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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me의 도서관

[SF]잿빛 클로버 (12)

작성자Khrome|작성시간24.03.27|조회수20 목록 댓글 1

베이스 캠프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지도자급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베론은 자신의 곁을 지키는 미하일을 슬쩍 바라보고는 열심히 스몰 토크 중인 뮬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기회에 최대한 많은 이들과 안면을 익혀놓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상업지구엔 크고 작은 창고들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막대한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가 모든 창고를 소유했거나 상업지구 전체의 대표인 것은 아니었지만 의결권을 노리는 유력자 중 가장 가능성 있는 녀석 중 하나라는 게 중요했다.

뮬러는 그저 이 기회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베론은 생각했다. 가진 창고의 크기와 물자의 수가 가장 중요한 상업지구에서 질 좋은 거래처가 많다는 건 권력의 변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먹을 것과 마실 물, 삼킬 공기를 위해 상업지구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다. 뮬러는 자신의 사업을 키워 지구 의원직을 얻고자 한다. 그걸 위해 죽인 자들과 훔친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술 한잔 못하는 게 아쉽군요.

-밀폐 공간을 만드는 게 영 품이 많이 드는 게 아니니 별 수 없죠.

술이 구하기 쉬운 물건은 아니지만 설령 구한다 해도 맛이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 아예 썩지나 않았으면 다행일 정도로.

-뮬러씨의 창고에는 고급 와인이 몇 병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게 사실입니까?

-허허, 그런 소문이 돕디까? 그저 옛날 술 몇병이 있기는 한데, 고급 와인은 아니죠. 그건 저보다 훨씬 돈 많은 의원 같은 사람들이나 취급하는 겁니다. 저야 양조 기술자들이 만드는 싸구려 맥주나 늪지대에서 캐오는 썩은 병 몇개가 전부죠.

그렇게 겸양을 떨었지만 술을 구하기 쉬운 시대가 아님에도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는 건 여전했다. 특히 루스키들이 술에 대한 욕심이 탐욕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양조 기술자라고 하면 아무리 허접해도 일단 우대를 받는가 하면, 물자를 낭비하고 사고를 유발한다며 배척 받기도 하는 복잡한 위치에 있다. 루스키들은 일단 알코올만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술을 만든다는 소문도 있는데, 대체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나저나 꽤 오래 걸리는군요. 지금쯤이면 이미 교전은 끝나고 슬슬 돌아올 때가 아닌가 싶은데..

입구 쪽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던 베론도 교전 이야기에 귀를 그쪽으로 돌렸고, 한마디 얹었다.

-지난 교전 때 느낀 바로는, 놈들이 꽤 사납다는 겁니다. 워낙 많은 물자가 있었으니 쉽게 빼앗기려 들지 않겠지요. 물론 한번 습격으로 휘저어둔 터라 그들끼리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할 것으로 여겨집디다마는, 놈들도 물러서지 않는 선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죠. 아무리 옆엣놈이 거슬리고 못 미더워도 당하고만 있지 않는 게 루씨놈들의 성질머리 아니겠습니까.

베론의 말에 대부분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베론이 말을 이었다.

-아마 놈들도 꽤 준비를 해놓았을 겁니다. 정확히는, 서로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무기를 쟁여 놓고 병력을 배치해놨겠지요. 뭐.. 그 중에서도 볼코프 놈들은 그 사이에서 피나 토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 공동체의 젊은이들이 워낙 혈기가 있는 편이라, 놈들 수십을 죽여놓고 왔으니 말입니다. 흐흐흐..

재수 없게 들려야 정상인 말이겠지만 에리히의 보증을 받은 자들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보기보다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공동체라면 가까이 해서 나쁠 게 전혀 없기 때문인데, 각 공동체마다 무장 수준과 실전 경험 수준, 실전에서의 전술 능력이 판이하게 다르다보니 종종 용병처럼 계약을 맺고 무력을 사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술 경험을 배우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익이기 때문에 받는 쪽에서 거부하지 않는 한 드물지 않게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용병질답게, 뒤통수를 치거나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 있는 친구는 좀 젊어 보이는데, 항상 데리고 다니는 친구는 어쨌나?

뮬러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다 고르고 고른 질문을 던졌다.

-미하일 말인가? 이번에 내 경호를 맡았네.

-젊은 친구를 끼고 다니기로 한 건가? 프흐흐..

뮬러가 능청스럽게 정보를 캐내려 했고 베론은 잠시 미하일을 쳐다보고 입구 쪽으로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미하일은 천천히 밖으로 나가 천막 주변을 한바퀴 돌아보고 들어와서 고개를 슬쩍 저었다.

