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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현대판타지]암월검문 복수기. (60)

작성자Khrome|작성시간22.05.20|조회수36 목록 댓글 1

아직 덜 완성되었지만 바실리에게 확인받고 정리한 명단을 장교들에게 넘기고 여러 약속들을 주고 받은 명설은 그 길로 흘렙에게 찾아갔다. 물론 흘렙 본인은 모르겠지만.

처음 몸이 재구성 될 때 같이 있었던 BID를 통해 전달 받은 CCTV 정보를 통해 그가 호텔로 갔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꽤 조심했던 모양이지만 사도 무인의 소양 중 하나가 추적이다.

호텔은 그다지 고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벨라루스에서는 꽤 돈을 써야할 것이다. 그가 세금을 정직하게 냈다면(물론 아니라는 정보가 있지만) 그의 소득으로는 쉽게 낼 수 있을만한 비용은 아니었다. 호텔 벽에 붙은 채 창문을 통해 그를 바라보았다. 두명이 보였다. 나신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옆자리에는 훨씬 어려보이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명설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름은 아나스타샤 미콜로바. 15살이었다.

바실리 패밀리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소녀이기도 했다.

***

명설이 장교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부름에 접촉했던 시간, 흘렙은 그녀를 자기가 아는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저녁식사를 하기에 가격이 만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는 남자답게 보이길 원했고, 동시에 이 정도 금액은 쉽게 낼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과거 군대에 가고 싶어했으니 다소 마른 체격에 기흉 전력 때문에 가지 못했다.

정보가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레스토랑의 주인이 그의 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뿐만이라면 순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언론인인 그가 알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이 레스토랑은 몇년전 형편이 어려웠을 시절 식품안전법과 위생관리법을 위반한 전적이 있다. 그러나 흘렙은 그 사실을 함구해주는 대신 이곳에서 자신이 누구와 저녁식사를 하는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를 위한 전용 자리와 그곳에 가기 위해 폐쇄된 통로 역시도.

레스토랑 주인은 빚내서 만든 레스토랑이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약간의 돈을 들여 레스토랑 내부를 리모델링 했고, 조금 좁긴 했지만 나름 고급으로 화려하게 꾸민 방과 가벽을 쳐서 독립된, 그리고 그가 확인하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는 좌석을 만들어냈다. 이 리모델링에는 흘렙 역시 약간의 자금을 지원했고, 힘든 시절의 실수를 함구해준 흘렙에게 감사를 표하며 식사할 경우 가격을 깍아주겠다고 했으나 흘렙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정가 그대로 낼 것을 고집했다.

돈이 아깝거나 억울하다 생각한 경우 그는 언제든 흘렙을 배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겠지만 그때엔 이미 경제적으로 상당히 나아진 시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흘렙의 안목이었는데, 레스토랑 주인이자 주방장이었던 그 남자는 팬이었던 흘렙의 비밀스러운 활동에 같이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활동이 레스토랑 주인에게 자극적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흘렙의 허물을 알고도 지지하고,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충분히 눈감을 수 있는 남자였다.

가령,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의심할 수 있는 상황조차도 그저 이 상황에 낀 동료의식을 느끼며 일상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극성을 즐기며 더더욱 그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어서 들거라. 여기 음식은 내가 아는 최고거든.”

객관적으로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다. 일류는 되지 못했고, 가까스로 이류를 조금 넘은 정도? 그러나 종업원의 수준을 본다면 시설과 음식이 고급일 뿐 접객역량은 평범한 레스토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흘렙의 자기가 아는 최고라는 것은 그의 입맛이나 주인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면 그저 듣는 이에게 그러한 인상을 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네, 고마워요. 미스터 흘렙.”

흘렙은 종전의 허세 떠는 태도 대신 좀 더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흘렙이라고 불러도 된단다, 얘야. 너무 늦었는데 부모님이 걱정하시진 않겠니? 내가 데려다 줄테니 걱정 말거라. 그러고보니 이름도 묻지 않았구나. 이름이 뭐니?”

흘렙은 자상하고 조금은 느린 말투로 질문을 쏟아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정신이 없었지만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차분히 대답했다.

“아나스타샤예요. 아나스타샤 미콜로바. 하지만 내 친구들은 절 아냐라고 불러요. 저도 그렇게 불리는 게 좋고요.”

“그렇구나, 아냐.”

