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Khrome의 도서관

[SF]잿빛 클로버 (8)

작성자Khrome|작성시간23.12.25|조회수22 목록 댓글 0

-씨발! 일단 닥치고 뒤로 천천히 물러나! 놈들이 유탄 못 쓰게 견제하고!

러시아놈들이라 빼돌린 군수 물자들이 많다. 유탄발사기를 보니 이젠 RPG-7 같은 대전차무기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와 리하르트, 빅커스는 통로 너머로 총탄을 쏘아날리며 견제를 하며 다소 급하게 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위의 리하르트는 낑낑거리며 불이 난 것 같은 팔에 힘을 쥐어 짜면서도 어떻게든 질질 끌면서라도 이동했다.

총탄이 무색하게 방탄방패를 앞세운 루스키들은 발걸음을 빨리 했고 빅커스는 동료들부터 사다리 위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볼커는 리하르트에게서 방탄방패를 빼앗아들고 후위에서 빅커스를 지켰고 브람스가 글라우버를 챙기며 위로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젠장, 글라우버! 정신 차려! 위로 올라가라고! 자, 이렇게 손으로 잡고 위로..

-글라우버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목과 등근육이 뻐근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으며, 그 여파가 어깨와 겨드랑이를 타고 팔과 손가락 끈 인대까지 뻗치고 있었지만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그 누군가를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살고 싶다는 이기적이며 동물적인 욕망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덜덜 떨면서 거의 껴안듯이 엉망인 모습으로 올라가고는 있었고 브람스는 그의 몸짓에 깊은 슬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한스! 너도 올라가!

한스는 빅커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빠르게 올라가는 게 그를 돕는 일이라는 것도.

-빌어먹을, 완전히 터버렸군.

리하르트는 어느새 꼭대기까지 올라가 문을 열고 박박 기어가듯 나가버렸고 찢어질 것 같은, 아니. 이미 근육이 꽤 찢어졌을 지도 모를 팔로 글라우버를 재촉했다 손이 닿는 위치까지 올라오자 그대로 끌어 당겼다.

-아오 씨발!

끊어질 것 같은 팔과 어깨에서 힘이 빠지려는 것을 참아내면서 어떻게든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바로 뒤에서 브람스가 따라올라오고 있었다.

타당, 타다당!

-볼커! 부탁한다!

한스는 이미 올라가고 있었고 빅커스는 그말을 끝으로 기폭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뻐어엉!!

거대한 폭음과 충격파가 몸을 흔들었지만 이를 깨물고 올라가야 했다. 폭발에 휘말린 루스키들은 몸뚱이가 터지고 찢어지며 사방으로 날아갔고 벽과 천장에 시체 조각을 남겼다. 빅커스는 충분히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느껴진 게 있었다.

띵. 푸쉬이이이익…

운이 나빴다. 무언가 파편이 튀어 공기통에 손상을 일으킨 모양이다.

‘긴장하지마. 당황하지마. 당장 죽는 거 아니야.’

빅커스는 다른 건 신경쓰지 않고 무조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만 생각했다. 일단 올라간 이후에 덕트 테이프로 구멍을 막으면 된다. 거의 다 올라왔을 때쯤 한스가 그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듣고 오히려 그가 당황했다.

-빅커스!

빅커스는 대답할 시간도 내지 못하고 허벅지 쪽 파우치에서 덕트 테이프를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공기는 계속 빠져나갔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거의 다 됐다는 심리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보다못한 한스가 자신의 품에서 덕트를 꺼내 그의 공기통에 뚫린 구멍을 막았다.

-허억….

빅커스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남은 공기는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브람스! 남은 공기통 좀 하나 가져와!

브람스는 돌보던 글라우버를 다시 돌아보고 대답했다.

-난 안 돼! 글라우버가 심각한 상태야!

결국 도와주는 사람 없이 그 무거운 방탄방패를 메고 혼자서 올라온 볼커가 남은 공기통을 하나 가져왔다. 놈들도 밖에서 경계할 때 몇 시간은 버텨야할 것이니 여러 공기통을 두고 계속해서 충전해서 쓰기 때문에 남은 게 몇개 있었다. 볼커의 눈빛은 조금 불쾌해 보였으나 그걸 드러내는 성품은 아니었다.

-아, 고마워. 볼커.

볼커가 건내준 공기통을 한스가 받아 빅커스를 도와서 그의 호스에 연결했다.

-젠장.. 미치겠군.

아래쪽에서는 금세 누군가의 외침과 발소리들이 들렸다.

-일단 목적은 달성했다고 치자. 바로 움직이자고.

한스의 말에 빅커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바로 글라우버를 바라봤다. 글라우버는 과호흡 때문에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있었다. 그와 친한 브람스가 아무리 그의 곁에서 말을 걸고 팔 등을 주물러 주고 있었지만 상태는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시간이 늦었다. 지금 움직여야 되돌아갈 수 있다. 이미 어두워.