-흠..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좀 불안한 게 있어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

베론의 말은 한스에게 미하일이 듣고, 미하일이 베론에게 해준 말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이곳에 있는 지도자급이라면 누구든 예상하고 있던 리스크였고, 그탓에 적게는 1명, 많게는 7명 이상 경호원을 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별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소만. 이 주변 경호원만 해도 물경 60은 될 것인데, 아무리 저들이 우리를 공격한다 해도 우리측과 머리수 차이는 크게 나지 않소. 그렇다면 결국 잘 싸우는 쪽이 이기는 거지. 저놈들이 아무리 경찰입네 뭐네 해도 루스키와 십수년 넘게 투닥거린 우리요. 서쪽에 있던 놈들이 실전 경험이..

탕!

총소리와 함께 쇤너 도서관의 제7 사서장의 우측두에 구멍이 뚫리고, 좌측두가 터져나가며 뼛조각과 뇌조각을 옆사람 헬멧에 흩뿌리게 되었다.

-엎드려!

베론은 총소리와 동시에 기민하게 몸을 바닥에 던졌고, 품에 메고 있던 총을 꺼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준했다. 총알은 밖에서 안으로, 천막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와 같이 엎드린 이들은 밖을 향해 총알을 뿌렸고, 베론은 뚫리는 구멍을 통해 방향과 위치를 가늠한 뒤 3점사를 쏘며 제압을 실시했다. 물론 맞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근처로 날아가기만 해도 위협적일 터였다.

‘머리는 굴렸지만 실전 경험은 부족하군.’

미하일은 폭탄조끼 때문에라도 아예 드러누운 채 응사 했고, 베론을 향해 쳐다보았다.

‘바깥에서 교전음이 들리는 걸 보면 기습이었지만 일시에 확실한 제압에는 실패했겠지. 혼란을 가중시켜야해.’

-젠장, 도망쳐!

-안돼! 멍청아!

어느 중년 지도자가 몸을 둥글게 말고는 천막 뒷편을 들어 젖히고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직후 총에 맞아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뒷편으로 나올 걸 예상하고 쏜 것이다.

팍, 파팍!

교전음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의 곁에도 총알이 때리기 시작했다.

-뮬러!

베론이 손짓을 했고, 그 의미를 아는 뮬러는 욕설을 짓뱉으며 파우치에서 물건을 꺼내어 밖으로 던졌다.

-연막탄!

연막탄은 아군의 위치가 아니라 적군의 위치나 그들의 시야를 가릴만한 중간 지점 등에 던져야 한다. 그리고 뮬러는 베론이 알고 있는 뭔가를 가장 잘 던지는 놈이었다.

푸슉… 푸슈우우우우…

대충 던진 것 같았지만 적절하게 떨어져 굴러간 연막탄은 빠르게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뮬러는 한번 더 뽑아 밖으로 던졌고, 절묘하게 굴러가며 측면을 가렸다. 천막에 부딪히는 먼지 바람을 고려하여 던졌기 때문에 적절한 눈막음을 이끌어냈다.

-미하일!

베론 역시 품에서 수류탄을 미하일에게 전달했고, 미하일은 곧장 핀을 뽑고 밖으로 던지고 곧바로 엎드렸다.

…꽈앙!!

미하일은 3초 뒤 수류탄이 터지자마자 그 즉시 발생하는 침묵과 경직을 틈타 밖으로 달려나왔다. 뮬러의 지시에 따라 그의 경호원 역시 조금 늦게 밖으로 뛰어나왔고, 미하일은 곧바로 연막을 탄 채 움직이며 가까운 엄폐물로 이동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전방의 경찰 병력의 얼굴에 총격을 갈겼다.

타탕! 퍽! 쩔그럭, 털썩.

미하일은 근접 교전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편은 아니었다. 저격수로 움직이며 얻어낸 넓고 정확한 시야는 먼지 바람과 연막 속에서도 타겟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고, 안전한 자리를 찾는 것은 거의 타고난 감각에 가까웠다. 그는 다시 한번 몸을 굴리며 탄통이 담긴 상자 뒷편에서 빠져나와 트럭 옆편에 붙었다. 그리고 슬쩍 뛰어서 엔진이 몸을 가리도록 했다.

따다다당!

총탄이 트럭을 때렸지만 미하일은 맞지 않았고, 고개를 슬쩍 들어올리자 트럭 바로 반대편에서 경찰 병력 중 하나가 총을 보닛 위쪽에 올려놓고 자신을 노리는 걸 보았다.

타다다다당!

미하일은 즉시 고개와 상체를 틀어 사선에서 몸을 틀어냈고, 아주 아슬아슬한 차이로 총알을 피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즉시 몸을 바닥에 옆으로 눕혀 차량 아래쪽으로 총을 쐈다. 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반대편 대원의 복숭아뼈와 발목에 총알이 박혔고, 곧바로 넘어진 대원의 몸에 총알을 3발 더 박아넣었다.