“그리고 또.. 집은, 없어요. 대신 큰 집에서 친구, 동생이랑 언니들이랑 같이 살아요. 늦는다고 뭐라고 하진 않을 거예요. 아이들이 워낙 많은데 아이들 관리를 애들에게 시키거든요.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돈 버느라..”

흘렙은 그녀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알았다. 또한 그녀를 관리하고 보호해야할 어른들이 아이들을 세심히 관리하지도 않는다는 것과 이 작은 소녀가 자주 늦은 시간에도 밖에 나간 경험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싸구려 창부처럼은 아니다. 그녀는 그런 년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 내 방송은 어떻게 알게 되었니?”

“처음은 라디오에서 였어요. 오래된 라디오라 고장났는지 틀 때마다 다른 채널이 나오거든요. 그러다 언제부턴가 미스터 흘렙.. 아니, 흘렙의 방송이랑 이상한 외국어 노래가 나오는 방송만 나왔어요. 아랍어 같았어요. 그래서, 원래 우리들은 잘 때 라디오를 틀어놓고 자는데 그때 듣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말도 잘하고 똑똑하시고..”

흘렙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그래, 그래. 잘 알았다. 그렇게 들었구나. 일단 마저 식사부터 하자꾸나. 음식이 식으면 벨렌코프가 실망할테니.”

그는 의식적으로 주방장의 이름을 언급했다. 이 자리가 그렇고 들어오는 과정이 그렇듯 그와 이런 ‘고급 레스토랑’의 주인과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네, 흘렙.”

둘은 아무 말 않고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식사가 이어졌다. 그러면서 흘렙은 이 아이를 어떻게 요리해야 좋을지에 대한 전략을 구상하는 것에만 몰두해 있었고 그 때문에 평소보다 좀 더 늦게 먹어야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아냐 또한 긴장 때문에 식사 속도는 느렸기에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종종 대화가 오고 갔지만 그저 어색하지 않기 위한 시덥잖은 이야기가 주를 이었다.

흘렙이 교양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천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누르며 닦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식으로 닦는 것보다 문질러 닦아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닦았기에 입꼬리 부분에 약간의 음식물 가루가 묻었다. 그는 그것을 모르고 식사를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나자꾸나.”

아냐는 그의 얼굴을 보았고 무심코 그를 불렀다.

“아, 잠시만.”

그러나 그녀는 식사와 대화로 그가 동경하는 남자와 특별한 관계가 됐고 친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나이도, 신분도, 무엇보다 오늘 처음 만난 어른 남자를 불렀다는 것에 놀라며 말을 잇길 망설였다.

“왜 그러니?”

흘렙은 그녀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라고. 그녀가 무언가 할 것이라고.

아냐는 그를 따라 입을 닦던 냅킨의 다른 쪽 모서리를 쥔 채 그에게 살짝 다가가 그의 입가를 닦아줬다.

“그.. 입가에 아직 묻으셔서..”

아냐의 귀는 이미 붉어져 있었고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걸 본 흘렙은 그녀의 손목을 탁 쥐었다. 놀란 그녀는 몸이 살짝 굳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윽하면서도 힘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그 뒤로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그가 알고 있는 경로는 도로의 CCTV 3개를 제외하면 노출되지 않는 경로였고 그 간격 역시 그리 길지도 않았다. 그렇게 도로를 달렸지만 많은 시간을 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는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구석진 곳에 있는 호텔이었지만 건물은 크고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입구에는 사람이 없는 무인 호텔이었고, CCTV는 조작된 영상만 반복되는 물건이었다. 영상을 확인하면 시간은 흘러가는데 24시간 동안 해가 뜨고 지는 것 외엔 누구도 들어오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찍히지 않는 영상만 반복된다.

애초에 이 호텔 자체가 성매매, 마약을 비롯한 불법적인 일과 관련된 곳이었고 흘렙 또한 그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경쾌하다 싶을 정도로 익숙하게 요금을 선불하고 아직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아냐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으레 권력자, 혹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답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곳을 좋아했다. 그렇게 9층 방에서 그는 미성년자와의 불법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명설은 몰래 침입하며 그 현장 증거물을 수집하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일을 잘 해주었다는 감상만을 남긴 채.

***

바실리는 명설을 앉혀놓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직 보고는 시작하지 않았다.

