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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SF]잿빛 클로버 (6)

작성자Khrome|작성시간23.11.17|조회수20 목록 댓글 0

베른하르트 거리를 나선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은 중무장을 한 채 바람소리와 먼지 바람에 숨어 움직였다. 정면에 선 사람은 리하르트. 그는 이번 작전에 스스로 자원한 몇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이전 전투에서 얻은 방탄 방패를 전면에 세운 채 움직이고 있었다. 먼지 사이에 섞인 작은 돌 조각, 마모된 플라스틱 조각 따위가 날아오며 틱, 틱. 하는 소리를 내었다.

-…헬무트는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 리하르트.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야.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해.

-씨발..

리하르트와 헬무트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전기를 다룰 줄 아는 리하르트네 집안과 헬무트는 필요에 따라 자주 작업을 같이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개인적 친분을 나누기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나마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또한 어깨 너머로, 경험적으로 서로간의 기술을 약간이나마 배우기도 했으며, 헬무트는 자식이 없었기에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 혹은 조카 같은 느낌을 섞어 리하르트에게 소극적으로 차량 관리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리하르트는 그런 그의 씀씀이를 몰랐으나 충분히 한 사람의 역할을 할 때 쯤에는 그를 큰 형 내지는 작은 아버지, 혹은 조금 어색한 삼촌 같은 느낌으로 대했다. 헬무트의 무뚝뚝한 성격과 그다지 붙임성이 없는 리하르트의 관계는 너무 가까운 친밀감을 드러내지 않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소극적 관계 였으나 오히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두터운 신뢰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의외로 그들의 성향은 잘 일치 하는 이해관계를 만들었다. 그런 그가 차량 감독을 맡지 않고 직접 현장에서 총을 들고 뛰는 것은 그런 이유가 존재한다. 베론 영감이 있을 땐 아무 말 않다가 이동 중 그가 부린 고집이기도 하다.

-정지. 전방의 거리엔 저격수가 있을 거야.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

나이는 리하르트가 29살로 가장 많았지만 일행의 리더 역할은 빅커스가 맡기로 했다. 본래라면 이런 일을 이끌만한 실력 있고 경험 많은 어른이 리더를 맡아야 했으나, 몇년에 걸친 깡패나 범죄 조직에 의한 불특정한 암살, 습격, 사고 따위로 공동체의 허리 역할을 맡아야할 이들이 적지 않게 죽거나 다쳐서 그럴만한 전투 경험을 가진 이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헬무트가 그러한 경험이 있었으나, 본래 전투와 외부 활동을 주로 담당했던 이들은 이미 없고, 2선급인 그가 벙커 탐색 도중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빅커스는 그 스스로의 성향 때문인지 이러한 전투와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실력과 경험을 갖추었기 때문에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격수는 몇몇 셸터를 두고 주기적으로 자리를 바꿔. 그리고 그 셸터 역시도 바뀌는 편이고. 지금 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어. 누구 하나 나가서 몸으로 맞아보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위치를 찾는 방법밖에 없는데, 놈들도 바보는 아니니 총구 소음이나 불꽃을 숨길테고 사람 하나 목숨을 버려가면서도 위치를 찾을 수 없으면 헛짓거리 하는 거지.

-그럼 어떡하지? 방탄방패 믿고 빠르게 밀고 가볼까?

브람스의 말에 빅커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된 방탄헬멧을 쓴 그의 머리는 조금 무거워 보였다.

-애초에 사람 수부터가 많아서 다 숨을 수도 없고, 저격수가 하나라는 보장도 없어.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무조건 한명 이상은 맞을 수밖에 없지. 그리고 저 도로 중간에 있는 차량 보여? 가까이서 보면 구멍 뚫린 곳들이 꽤 있을 거다. 엄폐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엄폐물 역할을 못해. 차량은 방탄 사양이 아닌 이상 무조건 총알에 뚫리거든. 권총탄에 조차도. 그나마 엔진 부위 뒤쪽에 숨으면 안 맞을 수도 있는데, 저건 분명 엔진 들어낸 걸거고. 쉽게 말해 저건 함정이란 말이지.

빅커스는 고개를 앞으로 까닥여 거리 너머를 가리켰다.

-그렇다고 정면에 보이는 건물 없이 뻥 뚫린 공간을 지나치겠다고 한다면 지뢰를 밟고 다리가 잘리고 공기가 빠져나가며 고통받다 죽을 거고. 운좋게 튕겨나가 몸으로 지뢰를 하나 더 터뜨리면 덜 고통 받겠지.