타다다당! 타당! 타다다다다다다당! 타다당! 땅! 탕!

그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밖으로 나온 생존 경호원들과 지도자들이 경찰 무장 대원들과 교전을 시작했고, 그중 베테랑의 사격술과 침착한 리듬을 가져가는 실력은 루키들이 따라갈 수 없는 기술이었다.

-요한! 샤를! 오른쪽으로!

-욘! 슈미트! 내 옆으로 와! 따라와!

그들의 전술적 움직임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 대원들을 상회했기에 이동 사격과 조준 사격의 퀄리티에서 차이를 발생시켰다.

-윽!

-욘! 제길!

설령 이미 잡힌 자리에서의 불리함을 곧바로 뒤집을 수 있는 건 아니었고 베테랑 총잡이 역시 어렵지 않게 죽어나가는 세상이라 해도 흐름은 확실히 바뀌었다. 미하일은 저격수의 특기를 살려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았고, 적절한 엄폐를 했다. 그리곤 갈색, 혹은 회색빛 먼지 바람의 틈을 노려 하나하나 쏴죽이기 시작했다.

탕!

하나.

탕!

하나.

탕!

빗나갔다.

딱!

-제길.

격발불량. 아마 먼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즉시 탄창을 손바닥으로 올려쳤고, 총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노리쇠를 한번 당겨주고 방금 전 조준했던 대상을 향해 발포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번 발사 때 또 고장이 났고, 다시 한번 고장 처치를 했음에도 몇발 쏘고난 뒤 또 발생했다. 결국 그는 소총을 세이프티에 걸어놓고 권총을 뽑아들고 베론의 곁으로 다가갔다.

탕! 탕! 탁!

-이런. 아, 미하일.

-빠져야 합니다.

베론의 소총 역시 고장이 나버렸고, 미하일이 권총을 들고 있는 걸 보고 그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음을 알았다. 베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뮬러를 불렀다.

-뮬러!

베론의 수신호를 읽은 베론 역시 그의 이미 2명이 죽어서 2명만 남은 경호원을 대동한 채 함께 후퇴했다.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과 경호원, 전투원 역시 적절한 순간 연막을 타거나 제압사격을 성공시킨 채 빠져나왔다.

이미 죽은 사람만 해도 절반 정도 되었다. 훗날 알게된 것이지만 죽은 사람은 자리에 있던 62명 중 37명이었다. 경찰 병력은 간부급 포함 44명이 죽었으니 기습을 성공시켰음에도 피해는 상당했다. 그럼에도 베론은 이 일로 공동체 지도자들이 죽어버려 권력과 정책의 변경이 필수불가결함이 확실해졌고, 한편으로는 베를린 경찰청이라는 놈들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과 이해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든 생각은 서쪽의 루스키들의 공세에 끼어버린 형상이라는 점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젠장.

-다치셨습니까?

미하일의 물음에 베론은 허탈한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10분도 안 남았어. 아니, 한 5분일까.

급하게 내려다본 미하일은 자신의 공기통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위치는 어느새 도시의 폐허 거리 한복판이었다. 운이 좋으면 10분 동안 죽은 자의 공기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생존의 희망 없어 죽는 자들 중 공기 잔량이 남은 자들은 다음 죽을 자를 위해 공기통을 잠가 놓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대부분 끝까지 있을 리 없는 운수를 기대하며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시고 죽어버린다지만 말이다.

-마지막 한숨만 남기고 죽게 생겼군요.

마지막 한숨. 죽은 자가 마지막에 내뱉는 숨으로, 이미 죽은 자가 머금은 숨을 의미한다. 그 안에는 분명히 수십g의 산소가 있을 것이지만, 죽은 자의 것이기에 빼앗아 마시는 것은 죽은 자를 몸에 받아들인다는 미신이 존재하기에 잔량이 소모된 공기통 유품을 손에 넣은 경우 그 안의 모든 공기를 밖으로 빼버린 뒤 다시 충전하는 것이 관례이다. 설령 그렇지 않아도 고작 수십g의 산소로 어찌하겠는가.

툭.

베론의 어깨에 올라온 손의 주인은 뮬러였다.

-6시간 분량의 공기. 얼마에 살텐가.

드물게 지어지는 베론 영감의 얼빠진 얼굴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을 터이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검게 반사되는 플라스틱 헬멧의 마스크 뿐이었다. 대신 베론은 목소리로 전달해주었다.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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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_Arondite_ 작성시간 24.03.27 ㅋㅋ 예상대로군요. 그나저나 뮬러 씨...상인의 자세가 매우 탁월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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