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RPG]통일전선 이상없다 - 02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5.09|조회수564 목록 댓글 721

 

"지구상 어떤 곳에든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미합중국 역시 그에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은 허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I am not a crook!)"

-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 리처드 M. 닉슨, 1961년 10월.

 


 

04. 빵과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

 

당정청 경제민주화 합동 대토론회에 앞서 국민의례를 진행하는 참가자들.

 

어느덧 해가 바뀌어 1961년이 되었습니다. 경찰청의 신설 등으로 국내의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점점 정리되는 분위기였으나, 반민주행위자 재판의 열기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아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국민진보당 이하준 의원이 사실상 전재산을 쾌척하며 경제민주화의 운을 띄우고 나서는 분배정의 실현이라는 중대한 과제가 정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의원이 국회 경제민주화특별임시위원회, 즉 [경민특위]의 위원장이 된 가운데 현강회 재무장관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들 역시 당정청 합동 대토론회에 참석했습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각 정파의 견해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선 근본적으로 지주-자본가 정당이자 소위 ‘반사회적 기업’과 만만찮은 유착관계를 형성하던 민주당은 [미국식 시장경제]를 주장하며 어떻게든 여파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헌법 자체가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을 규정하는 형국에 그들의 발버둥은 어디까지나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물론 한미개발원조처(USOM/K)를 비롯한 미국 측 관계자들이 민주당의 의견을 옹호하기는 했으나 그들도 대세가 기울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죠. 그나마 기존 기업인들의 경영권을 보장하되 국가의 광범위한 조정과 통제를 주장한 신민당은 “미국식 자유방임경제는 후진 약소국인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으니 [프랑스식 국가주도경제]를 기획해야 한다”는 온건론을 내놓았지만, 그마저도 국민진보당의 급진파들이 내놓은 각종 혁신안들을 중화시키는 역할 정도를 맡을 뿐이었습니다.

 

자유협동주의의 거두, 전진한 국무총리

 

장택상 진보당 총재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스탈린주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강력한 중앙계획경제를 주장하며 모두를 경악에 빠뜨리는 동안, 전진한 국무총리 등 국민진보당 다수파는 “헌정 수립 이래 13년동안 잊혀졌던 이익균점의 원칙을 드높이자”는 정당한 주장을 펼치며 정국을 장악해나갔습니다. 사주(社主)가 아닌 근로자가 직접 위원회를 결성해 사업체의 모든 운영을 총괄해나가며 지역의 총체적 균형을 도모, 국민 전체의 협동으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추구해나가자는 주장이었죠.

 

그러나 신민당의 반박 역시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수입대체산업화에 실패해 여전히 1차산업 위주 산업구조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몇몇 국가들의 예를 든 신민당 김영삼 의원은 “이상이 아무리 높아도 현실의 무게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습니다. 무려 2달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신민당과 진보당은 타협안에 도달했습니다. 50인 이상 사업체에서 근로자위원회가 경영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원안은 그대로였으나 (부정축재자 등을 제외한)기존 경영진의 고유 권한 역시 어느 정도 보전되었고, 노사간 협력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보장한다는 안전장치가 추가되었습니다. 이는 [노사정 협의체]라고도 불렸죠. 또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은 수출주도산업화 전략으로 변경되었고, 지역균형의 추구 역시 ‘거점개발을 통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노사협력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에 따라 국가경제의 사령탑 [경제기획원]이 투자, 대출, 조세, 보조금 등의 수단을 이용해 각 사업체를 통제할 수 있었죠.

 

경제기획원장을 국무총리가 겸임하게 되면서 국가경제의 사령관을 맡게 된 전진한 총리는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타협으로 독점자본주의와 공산전체주의를 모두 배격할 수 있게 되었다며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죠. 국가경제의 기틀에 합의한 정치권은 즉각 [부정축재자처리법]과 [국유사업체법]을 제정해 제헌헌법의 취지대로 광물 등 중요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 등 발전에 사용되는 자연력,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무역업의 전면 국유화를 선언하는 한편 전 정권과 일제에 부역했던 기업인 상당수의 경영권을 박탈해버렸습니다. 재계 2위 삼호그룹과 5위 태창그룹이 공중분해되는 가운데 재계 3위 대한그룹과 7위 락희(LG)그룹이 몰수되어 다시 경매에 부쳐졌고, 그 반사이익은 순위권에 속해있지도 않던 현대건설 등 ‘다크호스’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재계 1위 삼성그룹조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웅크려있는 상황에서 현대는 삼호토건, 대한전선 등을 인수하며 단숨에 2위 자리에 올라섰죠. 경민특위 위원장 이하준은 박철환 등의 도움으로 민족일보에 [정치혁명에서 경제혁명으로!]라는 사설을 기고해 마지막 방점을 찍었습니다.

