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RPG]내 조국에 소련은 없다 - 02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4.20|조회수443 목록 댓글 741

 

 


 

 

05. 풍년 속의 빈곤

 

해방(Свобода) 48년(1918년) 3월 2일, 새로 태어난 자유 공화국 연합(ССР/UFR)은 혁명 1주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해 임시정부가 무상몰수-무상분배에 기반한 토지개혁을 발표하고 시행한 이래 반군에 점령된 지역과 카자크 공화국을 제외한 국내의 대부분 농지는 자영농에 의해 경작되었습니다. 이는 스톨리핀이 꿈꾸었던 토지개혁을 혁명정부가 완수한 꼴이었죠. 작년 한해동안 산출된 곡물의 총량은 무려 1억 톤에 달했습니다. 이론상 전세계 인구를 1년간 부족함 없이 먹일 정도의 곡물이 시장에 유입되자 곡물의 시장가격은 폭락을 거듭했습니다. 반면 공업부문의 생산력은 더디게 복구되고 있었기에, 연합은 공산품과 농산물의 가격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일명 ‘가위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죠. 이대로라면 오히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농민들의 실질소득이 저하되고 지방의 민심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정계 전체에 감돌았습니다. 결국 농업부와 재무부는 사태의 해결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의회(소비에트)와 협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의회에서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캅카스에서의 일이 모두에게 공유된 이래 모든 정당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친독-반영 입장을 견지했죠. 민주당은 아예 비스와-다뉴브 강과 아드리아해를 경계로 독일과 러시아가 유럽을 양분해 해양세력과 대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떠드는 상황이었고, 사회주의 양당 역시 굳이 협상국을 옹호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의회에서 누군가에 의해 이러한 의견이 제시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죠.

 

“독일에 빵밀 1,300만 톤, 보리 500만 톤, 귀리 500만 톤, 수수 200만 톤을 저가에 수출해버립시다. 장기적인 동반자 관계를 위한 포석을 깔아두는 것이지요.”

 

민주당 민족주의파에서 나온 이 제안에 대해 나머지 정파는 일단 난색을 표했습니다. 민주당 소수파(자유주의)는 가격통제 및 정부수매를 제안했지만 “정부에 그만한 재원이 없다”는 재무장관의 발언에 제지당했고, 사회혁명당 온건파에서는 “잉여농산물을 징발해 소각해버리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 의견은 사회민주노동당 우파의 지지를 받았죠. 반면 사회민주노동당 좌파(주로 구 볼셰비키)는 독일 수출안과 폐기처분안을 모두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저곡가를 유지하는 것은 자유 조국의 산업화에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곡물이 남는다면 그만큼을 축산업에 사용하면 될 일이고, 곡가가 낮다면 농민들에게 도시 이주라는 방안을 제시해 노동력을 추가공급하면 될 일 아닙니까? 장기적으로는 공업생산량 향상과 물가 하락에도 도움이 될테니 말입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의 자영농 중심 토지개혁은 막대한 농업 초과생산을 달성했다.

 

제국군 총참모부 제1보급감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프로이센군 총참모장을 겸임하며 볼프강 카프의 ‘독일조국당(DVP)’을 여당으로 만들고 티르피츠 제독을 제국재상으로 옹립하는 등 극우 반동주의에 물들고 있는 독일에게 곡물을 지원한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 국제사회주의적 신념이 남아있던) 급진 사회주의자들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유주의자가 가격통제를 말하고 민족주의자가 대독 협력을 주장하며 사회주의자가 방임주의를 말하는 기묘한 정국에서 크라피엘과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인민군 인사들 역시 소비에트 회의에 초빙되었습니다. 총참모부와 동부전선사령부, 군수본부 등의 인재들이 총동원되어 작성 단계에 있는 일명 “크라피엘 보고서”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농업-공업 가격 차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었죠.

 

본래 지주-귀족 가문 출신인 크라피엘 장군은 곡물가격이 민생에 미치는 문제, 그리고 민생 악화가 국가의 안정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소비에트 의원 중 유통업자와 농민의 의견을 가장 잘 대변해줄 수 있는 이에게 서슴없이 발언권을 넘겨 난상토론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유통-운송업자 대표 이사크 벡셀 의원은 ‘유통마진’이라는 문제를 들이밀며 곡물 소각 및 가격통제가 얼마나 비경제적이고 불안정한 해법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했죠. 그를 이어 연단에 올라온 거구의 농민 의원 표트르 표트로프 또한 “농민들은 곡물을 독일에 파는 건 용인해도, 강제로 뺏어서 태워버리는 건 참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충실히 증언해 주었습니다.