리하르트의 말이었고, 그의 말은 옳았다. 이미 사위가 충분히 어두워졌는데 먼지바람에 의해 방향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브람스, 글라우버는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움직일 수는 있어. 내가 부축할게.

볼커는 어디선가 벽의 지지대로 쓰던 무거운 냉장고를 하나 끌고와 나왔던 컨테이너로 밀어 넣었다. 맨홀 뚜껑 위에 올려 놓았으니 놈들도 나올 때 꽤 곤혹스러울 것이다.

-좋은 생각이야, 볼커.

-땀을 훔칠 수 없으니 불편하군.

볼커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든든함이 느껴지는 침착함이 묻어 있었다.

-방패 들고 다닐 여유가 있나? 힘들면 내가 대신 들지.

-아직은 괜찮아, 한스.

빅커스는 모든 인원이 죽지 않고 살았으며 임무로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에 감사하며 외쳤다.

-좋아, 이동한다!

브람스는 글라우버를 부축했고, 리하르트는 힘들어 죽겠다는듯 한숨을 푹 내쉰 뒤 무장을 확인하며 앞서 나갔다. 빅커스와 한스 역시 그의 뒤를 따랐고, 볼커는 언제나처럼 후위를 맡았다. 공기통의 잔량이 많지 않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
.
.

-훌륭했네. 친구들.

베론 영감은 여전히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그러나 어쩐지 약간 불평스러운 노인네다운 목소리로 그들을 상찬했다. 그는 꽤 힘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터라, 그가 말할 땐 자연스럽게 주목 받는 편이었다.

-적어도 타격은 줄 수 있었으니 놈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쉽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줬을 거야.

물론 합심하여 보복을 결의할 수도 있겠지만, 네 조직 중 하나만 당했다보니 그런 의리를 보여주기보단 하이에나 본능을 더 자극할 것이다.

-자네들이 나가 있는 동안 나도 내 인맥들을 좀 동원했지. 에리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용병들이 모이고 있어. 그들에게도 정보가 새어나간 모양이야. 사람이 많다보니 새어나갈 입도 많은 법인가 보지. 아니면 각자 나름대로 냄새를 맡았거나. 용병이라고 루스키 놈들과 무작정 적대하지도 않고 루스키라고 모든 유럽인을 죄 적으로 삼는 것도 아니잖나. 어디든 빨대는 있으니.

베론은 수트에 장치되어 있는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쪽 빨고는 말을 이었다.

-저번에 슬쩍 확인한 것만 해도 상당한 물자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리고 모두의 욕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지. 그 정도 양에 이 정도로 확산된 정보라면 누구 하나가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일세. 루스키 놈들이 아무리 뭉쳤다 해도 이 정도 이목이며 독식 못해. 게다가 한 녀석은 타격까지 받았지. 놈들 머리속은 더 복잡할 거다. 놈들 상황을 알 방법은 거의 없으니 드러나는 정황만 살펴봐야 해.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사리는 거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격을 통한 전략적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 심지어 당장 알려지진 않을 것이기에 이 이상의 움직임은 쓸데없는 이목만 끌 뿐이다. 얻을 게 없는데 움직일 이유는 없으니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물자는 어떡합니까? 우리도 얻는 게 있어야지요.

빅커스의 물음에 베론 영감은 흐흐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물론 그래야지. 조만간 공격대(Raider)가 형성될 거다. 아마 어떤 용병놈들은 루스키에게 붙기도 할테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야. 친분이 꽤 있는 놈들이나 사리분별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나 붙겠지. 전자는 위협적인 베테랑이겠지만 후자는 눈 먼 총알만 조심하면 될 거고.

베론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마저 이었다.

-우리도 사람을 뽑아서 공격대에 합류시킬 예정이다. 물론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겠지. 방어가 약해질테니까. 실제로 노려 볼 법한 순간이기도 해. 하지만 그건 남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어찌됐든 우리가 미리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 당장 그걸 알릴 필요가 없는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름 증거물은 있어.

그의 시선은 방탄방패로 향했다. 몇몇 남자들도 그쪽으로 향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증명할 수단은 부족합니다. 입증하기 어려운 문제고요.

적을 먼저 공격해 성과를 얻어냈지만 그걸 어떻게 입증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공을 세우고도 입증할 수 없다면 얻는 것도 없다.

-이미 사람을 몇 보내놓았다. 믿을 수 있는 자들이야. 20년 넘게 같이 일을 해온 사람이지. 할베르트.