 

부정축재자처리법 제정으로 법정에 선 왕년의 재벌 총수들.

 

화신백화점 노동자들이 사장실을 점거하고 사업주 박흥식을 포박해 경찰에 인계하며 태창방직 백낙승 회장이 야반도주를 시도하려다 비서의 밀고로 체포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클라런스 더글라스 딜런(C. Douglas Dillon)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딜런 장관은 장면 행정부의 환율 정상화 조치를 환영하면서도 한국이 택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미경제협력을 위한 만찬’이라는 행사 이름이 무색하게도 분위기는 매우 냉랭했죠. 그러나 갑은 항상 미국이었습니다. 자유협동경제고 뭐고 미국의 산업차관 원조가 없다면 첫 삽도 뜰 수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목줄을 자유롭게 쥐고 흔들던 딜런은 “처음부터 경제정책을 다시 짜지 않으면 원조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더니, 분노와 당황에 휩싸여 있던 한국 대표단에게 못 이기는 척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 대안이라는 건 바로 [한일수교]였습니다. 일본에게서 배상금을 많이(즉, 필리핀보다 더 높은 금액) 받게 해줄테니 일본과 조약을 맺고 경제발전을 제대로 해보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한일수교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정권이 날아갈 위험이 있는 초대형 폭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세워둔 경제계획을 전환해 국가경제를 박살낼 수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외통수나 다름없었죠. 상황을 전해듣고 단숨에 달려온 정원상 경찰청장이 “나라를 또 한 번 혁명의 불구덩이 속에 밀어넣느니 차라리 자력갱생의 길을 택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라 소리쳤습니다만, 딜런 장관은 “왜 나한테 그러느냐”는 억울한 표정과 함께 “한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라”며 은근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합중국 국무장관 C. 더글라스 딜런(좌)

 

김시형 법무차관이 “결국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겠냐”며 현실론을 제기할 무렵, 현강회 재무장관은 딜런 장관에게 “무역, 영사 부문에서만 우선 제한적으로 협정을 맺어보겠다”는 절충안을 제안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딜런은 이를 승인했죠. 잠깐의 논란이 있었지만 한국 정부 역시 이참에 재일동포의 북송을 중단시키고 일본과 무역관계라도 수립하자는 데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딜런 장관에게 장면 대통령 명의의 서한이 도착한 즉시, 미국은 [한미경제협력협정]의 체결을 발표하고 기존의 2.5배 이상에 달하는 연 5억 2천만 달러 상당 경협차관의 제공을 약속했습니다. 그 중 무상원조는 약 2억 달러, 나머지 역시 저이율 차관이었죠. 한일회담과 관련된 언급은 철저히 통제되어, 국민들은 “정부가 미국과의 외교전에서 승리해 돈을 받아올 수 있었다”며 자축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호재가 아니라 오히려 함정이었다는 점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미경제협정의 미 의회 비준과정은 이상하게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조금 더 포괄적인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며 대놓고 한일수교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05. 두 번의 구한말은 없다

 

북송된 재일교포들을 태운 북한의 "만경봉"호.

 

정원상과 박철환은 제5차 한일회담이 열리기 전 사전교섭인원으로 선임되어 나머지 인원들에 앞서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일본의 국회의원, 고위 관료, 경제인, 언론인 등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고 숙소에 도착한 둘은 비밀리에 검은 승합차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왔죠. 그렇게 도착한 곳은 중정 일본지부의 안전가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중정 일본지부장 석정선과 “긴자의 호랑이” 재일교포 야쿠자 정건영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이들의 진짜 임무는 1959년부터 실시되고 있던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막는 것이었죠. 물론 영사 문제에 대한 교섭이 있을 예정이었지만, 협상은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래 일본에서 무국적자 취급을 받던 60만 가량의 재일교포들은 우세한 동원력의 [총련]에게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북한 정권과 연결된 총련 지도부는 [일본사회당]을 통해 사실상 재일교포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죠. 사회당 의원의 지역구에는 ‘조선학교’가 세워져 아이들을 교육시켰고, 재일교포 각 가정에는 최창익 국가주석과 김두봉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을 찬양하는 유인물이 배달되어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유도했습니다. 경찰청 대공수사국의 역량을 총동원한 정원상이 북송된 동포들의 실태를 파악하자 공작 인원들은 분한 마음을 겨우 삭히고 방침 마련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죠.