 

가격통제안과 징발-소각안이 빠르게 힘을 잃고 있던 와중, 사회민주노동당 조직국원 데이비슨은 부하직원으로부터 ‘독일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받아들었습니다.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독일의 실권을 쥔 우익세력은 농촌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진 상태이며, 농촌의 민심이 붕괴한다면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2,500만 톤에 달하는 곡물이 일거에 독일로 유입된다면 암시장으로 유지되는 농촌경제는 그대로 주저앉을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앞당기는 일이었죠. 체슬라프와 데이비슨은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당 지도부에 “대독 곡물수출안이 곧 대독 혁명수출안”이라는 소견을 전달했습니다.

 

민주당(민족주의파 및 자유주의파)과 사회민주노동당 좌파가 대독 곡물수출안에 대한 찬성을 굳히고 사민당 우파 또한 당론에 반대하지 못하는 사이, 원내 제1당 사회혁명당에서는 “협상국과의 관계악화 가능성”을 거론하며 아예 곡물시장을 전면 개방하자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동시베리아 일대에 일본군이 거의 10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주둔하는 상황에서 영국이 그들을 전면 지원한다면 연방은 또 다시 전쟁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야 했고, 이는 세레브랴코프 등 군부 인사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독일에 곡물수출을 가장한 혁명수출작업을 서두르고 싶었던 데이비슨 등 인사들은 “누가 봐도 박쥐같아 보이는 짓은 양쪽과 척지는 결과만 불러올 것”이라며 반발했지만, 대세는 기울어가는 것 같았죠.

 

그때, 체슬라프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곡물시장 개방을 타협안으로 내세운 사회혁명당 내부에도 “농민경제 악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를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의원들이 상당히 많았고, 민주당의 민족주의파 의원들은 독일과의 친선을 다지는 데 시장개방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습니다. 체슬라프는 곧바로 사회민주노동당 좌파의 ‘간판’ 레프 트로츠키 정치국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트로츠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곡물개방 반대 블록”을 꾸렸습니다. 결국 정파들은 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했고, 세레브랴코프가 “곡물시장을 개방하되 6개월의 유예기간을 두어 독일에 선제수출한다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겠냐”며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안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독일제국 최고육군사령부(OKH) 총참모장 힌덴부르크(좌), 그리고 제1보급감이자 프로이센군 총참모장이며 1916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제국의 실질적 1인자였던 루덴도르프(우)

 

우크라이나와 돈 강 유역, 카스피해 연안에서 수확되어 곡물창고에 보관되던 곡물이 열차와 선박을 통해 슈트랄준트 항과 포츠담 역에 차례차례 하역되자, 루덴도르프는 이 곡물을 전선에 우선배당했습니다. 1916년부터 이른바 “힌덴부르크 계획”이라는 명목하에 제국을 ‘총력전 국가’로 재편한 그는 후방의 민간인들이 얼마나 굶고 있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죠. 트로츠키와 스탈린도 감탄할 만큼 국가경제를 하나하나 통제하고 싶던 루덴도르프는 곡가 폭락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잉여곡물을 그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재판매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데이비슨이 기대했던 농촌경제 붕괴의 효과가 오히려 이중제국에서 발생하는 결과를 가져왔죠.

 

이러한 파급효과와는 별개로, 연방의 곡물가격과 공산품 가격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모든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그러나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선택이 대전쟁에 어떤 파급효과를 몰고 올 지를 말입니다...

 


 

06. 러시아 혁명전쟁의 끝

 

‘곡물법’ 제정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열강은 다름아닌 일본이었습니다. 심지어 영국도 우려를 표명할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무리하게 시베리아로 진출했던 일본에서는 러시아발 애그-디플레이션이 큰 파급효과를 일으킨 것입니다. 일본 농촌과 쌀 도매업자들은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곡물을 시장에 푸는 대신 썩히고 있었고, 이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크게 반발하는 상황이었죠. 일본 정부는 이렇게 된 이상 한 발짝 더 나아가 경제적 손실을 벌충하고 국내 여론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시베리아에 대한 ‘특수한 권리’ 선언, 바이칼 호 이동 시베리아 철도의 무단수용 및 ‘북만주 및 시베리아 철도주식회사(홋테츠, 북철)’ 설립, 파병 병력의 증강 등 조치가 이어졌죠.

