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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현대판타지]암월검문 복수기. (53)

작성자Khrome|작성시간22.04.03|조회수24 목록 댓글 1

고려 그룹의 박현진 회장비서는 꽤 만족스러운 보고를 받았다. 얼마전 지시한 사항이 모두 적절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채명설을 러시아-벨라루스로 보내면서 추적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국외로 나갈 가능성 또한 있었다. 평양에서는 척주벽을 통해 일을 진행시켰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다른 인물에 의해 누구도 죽지 않고 충돌은 일단락 되었다. 그 인물은 고려 그룹에서도 확인하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시선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뛰어난 무인이었기 때문에 감시의 난이도 역시 두 등급 높게 책정되었다.

남포에서의 일 역시 원하는데로 돌아가고 있었다. 꽤 디테일한 실리콘 가면이었지만 고려 그룹 전문가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전문 감시자들을 통해 감시했다. 그리고 노숙자로 위장한 어느 사파에 들기에도 애매한 브로커 전문 조직의 인원을 통해 숨겨진 조직과 전문가들의 명단을 넘겼다. 그가 도망간 뒤 다시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오자 몇다리 걸쳐 전달되어 미리 준비된 명령으로 그의 외모를 바꾸고 다른 곳으로 보냈다. 만약 데이비드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이 위장된 임무를 주어 그들의 눈에 들게 계속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해당 브로커를 적발하여 정보를 캐내었으니,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이용하거나, 얻어낸 정보를 통해 들쑤실 것이다. 물론 새어나갔다는 소식이 밑바닥에 퍼지면 그 역시 고려그룹이 개입할 수 있는 혼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브로커에게 알게된 지하 시술자 중 하나를 데이비드 리와 그의 일행이 건드렸다고 한다.

***

사각사각.

흙을 밟는 소녀의 맨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원하는 것에 다가가 쪼그려 앉은 뒤 열매의 씨앗을 하나 흙과 함께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손안에 담아 고목 아래에 누워 있는 어느 노인에게 보여줬다. 노인은 몸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함께.

그러곤 열매를 가리킨 뒤, 자신을 가르켰다. 소녀는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벙어리였다. 그리고 소녀는 노인을 가리켰고, 그 뒤 그가 누운 고목을 가리켰다. 하얗게 샌 머리와 수염을 한 노인은 몇번 눈을 껌뻑거린 뒤 열매를 힘없이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고목의 가지들을 바라봤다. 가지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씨앗들이 매달려 있었다.

노인은 눈을 깊게 감은 뒤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 역시 노인을 바라봤고, 노인은 피묻은 손으로 나무를 짚고 위태롭게 일어났다. 그리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피가 묻은 손으로. 소녀는 노인의 손을 잡고 푸른 언덕을 내려갔다.

암전.

“자, 21세기 중반 이탈리아 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뽑히는 ‘고목을 흔드는 바람’이었습니다. 영화의 특징으로는 대사를 극히 배재하는 기법과 그러면서도 여러 복선과 대구를 직관적으로 알게끔 해주는 연출이죠. 영화 전체에 걸쳐서 대사는 총 15번 나옵니다. 그리고 문장형 대사는 고작 7번에 불과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자마자 어떤 상황이고, 눈빛과 표정, 행동으로 어떠한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알게 해줍니다.”

턱수염과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중년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강의했다. 댄디하면서도 차분한 그의 모습과 함께 인기 있는 교수이자 강의였다. 학생들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영화를 3D로 체험할 수 있는 VR 안대를 내려놓고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해석을 낳은 마지막 장면은 정말 유명하고 많은 곳에서 패러디, 오마주 되기도 했죠. 그러나 대부분은 실패했습니다. 패러디하기엔 너무 무겁고, 오마주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만약 대사를 넣는다면, 물론 그것은 작품과 엔딩을 망치는 길이지만, 자신의 해석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대사를 넣는다면 어떨게 넣고 싶습니까?”