 

공작의 핵심은 일본 좌익-총련-북한 정권으로 이어지는 커넥션을 붕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세운 계획 역시 일본사회당과 북한의 직접 접촉(즉, 사회당의 대북 자금지원)을 유도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추가적 송환을 막게 하고 총련의 조직력을 와해시키며 북한-사회당 간 커넥션 역시 끊어버리는 것이었죠. 전체 의석의 4할에 달하는 의석을 점유하고 있던 사회당과 공산당은 탈스탈린주의화를 빙자해 [신민주주의]를 표방하던 중공의 마오 정권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집단이었고, 북한 정권과 유착하여 한일회담을 전력으로 방해하던 이들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일본사회당은 북한 정권과의 밀접한 커넥션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 공작계획은 실행도 되기 전에 엄청난 분기를 맞았습니다. 1961년 6월 12일, 미국령 오키나와 후텐마 공군기지에서 정체불명의 폭발이 일어나 미군 7명과 일본인 군무원 3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형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오키나와 조국복귀운동”이라는 단체를 자처한 일군의 정체불명자들은 이를 자신들의 소행이라 밝혔죠. 그로부터 8시간 뒤에는 주일본 중화민국 대사관에 폭탄 소포가 배달되어 2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터졌고, 심지어 공작인원들이 상주하던 중정 안전가옥마저 습격을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광복군 정예요원으로서 이러한 대비에 익숙해져 있던 박철환과 정원상이 빠르게 행동해 습격자들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충격적이게도(또는 새삼스럽게도) 범인은 북한 정찰총국 요원들이었습니다. 심문 결과 이들은 한일수교를 막기 위해 후텐마 공군기지와 중화민국 대사관을 테러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이 남한과 일본의 수교를 막으려 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 요원들은 “일본 정부가 중공과의 수교를 추진하고 있으며 그 명분을 위해 남한과의 수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중일수교 이후 마오 정권에게 버려질 위기에 놓인 사회당은 북한과 직접적으로 결탁, 작전 실행에 핵심적인 조력을 제공했다는 대단히 놀라운 소식 역시 들려왔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실제로 미국의 철수를 촉구하는 시위가 자주 발생했다.

 

놀란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 따위는 없었습니다. “회담이 있기도 전에 일본 영토 내 공작 사실을 들켜서는 안된다”는 석정선 지부장의 의견에 따라, 체포한 북한 공작원들을 전원 전향시키고 이들 중 일부를 일본 경찰에 자수시킨 뒤 사후 교섭으로 인계받아 사면령을 내린다는 방침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빌미만 기다리고 있던 자민당 정권은 총련과 사회당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있을 것이었죠. 박철환이 다시금 문필 실력을 과시해 북송된 재일교포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은 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효과는 탁월했습니다. 북한과 총련, 일본 좌익의 장렬한 자폭행위는 그들의 명줄을 재촉했습니다. 제2의 ‘레드 퍼지(Red Purge)’가 열도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총련의 일반 회원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재일동포들의 여론은 급격히 친-남한 쪽으로 기울었죠. 뜬금없이 “북괴가 테러까지 저질러가며 한일수교를 막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한국 여론 역시 두 패로 갈렸습니다. 즉 반공과 반일 중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었죠. 친일몰이에 예민하고 용공 논란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보수세력은 반일을 우선시했고, 그와 반대인 혁신세력은 반공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보수세력은 민족주의를, 혁신세력은 자유세계 국제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정원상과 박철환이 모든 공작 사실을 은폐하고 귀국한 뒤인 8월 9일, 드디어 제5차 한일회담이 정식으로 개막했습니다. 회담 개최 사실이 이미 공개된 뒤였기에, 각 당파는 자신들의 대리인을 덕지덕지 붙여 대표단의 체급을 한참 키워놓았습니다. 정치색이 없는 정통 외교관 출신 외무차관 최규하가 명목상 대표를 맡은 가운데 신민당은 김신 합참의장과 이만섭 청와대 대변인을, 진보당은 김시형 법무차관과 이하준 의원을 붙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측에서 이케다 총리의 심복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이 직접 협상대표를 자처했고, 일본 대표단은 거리낌없이 요구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북진통일, 주권사수!"를 외치는 혁신 성향의 부녀회원들.

 

