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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현대판타지]암월검문 복수기. (85)

작성자Khrome|작성시간23.01.06|조회수40 목록 댓글 1

“과거 배화교라 불리던 마교는 이 세상이 거짓된 것이라며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죠. 척박한 환경에 살아가던 이들인지라 내세보다 현세의 풍족함을 추구하기 마련이건만 사는 게 하도 힘들어서 죽어서라도 좋은 곳에 가야겠다는 심보의 발로인지 그러한 신앙으로 결집할 수 있었죠. 그들에게 이 세상은 거짓된 것이고 가짜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러한 사상은 마교 외부의 세계에도 동일학 적용되었지요.”

명설은 마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무공은 그들만의 사상 때문인지 정도를 역행했습니다. 사도가 정도와 다른 길이라면, 마도는 아예 정반대의 길이었죠. 그렇기에 마도와 사도는 정파와 경쟁했지만 서로 합일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죽음을 추구한 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집단 자살이라도 했겠죠. 대신 그들이 추구했던 진짜 세상으로의 길은 무武였습니다.”

무. 무술. 무공. 무력. 무를 정의하는 방식과 문법은 다 달랐지만 살아남은 가르침은 모두 제각기의 경쟁력이 있었다. 심지어 마공조차도.

“그들이 살아가던 세상은 각박했고 척박했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었고 그럼에도 그들을 살아남는 걸 미덕으로 여겼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살아남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가. 바로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순응하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약육강식에서 강자의 입장에 서고 싶었고, 약자의 입장에서 희생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배화교의 등장은 그들에게 단순히 살아가는 것 이상을 말했죠. 그들은 이 가짜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 방식은 바로 힘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이 가짜 세상을 깨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것. 그러기 위해 투쟁해야할 것은 삼라만상의 모든 것.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바로 본래 마교인들이 투쟁하고 이겨내야할 것들이었습니다.”

명설은 말을 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가짜이기에 오직 진짜임을 확신할 수 있고 의지를 집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 뿐이었으며, 자신을 단련시켜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배화교의 목적이었죠. 이것은 단순히 강함을 추구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바위를 부수고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는 것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것에 투쟁합니다. 도가의 가르침이 이 세상과의 합일이라면 마교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파괴지요. 그 이유는 이 세상이 가짜이기 때문이며, 그 가짜 세상에 순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살아간다는 것. 좀 더 세분화 해서.. 숨을 쉬는 것. 인간은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먹는 것.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잠을 자야만 하며, 늙습니다. 다치기도 하고 죽임 당하기도 하죠. 이것은 이 가짜 세상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법칙이기에 평범한 이들은, 심지어 무공의 고수들조차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멸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넌 반드시 이 세계 안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병들고 죽을 것이라고.”

숱한 마교에 대한 이야기들과는 자뭇 달랐다.

“그러나 마교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무공의 고수들은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마시지 않고 숨쉬지 않아도 아주 오랫동안 버틸 수 있습니다. 초절정에 이르면 백년 이상은 어렵지 않게 살아가지요. 그렇다면, 무武를 통해 이 세상과 싸울 수는 없는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모든 것들을 무의 이름 아래 굴복시킨다면, 그러한 원리와 법칙이라는 이름의 가짜 세상이 강요하는 바를 거부할 수는 없을까? 마교에게 무는 그것을 뜻합니다. 그들에게 세상 모든 것이 투쟁의 대상이라고 했었죠? 그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숨쉬는 것, 먹는 것. 그러한 인체의 항상성 역시 투쟁의 대상입니다. 두 발을 딛는 땅은 물론 대해의 바다 역시 투쟁의 대상이며, 하늘과 별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하여 이겨낼 적이었죠.”

이 우주 모든 것. 그것이 마교의 적이었고, 이 우주의 대적자는 마교였다.

“우주의 법칙 역시 마교는 싸워 이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기론이라고 아십니까?”

바실리는 고개를 저었다.

“동양 사상이라는 것 정도만.”

