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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현대판타지]암월검문 복수기. (78)

작성자Khrome|작성시간22.11.04|조회수25 목록 댓글 2

김태원은 어떻게 해서든 지금 상황을 타개해야 했다. 자기가 죽어서라도.

“흐으읏..!!”

내기와 선천지기마저 일부 끌어다쓸 정도로 내력을 끌어올린 태원은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이를 꽉 문 채 방어 자세에서 무리할 정도로 빠르게 공격으로 전환했다. 머리 위로 올린 검은 그대로 벼락같이 명설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명설은 아쉽지만 이 기회를 그대로 흘려내기로 했다. 검에 머금은 내공을 폭발시켜 그대로 태원과 데이비드를 밀어내고 그 반탄력은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뒤로 쭉 밀려나갔다. 극히 아슬아슬하게 명설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태원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히려 공격이 실패한 태원은 그대로 내력이 역류하며 눈, 코, 입에서 피를 쏟아냈고 당연히 기혈 역시 뒤틀렸다. 그러나 태원은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았고, 그덕에 날아가는 도중 등에 붙는 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손에서는 청명한 기운이 밀려들어왔고 태원의 기혈이 안정을 찾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 도움은 곧바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명설이 다시 날아들어온 것이다.

명설은 내력을 그림자화하고, 주변 공간의 그림자들을 물성화시켜 주변의 돌, 나뭇가지 등의 사물을 그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역시 검에서 내뿜은 검기를 날리고 그 뒤를 따랐다. 검기 하나는 태원, 본인은 데이비드에게.

데이비드는 이를 악물며 태원의 몸에서 손을 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깨어진 검, 맨몸에 가진 것 뿐이라곤 품에 숨긴 제식 단검 뿐이었고 명설이 검으로 반탄지기를 터뜨려 밀어낼 때 이미 왼손에 꺼내들었다. 그런다고 상황은 쉽게 타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명설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고 실전경험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게 느껴졌다. 정파 우위의 사회에서 조직화된 무력집단을 동원하여 폭력단에 가까운 사파들이나 언제든 소모할 수 있는 개념의 중국 평범한 하급 무인 특수부대와의 교전 역시 쉬운 게 아니었지만 진짜 살벌한 싸움은 언제나 사파와 사파끼리 발생했다.

정파와 사파의 싸움은 이익과 동시에 이념의 싸움이었고 진짜 강자들은 한 집단 내에 언제나 소수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다 싶은 사파들은 정부와 정파의 견제로 억제되었고, 그것을 버틴 거대 규모의 사파 조직은 그들 스스로의 이권을 위해 알아서 사리기 마련이었다. 그들 중 상위간부 급은 언제나 정파에서도 손을 대기 어려운 강자들이었지만 그룹 단위에서 오랫동안 노하우를 축적하고 국가기관과 다른 문파그룹 단체의 공조 및 협조가 가능한 조직화된 무력의 더 정교하고 다각화된 공격에는 그들 역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령, 평균적인 질이 높은 집행팀이 작정하고 차륜전 무대를 만들어 상위 간부, 보스급을 수적 우위에서 집중타격한다면? 한두 등급 우위는 금세 꺽이는 법이다. 

더욱이 같은 사파라고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의 탈락과 도태가 기회가 되는 법이다. 되려 경찰, 검찰 등 법 집행기관 및 정보기관에 인맥을 가지고 관리를 받는 입장의 경우 심각한 범죄를 발생시키기보단 눈엣가시 같은 적대, 경쟁조직에 대한 밀고를 더 선호하곤 했다.

그러나 사파들의 싸움은 사파 진영의 한정된 파이를 나눠가지는 더 살벌한 이권 싸움이었고, 정파가 굳이 손대지 않는 영역이거나 손댈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업권의 투쟁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폭력집단들은 조직의 체면과 위신을 극히 중요시여겼기 때문에 조직 내부에서도 강력한 수직적 권위가 존재했고 이에 대해 사소한 침해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말단부터 보스까지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이의 도전이나 도발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사소한 행동조차 꼬투리가 잡혀 제재와 처벌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했다느니 봤으면서 와서 인사하지 않았다거나, 오는데 뛰어오지 않았다느니 하는 것.

