾아내서 나와 아내의 눈 앞에 보여줬다.

 

그리고 그 안에서 5mm 정도 되는 세포들의 덩어리를 찾아내서 나와 아내의 자식이라고 알려주었다. 

 

초음파 기계는 이번에는 악기로 변해서, 아기의 심장이 1분에 114번 뛴다는 것을 '투쿠 우, 투쿠 우, 투쿠 우' 소리를 내면서 들려주었다. 

 

이 소리를 들으려고 우리는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었나 보다. 

 

 

 

아내의 임신이 확인되었으니, 이제부터 육아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기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육아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육아는 바로 시작이다.

 

애기가 되어야 하는 아내를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임신 12주까지를 '임신 1기'라고 한다.

 

이 때는 가장 유산을 할 가능성이 높을 때이다. 

 

이렇게 초기에 유산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음파로 뱃속을 훤히 볼 수 있는 현대의학으로도 그 원인을 낱낱이 알 수는 없다. 

 

결국, 일단 유산이 되면 자기 탓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절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육체적 활동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아기집의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유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원인을 차단한다. 

 

아내는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그러면 남은 남편은 빨래/청소/요리/설거지/집안 정리 등 가사 전반을 담당하게 된다. 

 

아이가 금방 들어선 집은 이 정도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집은 이렇게 되었다. 

 

아내는 누워 있고, 남편은 직업활동에 더해 가사까지 전담하게 되었다. 

 

아내는 이사를 하면서 잠시 쉴 계획이었는데, 심장소리를 듣는 날에 일정을 1주일 앞당겨 퇴사를 하였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게 정립되었다. 

 

 

 

이 시기의 아내는 '입덧'이 시작된다. 

 

매우 고통스러운 증상이다. 냄새에 민감해지고 구역감이 생긴다. 

 

아내는 매우 괴로워했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조금 무리해서 식사를 하면 구토를 하기도 했다.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신체 증상은 괴로움에 더해 피로를 만들어낸다. 

 

아내는 직업활동, 가사를 전혀 하지 않음에도 힘들어하였다. 

 

그리고 직업활동과 가사를 모두 하는 나도 힘들어하였다. 

 

사람은 힘들면 날카로워지고, 날카로워지면 다른 사람을 쉽게 공격하게 된다.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 나에게 화를 낸다고 서운해하면 문제가 커질 뿐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지금 상황에서 아내 힘듦을 경감시키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보류되었다. 

 

입덧 치료제는 기형아를 유발하는 참사를 일으키고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탈리도마이드라는 의학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유명한 사건이다. 

 

새로운 약이 나오고 안전하다고 FDA 인증까지 받았다고 하지만,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의사라는 인간이 과학적인 실험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식이 걸리니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내도 일단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방법을 먼저 찾아보기로. 사실 아직 아주 심한 입덧은 아니기도 하고. 

 

심해지면 그 때는 약물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편의 힘듦을 줄여야 한다. 

 

정신과를 하면서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인관계의 구조를 바꾸려면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이다.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가 관리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관계는 그대로 흘러가버린다. 

 

직업활동에서 배려를 받기는 쉽지 않은 것이 아직은 대한민국의 현실이지만, 요령껏 일을 줄였다. 

 

세탁물 건조기와 식기세척기는 가사를 줄여주는 신이 내린 기계였다. 미리 사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5만 원 정도면 1주일에 한 번 집안일의 상당 부분을 해주시는 분을 모실 수 있는 서비스가 있어 이용하였다. 

 

저녁에 한 번씩 마시던 맥주와 안주를 끊고, 그 돈으로 아주머니를 모셨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를 줄이고, 가사 부담을 줄이니 여유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유로 아내의 화를 받아들이고 인내했다. 

 

아내와 다툼으로 화가 끝나지 않자 시간이 지나서 아내는 미안한 감정을 느꼈고, 나에게 사과했다. 

 

아내의 사과는 나에게 긍정적 결과로 다가왔고, 집안일을 전담하는 것에 목적성을 부여했다.

 

나는 감정적 여유를 추가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여유를 만들어 아내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유로운 대화시간에 아내에게 본인이 알던 신체와 지금의 신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천천히 인식시켰다. 

 

인간이 병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드는 생각은 '내가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라는 생각이다. 

 

신체는 변해버렸고, 고통은 현실이 되었다. 이런 때에 저런 생각은 문제를 해결하는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아내의 신체가 변화했음을 인식시키고, 현재 문제 되는 상황을 점검했다. 

 

1.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소화가 안 된 상태에서 식사를 하면 구역감이 심해진다. 

 

아침 식사는 나 혼자 하고, 아내는 충분히 자고 일어났을 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요구르트를 사놓기로 했다. 

 

2. 침대에서 TV만 보니 재미가 없다. 

 

태블릿으로 본인이 이전부터 해보겠다는 만화 그리기를 독려하고, 만화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콘티와 스토리를 같이 상의하기로 했다. 또한 참고자료가 될만한 책을 구해보기로 했다. 

 

3. 침 냄새가 역하다. 

 

구강청결제를 리스테린에서 테라 브레스로 바꾸고 혀 클리너를 사용한다. 침을 묻히는 뽀뽀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6주 차를 지내면서 서로의 바뀐 역할과 신체,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가고 있다. 

 

내가 이 일기를 계속 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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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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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아빠나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3 ㅎㅎ 아내가 더 고생했지만. 감사합니다!
  • 작성자디아나 | 작성시간 21.02.04 가을이 오면 아기를 만나보시겠네요. 축하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아빠나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4 9월 26일입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디아나 | 작성시간 21.02.04 아빠나무 날짜는 꼭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20일 먼저 태어난 사람)
  • 답댓글 작성자아빠나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04 디아나 20일이면 적절하네요 ㅎ 저는 조금 더 있다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주의기는 한데... 아내는 싫어하겠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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