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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통일전선 이상없다 - 01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5.03|조회수591 목록 댓글 715

 

나라가 명랑하게 민주화되려면 국민의 진정한 의사가 국회와 정부에 반영돼 입법과 행정에 실현돼야 하며, 국회와 정부는 국민 앞에 절대 책임을 져야 한다.

- 장면, 1960년 12월 4일

 


 

01. 꼬리가 몸통을 흔들다

 

임시국무회의를 주관하는 허정 과도정부

 

1960년 4월 27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누군가의 영웅, 또 누군가의 철천지 원수이기도 했던 한 노인을 태운 비행기가 영공을 빠져나갔습니다. 대통령의 하야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죠.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 군중은 여전히 집으로 귀가하지 않았고, 국회의사당은 선개헌-후총선, 선총선-후개헌 등을 외치는 의원들의 입씨름 현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년의 좌익 국제주의자이자 우익 전향자, 민주당 현강회 의원은 그간 모은 자신의 동지들을 이끌고 의사당을 조용히 빠져나왔습니다. 경북 선산군의 초선의원 김시형, 과거 족청에 몸담았다가 혁신계로 전향한 광복군 출신의 경향신문 기자 박철환, 고학력 식민지 엘리트 출신 민주당 당직자 이하준, 그리고 역시 광복군 출신으로 현직 육군 사단장을 역임하고 있던 정원상 준장이 그를 따랐습니다.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현강회 의원은 “여태까지 이 박사가 추진했던 개헌은 절차상의 심각한 하자로 인해 모두 무효”라는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논리상 허점은 없었으나, 문제는 이제 와서 새삼 그러한 논리에 누가 동의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혁신계는 차점자론을 주장하며 “부정선거가 아니었으면 죽산(조봉암) 선생이 승리했을테니 그를 새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주당 구파와 신파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기정사실화해 국무총리직을 둔 치열한 정치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니까요. 요컨대 혁신계 등 민주당에 속하지 않은 비주류 야권세력을 규합하고 민주당 양대 계파의 경쟁심을 더욱 자극해 현재의 개헌 합의를 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인 현강회 일파가 주도권을 쥐고 노른자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원상 장군이 “그래도 직선제 대통령제라는 이상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전반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는 제2의 우남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제헌헌법의 대통령 간선제를 더 손대지 않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졌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에 앞서, 족청계와 혁신계 모두에 인맥이 있던 박철환은 과거 광복군 참모장이자 한때 자신이 파시스트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던 이범석을 찾아갔습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잠깐 호헌동지회(민주당의 전신)에 속했으나 극우분자로 몰려 추방당한 상태였죠. 그는 박철환에게 “아예 혁신계까지 포함한 신당을 차리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은 일행 모두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국민진보당 초대 총재 장택상

 

그렇게 가칭 [국민진보당(National Progressive Party)]이 출범하고 나서, 장택상, 이범석, 현강회, 서상일, 조봉암으로 구성된 5인 최고위원회의는 이하준에게 민주당에 대한 여론공작을 지시했습니다. 인촌 김성수의 6촌 재종손으로 민주당 구파 인사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던 정원상 준장 역시 이 공작에 자진해 참여했죠. 국민진보당 창당으로 인해 신파 당직자 및 비주류계 의원들이 하나둘씩 이탈하는 가운데 대세는 윤보선의 구파에게 향하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구파가 당권을 장악해 계획이 어그러질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신파의 드골 헌법(프랑스 5공 헌법) 도입론”, “김준연의 구파 합류론”, “신파의 혁신 빅텐트 합류론” 등의 뜬소문들을 마구 뿌려댔습니다. 이하준이 경향신문 등을 통해 뻐꾸기를 날리는 동안 정원상은 사촌들에게 연락해 인촌 김성수 기념사업회를 열어 참석한 민주당 인사들에게 이 소식들을 교차검증 해주었습니다.

 