좌우로 뻥 뚫린 8차선 도로의 건너편에서 건물의 한쪽 면에 몸을 숨긴 그들은 빅커스의 경고만으로 위험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들이 서있는 길의 건너편은 바로 공원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도 건물 서너개는 있을 법한 자리 너머에야 콘크리트 건물이 서있었다. 반면 건너 왼쪽으로는 15m만 가도 건물이 쭉 늘어서 있는데, 도로를 사이에 둔 건물을 속에 어디에 몇명의 저격수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그대로 돌아가자고?

리하르트는 불만을 내보였다. 그럼 여긴 왜 온 거냐면서.

-베론 영감이 놈에게 듣기를, 이 근처에 비밀 통로가 있다더라고. 길게 설명할 생각은 없어. 따라와.

그러면서 그는 총을 내리고 리하르트에게서 방패를 건네 받고 스스로 전면에 섰다. 리하르트의 M1A가 그의 어깨 너머를 겨냥하며 엄호하며 따라왔다. 그 뒤를 따라 브람스, 한스, 글라우버, 볼커는 말 없이 따라갔다.

골목을 몇 굽이 돌고, 문짝마저 떨어져나가 폐허가 된 건물 몇개를 지나치고 나서야 어느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벽에 걸려진 낡은 군청색 천을 치우니 그뒤로 문이 하나 있었다. 아주 오래된 듯한, 단단하면서도 손때로 인해 매끄러워 보이는, 그럼에도 시간과 환경에 의해 손상이 된 문이 나타났다. 빅커스는 이제 방탄방패를 리하르트에게 넘기고 한스에게 말했다.

-여기 경첩에 WD-40 좀 뿌려봐.

베론 영감이 포로에게 듣기로는, 일부러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놔뒀다고 한다. 그곳을 지키고 있을 누군가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WD-40을 쓰면 일시적으로 윤활 효과를 얻기 때문에 소음을 없애거나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있는 기름 역시 지워버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심한 소음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지금 그들이 신경쓸 건 아니었지만.

한스는 허리춤의 작은 가방에서 포켓형으로 쓸 작은 WD-40을 꺼내 칙, 칙 뿌렸다. 무소음이 필요한 상황으로 이해하고 충분히 뿌리며 아주 얇은 갈고리형 치과용 이쑤시개를 꺼내 경첩의 사이 사이를 파내기도 하고 WD-40을 묻혀 꾹꾹 누르기도 하고 긁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도구를 가방에 넣은 후 빅커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작업이 끝났음을 신호했다.

빅커스는 리하르트의 어깨를 살짝 눌렀고, 리하르트는 방패를 전면에 비스듬하게 세운 뒤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열리고 그 믿으로는 검은 통로만 보였다. 불을 킬 수 없었고, 계단 너머에도 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리하르트는 문을 열어 젖히며 조용히 밑에도 문이 보인다고 말했다. 빅커스가 알았다는 의미로 그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대었다 땠다.

그것은 내려가도 좋다는 의미 역시 담겨 있었고, 리하르트는 팔에 힘을 주고 무거운 방탄 방패가 벽이나 계단에 닿아 소음을 내지 않을 수 있게 집중하며 내려갔다.

아주 작은 저벅저벅 하는 소리. 그들 귀에는 너무 선명하게 들려서 도리어 공포스러웠다. 당장이라도 고함이 울려퍼지며 욕설과 함께 적의 침입을 알리는 외침을 터져나올 것 같았다. 빅커스는 긴장 속에서 익숙하게 몸의 긴장을 풀어냈고, 한스 역시 자신이 지나치게 긴장했다는 걸 깨닫고 의도적으로 긴장의 수위를 낮추었다. 볼커는 계단에 들어오지 않고 그들이 내려왔던 지하실 입구와 혹시 모르게 비밀통로 따위가 숨어 있을 것을 고려하여 주변에도 경계의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마침내 내려온 리하르트는 아주 천천히 방탄방패를 내려놓았다. 바닥이 아니라 자신의 신발 위에. 약 20kg보다 조금 덜 나갈 무게가 한쪽 발에 몰렸으나 그가 신은 작업용 부츠는 용케 그의 발에 큰 고통을 주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수신호로 진입을 표시했고 빅커스 역시 그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대었다. 리하르트는 왼쪽으로 슬쩍 몸을 돌려 방탄 방패가 앞을 가리거나 벽에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한쪽 팔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아다. 그리고 돌리는 순간.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를 굳게 만들었다. 한스는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느꼈고 브람스는 등이 완전히 축축해져버렸다. 글라우버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볼커만이 자기 임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고 거의 0.2초나 지났을까. 문 손잡이가 저절로 리하르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문은 폭력적으로 열렸고, 검은 옷을 입은 작은 키의 두 남자가 그에게 총을 갈겼다.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닥!

