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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통일전선 이상없다 - 04(完)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5.20|조회수476 목록 댓글 347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릴 것이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듣지 않을 것이다.

- 예레미야 11:11

 

 

08. 검은 황금의 전쟁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삼면 동시기습한 “3주 전쟁” 또는 [제3차 중동전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골란 고원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탈취했지만 끝내 이집트군의 지연전술에 막혀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중동 열국들의 공적(公敵)이었죠. 실질적으로 주요 전투가 벌어진 것은 개전 후 고작 3일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아랍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의 ‘시정조치’가 있기 전까지 석유를 월 7%씩 감산한다는 합의를 맺고 드러누웠던 것입니다. 이 조치로 국제유가는 기존의 배럴 당 3달러에서 7달러까지 수직상승했으며, 대한민국의 산업화 계획에도 상당한 차질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중공업 비중은 아직 크지 않았기에 직접적인 타격은 다른 산업국가에 비해 적다고 할 수 있었으나, 고유가가 지속될 경우 전세계적 경기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주효했습니다. 수출을 중심으로 경제를 꾸려나가는 소국의 입장에서 세계적 경제위기는 곧 파산을 의미했기 때문이죠. 유가 상승을 주도하던 사우드 왕가의 [파이살 알사우드] 국왕과 [아메드 자키 야마니] 석유장관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고, 이스라엘을 굳건히 지지했던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이하 서유럽 국가들 역시 어떻게든 버틴다는 전략을 내세우며 이 사태는 자유세계의 경제 내전이라는 형태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약소국에 개발도상국이었지만,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산권과 자유세계의 경계에 위치한 최선봉 국가이자 몇 안 되는 분단국가, 그리고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 국가였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유대계 자본과 손잡은 유럽, 그리고 석유를 무기화해 그에 맞서는 중동 국가들. 대세가 한 쪽으로 급격히 쏠리지 않는 이상, 자유세계의 내전에서 한국이 어느 편을 드느냐는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터였죠. 즉 한국이 가지는 외교적 레버리지는 그 어느 때보다 극대화된 상황이었습니다.

 

각각 워싱턴 DC와 리야드로 파견된 일행들의 초기 판단은 “중동의 손을 들어주는” 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분없는 침략을 옹호하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고, 향후 경제발전을 위해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두는 것은 중요했으니까요. 게다가 미국에 파견되었던 김시형 등이 닉슨 행정부의 계획을 알게 되자 일행들의 마음은 더욱 쏠렸습니다. 유동성과 신뢰성(또는 통화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는 [트리핀 딜레마], 즉 금태환제 유지를 위해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감수해야 했던 미국은 유가사태로 이미 큰 피해를 본 상태였고,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정치공작으로 본인의 지지율을 유지해왔던 닉슨 대통령은 이대로 민주당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본인의 집권기간이 끝나기 전에 [금태환 정지선언]과 함께 [페트로-달러 시스템], 즉 석유의 달러화 결제제도를 정착시켜 (달러 가치 하락을 통한) 경기부흥과 서유럽의 재복속을 시도했던 것이지요.

 

사실 여러모로 중동을 편드는 것이 이득인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이 이번 사태를 통해 자유세계 분열 장기화를 획책하는 상황에서는 빠른 선택이 필요했죠. 그러나 한국의 캐스팅보터 지위를 잘 알고 있던 프랑스가 “핵무기 기술 공유”라는 빅 카드를 꺼내들고 나서 전세는 그대로 역전되었습니다. 정원상이나 박철환을 비롯한 많은 정부인사들은 문제의 한일회담 당시 미국이 기획했던 수많은 기만행위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결국 약소국이 제 발로 서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하준 등 테크노크라트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펄쩍 뛰었지만, 혁명 정치가와 테크노크라트 사이를 중재하던 김시형이 의견 내기를 포기하면서 정부 내 여론은 급격히 친유럽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1966년 10월 3일 조봉암 대통령은 서유럽-이스라엘 동맹의 편을 드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직까지 중립 입장에 서있던 수많은 로비세력들이 유대자본의 편을 드는 결과를 불러와, 미 연방의회에서 친-닉슨파의 고립을 초래했습니다. 유리할 줄 알았던 전세가 그대로 역전되자 이란 제국은 급히 석유 증산을 합의, [유가 역파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유세계의 내전이 그대로 서유럽과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나서, 최후의 승자로 떠오른 것은 프랑스의 드골과 미국 민주당의 진보파였습니다. 물론 드골 대통령은 얼마 뒤 68혁명의 열기에 직면하고 자진 사퇴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승자의 여유에 가까웠죠.