-민생은 안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러시아와 중서유럽 사이에 벨라루스는 크고 작은 이익을 노렸지만 국력의 한계는 폴란드나 우크라이나를 더 우선시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나라는 경제성장도, 내부 안정도 어려웠습니다. 힘이 약했기에 외부의 영향에 쉽게 휘둘렸고 유럽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가까운 우리 벨라루스를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일리야 막시모프 후보의 연설이었다.

-우리는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소련 시절 세계는 우리를 누구도 우습게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련 시절을 그리워 합니다. 그때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소련이라는 향수가 우리 가슴 속에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고,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전 저는 러시아 대사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통합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연대한다고 EU체제에 거부감을 느끼던가요? 우리 또한 동유럽에 그러한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련이지만, 우리가 아는 소련이 아닙니다. EU에 가입하지 못한 나라들, 그리고 EU에서 따돌려지는 약소국가들이 다시 한번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우리만의 질서. 우리만의 질서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 질서에서 벨라루스는 또 한번 강해질 것입니다. 그 질서를 세우는 것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될 것입니다.

일리야는 시민들에게 거대한 세상을 쥐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의 분위기 또한 그의 말에 강렬하게 호응했고 그의 이름과 당의 이름을 외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화면을 보는 두 사람은 무미건조하게 볼 뿐이었다. 일리야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군대입니다. 강한 군대가 있어야 강한 경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을 보십시오. 반군이 쏘아올린 미사일에게서 자국 무역선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보복을 했습니다. 경제를 지킨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고 망가뜨리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음을 알려줄 수 있는 강한 주먹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전 강한 군대를 가질 것이고, 해이해진 군 기강을 바로잡겠습니다.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해 우리 벨라루스를 강국으로 만들 것이며, 유럽의 변경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습니다. 우리가, 세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삑.

TV는 꺼졌고, 별 다른 감상 없이 보고를 요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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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설의 보고를 받은 바실리는 눈을 잠시 내리깔며 생각을 정리했다. 서로 다른 두가지 일을 동시에 보고받았고 그 때문에 각기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 바실리가 아무리 뛰어난 지적능력을 지녔다해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바실리는 두가리 문제를 서로 하나로 묶어서 다루려고 했다.

“쿠데타 건으로 흘렙을 띄워주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쿠데타가 시작되기 전에 정보가 새어나가면 안 된다. 의심할 뿐더러, 계획 역시 효과를 잃어버리게 된다.

“민스크 타임은 물론 흘렙은 전형적인 야당 지지 성향이 강하지. 그는 일리야에 대해서도 굉장히 호의적으로 보고 있어. 그가 강한 군대를 만들고 군 기강 해이에 대해 말했으니 군 기강 문제에 대한 제보를 해주면 되겠군. 그건 이쪽에서 맡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자네는 장교들에게 민스크 타임과 접촉하여 쿠데타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형성해보지 않겠느냐고 말해보게. 만약 부정적이라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그러죠.”

“밤새 고생했네. 쉴 건가?”

명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 같은 무인들은 며칠 안 잔다고 탈나지 않습니다. 잠시 수련이나 하죠.”

과거 절정무인이라 불렀던 7급 이상이 되면 1주일 정도는 안 자도 별 문제 없다. 다만 피로 자체는 쌓이기에 비슷한 수준의 적과 맞딱뜨릴 경우 그 작은 차이로도 승패, 생과 사가 갈리기에 가급적 잘 쉬어주는 편일 뿐.

***

명설은 본인에게 할당된 연공실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꺼내서 잠시 검강을 형성했다 곧바로 흩었다.

흐릿하면서도 간질간질한 이 느낌. 검강을 형성할 때 느꼈던 감각이다. 비록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도구에 의해 억지로 형성한 것이지만 검강은 진짜이다. 아니, 아마 ex12등급의 진짜 검강과 마주하면 깨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검강은 검강이다.

“기의 소모가 크군..”