나름 이름값 있는 무역상이다. 25년 넘게 도시간 무역을 행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살아 남은 사람이다. 그가 더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증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손해 볼 일은 하지 않는 게 장사치라지만 할베르트는 위험한 투자를 할 줄 안다. 그런 그의 평판과 증언이라면 무시 받진 않을 것이다.

-그가 다루는 직원 몇이 현장을 확인할 거야. 물자 이동이 있다면 간접적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고. 싸울 적이 줄어들거나 자기들끼리 내분이라도 일어나 더 만만해진다면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을테지. 게다가 공격 직전에 알려진다면 생각할 시간도 적고 몰아칠 수도 있어.

한스가 질문했다.

-멤버는 어떻게 됩니까?

베론은 그를 돌아보며 답했다.

-빅커스, 볼커, 브란트, 리하르트, 미하일과… 한스. 그리고 나도 간다.

베론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뿐일 수도 없는 말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의 측근, 헤르만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베론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쪽 손만 올려 말을 끊었고 테이블에 몸을 조금 더 기울인 채 설명했다.

-그만한 일에서 제대로 교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만한 경험을 한 사람도 없고. 물론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내가 우리 공동체를 대표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아, 물론 적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판을 깨거나 이 상황에서 묵은 원한을 갚겠다고 납탄을 갈겨댈 놈은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한스는 무표정하게 그의 말을 듣다 공기통의 잔량을 확인했다. 압축공기 약 20L지만 실제로 들어 있는 총량은 40L가 조금 넘을 것이다. 그 중 20%가 산소라고 친다면 8L의 산소가 있을 것이고, 밸브가 가리키는 숫자로 고려했을 때 소모된 산소는 1.1L. 1시간 산소 소비량이 14,400cc 쯤이라고 생각하면 약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친구라고 하긴 어렵지만 동료는 될 수 있는 녀석들도 참가한다고 하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물자는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손에 넣어놓고 분배로 목숨을 걸 정도까진 아니야.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서라도 내가 가야하지.

-안전은 어떻게 확보하실 겁니까?

-헤르만이 계속 곁에 있을 거다.

-혼자서 경호가 됩니까?

-몸에 폭탄을 두를 거라서.

-…

헤르만은 베론을 짜치게 쳐다보았다.

-그럼 그렇다치고, 공동체는 누가 지휘합니까?

빅커스의 말에 베론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듯 바로 답했다.

-그야 그로벨이지.

-그로벨 영감이?

리하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 양반이 해주겠답니까?

베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별 수가 없지 않은가. 토제아 그 친구는 영 못미덥고, 쓸만한 어른들이라곤 죄다 죽어나간 판에 그 고약한 영감탱이라도 써야지.

-별 일이군요. 그런 책임감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베론은 흐흐 웃었다.

-책임질 사람 다 없어지면 지가 책임자인 게지.

몇가지 사항과 걱정되는 부분들을 논의한 뒤, 흩어졌다.

.
.
.

“왔으면 바로 좀 오지, 뭐하다 이제와?”

에반젤린은 방 중앙의 비닐막 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말했다. 한스는 답할 말이 궁했는지 들고 온 것을 내려 놓으며 멋쩍게 답해야 했다.

“잠깐 회의 좀 했지. 그것보다 이것 좀 봐. 받은 물자들이 꽤 괜찮아. 아마 며칠 내로 더 전달 받을 것도 있을 거고.”

성과는 성과이니 당연히 상 받아야 할 일이다. 공동체는 비상이나 공동의 목적을 위한 공무적 성격의 일에 대한 대가를 위해 주기적으로 비밀금고나 창고 등지에 물자를 보관한다. 일종의 세금과 비슷할 수 있다. 각 가정이나 가게마다 자신들이 팔거나 소유한 것을 제출할 것을 요구 받는다. 강제성은 없기에 제출 하는 것은 자유이나 어떻게든 대가는 찾아오기 마련인지라 적더라도 낼 만큼은 내곤 한다.

한스는 그렇게 받아온 물건들을 하나 하나 분류했다.

“이건.. 볼커네 말린 버섯이고.. 오, 건전지 충전기다. 안 버린 건전지들 모아놓길 잘했네. 이런 게 있으면 시장에나 좀 풀어주지 왜 쟁여놓나 몰라. 음.. 이건 진통제인데.. 유통기한이 7년 지났네. 그래도 쓸 수는 있겠지. 그리고.. 아, 책도 있구나. 넬레 노이하우스.. 여우가 잠든 숲? 이건 나중에 시간 나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아, 두루마리 휴지. 이런 거 꼭 필요 했는데.”

에반젤린은 한스의 말을 들으며 모종삽으로 흙을 고르고 씨앗을 심으며 분무기를 흙에 대고 물을 뿌렸다.

“아무튼 안 다치고 와서 다행이야. 밥은 먹었고?”