 

일본과의 전면전이 가시화되자, 정부와 의회, 군에서는 입을 모아 주전론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놈들을 쳐부수자”는 논설이 정파를 초월한 채 화살처럼 빗발쳤죠. 아무리 반전론을 지지하더라도 아예 영토 한 귀퉁이를 괴뢰화하려는 일본의 행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고, 일본의 내부사정이 좋지 않아 총력전을 길게 이어나갈 수 없으리라는 예측은 모스크바에서도 충분히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전 발발 이래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던 극동 소비에트공화국의 동지들에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역시 이러한 초당적 주전론에 불을 지폈습니다.

 

동쪽의 위협에 강경대응한다는 결론은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었습니다. 영일동맹이 유효한 상황에서 일본과 전면전을 펼칠 경우 영국에서 또 어떤 창의적인 조약 해석을 들이밀어 러시아에 칼을 들이밀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니콜라이 라텔 인민군 총사령관은 외교적 여파를 고려해 ‘전쟁(война)’이라는 용어를 공식 문서에서 최대한 배제한다는 임시방침을 세웠습니다. 대신 “조국 해방을 위한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죠.

 

치타(Chita)에 주둔한 일본군. 그들은 러시아와의 외교전에서 완패한 채 본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말장난이 외교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외무부에서는 최대한의 가용자원으로 영국의 불개입을 이끌어내는 데 총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전러시아 인민군 작전사령관 크라피엘을 대표로 한 협상단이 주러영국대사관으로 향했고, 최고실무관 명목으로 동행한 바레츠노프가 사실상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며 예비교섭이 시행되었습니다. 물론 영국 고위외교관이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바레츠노프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무단점거한 북부 페르시아의 영유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러시아(자유 공화국 연합)가 아프가니스탄에 불가침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영국은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 상황에서 불개입을 선언했습니다. 사실 서부전선에서 형편없이 밀리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 적을 하나 더 늘리는 건 가당치도 않은 행위였기에, 사실상 러시아의 추가적 남하를 밀어낸 영국의 승리라고 치부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죠.

 

그러나 영국의 현란한 외교술에 당하든 말든 그건 하등 중요치 않았습니다. 바레츠노프가 영러협상의 결과를 이르쿠츠크에 통보하는 즉시, 현지에 파견 나가있던 밀류코프 외무장관은 일본 대표단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극동 소비에트의 소수민족(몽골인, 중국인, 조선인 등) 대표를 모두 불러 일본 대표단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죠. 한 마디로, “영국은 네놈들을 버렸으며 우리는 너희 같잖은 놈들에게 끝까지 복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입니다. 사실 영국이 일본을 버렸다기보다는 당장 그들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지만, 일본 대표단은 100만이 넘는 러시아의 대군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30만 정도의 병력과 국지전을 벌이며 동시베리아 해안 지대를 지키려 했던(물론 이 판단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호전성에 기겁하며 “명예로운 철수”에 동의했습니다.

 

일본 군부는 미쳐날뛸 준비를 마쳤습니다. 세계 최강 이기리스와 어깨를 견주는 동맹, 자랑스러운 ‘황국’이 고작 로스케 야만인들에게 굴복했다는 소식, 그리고 그 ‘이기리스’가 자신들을 이토록 쉽게 배신했다는 소식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죠. 일본의 민간 엘리트들은 재빨리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보수적 군부를 만족시킴으로써 사태를 마무리지었지만, 일본의 제1적국은 이미 자유공화국연합으로 확정된 채였습니다. 물론 모스크바에서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07. Kaiserreich

 

1918년 7월 12일, 독일군은 가칭 “루덴도르프 공세”를 통해 파리를 점령하고 적의 방어선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르도로 파천한 프랑스 정부는 ‘더 이상 참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병사들의 대대적 항명으로 인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파리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서 ‘코뮌’들이 선포되며 대독 결사항전을 천명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했습니다. 물론 아직 한참 힘이 남은 미국은 이를 악물고 독일과 사생결단을 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습니다. 독일은 치머만 전보 사건과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한 미국인들의 피해 등에 제국재상 명의의 사과문 및 피해보상을 약속하며 미국과 백색 평화를 체결했습니다. 독일 제국은 영국이 1) 프랑스 정상화에 협조하며 2) 구 프랑스령 식민지의 독일령 편입을 지지해주는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했고,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물론 영국은 서부 로렌 지방을 프랑스령으로 유지하라는 조건을 내걸었죠. 또한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영국령 서아프리카를 독일에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대오스만 전선을 유지한다는 밀약 역시 체결되었습니다.