교수는 잠시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저라면 이런 대사를 썼을 것 같습니다. ‘씨앗에는 무궁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요. 뭐든 될 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어떤 어른들은 이걸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마저도 바치려고 해요. 전 그게 싫어요. 나이든 나무라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해요. 이렇게 가능성을 지닌 씨앗을 맺었잖아요.’ 이렇게 말입니다.”

일부 학생들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슬쩍 주억거리거나 감수성 뛰어난 학생의 경우 눈가가 촉촉해지기까지 했다.

“소녀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씨앗이라면, 그러한 씨앗을 맺거나 성장시키는 것 역시 고목의 가능성이자 역할입니다. 나이들었다고 해서 뒷방 늙은이로 살 수도 있지만.. 뭔가 맺을 수도 있지요. 제가 성공한 영화 감독으로 은퇴하고 편안한 삶을 즐길 수도 있지만 아직도 강단에 서있는 이유입니다.”

교수는 잠시 책상 모서리에 배치된 금속질 텀블러 쪽을 바라봤다. 그 옆엔 책상에 내장된 시계가 있었고 강의를 끌낼 때가 됐음을 알았다.

“다음 시간까지 이 영화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과 감상을 작성해오는 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학생들이 영화와 교수가 제시한 대사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느낌으로 천천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교수 또한 자신의 짐을 느릿하게 정리하면서 학생들이 모두 나갈 때 쯤 옆을 바라보았다.

“다음주 과제 받고 싶으면 잘 처신하는 게 좋을 거요.”

남자가 고갯짓을 하자 교수 역시 나지막이 한숨을 흘리고 따라갔다. 키와 체구가 작은 편인 다른 일행이 그의 뒤에서 따라왔다.

.
.
.

곽용태는 교단에서 강의를 하는 남자가 무허가 수술 전문가라는 사실에 놀랐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것도 한 때 이름 꽤 날렸던 명감독인데도 말이다.

“고문하기 전에 몇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러지 마시오. 그냥 다 답할테니.”

데이비드는 의도적인 코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고문하기 전에 하는 말과 한 뒤에 나오는 말을 비교해봐야 하거든.”

그말이 끝나자마자 데이비드는 남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퍼엉!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중수법의 묘리로 겉으로 봐서는 절대 알 수 없지만 안쪽에서부터 무너지는 수법이며, 위력과 방식에 따라 악질적인 공격이 될 수도 있는 수법이다. 옛시절에는 암살에도 자주 사용됐고 드러나는 흔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부조리나 고문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규제된 기술 중 하나이다. 물론 그것도 역사와 전통이 긴 정도 그룹은 익히는 게 허가되어 있거나 일부 사파 집단, 마인의 경우 몰래몰래 익히고 있기도 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익힌 사람 역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기술.

다시 말하자면, 내가중수법을 익히고 있고 서슴없이 쓸 수 있다는 건 보통내기가 아니거나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겉멋든 멍청한 놈일 것이다. 그리고 박중경 교수의 눈에 이들이 후자의 바보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콜록, 콜록!! 컬륵.. 끄헙..”

“이건 긴장 좀 하라고 친 거다. 자, 질문하지. 네가 손댄 놈들 중 기억나는 놈들을 다 꺼내.”

불법 수술, 시술 대상자에 대한 신상을 꺼내라는 말. 그러나 그는 흘러나오는 침을 닦으로 말했다.

“그걸.. 콜록,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당신들, 고려그룹에서 나오지 않았소? 그럼 내가 모른다는 걸.. 끄아악!!”

이번에는 점혈법.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곳을 꾹 눌렀다. 시간은 좀 걸려도 내공을 돌려 해혈할 수도 있지만 감히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내력의 차이가 컸다.

“누가 이름 말하래? 기억나는 특징들, 네가 손을 댄 부위와 장비, 파츠, 목적. 다 말하라는 뜻이다.”