일본 측은 총 10억 달러(무상 5억)에 달하는 파격적인 ‘전쟁피해보상금’과 내각총리대신의 현충원 방문, 대한민국의 한반도 유일 합법정권 승인 등 전향적 조건을 내세우며, 한국 측에는 단 한 가지의 전제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정치-경제의 분리가 아닌 “포괄적 수교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국 대표단이 대뜸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보수와 진보 측 인사 모두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죠. 국내 여론이 “한일수교 절대반대”와 “자유세계 동맹을 통한 북진멸공”으로 양극화된 상황에서 수교협정이 체결된다면 그 후폭풍은 불 보듯 뻔했으니까 말입니다. 최규하 외무차관은 본국과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며 즉답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날 회담이 마무리되고 나서, 이하준과 김시형은 주일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의 비밀스러운 연락을 받고 그와의 회동에 나섰습니다. 동아시아 전문가 출신의 라이샤워 대사는 단도직입적으로 “수교가 불발된다면 한국은 절체절명의 안보 딜레마에 직면할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죠. 전말은 이러했습니다.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하면서 서구세계의 여론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이는 소련 견제를 위해 중공과 접촉할 명분을 찾고 있던 닉슨 행정부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소련이 베를린을 재차 봉쇄하고 유고슬라비아가 사실상 NATO에 가입하여 유럽이 불타네 마네 하는 현 상황에서는 닉슨이 아니라 그 어떤 정권이라도 중공과의 대화를 선택했을 것이었죠. 아무튼 미중수교가 이루어진다면 주조선중공군과 주한미군의 상호철수가 전제조건으로 작용할테고, 따라서 미국은 안보상 이유로 어떻게든 한국과 일본을 연결시키려 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10억 달러를 과감히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미국이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었죠. ‘국토 수호’라는 부정할 수 없는 성과를 가져온다면 이케다 정권 역시 적은 부담으로 한국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해 “윈-윈”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미국 외교관 중에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았던 에드윈 O. 라이샤워 주일대사(좌). 그는 이후 빈에 파견되어 소련 측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우)와도 협상에 나섰다.

 

물론 이 모든 고려는 한일관계와 한국의 내부정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라이샤워 대사는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보고자 협상단에 접근한 셈이었죠. 정보가 협상단 전원과 장면 대통령, 현강회 장관 등 국내 주요인물에게 전달되자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신민당 등 보수세력은 협상을 즉각 중단하고 미중접촉 자체를 어떻게든 방해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진보당 등 혁신세력은 미국을 어떻게든 설득해 원래 이야기되었던 ‘무역 및 영사관계에 한정된 한일협상’을 관철하자는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어느 해결책도 실행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이었죠.

 

고심하던 김시형 차관은 “중공이 미국, 일본 등과 연결된다면 그들의 괴뢰인 북괴 또한 버려지는 게 아니냐”며 서울의 정원상 경찰청장과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북한 내부의 정황을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정과 경찰 대공수사국, 군 방첩사령부는 모든 가용 정보력을 총투입해 북한 정권의 행동을 조사했죠.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북한이 독단적으로 일본 내 테러활동을 자행한 직후 정권 실세였던 김두봉 총사령관이 숙청되자, 본래 친중파였던 국가주석 최창익은 극심한 불안감을 느껴 소련파, 남로당파, 심지어 납북시킨 우익 인사들까지 동원해 소련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시 소집된 장면 대통령 이하 국가안보회의는 이 북소밀약 시도에 대한 정보를 미국, 일본, 심지어 중공에까지 유출시키자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북한이 소련에 붙는다면 한반도 상호철수를 매개로 한 미중일 밀월의 전제조건 자체가 무효화될테고, 이는 결정적 국면전환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었죠. 중국이 북한 정권에 ‘조치’를 취해 그들을 완전한 종속국으로 만든다면 미중수교의 절차는 중단될 것이 뻔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복잡한 거래 역시 무효화되어 결과적으로 원래의 훈령인 ‘제한적 협정 체결’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국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또 다시 장기말로 희생될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중국이 북한 정권에 대한 대숙청을 벌여 아예 연변자치주장 주덕해를 국가원수로 옹립하고 소련이 “베이징 핵타격”을 언급하자 미국은 곧바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한국에 특사로 방문한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온갖 퍼레이드를 벌이며 일본에게 은근한 압박을 전달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의 재일교포 보호권을 인정하고 양국 정부를 통한 한일간 무역을 재개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한일무역투자협정]과 [재일조선인의 지위와 국적에 관한 협정]이 각각 체결되면서 장면 대통령은 “일본과의 담판으로 동포를 보호하고 국익을 수호할 수 있었다”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1년의 주제어가 ‘경제민주화’였다면 1962년의 주제어는 [민족적 민주주의]가 되었죠. 일부 지식인들의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미중접촉은 당분간 어려워졌으니 한국은 얼마간의 시간을 번 셈이었지요. 그렇게 얻은 귀중한 시간을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사용할 때였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5.13 유진산 추천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5.13 일단 하나 있긴 해야 할 것 같아서 DJ 포트레잇 만들어봤습니다.

    -

    1-2: 혁명군부
    3-4: 진보당 트리오
    5-6: 유진산

    6.

    유진산으로 낙점됩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5.13 트롤 유진산과 빡친 YS(...)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5.13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약속의 땅은 댓글 2천개를 한 게시글로 만들다 보니 생략된 내용이 많더라고요..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작성시간 23.05.13 렌지파일 사실 댓글이 많을땐 끊어가야죠 ㅋㅋ... 근데 하다보면 그게 안되는 경우도 있을테고... 무조건 1년. 1년이다! 하고 기간을 정해둔 경우에는 더 답이 없고(...)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