“마교는 중원과의 사투 동안 잃기만 한 게 아닙니다. 많은 것을 배웠죠. 이기론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기는 물질.. 힘. 이 우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무인들이 사용하는 내공 역시도 기의 일종입니다. 원래 내공을 기라 뭉뚱그려 부르던 때도 있었죠. 리란 이치. 우주의 원리입니다. 빛이 기라면 빛을 발하게 하는 원리가 바로 이. 번개가 기라면 번개를 치게 만드는 원리가 바로 리인 셈이죠. 그들이 이기론을 받아들인 이후 그들의 투쟁 대상은 훨씬 늘어나 이 우주의 물리법칙 그 자체로 확장되었고 그만큼 그들은 강해졌습니다. 그런 힘의 극단이 바로 천마이죠.”

마교의 교주이자 최강의 마인.

“지금은 그저 가장 강한 마인이나 마교의 교주 정도를 천마라 일컫지만, 실제 천마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말했듯이 마교의 목적은 이 우주 그 자체를 적으로 삼아 부수고 깨뜨려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걸 가능케하는 것은? 당연히 가장 강한 마인일 수밖에 없죠. 가장 강한 마인이기 때문에 천마라 부르는 게 아닙니다. 가짜 세상을 부술 가장 가능성 있는 이가 바로 천마인 셈입니다. 이 가짜 세상을 부수고 진짜 세상으로 이끌어줄 존재.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존재. 가짜 세상의 강요를 거부하고 진짜 세상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존재. 마교가 말하는 강자존의 본래 의미는 그런 것이었죠.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대의는 천마를 위시로 하여 절대적인 질서와 충성을 만들었고 강자는 존중 받고 존경 받았습니다. 힘들고 척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지키고 진짜 세상으로 이끌어줄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천마의 무武는 고작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천마군림보라고 아십니까? 그것은 천마가 마교의 가르침을 통해 대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언제 어느때가 됐든 천마는 세상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하늘을 깨부술 것이라고.”

십만대산 주변과 중원은 언제나 그들이 평정해야할 대상이었지만, 마교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것을 넘고자 했다. 중원은 그저 마교의 목적에 있어 한 티끌에 불과했다. 그저 그 티끌을 넘지 못했을 뿐.

“동양에서 하늘이란 이 우주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 그 자체를 하늘에 비유하죠. 신의 의지를 하늘에 빗대기도 합니다. 마교가 말하는 하늘이란 정도의 질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평화를 부수고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천자를 죽이고 중원을 멸망시키겠다는 선포 역시도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타천打天이란 이 세상 그 자체를 부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마교인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잊고 그저 힘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됐지만 본래 마교란 그런 집단이고 천마란 그런 존재입니다.”

마인들은 마교의 가르침을 잊었고, 이는 정부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타천을 말하며 세상의 질서는 물론 세상 그 자체를 뒤집겠다는 이들과 어떻게 상종할 수 있겠는가. 가짜 세상이라며 사람을 덧없이 죽이고 의지를 통해 파괴만을 일삼는 존재와. 그래서 마교는 없어졌고, 그저 마공만이 나돌아다닐 뿐이다. 마인들이 강하지 못한 이유이며 그들이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존재한다면 정부의 통제 아래에서 소모품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될 뿐.

“흔히 마인들을 아주 강한 광인과 같은 말 쯤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좀 더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죠. 단순히 마공이 폭주했기 때문에 주화입마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무학적인 문제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부수겠다는 의지란 얼마나 강대해야겠습니까? 하나의 나라를 뒤집거나, 심지어 한 사람을 처음 죽일 때조차 많은 각오가 필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수많은 참극을 본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미치게 마련이죠. 그들은 세상을 부수겠다는 대의로 결집한 이들이고, 가장 강한 자는 가장 세상을 부술 가능성이 높은 자를 말합니다. 그들의 강대한 의지에 대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 법이죠. 그들의 정신으로 세상을 대적할 수 없는 겁니다.”

“그들은 그저 순수할 뿐입니다. 세상의 파괴에 순수할 뿐이죠. 본디 마교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가장 순수하게 정제하라고 말합니다. 이 가르침이 도가의 그것과 비슷하게 들릴진 몰라도,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자신을 정제하라는 말은, 이 세상의 강요을 거부하여 온전한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지라는 것이죠. 어떤 것에 모든 것을 던진 자는 그것에 순수한 사람입니다. 복수에 순수하기 위헤선 복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서 멀어져야만 하고 포기해야만 하죠. 심지어 때로는 자기 신체, 정신. 그리고 목숨마저도요.”