결국 구파와 신파는 총선에서 정면으로 맞붙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 제헌헌법 정통론은 사실상 정설로 자리잡았죠. 마지막으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출신 김시형 의원이 나섰습니다. 전 대법원장이자 법조계의 전설인 가인 김병로 선생을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것이었죠. 김병로 선생은 까마득한 후배 김시형의 의도를 찬찬히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도 “제헌헌법을 원상복구하여 안정을 꾀하자”는 제안은 나쁜 것이 아니었죠. 가인 선생은 시형의 말에 어울려주기로 했습니다. 결국 “대법관 간선제(주: 원역사 6공에서 헌법재판관을 선출하는 방식과 유사했습니다)”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김병로는 대법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두 차례의 헌법 개정을 무효화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렇게 5월 2일, 국회는 “유효한 헌법에 따른 절차”로 ‘과도정부 수반’ 허정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직후 국회의원 233명 전원은 의회를 자진 해산했고, 과도국무원(내각)의 관리 하에 총선을 치루어 새 국회 내에서 새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원래 원내에 있던 현강회와 김시형 이외에도 이하준이 경기도 광주군 지역구에서 새로 출마해 당선되었죠. 국민진보당의 캐스팅보터이자 국회 전체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버린 현강회 계파는 규모에 비해 훨씬 강한 레버리지를 행사할 수 있었고, 그렇게 정원상을 유엔사 작전실장(소장)으로, 박철환을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승진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총선 결과, 신파가 79석, 구파가 64석, 국민진보당 및 사회당 혁신블록이 70석, 나머지 기타 정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20석을 차지했습니다. 당내에서는 “차라리 선명야당으로 남아 향후 더 큰 승리를 노리자”는 의견이 잠깐 대두했지만, 결국 현실론이 채택되어 신파와의 연립정부 구성이 승인되었습니다. 장면을 대통령으로, 조봉암을 부통령으로, 그리고 국무총리는 양당간 합의로 자유협동주의자 전진한이 차지했죠. 민주당 신파는 아예 공식적으로 탈당해 “신민당”이라는 당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정계는 서서히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02. 새 술은 새 부대에?

 

4월 혁명 직후 야권이 민주당, 신민당, 국민진보당으로 분리되고 제헌헌법이 복구되며 대법관 간선제 등을 포함한 "제1차 개정헌법"이 통과되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갔습니다. 1960년 9월,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는 주제이자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름아닌 '적폐 청산'이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의 충실한 사냥개이자 일경의 직접적 계승자인 경찰은 가장 많은 이들의 비토를 받았으며, 3.15 부정선거 및 혁명기간중 대민학살 책임자들을 강력히 처벌하라는 탄원이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민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육사 8기를 중심으로 한 영관급 장교들은 이른바 '정군(整軍)운동'을 진행했죠.

 

이 ‘정군파’ 장교들은 육사 2기이자 부산 군수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뭉쳐 군 지휘관들에게 펜검술을 시전했습니다. 이승만 하야 이후 본인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구 육군 수뇌부들이 정말로 하나둘씩 자진 예편을 선택하자, 군의 젊은 장교들은 점점 더 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혀갔습니다. 송요찬, 백선엽, 백인엽, 유재흥, 엄홍섭, 김창규 등 각군 참모총장 및 군관구사령관급 인사들이 사표를 쓰자, 미군 관계자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미 국방부 군수국장 팔머 대장이 정군운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 시작이었죠. 태평양사령부 지상군사령관 화이트 대장 역시 유사한 발언을 내뱉었고, 9월 24일 총 16명의 영관급 장교들이 단체로 이종찬 국방장관을 찾아가 팔머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는 “16인 항명사건”이 발생하자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대장 역시 격노했습니다.

 

정군운동의 주역, 박정희 소장(육사 2기)과 김종필 중령(육사 8기)

 

매그루더 장군은 즉각 휘하의 정원상 소장에게 “당신의 정치인 친구들을 당장 불러오라”며 엄포를 놓았고, 그렇게 9월 26일 일행들은 국방부로 향했습니다. 매그루더 등 미군 관계자들은 김종오 육군참모총장과 장도영 2군사령관 등 “자신들이 직접 키운” 장군들이 하급 군관들에게 퇴진 압력을 받는 상황 자체를 매우 언짢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입장에서 이는 기껏 쌓은 육군 경험치를 땅바닥에 버리는 행위나 다름없었죠. 한미군사고문단장이자 미8군에서 가장 핵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제임스 하우스만 중령의 발언에서, 일행들은 미국 정치권과 미군의 의도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수에즈 위기 등을 겪으며 많은 외교적 난맥상을 경험하고 있었고, 한국의 안보가 흔들린다면 현 부통령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안보 대통령 이미지를 전혀 이용할 수 없을 것이었죠.

 

미국은 문민통제의 원칙이 지켜지는 나라였기에, 미8군의 비위를 지나치게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는 미 정치권의 의도에 맞추어주는 것이 정석이었습니다. 미군 관계자들이 떠나고 나서, 일행에 새로 합류한 국방부 제79호실 실장 이후락 소장이 회의실로 들어왔습니다. 일행들의 ‘비밀’을 알고 있던 이후락은 “어차피 같은 편인데 무슨 걱정이냐”며 너스레를 떨었죠. 아무튼 그가 제기한 대원칙은 꽤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정군운동은 하극상이자 혁명운동이므로, 군의 기강과 혁명압력을 모두 제거하려면 수뇌부와 하급장교단 모두에 대한 ‘대대적 숙군’이 필요하다는 논리였죠. 이는 미국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것이었기에 이후락은 “하우스만 고문단장을 정군파 장교들의 소행으로 꾸며 암살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건넸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부터가 한국의 숙군을 앞장서서 추진할 것이라는 이야기였죠.