그런 이유로 경쟁조직간의 기싸움은 살벌할 수밖에 없었고 형님동생하던 조직들조차 사소한 이유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 역시 뒷세계에서는 꽤 흔한 편이다. 특히 그 지역을 주름잡는 큰형님격 거대 조직이 없는 경우에는 그 자신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더더욱 잔혹하고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걸 볼 수 없는 조직들이 연합해서 하루아침에 수십명씩 죽어나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조금 더 수준 있다고 해도 체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더 조심스럽고 교활할 뿐 도전과 도발에 물러서지 않는 경향은 더더욱 강해진다. 이 수준에서는 증거를 쉽게 남기지 않고 집행팀과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는 강자들이 간부진을 장악하고 있기에 한두 사람의 고수가 타격대 내지는 암살자가 되어 경쟁 조직이나 하부 조직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정파 조직이 그들 자신의 정보력과 정부의 정보력을 합쳐 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적인 타격과 체포 및 무력화 작전이 벌어져 우위에 선 싸움을 해서 그렇지 이들 하나하나의 위험성은 그들이 목숨을 걸어온 횟수만큼이다.

그리고 정파와 정부가 합심하여 사파를 한번 쓸었다고는 해도 작은 조직에서 시작해 사파 잔당들을 규합, 견제, 무력화시키며 한 지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규모 점조직을 형성시킨 명설의 수완과 실력은 상당한 편에 속한다. 오히려 살아남고 도주한 고수와 그에 준하는 이들이 정파천하 이후의 세상에서 쓸려나간 이권을 선점하고 더 많은 파이를 확보하려는 포부를 지닌 이들은 최소한의 세력균형이 있었던 시기와 비교하자면 더욱 피튀기는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파 세계에서 고려 그룹의 눈에 들 정도로 성장한 명설은 상당히 많은 피를 봤을 것이고, 여러번 목숨을 걸어봤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데이비드는 명설의 경험이 녹아있는 수싸움에서 이미 지고 시작한 셈이다. 무공으로 정면에서 부딪혀도 쉽지 않을 자인데 무수하고도 다양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갈고 닦인 전투경험은 데이비드와 같은 정파 고수들이 같은 기간 동안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데이비드는 즉시 깨달았고,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딘가에 연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쩡..!!

깍, 끼릭. 뻐벅!!

태원은 눈의 실핏줄이 터져나가면서도 날아오는 검기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고 눈앞에서 기적이 벌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의 눈앞에 방어막이 생성되어 날아오던 검기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날아오던 잡동사니들 역시 방어막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데이비드가 어느 기업의 간부로부터 받은 부적술사 김윤여의 방어부적이었다. 그 수준은 10급 무인의 검기 한번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받아낼 수 있는 물건이었다. 태원은 그것을 보고 당장의 위기감에서 벗어나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지만 곧바로 찾아오는 위기감에 정신을 억지로 잡아야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기혈과 내력의 안정에 집중해야했지만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분명했다.


“역시 팀장급은 다른가보군.”

스마트폰에서 발동시킨 방어부적은 김태원을 지켰고 데이비드에게 날아온 명설의 검은 데이비드의 단검에 막혔다. 그러나 상황이 더 나아진 건 아니었다. 데이비드의 단검은 명설의 검과 닿자마자 검기를 밀어내고 단검의 날을 파고 들었다.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이것은 아주 위험했다. 데이비드는 즉시 단검을 움직여 틈에 맞물린 채 꺽었고 명설은 그 의지에 기꺼이 화답했다. 꺽이는 방향을 따라 손목을 돌렸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스마트폰을 이미 놓았고 주먹을 들어 명설을 타격하려 했다. 그러나 명설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 진인에게 개처럼 얻어맞은 경험 덕분에 데이비드의 맨손 근접전투는 우습게 보일 정도였다. 데이비드가 단검을 꺽고 주먹을 뒤로 당겼을 때 명설의 왼주먹은 이미 내어지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단검을 꺽기 위해 힘을 줬지만 명설은 오히려 오른팔의 힘을 뺐고 대신 왼주먹에 힘과 무게중심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미 한 수 뒤쳐진 데이비드는 명설의 주먹에 오른팔을 급히 접어 몸에 붙히며 방어했지만 명설의 준비가 더 빨랐던고로 마치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이 공격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탄력에 몸을 싣고 후퇴를 시도해볼 수 있었지만 명설이 곧바로 따라붙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과 이 공간 자체가 그의 의지에 움직이는 적대성을 띄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명설은 곧바로 뒤돌아 태원의 등에 검을 휘두를 것이기 때문이다.