“그렇다면, 미스터 보긴스카야. 마교의 이야기가 누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실리는 자신에게 의지를 강제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어떤 강함과 어떤 정신이라도. 어떤 강대한 세력이 그에게 요구를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는 무슨 짓을 해서든 자신에 대한 강요를 무력화할 것이다. 설령 부숴 없애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짓을 저질러서라도.

“내가 무공을 배웠다면 마교인이 됐을 지도 모르겠군.”

“그보다는 천마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죠.”

명설은 스마트폰을 조작해 뉴스를 켰다.


-태일 무학관의 맹허규 관장이..
-대한체육회 허승재 이사가..
-태허도검문 박철 장로가 사망한 것으로..
-한국무학협회 윤민주 고문이..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군요. 안전한 곳을 찾아드릴까요?”

바실리 역시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디든 추적 당하겠지. 자네 옆이 가장 안전할듯 싶군.”

“..괜찮으시겠습니까?”

바실리가 얼마나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지는 것인지 알고 하는 말일까?

“내가 내려야할 지시가 있을 것이네.”

그건 명설에게 내릴 지시가 아닐 것이다.

***

사건이 벌어지기 몇시간 전.

“끄읏.. 헉.. 헉.. 팀장님..”

“집중해.”

“죄송.. 으윽..”

데이비드와 태원은 그룹 자산을 동원해 가장 빠른 복귀행 전세기를 탈 수 있었다. 탑승객은 단 둘 뿐. 그렇기에 데이비드는 경계할 필요 없이 태원의 치료를 도울 수 있었다.

“끄으윽..”

데이비드가 태원의 등에 손을 올려 내공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급하지만 급해서는 안 된다. 데이비드는 태원이 버틸 것이라 믿고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하나하나 착실하게 들끓는 기혈을 안정화시키고 있었다. 그 역시 힘든 일이었지만 같은 종류의 무공에 같은 내공을 가진 명문 정파 그룹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능하더라도 더 어렵고 위험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저 때문에..”

“..제발. 태원아. 집중해. 지금은 그저 기혈을 다스리는데 온 신경을 다 쏟아야할 때다.”

데이비드는 전세기에 보관된 엘릭서를 복용했음에도 내력이 바닥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멈춘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다스린 기혈이 차츰 뒤틀릴 것이다. 데이비드는 그가 자신을 위해 그랬듯, 자신의 선천지기 일부를 끌어올려 태원의 몸에 전달했다.

비행기는 성층권을 조용히 날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어느 정도 태원의 기혈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몇시간 정도였지만 그들이 느끼기엔 며칠은 되는 듯한 작업이었다. 잠시 엘릭서로 내력을 보충하고 다시 태원의 기혈과 부상을 회복시켰다. 태원은 도중 기혈의 안정에 반항하는 폭주에 정신을 잃고 막 다시 일어난 참이었다.

“계속 자도 된다.”

태원의 얼굴은 안 보였지만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 때문입니다. 제가 모자라서 그랬습니다..”

“아니다.”

“아닙니다. 제가 모자라고 부족해서, 저 뿐만 아니라 팀장님마저도 위험하게 만들 뻔 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제가 실수만..”

데이비드는 그가 아픈 것처럼 아픔을 느꼈다. 오판은 태원만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절박함을 느낀 것은 그가 더 컸다. 싸움은 그의 의지로 일어난 것이고, 태원의 부상 역시 그가 초래한 실패다.

“그만.”

잠시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원아. 네 잘못이 아니다. 우리 생각보다 그가 강했고, 우린 모든 것이 읽힌 거야. 그가 더 많은 준비했고 더 오랫동안 칼을 갈아왔던 거야. 우리가..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내가.. 너무 급했어. 그렇게 싸워서는 안 됐는데. 눈앞의 표적에 집중할 수 없었고 마음이 흔들려 버린 거야. 내 실수를 없었던 것처럼 바로 잡고.. 불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한 발자국만 남았다고 생각해버린 거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 내가 앞서나간 거고 네가 따라온 거야. 내가 널 등떠민 거고 네가 떠밀린 거지.”

“그러니 태원아. 네 잘못이 아니다. ..네가 날 욕해야할 일이지.”

태원은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일 수 없는 것만큼이나.

“팀장님.. 전..”