 

엄청나게 매운 제안에 정신을 못 차리던 일행들은 어느새 합류한 국민진보당 초선의원(이자 민족일보의 사주) 조용수의 반박을 듣고 대안 수립에 몰두했습니다. 때마침 김시형이 내놓은 절충안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죠.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박정희를 위시한 ‘정군파’ 장교들을 요직에 등용해 이들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구 수뇌부들 상당수를 명예직으로 좌천시키며 미군이 중요시하는 주요 인재(김종오, 장도영)들에게 고위 지휘관 역할을 맡기는 것. 또한 장면 대통령이 직접 하이바를 쓰고 전방을 시찰하는 사진을 대대적으로 배포해 대한민국의 안보 수호 의지를 국내외에 선보이자는 제안도 함께였습니다. 이 제안은 기본적으로 ‘디바이드 앤 룰’의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정군의 대의를 받아들이되 정군파를 ‘변절자’로 만들어 야심가들의 쿠데타 시도를 사전에 꺾어놓는다는 것이었죠.

 

1군사령관에 부임한 박정희 중장과 악수를 나누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

 

박상희의 제자로 박정희, 김종필 등 정군파 장교들과 안면이 깊던 김시형 의원이 그들을 설득하는 동안 이하준은 이후락과 함께 독립적 방첩기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기 위한 밑작업에 나섰습니다. 정원상은 육사 동기 김재규를 통해 (중립을 지키던) 이종찬계를 끌어들였고, 이는 김시형의 공작과 맞물려 김재규의 육참차장 발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와 별개로 박철환과 조용수가 경향신문 및 민족일보를 통해 장면 대통령의 안보시찰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미국 공화당은 한국의 “강한 민주주의”를 외교정책의 성공으로 홍보할 수 있게 되었죠.

 

결국 전략은 멋들어지게 성공했습니다. 정군의 대의가 널리 수용되면서 국군은 ‘민주주의 혁명의 전위대’라는 의식을 공유했고, 박정희는 정계 진출의 끈을 쥐는 대신 혁명의 변절자라는 이미지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일으켰는데, 바로 196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에게 압승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또한 중화민국에서는 이승만의 처참한 몰락에 자극받은 장제스가 반정부 언론 ‘자유중국’의 주요 필진들을 ‘공산당 간첩’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저지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닉슨 정권이 “공산주의자든 자본주의자든 ‘악의 근원’ 소련에 저항하는 이들이라면 언제든 지원하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지만, 해외 소식에 어둡던 국내에서는 당장의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변화는 향후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습니다.

 


 

03. 민주주의 계속혁명론

 

군 인사개편이 한창 이루어지는 동안, 정부는 “적폐청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장면 대통령은 조봉암 부통령을 통해 연립여당 차원에서의 대책 마련을 주문했고, 또 다시 일행들이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경찰개혁 문제였습니다. 사실상 일제 총독부 경찰의 연장선상이던 기존 경찰은 이미 전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조직이었고, ‘재창설’에 준하는 강도 높은 개혁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허나 경찰인력이 다시 충원되는 동안 전국의 치안공백은 어떻게 해결하냐는 물음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죠. 민주당(그러니까 옛 ‘구파’) 의원 13명이 발의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일명 [데모규제법]을 통과시킨다는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이 법안은 사실상 집회의 자유를 차단해 민주질서를 크게 훼손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즉, 데모규제법의 수위를 조정하려면 경찰의 공백을 최소화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 간부인력 재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파괴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은 그리 많지 않았죠. 우선 현석호 내무장관(신민당)이 내놓은 ‘중앙공안위원회’ 안이 기초 토대가 되어주었습니다. 대통령, 국회, 대법원, 변호사협회가 각각 위원을 지명한 공안위원회가 경찰청, 해양경찰, 소방청 등을 통제한다는 안이었습니다. 또한 경찰간부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비역 장교들을 대거 채용한다는 고육지책이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경찰대학을 설치해 점차적으로 민간인력으로 대체한다는 전제였지만, 군경의 유착이 심해지는 단점은 어찌할 수 없었죠. 그나마 법무부 검찰청이 수사권과 수사종결권을 가져가 경찰을 통제할 수 있게끔 하면서 독소조항은 어떻게든 완화될 수 있었습니다. 치안공백이 최소화되며 데모규제법 역시 조금 역화된 [집시법]으로 대체시킬 수 있었고 말입니다.

 

거리 연설에서 2대 국가정상화 법안(데모규제법, 개정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국민진보당 김대중 의원.