명설은 이 유리한 상황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다시 검에 힘을 밀어넣어 단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물론 그가 온 힘을 다한다면 단검 역시 깨어지거나 베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건 너무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고 데이비드를 죽이게 만들 것이다. 명설의 목적은 그가 살아서 무당그룹의 몰락을 지켜보게 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아버지를 구하지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던 무력함과 절망을 맛보게 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의 오른손은 데이비드의 왼손을 봉인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의 근접격투술이 명설보다 우월할 수 있을까? 한 진인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설은 데이비드보다 훨씬 노련하고 교활하며 엄청난 경험을 쌓아올린 한주창의 근접격투를 겪었다. 무당 특유의 금나수법은 물론 전통있는, 그리고 비교적 최근 만들어진 CQB 타입의 근접술, 한주창 개인이 연구하고 공개하지 않은 몇가지 테크닉까지.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 진인의 조건이 매우 불리해서 였을 뿐 검강이라는 기적이 없었다면 무승부, 운이 안 좋다면 오히려 명설이 한번쯤은 당했을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그런 싸움을 겪었기에 명설에게 데이비드의 박투술은 이미 얻은 데이터의 열화판에 불과했다.

명설은 먼저 오른발을 뻗어 데이비드의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것은 거리를 좁히기 위함인 동시에 그의 보법을 어그러뜨린다. 데이비드 역시 그걸 피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왼발을 뒤로 끌어당기려 했지만 명설이 그의 왼다리를 걸고 그걸 막았다. 이미 타격이 있는 데이비드의 오른팔은 재빨리 내공을 돌려 억지로 움직이게 했고 홍조권을 펼치며 굽힌 손가락으로 명설의 옆구리를 뜯어가려 했다. 그러나 명설은 한 진인에게 맞아가며 배운, 무언가 하기 전에 두들겨서 그럴 기회를 앗아가는 수법대로 날을 세운 손끝으로 팔오금을 찔렀다.

데이비드의 홍조권은 즉시 무위로 돌아갔고 오히려 팔꿈치가 접히며 동작의 처음으로 돌아갔다. 데이비드는 그가 자신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접힌 팔을 몸으로 당기며 수비 자세를 펼쳤다. 동시에 오른발을 위로 올리며 무릎으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명설은 재빠르게 왼발을 부딪혀 무릎이 올라오기 전에 힘을 흩었고 다시 발은 땅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군..’

데이비드는 한 진인과 같은 자기보다 윗선의 고수들과 맞붙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의 기세가 같은 등급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한 것은 맞지만 그의 무공 성취와 위력은 자신보다 높다고 할 수 없다. 무공의 성취만큼은 근소하게 자신이 우위인 것이 분명하다. 비슷한 무위를 지닌 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지금 보여주는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모든 공격은 파해되어 그에게 제대로된 공격 한번 해본 적이 없고 2:1의 싸움조차 너무 빠르고 쉽게 무력화됐다. 이제 데이비드는 자신감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고려해야할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을 살려준다고 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해도 이건 너무 무력하게 당하는 것이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의도를 먼저 읽고 있었고, 내가 무엇을 하든 먼저 움직였다.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움직임의 가짓수를 한정시키고 자신의 전술적 우위를 유지하며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무인에게는 상당한 격차가 있지 않는 한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거의 이상적인 수준의 전투.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데이비드의 당당함을 드러냈던 날카로운 눈빛이 흔들리고 흐려졌다. 절망이 차오른다. 이길 수 없다는, 단순히 힘의 차이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 수준이 다르다. 벽을 앞에 둔 것처럼.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너무 빈약한 무장으로 왔나? 너무 방심했나? 명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것인가? 실력을 숨겼나? 속임수가 있나? 무공의 차이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약한 것 뿐이다. 명설은 준비했고 그는 그러지 못했다는 건 변명거리가 아니다. 목숨을 두고 싸우는 환경에선 어떻게든 승패가 갈리고 생과 사가 갈린다. 사파의 고수가 약자에게 죽은 적이 없었을까. 정파의 강자가 약자에게 허를 찔려본 적이 없을까. 전쟁에서 반칙은 없고 정정당당함을 요구할 수 없듯이, 지금의 전투가 그러했다. 명설이 유리한 모든 조건들은 그의 무기일 뿐이고, 자신은 빈약한 무장으로 그에게 싸움을 건 것 뿐이다. 더 강한 무장을 가진 군인이 그렇지 못한 군인을 상대로 더 우월한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듯, 지금의 상황이 그러한 것 뿐이다.