“…형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가 이렇게 마음을 열어본 적이 있는가? 이건 어떤 면에서 사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전우에게 할 수 있는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런 것이 처음이기 때문일까.

“…사형.. 전.. 모르겠습니다. 절 위로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말 마십시오. 제가 모자랐던 게 맞습니다. 제가.. 애초에 제가 너무 흔들렸어요. 실패를 겪었습니다.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실수로 팀원이 죽을 수도 있었고 다쳤습니다. 운이 좋아 살았지요. 그래서 팀장님과 함께라면 옛날처럼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제 무책임입니다. 제가.. 제가 사형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던 겁니다. 판단, 지시, 역할. 모든 것을요. 단지 시키는데로 하기만 하면 됐던 때처럼. 그래선 안 됐던 건데.. 그 대가로 전 위험에 처했고 저 뿐 아니라 팀장님.. 사형마저도 위험하게 했습니다.”

태원은 조금 몸을 떨고는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수치심과 죄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전 제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데이비드는 태원의 등에서 손을 때고 위를 올려다봤다. 보이는 것이라곤 비행기의 천장 뿐이지만 마치 저 하늘 꼭대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데이비드는 그대로 고개를 꺽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저 지하 깊은 곳을 보는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많은 것을 눈에 담게 한다. 데이비드는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내려놓듯, 가슴 속의 것을 내뱉듯.

“태원아.. 네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안다. 나도 이미 겪었던 것이니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너의 실패와 절망, 고통, 슬픔, ..고독조차도. 난 이미 다 겪었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그게 결코 끝이 아니라고.”

어렸을 적. 좁고 지저분한 나무 동굴 같은 불꺼진 집에서 어머니의 품에서 유일하게 빛내던 TV를 보았던 때. 그리고 그 이후 한국에서의 삶.

“난 사생아다. 아버지가 낳고 버렸지. 사실 날 돌보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당신의 신분이 부자유스럽게 했지. 이러선 안 되고, 저래선 안 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분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셨지만 그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 아직도 사랑한다고 하셨지. 그래서 왜냐고 물어봤다. 나라는 보답을 주었기 때문이라더군..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셨어. 마치 한국 사람들처럼..”

한국인들은 사랑한다 대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해서 미안한 것들이 한이 되어 가슴 속에 남는 것이다.

“어머니께선 사랑을 미움보다 더 충만하게 가지라 하셨지. 하지만 난 어렸고 그러지 못했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더럽고 지저분한 집안에서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한 혼혈아의 삶인데. 어느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남자들이 찾아왔다. 아버지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지.”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데이비드의 눈에 역광 속의 검은 그림자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종류였다.

“한국에 도착하고나니 아버지는 이미 광증으로 죽고 말았다더군. 주화입마라는 것도 몰랐을 때야. 어머니의 장례를 지낸지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초상을 치뤄야 했다.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 난 그곳에서도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못했어. 내 존재는 비밀로 취급했다는 건 그때에도 알았지. 그래도 아무 생각이 안 들었어. 그냥 새롭고 낯설기만 했다. 그곳에서 난 할아버지를.. 회장님을 만났고, 내 형제들을 만났지.”

유여기는 그 당시에도 인세에 초탈했고 낯선 형제들은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난 양발이 안 좋았고 치료 받았다. 무공을 익혀야 한다는 이유 역시 있었고.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망가진 것인지라, 뼈를 티타늄으로 보강해야했지. 무거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당시 내 형제자매들은 날 집안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어. 나 역시 그런 의식도 없었고.”

그럼에도 그는 살아갔다. 타성에 젖어서.

“그리고 무공을 배웠다. 처음이었고 연약했기에 너무나도 어려웠지. 수백번의 도전과 수천번의 실패. 너무나도 늦어버린 도전은 더 많은 노력을 요구했고 난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어. 그저 가문의 힘 덕에 강제로 영약과 장비를 때려박아서 올린 경지였지. 그럼에도 난 무공에 집중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난 무공에 미쳐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무언가에 순수해진다는 건 그만큼 포기한 게 많기 때문이야. 아니면 이미 잃어버렸거나. 난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 역시 잃었다. 가족들은 날 거부했고 나 역시 그걸 받아들였지. 담긴 게 없는 사람은 무엇이든 채워넣어야해. 그렇지 않으면 시체가 될테니. 그래서 매일 같이 무공을 익혔다. 괴로웠지.