 

정원상은 의견을 낸 책임을 그대로 물어 초대 경찰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경찰청장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그가 겪은 사태는 국회의사당으로 분노한 군중들이 난입하는 비상상황이었습니다. 주요 책임자들이 현장에서 체포되며 사태는 곧 진압되었지만, 그 내막은 그리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죠. 3.15 부정선거 및 유혈진압의 핵심 책임자 9인에게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진 것이 봉기의 원인이었습니다. 사법부의 책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현행 법률에 의거해 공정하게 판결했을 뿐이었으니까요.

 

위기감을 느낀 정부에서는 이른바 ‘혁명입법’을 준비했습니다. [반민주행위처벌법]을 새로 제정해 1공 부역자들에게 사형, 무기, 10년 이상의 징역 등 중형을 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이었죠. 허나 헌법상 대원칙(그리고 일반 법상식)에 의하면 “행위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법”을 근거로 피의자를 재판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법률 불소급의 원칙]이었죠. 즉 부역자들에게 반민주법을 적용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했고, 그러려면 야당 민주당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당은 혁명입법 과정에 동조하는 조건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걸었습니다. 이른바 “반공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안은 반국가단체 및 해외 사회주의 단체에 대한 찬양 및 고무행위를 엄벌(1년 이상의 징역)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이 법안이 원안대로 통과된다면 혁신계와 민족주의 계열, 중도우파 등으로 구성된 국민진보당은 크게 와해될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 대대적 정치탄압이 발생할 우려도 있었죠. 법안에 강력히 동의하던 국민진보당(구 민주당 탈당파) 김대중 의원과 (민족일보 사장이 된)박철환 주필 역시 여러 설명을 듣고 나서는 독소조항의 제거 필요성에 동감했습니다.

 

긴 협의로, 국보법 개정안에는 두 가지 단서조항이 추가되었습니다. 학술, 예술 등 비정치적 의도가 명백한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첫째, 그리고 ‘해외 사회주의 단체’를 ‘해외 반국가단체’로 대체하며 그 범주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둘째였죠. 물론 대통령령이라고 해도 무제한의 자율성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사실상 중국과 소련 및 공산권 국가들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민주당과 신민당 모두 타협안을 받아들이며 혁명입법과 원포인트 개헌 절차가 본격화되었습니다. 김시형 의원과 정원상 청장은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나 그것을 표면화하지는 않았죠. 박철환은 (서민들의 언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단숨에 메이저 언론사로 떠오른) 민족일보를 통해 이승만 정부의 악행을 하나하나 재조명하는 동시에 법무부와 협력해 이승만의 궐석 기소를 이끌어냈고, 동시에 ‘민족협동주의’라는 대안적 길을 제시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총 3만명의 참관인과 함께 진행된 “반민주행위특별검사위원회 재판”에서는 핵심 부역자 9인의 사형 선고가 확정되었고, 이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거리에서 모욕적인 팻말을 걸고 군중들의 가래침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심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이승만의 마지막 내무장관 홍진기.

 

혁명의 분위기가 극히 고조된 상황에서, 정치적 입지 상승을 노리던 이하준은 본인의 취득재산을 국민에게 환원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날리며 이승만 정권의 잘못된 적산분류정책을 비판, [경제민주화]라는 의제를 수면 위로 올렸습니다. 이 의제는 일약 정치권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었으며, 구 한민당 지주계층이 지배하던 민주당은 삽시간에 ‘반혁명 정당’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의 파급효과는 이하준조차 계산하지 못한 것이었죠. 민족일보를 필두로 동아일보, 경향신문, 심지어 조선일보까지 경제민주화 떡밥을 물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경제의 재편이라는 의제가 테이블에 올라왔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장면 대통령 각하와 조봉암 부통령 각하의 용단을 적극 지지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거리를 행진하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은 [전사회적 민주화]를 위한 박차를 또 한 번 가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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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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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5.08 dear0904 제가 B 하는 이유는 간단하게 민간인이 군대 개혁하는 선례를 좀 남기려고(...)하는 목적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작성시간 23.05.08 렌지파일 그래야 문민 통제로 넘어갈 수 있죠(...) 지금도 문민통제가 안되고 있을텐데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5.08 A: 정원상/박철환
    B: 김시형
    C: 이하준

    배치에 따라, 정원상과 박철환은 국토개발청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습니다.

    김시형은 법무차관에서 국방부 방위조달청장(차관급)으로 이동합니다.

    이하준은 다시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로 임명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5.08 E.E.샤츠슈나이더 방사청 ㄷㄷㄷ
  • 답댓글 작성자로콘 작성시간 23.05.08 E.E.샤츠슈나이더 갑자기 경제에 대해 잘 모르는 박철환이 국토개발청 상임고문으로서 하는 일은 "협동조합주의 가즈아!!!!" 이거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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