데이비드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 끓어 올랐다. 이것을 분노라고 한다면 분노겠지만 한국인에겐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었다. 한. 그 또한 한국인의 핏줄을 이은 혼혈인이고 한국인의 정서 속에서 살아왔다. 그가 강해지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던가.

깊은 한은 무력한 절망 속에서도 끈질긴 무언가를 낳곤 한다. 집요한 무언가가 남기 마련이고, 그것은 무공이라는 형태로 심상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무인에게 어떻게든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무력이 강해진 것은 아니다. 그의 무공이 강해진 것도 아니다. 어쩌면 깨달음의 재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끈질긴 정서는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착상조차도 감정의 영역에서 질료로 삼는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절망감을 한으로 바꾸었고, 훈련받은 전투원으로서 냉철함을 돌려놓았다. 그렇게 나온 질문은 이것이다.

이제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것을 위해 그의 정신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오랫동안 형이라 부르지 않았던 남자, 그의 형, 유기천과의 대련.

기천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그보다 우월했고 무공은 단지 그중 하나의 갈래에 불과했다. 어려서부터 내력을 발출시키는 경지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그는 데이비드와의 대련에서 한가지 전술을 고집했다. 정면에서 권기를 날리고 그것에 대응하는 데이비드의 수를 파해하는 것. 어떤 곳이든 피하면 뒤따라오는 기천의 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고 막으면 막는대로 뒤따라오는 기천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경험과 능력이 부족했던 데이비드는 단순히 자신의 경지가 그보다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나이가 차고 여러 경험을 하며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이끌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게 고민한 결과 내놓은 파해법은 단순했다. 정면. 오직 정면으로 뚫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기천이 그 대응법을 의도하고 한가지 전술만 고집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것이 기천의 성향에 맞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사례는 다른 예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법이었다. 최소한 다른 방향성은 새로운 전술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법이었다. 설령 그에 따라 새로운 전술적 불리함과 위험성을 리스크로 갖는다 하더라도.

‘호오.’

데이비드의 눈빛이 변했을 때부터 명설은 그의 대응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의 대응은 비슷한 세대에 속하는 정파 무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창의성이 있었다.

먼저, 데이비드는 발밑으로 내공을 폭사시켰다. 지향성 반탄지기. 그것을 통해 바닥을 터뜨렸고 그에 따른 반발에 몸을 싣고 회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회피가 아니라 다른 선택을 했다. 바닥을 터뜨려 구멍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무릎을 굽히고 천근추의 수법으로 반발을 최소화했다. 폭발의 반동에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적절히 조절하며 명설에게 반 발짝 더 접근한 데이비드는 그대로 왼손의 단검을 놓았다.

검을 놓는 것을 수치이자 불명예로 여기는 정파인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더 불리한 무기를 쥔 입장에서 더더욱 위험한 선택이다. 그러나 명설은 그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위협이라 느끼지 못했다.

데이비드와 명설은 아주 잠깐이지만 공중에 떠있었고 데이비드는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그대로 명설의 오른팔에 자신의 왼팔을 엮고 팔꿈치로 명설의 손목을 내리 눌렀다. 명설은 오른손목을 돌리거나 팔을 접기 어려워졌다. 또한 왼다리를 명설의 오른다리에 걸며 상대의 몸을 지지대로 삼았다. 그 상태로 오른 주먹을 그러쥐고 몸안으로 당긴 뒤 짧고 빠른 잽을 명설의 눈에 날렸다.

명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가 오른팔과 다리를 엮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왼주먹은 데이비드의 옆구리를 두들길 수 있었다. 그의 갈비뼈를 부수어뜨릴 생각으로 내력을 담아 갈겼지만 데이비드는 그걸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막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주먹을 날렸다. 첨성권의 묘리가 담긴 주먹이었기에 쉽게 맞아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틀었지만 잽은 가장 빠른 맨손 공격이었다. 이어지는 공격에서 자신의 회피속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다는 견적이 나온 명설은 과감히 반탄지기를 형성시켜 데이비드를 떨어뜨리려 했다.