하지만..

“그러나 하루하루 강해지는 걸 느꼈어. 100번 하기도 어려웠던 줄넘기가 1만번을 넘어가고, 3바퀴로 돌기 어려웠던 연무장이 수십 바퀴를 돌아도 지치는 법을 몰랐고 손목만 다치던 검 역시 내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았지. 기를 다루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었어. 그래, 너도 무공을 익히며 겪었던 것이었겠지. 그러나 네 주변에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다. 실패할 때 일으켜 세워주고 모르면 가르쳐주고, 힘들 때 옆에 있어주며, 웃고 떠들고 즐기고.. 사랑하고 보다듬어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거야. 넌 나와 다르게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몸에 담았다.”

무공의 기초를 넘기고 종종 데이비드와 함께 교육 받았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태원이었다. 물론 그는 엘리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주 보진 못했지만 명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사제관계는 형성되었다.

“네가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난 이런저런 요구들을 받았다. 무공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라고. 때론 성공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실패했다. 그럴 때마다 난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했어. 아무도 내게 손을 뻗어주지 않았고,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으니까. 난 언제나 혼자였다. 내가 알아서 해야했지. 내 절망은 누구와 나눌 수 없이 온전히 내 것이었고 내 실패 역시 위로받지 못한 채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내것들이었지. 10년을 넘게 웃는 법을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

그가 머리를 기울여 태원의 등에 대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중저음 목소리의 진동이 태원의 몸을 간지렀다. 그것에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느날.. 내 형과 대련을 시키더군. 비무라기보단 대련이었고. 그러기엔 교육적인 목적이었고. 형…은 언제나 당당했고 여유 넘쳤다. 짓궂게 놀리던 때도 있었고 실패를 조롱할 때도 있었어. 대련 때마다 날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으면서 가지고 놀듯이 질질 끌어댔지. 그러면서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날 이겼어. 난 그 한 수를 결코 넘을 수 없었고. 하지만 이젠 알겠더군. 그건 형님 나름대로의 표현이었다는 걸. 배다른, 그리고 10년 동안 본 적도 없었던 나와 어떻게 접점을 가질지 몰랐던 거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니 친구들 대하듯이 했던 거야. 난 친구가 아니었는데. 난 너무 어렸는데..”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롭고 모든 것에 능숙해보여도 서투른 건 있는 법이다. 특히 가족의 일일 때는 더더욱.

“그럼에도 세상은 살아가지더라. 무공과 임무만이 내 전부였지만, 이젠 알겠어. 세상은 그보다 더 넓고 많은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원한다면, 노력한다면 내 손을 뻗어 그것을 내 안에 담을 수 있다는 것도.”

그가 처음 손을 뻗은 것은 수년 동안 그의 곁에서 보좌해준 사제이자 동료, 그리고 친구였다.

“널 잃고 싶지 않다. 넌 지금의 실수를 이겨낼 거야. 더 앞으로 나아갈 거고, 그 곁엔 내가 있을 거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나 또한 겪었던 일이고, 그 다음이 어떤 것인지 아니까. 너 또한 그럴 수 있을 거다.”

태원은 고개를 숙였다. 몸은 떨리지 않았지만 데이비드는 그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돌을 던졌다면 파문이 일어나길 바랄 뿐이다.

“후우… 하아….”

태원은 숨을 깊게 들이키고 내쉬었다. 그리고 답했다. 그가 내민 손을 잡는 것으로.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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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절반 정도 썼던 게 윈도우 오류로 포맷하면서 다 날아가서 초반 서술이 좀 달라지긴 했네요. 말하고자 하는 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데 서술 방식과 내용이 좀 달라져서 아쉽..

 

대충 데씨가 태씨(??) 위로하는 초입까지만 썼다 날아갔는데, 그때는 이것보다 덜했음에도 오그라드는 거 같아서 못쓸 거 같았는데 역시 밤에는 감성이 센치해져서 그런가 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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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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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_Arondite_ | 작성시간 23.01.06 ㅎㅎㅎ 저거 데씨랑 태군은 좋은 군신관계인 줄 알았더니 사실상 형제관계군요. 감성을 적절히 자극해주시니 좋습니다.
    천마에 대한 저런 설정은 뭐랄까, 너무 오랜만에 봐서 오히려 신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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