중년의 나이에 끔찍한 고문을 받고 싶지 않았던 박중경 교수는 자기가 기억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기 시작했다. 단순 의뢰자부터, 고려그룹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보내온 사람, 죽거나 다치거나 납치되어 흘러온 사람들을 해부하고 분해해서 장비나 장기를 꺼내 밀거래하는 등 자신의 범죄와 협조에 대해 기억나는 모든 것을 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이제.. 그만.. 나.. 다 말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은 끝나지 않았다. 고려그룹의 일원으로 보이기 위해서라면 다소 손속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용태는 데이비드의 거침없고 망설이지 않는 행동에 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악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차가운 행동들. 그러나 어떤 적의나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처럼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 지금은 2팀에 있지만 교류하는 동기 중 하나가 고려그룹의 잘 조련된 요원들에게서는 어떤 의도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마 데이비드의 그런 행동은 고려그룹 요원들의 모습을 모사하고 있는 것일테다.

몇번의 거친 손길이 더 있은 뒤에야 데이비드는 기절한 교수를 내려다보다 용태에게 나가자는 고갯짓을 했다. 용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늙은이가 잘도 버티는군. 일부러 기절하라고 세게 때렸는데.”

“2번 정도 깨우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한번 기절하자마자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상하게 생각할테니까.”

용태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뭡니까? 듣자하니 기억력이 좋아도 너무 좋던데.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알아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데이비드는 실리콘 가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잘 만들어진 물건이다보니 어색하지가 않았다.

“뭐, 그렇지. 하지만 가장 최근 1년 동안 놈이 손댄 사람들은 3명도 채 안 돼. 이 나이 먹고도 수술에 손을 댄다는 건 그냥 사람 몸을 헤집고 닫는 걸 즐기는 거겠지. 그 3명 중 한명이 유독 의심스럽다.”

젊은 청년, 고려그룹의 투자를 받고 있다는 의혹을 가진 러시아 레온테크의 의안 제품, 뼈의 코팅 등.. 다른 녀석에 비해 비싼 수술이자 신체적 업그레이드, 게다가 의뢰자 또한 의심스러울 뿐 고려그룹일 가능성 역시 높다고 했다.

“어디갔는지 모르잖습니까.”

“그거야.. 몇군데 들려보면 되겠지.”

데이비드는 손목의 갤럭시 워치를 툭 쳐서 홀로그램을 띄웠다. 미리 정해놓은 몇몇 지점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밀수입, 밀입국 관련 조직과 관련이 있는 장소들이었다.

***

기천은 홀로 신의주에 도착했다. 국정원 친구들은 이미 개천 근처에서 헤어졌고, 데려온 두 팀원 역시 하나는 평양에, 다른 하나는 남포에 남겨뒀다. 명목상의 명령은 고려그룹과 관계된 움직임과 채명설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임무는 그들이 사고치면 무당그룹과 관계 되었다는 흔적을 지우는 것. 여기서 흔적이란 집행팀의 시체나 신분 역시 포함된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애들도 아니고.”

머리를 슥슥 긁은 그는 본사로 추정되는 공장에 정문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공장이었지만, 그가 가진 정보가 맞다면 공장 지하에 대규모 공간이 있을 것이다. 고려그룹의 진짜 본사는 거기에 있을 것이고.

“거기! 이봐! 여기 들어오시면 안..”

퍽!

“돼긴 왜 안 돼. 왜 이런 공장에 5급 무인이 있지?”

스스슥.

그의 주변에 열댓명의 무인들이 각종 장비들을 들고 둘러쌓다. 기천은 씨익 웃고는 그들을 둘러보고 광오하게 말했다.

“취업이 너무 안 됐거나 아니면 너무 잘 됐거나겠지. 다 덤벼도 좋다. 단, 목숨은 보장 못한다.”

누구냐고 묻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기천에게 덤벼들었고, 6초가 지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아무래도 내가 맞게 온 모양이군. 자.. 그럼 여기 집주인 좀 보실까.”

정문으로 들어가, 필요한 것들을 확인하고, 정문으로 나온다. 기천이 세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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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_Arondite_ | 작성시간 22.04.03 ㅋㅋㅋㅋㅋㅋ 야 이거, 하는짓이 완전 막나가는 사파의 도련님인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문으로 들어가서 다 보고 정문으로 나오겠다니, 다 박살내버리겠다는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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