데이비드 역시 반탄지기를 형성시키며 받아쳤다.

둘의 내공은 비슷한 수준이었고 양으로 따지자면 온갖 좋은 건 다 제공 받은 데이비드 쪽이 더 많았다. 그러나 위력은 비슷했기에 둘의 의복은 갈갈이 찢겼고 상처와 내상 역시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무식하고 즉각적인 대응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명설의 의도적인 담대함은 그러한 대처 역시 그저 받아들일 뿐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음 수를 생각해냈다. 그는 잠시 반탄지기로 흩어진 그림자들을 빠르게 모아 데이비드의 몸에 엮었다.

특히 오른팔과 손목을 묶어낸 그림자는 비록 그 물성이 물질 그 자체와 같지 않았기에 엉성한 젤리 같은 느낌으로 제약을 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제약으로도 데이비드의 잽은 느려졌고 방해받았다. 그렇다고 이걸 떨치기 위해 반탄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할 수는 없었다. 명설이 그걸 보고 비릿하게 웃었다. 데이비드는 그 웃음을 보고 눈만 돌려 태원을 바라보았다.

명설의 어깨너머 태원은 그림자에 둘러쌓여 있었다.

“너희 무당의 무공은 언제나 신체를 기준으로 하지.”

내력을 발출할 수는 있지만 신체 외부의 무언가를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심지어 5급조차 제대로 도달못한 전수천의 독공조차도 1m 내에 자신의 통제력이 가해지는 액체, 주로 독을 비록 제한적이지만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는 무공의 기초 개념, 특히 기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하는 물질도 아닌 빛의 반대 개념에 불과한 그림자를 물성화시키는 암월공과 무당의 태극 계열 공법은 그런 이유로 개념 자체가 다르기에 무학을 제외하면 무공 그 자체에선 접점을 찾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무당에선 허공섭물이 초절정의 근거가 된다. 그들의 무공 체계 내에서 허공섭물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그마저 초월한 경지에서나 허공섭물이 가능해진다.

“협상하자는 거냐?”

명설의 말은 지금 자신이 데이비드를 잡아둔 채 위태로운 상태인 태원을 죽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데이비드는 무슨 수를 쓰던 그걸 막을 방법이 없고.

“협상은 비슷한 급에서나 하는 거고. 저 녀석을 살려준테니 돌아가라.”

데이비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라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왜지?”

“둘 다 이길 수는 있지만 널 당장 죽일 생각은 없고.. 앞으로 갈 곳이 있는데 늦으면 안 되거든. 근데 내가 저 녀석을 죽이면 넌 끝까지 하려고 들겠지?”

아마 죽을 생각으로 달려들 것이다. 팔다리가 잘려도. 그렇다고 죽지 않을 정도로 제압하기엔 명설의 경지가 그 수준에 도달하진 못했다. 데이비드 역시 정파의 습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죽이지 않겠다면 그에게 다양한 경험만 쌓게 해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니 보내주겠다는 거다. 물론 따라와서 방해하겠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기에 저 친구 목숨이 간당간당해보이는군.”

“….”

데이비드는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관성에 불과한 태도라는 것 역시 자각하고 있었고, 그는 한결 누그러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나도록 하지.”

명설은 피식 웃으며 비웃었다.

“꼴에 자존심은.”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마치 자신 따윈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것이 데이비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 젖어있을 새가 없었다. 당장 태원을 구해야했다. 다행인 건 역사가 깊은 정파의 무공은 같은 동문과 같은 것이기에 내력을 몸에 전달시키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력을 타인에게 전수해주는 것은 어렵지만 치료와 회복, 무공 교육을 목적이라면 문제 없다.

데이비드는 곧장 태원의 등뒤에 양손을 올리고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가 내력을 주입하며 느낀 태원의 내부는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어가는 산의 초입을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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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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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_Arondite_ | 작성시간 22.11.04 오옷 ㅋㅋㅋㅋㅋㅋ 그 복수가 아니었군요 ㅋㅋㅋㅋㅋㅋㅋ 패배감은 확실히 안겨주었으니 다음은 절망감 차례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Khrom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04 어떻게든 결국 복수를 하긴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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