어째서일까? 명설은 검강 형성이 가능한 Ex12등급, 혹은 초절정이라 불리는 경지에 대한 단서를 이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어째서 기의 소모가 큰 것일까? 단순히 절정과 초절정의 차이가 다룰 수 있는 내력의 차이에서 오기 때문에? Ex12등급에 도달한 자들에 대한 지식은 과거에서부터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그것을 좀 더 체계적이고 다양한 사례와 함께 분석했다. 초절정에 도달하면 체내외의 구분이 없어져 단전에 기를 담는 것이 아닌 통로처럼 된다고 한다. 즉, 외부의 기를 체내의 단전에 모으고 몸안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체외의 기 자체를 그대로 온몸으로 돌리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절정 무인이 다룰 수 있는 내력은 무한하되, 단지 무공이나 공법에 따라 한번에 발출할 수 있는 기의 규모만 달라질 뿐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지식과 사례를 가지고 분석한 것이며, 실제로는 어떨지 본인이 도달하지 않거나 현 Ex12등급 무인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일 가능성은 높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초절정 무인이 검강을 자유자재로 뽑아내고 그것을 미친듯이 뿌릴 수 있는 것 역시 설명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것은 막대한 내력을 가진 무인이라면 어느 정도 흉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은 어떨까? 명설은 자신이 억지로 뽑아낸 검강이 아마 진정한 초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이 뽑아내는, 아마 자신보다 훨씬 강한 10, 11등급 무인의 검강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 그것은 기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기. 기는 본질적으로 무형의 기운이다. 마치 열 같은 개념의 에너지일 뿐이지 실존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검기는 공기에 섞인 가루, 혹은 가루가 공기와 뭉친 것에 가깝다해도 실존하는 형상을 띄고 있고, 검강은 아예 그 자체로 실재하는 물리적 형체를 갖춘다. 즉, 검강의 단계에서는 부정할 수 없게 물질화가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설명은 여럿 있지만 명설의 관점에서 그것은 ‘스며듦’으로 설명이 된다.

그의 무공은 그림자를 매개로 한다.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거나, 거의 환술에 가깝지만 신체를 그림자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 그림자로 이어져 있다면 그림자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거나 특히 은신이라는 면에서 아주 탁월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림자 아래는 명설의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자는 그런 것이다. 세상을 덧칠하고, 밀도가 높아질수록 세상의 윤곽을 지운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빛의 역. 다시 말해, 무언가를 가리기에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다. 그림자는 빛이 없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림자라는 물질이 광원을 마주한 물체의 반대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명설의 무공으로는 그림자를 연성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림자, 좀 더 정확히는 어둠의 속성을 지닌 내력이 그림자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그림자가 진 영역을 점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 내에 짙게 낀 안개나 밀도 높은 습기와 유사하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기의 속성은 사물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검기나 검강 등, 물체에 내력을 담는 것을 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명설의 기운, 내력이 물질의 분자 사이사이를 채워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력을 담은 물건은 그만큼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고 뭉툭한 모서리에 내력이 모이면서 더욱 날카로워 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력이 스며드는 이 빈 공간의 밀도가 더 높아지고, 더 세밀한 공간까지 채울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분자보다 더 작은 공간. 원자 사이사이마저도 내력이 스며들어 채워진다면 그것이 곧 검강이다.

이는 명설이 검기를 이루는 분자보다 더 작은 공간을 이해하고 (무의식적으로라도) 감각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든다면 검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 이는 현대 물리학이나 양자역학과 같은 지식을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자신의 무학 내로 포함시켜서 이론을 일궈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에서 기존 자신의 무학과의 충돌이 발생한다면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수정에 의해 기존의 무학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고, 위력이 약화되거나 그 무공 성질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도의 무학이 만들어지긴 쉽지만 발전하기 어려운 이유가 이러하다.

그들은 자신의 무공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새롭게 도입하는 논리와 지식체계가 자신의 무학, 혹은 무공과 충돌하게 된다. 이를 제대로 해결할 역량이 없거나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져드는 것이다. 본래 안정적이었던 무공이 모순과 논파가 발생할 경우 무공의 논리로 돌리던 기존 내력의 흐름과 방식, 순서 등이 어그러진다. 내력이 원래 돌아야할 경로와 순서대로 돌지 않고, 양 또한 제멋대로가 될 수 있다. 기혈은 그렇게 뒤틀리고 이를 통제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이 주화입마이다.


명설이 검강을 뽑고나서 느끼는 그 흐릿한 느낌, 간질간질한 감각은 자신이 본래 느낄 수 없었던 경지를 느끼게 된 여파일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긴 어려웠다. 원래 자신은 느낄 수 없던 분자보다 더 낮은 단계의 공간. 더 스며들 수 있는 공간을 느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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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_Arondite_ | 작성시간 22.05.20 이번 글은 잔잔하고 무난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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