“이제 먹어야지. 아, 공기통 좀 채워줘.”

방울토마토와 민드레 뿌리를 볶은 뒤 가루를 내어 만든 커피 대용의 음료를 가져오며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 수kg짜리 공기통을 세워서 굴려가며 공기를 모아 놓은 다른 공기통 옆에 세워놓았다. 그러고는 호스를 연결한 뒤 발로 밟는 펌프로 공기를 채워넣었다. 방안에서 기르는 식물들 덕에 언제나 공기가 부족할 일은 없지만 환기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상 공기나 냄새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꽃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나온다는 점에서 한스네 집안은 나은 편이었다.

“그거 알아? 우리집 공기가 다른 집 공기보다 훨씬 좋다더라. 저번에 공기통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우리집 공기를 넣어둔 거라 향기가 섞여 있어서 좋았대. 이것도 나름 팔만한 상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잘 포장해봐.”

취익, 취익 하면서 공기를 불어 넣던 에반젤린은 밸브의 바늘을 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천이나 실 같은 거 있으면 한번 구해와줘. 삭고 낡은 옷가지들이 많아서 좀 손을 봐야겠어.”

제대로 세척도 어려운 게 현실이기에 쓰고 남은 물이나 오래 삭힌 오줌을 이용해야만 한다. 숨을 쉴 수 있을 만큼의 산소는 없어졌고, 숨을 쉴 수 없는 기체들이 대기를 거의 채웠지만 그럼에도 비는 내린다. 대부분은 여름이 아닌 겨울에 내리는데, 한 두달에 서너 번 내리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를 받아놓거나 집 거실이나 복도로 연결되는 관을 열어서 모은다. 그대로는 모래먼지로 인해 쓸 수가 없지만 오래 침전시킨 뒤 윗물만 뽑아서 정수 과정을 거친다. 이 처리를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중금속이 몸에 쌓이거나 탈이 날 수 있다. 의약품도 부족한 세상에서 이런 건강 문제는 치명적이다.

“그래, 조만간 구할 수 있게 될 거야. 아니면 베론 영감에게 말해도 나한테 배정될 물건 중에 천이나 실, 옷 같은 거 달라고 하지.”

한스는 서랍에서 마른 순무와 물기를 빼고 간 순무를 담은 통을 꺼냈다. 한스와 에반젤린은 이것을 순무 버터라고 불렀다. 그리고 민들레 커피를 먼저 한입 마시고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두께로 자른 순무 위에 갈아서 압축 시킨 순무를 발라 먹었다. 그리고 방울토마토 몇알, 민들레 뿌리 몇개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보상으로 받은 볼커네 마른 버섯, 정확히는 한번 데친 뒤 말린 버섯에 소금을 조금 뿌린 뒤 순무 버터와 함께 먹었다. 소금은 구하려면 구할 수 있지만, 가격대는 다소 높은 편이었다. 100g 용량의 소금을 구하기 위해선 5.56mmx45탄 15발, 혹은 순무 1kg, 또는 토끼 고기 100g이나 닭고기 60g, 아니면 콩 300g이나 물 250ml 정도이다.

그나마 바닷가에서는 구하기 쉽다곤 하지만, 바다는 이미 먼지로 덮혀 있는 상태라 물이 죄다 썩어 있다고 하며, 워낙 오염처리가 어렵다보니 먹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기름을 제거하거나 소금물로 전지를 만들어 비상시에 사용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니 대부분 유통되는 소금은 옛 가정집이나 음식점 등에 보관된, 지금은 버려진 것들을 발견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기를 좀 구해야 하는데.”

“여유가 좀 생겼으니 프란츠네한테 토끼 한마리 정도는 구해볼 수 있을 거야.”

한스가 우물 거리며 대답했다.

“그것만 먹어서 괜찮겠어? 전투식량 전부는 아니더라도 초콜렛 정도는 몇개 먹어도 되는데.”

“됐어. 나 의외로 버티는 거 잘한다고.”

실은 조금 부족하게 먹는 게 습관이 되었을 뿐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은 후 에반젤린은 언제나 그가 책임져야할 동생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식에 가깝다는 느낌마저도 들 때가 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저 말 안 듣는 여동생이었는데,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는 밤을 지난 다음날 어떤 어른이 두 분의 유품과 함께 전한 말 이후로 그에게 에반젤린은 못살 게 구는 여동생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좀 먹어.”

에반젤린은 초콜렛 몇개를 그의 탁자 위로 올려주었다. 한스는 그 중 2개를 집어 에반젤린에게 던져 주었다.

“너도 좀 먹어라. 맨날 집에만 있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어.”

초콜렛을 받은 에반젤린은 한스의 저런 마음씀씀이가 항상 미안했다. 초콜렛은 달았고, 조만간 상품화시킬 화분들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