리하르트는 너무 놀라 손을 뒤로 빼버렸기에 총에 맞지 않았고, 날아온 총알은 모두 소구경 고속탄. 그러나 방탄 방패를 뚫을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보다 문제는 오히려 뒤에 있는 사람들.

빅커스는 곧장 총을 방탄방패 위로 들어올려 쏘았고, 따다닥! 하는 소리 뒤에 꾸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번 작전 때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소음기를 착용했기 때문에 소음은 크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통로를 지나쳐 울리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씨벌.. 기습 작전은 실패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우린 우리 일을 하긴 해야해. 이대로 물러나는 건 오히려 놈들의 의심과 경계심만 높히는 꼴이야.

-빅커스 이 씨발놈아. 전에도 이렇게 했다가 헬무트가 죽은 거냐?

-리하르트. 집중해라.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일단 움직인다. 앞으로 가.

보이진 않았지만 리하르트는 이를 꽉 깨물며 시체를 지나쳐 지하 터널로 진입했다. 방패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시신은 빅커스의 총알에 목과 얼굴, 머리와 쇄골이 관통되며 즉사했다. 일행은 시신의 피를 밟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건넜다. 글라우버는 일행의 후미에서 시신의 장비를 확인하고 그들의 공기통을 잠근 뒤 무장을 벗겼는데, 그들은 러시아제 AS VAL을 사용했다. 리그에서 탄창을 뽑아 탄을 확인한 글라우버는 이렇게 말했다.

-SP-5군. 운이 좋았어.

SP-5는 다소 관통력이 낮은 탄이다. 따라서 방탄 등급이 높은 방패를 뚫지 못했고, 기습 당한 리하르트와 일행들 중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글라우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AS VAL의 탄창을 교체한 뒤 총기 한 자루를 몸에 걸고 탄창 하나를 챙겨서 허리춤의 바지 허벅지의 큰 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잠갔다. 공기통은 어깨에 감았다. 총이나 다른 딱딱한 부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그는 덕트 테이프로 옷에 붙혀 고정했다.

볼커는 말 없이 후미를 지키며 따라갔다.

-분명 소리가 났을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여길 지키는 건 이 둘이 전부인가?

-그렇기에 너무 중요한 통로인데.

-너무 비밀스러워서 조직 내에서도 감춰진 게 아닌가 싶군.

-그럼 무장이라도 장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마지막은 글라우버였다. 긴장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그를 본다면 헬멧 너머로도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너무 긴장 풀지는 말자고. 혹시 모르지. 여긴 우리가 모르는 길이야.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있다는 거지. 정면은 리하르트가 맡고 있으니 주변 확인 확실하게 해.

한스의 말에 일행은 더욱 더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조심스러워야 했지만 이미 소리를 발생시킨 이상 조금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리하르트가 발걸음을 멈췄다.

-하, 시발 못해먹겠군. 너무 팔이 너무 아파.

확실히 수십 분 동안 20kg이 될 법한 방탄방패를 들고 긴장을 풀지도 못하고 움직여야 하니 피로가 극심할 것이다. 빅커스는 그런 사정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브람스, 여유되나?

그는 총을 뒤로 넘기고 앞으로 나와 방탄방패를 건네 받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뒤쪽, 한스의 뒷편으로 이동했다.

-수고했어.

한스의 말에 리하르트는 피곤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팔에 힘이 없어서 총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총구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한스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고, 리하르트는 뒤에서 젠장, 이마의 땀이라도 좀 닦고 싶은데. 하는 중얼거림을 들었다.

-좋아. 앞으로 간다.

‘정말 아무 경계 병력이 없었으면 하는데.’

그리고 그 바람은 이미 죽은 신이 들어준 듯 했다.