 

이 사건이 한국의 정치, 더 나아가 세계정세에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비록 유가 자체는 몇 달만에 안정화되었지만, 한국의 국민진보당 정권은 더욱 ‘혁명’ 그 자체에 경도되고 말았습니다. 중용과 안정이 미덕으로 취급받던 시대는 완전히 사멸했으며, 그 자리는 모험주의와 맹동주의로 채워졌습니다. 마치 눈 앞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건 말건 목표를 향해서 돌진하는 일만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정당이 된 것이었죠.

 

물론 공산권에 대한 정보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던 한국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유럽의 승리는 소련에게도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들은 자유세계가 계속 분열된 채 남거나, 차선으로 중동이 석유 무기화에 성공해 자유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라도 쥐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유럽이 다시금 미국의 공고한 동맹이자 제1의 혈맹으로 복귀한 것은 모스크바의 공산 교조주의자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생각을 고쳐먹을 법한 “진짜 세계멸망 위기”가 닥치지 않았기에 백악관과 크렘린또한 소통 채널을 만들어놓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편집증적 사고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스노우볼은 최악의 형태로 전세계를 덮치게 되었습니다...

 


 

09. 불의의 일격

 

1968년 제7회 국회의원 총선거는 (이미 여러 가지 사건들로 지지율을 어느 정도 상실한) 국민진보당의 과반 달성 실패라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과반에 근접한 의석을 여전히 점유하던 진보당은 백범 김구의 후계를 자처하던 [한국독립당]과 손을 잡고 그 당수 [김홍일]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함으로써 계속 집권세력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정원상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방개발위원회가 핵개발을 총괄하는 부총리급 기관으로 격상되며 미국의 [유진 매카시] 신임 행정부가 한국의 시국을 매우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김홍일 행정부는 사실상 대부분의 주요 내각진을 기존의 진보당 정치인들로 채운 채 출항했습니다.

 

그러나 각 부처 장관진이 내정되는 어수선한 시국에서 또 한 번의 대형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말로 북한에서 벌인 일이라는 점이 비극이었죠. 1969년 1월 20일 저녁 휴전선 철책을 넘어온 공작원들이 서울 코앞 북한산 자락까지 내려와 교전 끝에 대부분 사살당한, 일명 [1.21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태까지 북한의 도발은 전투기 따위를 월경시켜 크고작은 교전을 벌이거나(그마저도 미라주III의 도입 이후로는 잠잠했습니다) 소수의 간첩이 침투해 정보공작을 시도하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생포된 무장공비들은 “김홍일이 모가지를 따러 왔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으며 출근(또는 등교)을 준비하던 국민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곧바로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 각급 정보기관장들은 각자 알아낸 정보들을 보따리 풀듯 풀어놓았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괴뢰국으로 전락한 북한에서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두 아들 [김정일], [김평일] 형제가 빨치산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된 뒤였기에, 국무위원들은 그 상세한 내막과 이번 공작의 주범을 알고자 했죠. 결론적으로 공작을 주도한 것은 [주덕해]를 수반으로 하는 친중 북한 정부가 아닌 빨치산들이었습니다. 빨치산은 북한 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형태는 단일한 투쟁조직이 아니라 점조직이라는 점, 북한 정부 내에 빨치산에 호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빨치산의 명목상 지도자인 정일-평일 형제가 소련의 지원을 받는다는 점 역시 밝혀졌습니다.