 

그 사이, 툴롱 항의 수병들은 항명을 일으키고 “코뮌 지지”를 선언, 본토에서 절찬리 진압당하던 노조원들과 병사들, 그리고 혁명지도자들을 알제리로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아프리카로 파견되며 총 160만명의 독일 병력이 여전히 프랑스 본토와 북아프리카에 쏠린 가운데, 베를린의 카이저와 루덴도르프, 총참모부는 오스트리아의 상황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10월 13일 민족대표들은 빈의 카이저 카를에게 독립선언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죠. 보헤미아, 독일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5개국으로 분리된 구 이중제국의 잔재들은 순식간에 중부유럽 전역에 힘의 진공상태를 가져왔습니다. 루마니아, 이탈리아, 불가리아, 폴란드 등이 민족자결을 주장하며 국경을 넘기 시작한 것이었죠.

 

오스트리아군이 썰물처럼 빠진 이탈리아에서는 “민족협동주의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Cooperatista Fascista d’Italia, PNCFI)”이라는 정당을 지배세력으로 하는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이 건국되었습니다. 독일과 정면으로 맞서기는 부담스러웠던 이들은 피우메의 단눈치오(G. D’Annunzio) 세력과 연계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을 지원, 이제 막 출범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연합왕국”에 대한 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가브리엘 단눈치오. 그는 PNCFI와 긴밀히 협력하며 피우메(Fiume)에서 '카르나로 자유국'이라는 독자세력을 만들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반군을 지원했다.

 

한편 모스크바 정계 역시 자연스럽게 향후의 대전략을 두고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민주당 민족주의파, 민주당 자유주의파, 그리고 사회혁명당 온건파는 독일을 유럽의 패자로 인정하자는 현실론을 외쳤습니다.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1905년 빌헬름 2세가 니콜라이 2세에게 제안했던 '비외르쾨 밀약'을 인용하며 독-러 협력관계를 궁극적으로 대륙동맹으로까지 격상시켜 영국, 미국, 일본 등 해양세력에 대항하자는 주장을 펼쳤죠.

 

반면 (사실상 좌파가 주도하는)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 급진파는 "지금이야말로 전 유럽의 혁명세력을 도와 '자유진영'의 저변을 확대할 때"라는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중부 유럽에서 최대한 기반을 확보하고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혁명세력을 지원하며 급진파 이탈리아와도 연대하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죠. 물론 독일과의 전쟁을 감당할 수는 없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회민주노동당 조직국의 최선임간부 3인. 왼쪽에서부터 보로실로프, 스탈린, 그리고 칼리닌.

 

그러나 혁명 수출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현실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이제 영국을 대신할 세계 패권국이 되었고, 이제 막 완성된 크라피엘 보고서에 따르면 연방은 30년동안 (누구 말마따나)쌔빠지게 쫓아가도 그들의 산업력을 능가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예 독러 대륙동맹을 동해 적극적으로 독일 패권에 편승하자는 여론 또한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경제력으로 독일을 능가하며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그다지 큰 손해를 보지 않았고, 향후 미국이 영국과 일본 등 ‘대전쟁의 잔해들’을 흡수해 새 동맹체계를 이룰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들과 척지는 것은 절대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죠.

 

따라서, 최종 채택된 연방의 대외기조는 “전략적 모호성”이었습니다.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영미 해양세력과의 관계 역시 원만하게 복구하며, 해외 혁명세력 지원을 포기한다는 안이었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전략으로는 이른바 [밀류코프-바레츠노프 계획]이 입안되었습니다.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서아르메니아를 필수지역, 나머지 동유럽 및 중동지역을 충분지역으로 구분해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플랜이었습니다. 혁명 수출이 좌절되자 사회민주노동당 좌파 일각에서는 “당 차원에서라도 국제사회주의 연대에 나서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는데, 밀류코프 안의 완성에 집중하던 타 정파들은 그들의 시도를 ‘비현실적 이상주의’라고 비웃기 바빴습니다. 물론 이를 막지 못한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밀류코프 외무장관을 필두로 크라피엘, 세레브랴코프, 바레츠노프 등을 대동한 “평화사절단”이 모스크바를 출발해 세계를 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맨 먼저 이들은 영국-오스만 제국 간 평화협상을 중재해 서부 아르메니아를 챙기고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논의 끝에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플의 자유주의자들과 밀약을 맺고 서부 아르메니아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영국의 농간에 넘어가 “영국령 우간다에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는 안”을 책임지게 되어 시온주의자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지만, 아무튼 오스만 제국과 친선관계를 다지고 영국과의 관계 역시 소폭 회복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성과였습니다.