통로 중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열어 젖힌 맨홀 뚜껑을 열었음에도 아무런 경계 병력도, 함정도, 경계 장치도 없었다. 시 외곽, 죽은 나무와 그 죽은 나무조차 베어가고 캐어간 흔적이 가득하며, 바위와 돌 따위가 가득한 어느 숲속이었고 맨홀 뚜껑은 그 숲을 관통하는 도보의 한 중간에 뚫린 것이었다. 흙과 먼지가 덮이긴 했지만 위로 솟은 지형과 주변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듯한 바위들로 인해 두껍지는 않았다. 아마 몇번 사용한 통로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모두 올라와.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볼커가 올라올 때까지 그들은 경계 대형으로 앉아서 사방에 총을 겨누고 있었고. 아무 위험도 없다는 걸 완전히 받아들인 그들은 지금 상황에 대해 정리가 필요했다.

-정말 중요한 통로라 기밀을 지키기 위해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어. 오히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놔둔 거지.

-그럼 다행이지. 일단 공기부터 확인해. 부족한 사람?

-리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그로벨 영감이 산소를 대기 비중보다 더 많이 넣어서 압축시킨 2시간 짜리 공기통을 장비하고 있었지만 리하르트의 체력 소모는 꽤 컸던 모양이다. 글라우버는 그에게 노획한 공기통을 건네주었다. 분량으로만 따지자면 약 40~50분 정도. 리하르트는 감사히 건네받고 자신의 공기통의 남는 관을 연결해 공기를 공급받았다.

-함정을 가능성은?

-함정을 파려고 했다면 이미 기회는 많았어. 지하 통로의 어둠 속에 숨어서 저격을 해도 우린 다 죽었을 걸.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에서 수류탄만 던져도 우린 다 죽었을 거야.

한스의 말에 빅커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시간도 부족하고 우리 임무는 아직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했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지?

글라우버의 호의 덕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어쩌면 피곤하고 짜증나서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랬을진 몰라도 협조적인 태도로 빅커스에게 말했다. 빅커스는 품에서 작은 약도를 꺼냈다. 남들은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자기만의 경험과 방식으로 그린 것이라 빅커스는 어렵지 않게 읽어내고 위치를 특정해냈다.

-시 외곽 숲이야. 지금이야 나무나 조금 있고 거의 다 베어졌거나 그냥 죽었지만.

산소가 없고 먼지가 뒤덮은 세상에서 자연 상태의 식물은 모두 죽었다. 그리고 산소를 생산할 수 없는 나무는 도구를 만드는 재료 목적이 더 컸다. 베어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환경 파괴는 이제와서 사어가 되었다. 파괴할 환경이 없어졌기 때문에. 

-동북쪽으로… 1.3km 정도만 가면 놈들 소굴이야. 좋아. 다시 브리핑한다. 우리 목적은 보로딘 조직에 기습 공격을 가한 뒤, 빠르게 후퇴하는 거다. 지금은 거의 밤이 다 되어가니 기습이 특히 잘 먹힐 거야. 중요한 건 후퇴인데, 완전히 해가 떨어지면 가시 범위가 수십cm 수준으로 줄어드는 건 다 알 거야. 게다가 우리에게 익숙한 곳도 아니라 길을 찾기도 어렵지.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해가 지기 전, 최대한 많은 화력을 쏟아붓고 곧바로 빠지는 거다. 한스, 넌 반격하러 나오는 놈들을 저격해줘. 위치는 내가 지정해줄테니까.

-그래.

-돌아오는 길에 작은 표식들을 새길 거야. 우리가 아는 방식은 당연히 아니고, 볼코프단의 표식이야. 출발 전에 알려줬지만 한번 더 알려줄 게. 기억해둬.

그는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그들의 표식을 그렸다. 이 일대에는 나름 유명한 게 놈들의 표식이다. 공포와 명성을 위해 그들의 폭력이 지나간 자리엔 볼코프 사인, 그들이 장악한 지역이나 자산엔 볼코프 마크라 불리는 흔적을 남기는 것을 즐긴다.

-당연하지만 작고 은밀하게 남길 거니까 모두 위치를 익혀놔. 주로 바닥 부근에 남길 거다. 먼지에 덮히기 전에 끝내는 게 중요해. 이제 이동하자고.

그리고 그의 말대로 돌과 땅 사이 틈이나 뽑거나 캐기엔 너무 깊게 박힌 나무 밑둥 등지에 작은 표시를 해두었다. 때로는 돌멩이 따위를 바닥에 굴린 흔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미 어딜 가든 먼지가 덮은 세상인지라 발자국과 함께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먼지와 바람은 그러한 가변적인 흔적을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모두 덮어버릴 것이다. 얕은 수준이라면 사람이 발로 밟아 압축된 발자국 흔적 정도는 여전히 남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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