 

프라하 민족평화회의의 결과

 

해가 바뀌어 1919년이 되자 사절단은 다시금 프라하에서 열린 민족평화회의에 참여, 이번에는 독일과 중부유럽의 영향력을 협상했습니다. 독일과 연방 모두 서로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고, 연방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비롯한 동부 발칸만 챙기기로 합의된 상황이었죠. 따라서 협상은 원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루마니아가 트란실바니아를 챙기는 조건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등 지역은 독일의 영향권 아래 들게 되었죠. 또한 아슈케나지 유대인 단체들과 척진 김에 발칸-아나톨리아 지역의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테살로니카 유대인 국가” 계획을 전폭 지원하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국가 차원의 외교성과와 별개로 “제3인터내셔널 창립준비위원회”를 꾸린 이오시프 스탈린 조직국장 겸 준비위원장과 그의 심복 체슬라프는 데이비슨과 함께 전 유럽 혁명세력의 규합에 나섰습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이 대전쟁 지원 여부를 두고 사분오열된 가운데 대표단은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파시스트’ 세력이 실은 ‘민족주의 요소를 차용한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지배민족의 구 부르주아지가 공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와 연합해 인민의 공공 복리를 추구하자는 파시즘의 이상은 데이비슨을 홀려놓았고, 체슬라프 역시 이탈리아의 ‘변종 혁명가’들을 그리 경원시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독일 등의 기성 좌익세력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판단한 스탈린 위원장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과의 연합을 최종 승인했고, 그렇게 유럽 좌익세력은 사민주의자들의 ‘재건 제2인터내셔널’, 독일 공산당 중심의 ‘노동민주 인터내셔널’, 그리고 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알제 정부 중심의 ‘국제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IPI)’로 삼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내 영향력이 희미해지고 있던 우파, 즉 구 멘셰비키 찬전파들을 중심으로 이 ‘대안사상’이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바실리 슐긴 당수가 이끄는 민주당 내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사민당 내 트로츠키 계파 및 (부하린 등) 일부 좌파공산주의를 제외한 대부분 당원들은 소위 [민족공산주의(National Communism)]을 매개로 협력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였죠.

 

물론 민족공산주의 열풍은 전세계적 관점에서는 아직 찻잔 속의 태풍에 가까웠습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협상을 통해 동부 아드리아해 연안 영토를 되찾는 등 실용주의적 행보를 보였고, 알제의 프랑스 혁명정부 역시 체슬라프 등의 조율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숱한 위기를 힘겹게 넘겨오던 자유 공화국 연합의 온건파들은 매우 큰 위기감에 휩싸였습니다. 사회혁명당과 자유주의 민주당은 좌우 양극단으로부터의 정치적 포위에 대처하기 위해 “진보와 정의 연대”라는 연합을 구성해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면역반응이 오히려 병을 키우는 법이었지요.

 


 

1919년 4월 기준 유럽지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로콘 작성시간 23.04.24 E.E.샤츠슈나이더 그리고 체슬라프의 엔딩은 체슬라프가 질서자유당의 어두운 면을 인민에게 폭로한다는 느낌으로 만들었는데 잘 표현됬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통장 작성시간 23.04.24 dear0904 같이 협동하며 공화정을 유지하는줄 알았고 게임 규칙도 있으니, 불안해도 어쩔 수 없는 혁명만 막자 했는데 알고보니 공화정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공화정은 유지했으니 됐지(?)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작성시간 23.04.24 통장 인민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어쨌든 선거는 하고, 세습은 안하는 공화정이니 된거죠 뭐(??)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4.24 로콘 어쩌면 체슬라프랑 크라피엘은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킨 셈이네요.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로콘 작성시간 23.04.24 E.E.샤츠슈나이더 승자들은 신념을 버렸고, 패자들은 신념을 지켰으니 아이러니라 할만 하겠군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