 

1월 21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당 주요인사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빨치산들이 고의적으로 전쟁상태를 유발하기 위해 금번 사태를 일으켰다”는 추론까지 접한 상태였습니다. 곧 사태의 책임을 물어 경질이 예정되었던 박정희 국방장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김시형 국토개발청 장관은 (중국 각지에 압송되어 있던) 구 납북인사들, 즉 [조소앙], [조만식], [엄항섭], [박열] 등의 인물들을 구출한 뒤 북한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 참수작전으로 혼란을 불러일으켜 이들의 집권을 획책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반공-혁명 이데올로그로 가득한 집권세력 내에서 “전쟁을 일으키자”는 이야기로 오인되었고, “당장 북진해 통일조국을 이룩하자”는 선언처럼 여겨졌습니다.

 

중공의 거친 압박에 고전하던 중화민국이 [한-화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작전 공조에 나서기로 한 뒤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습니다. 조소앙을 비롯한 인사들은 공작원들에 의해 빼돌려져 비밀리에 인천항으로 인도되었고, 지도부에 대한 참수작전은 주덕해 주석을 끝장내지는 못했을지언정 정당성 없는 친중 괴뢰정부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이 배후조종하는 [조선인민공화국 과도정부], 즉 ‘인공’은 자력으로 개성시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아버렸습니다.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에 국무위원들은 정말로 통일이 머지않았다는 장밋빛 환상에 휩싸였습니다.

 

물론, 그 다음날 소련군이 서유럽을 침공했다는 사실만 뺀다면, 이는 좋은 징조가 맞았습니다.

 


 

10. Eleventh Hour

 

국가지도자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는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몰랐던 사실이지만, 소련의 유럽 침공은 그들 나름대로 철저한 계산 하에 수행된 것이었습니다. 자유세계의 분열이 종식되고 유럽과 미국이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게 연합하는 상황은 모스크바의 정치국원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말렌코프-몰로토프 등이 물러난 당조직은 최고의 교육을 받은 ‘붉은 엘리트’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들은 냉철한 현실 판단력으로 연방이 “개혁도 할 수 없고, 지금의 체제로 미국을 넘을 수도 없다”는 비관적이지만 현실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0보다는 1이 낫다”는 논리 하에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도박수를 던지려 했고, 그 밑작업은 한반도에서 북한(그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중국)과 남한의 전쟁을 일으켜 미국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징을 친소파가 장악하는 계획은 미국의 역공작으로 오히려 반대파의 집권을 초래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중부유럽의 평원지대를 초기의 수적 우세로써 점령해 서유럽을 발 아래 놓는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이러한 정황을 까맣게 모른 채, 북한 내전에서 승리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중국(대륙) 신정부 측의 특사를 맞이했습니다. 국민당 혁명위원회(민혁)의 책임서기이자 2인자였던 [천밍수]는 한반도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유럽의 전쟁이 아시아에까지 옮겨붙는 비가역적 상황을 방지하라는 지시를 받은 채 제주도에 도착했죠. 역시 비슷한 동기를 가지고 있던 미국은 한반도가 미-소 사이의 중립지대로 남아주기를 바랬고, 특히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상황을 막고자 했습니다. 만약 한국군이 그대로 북진한다면 이는 소련에게 매우 적대적인 시그널로 보일 우려가 있었죠. 특히 유럽 전역 개전 이후 소련이 생각만큼 크게 진격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군의 북진은 “미국이 소련을 이참에 아예 끝장내려고 한다”는 신호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천밍수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도 좋다”는, 수도를 코앞에 둔 국가에게 할 말 치고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해가며 어떻게든 한국 정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심지어 핵개발을 묵인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던지면서 말이죠. 거의 대국 중국이 소국 한국에게 애걸복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박철환은 이미 전세계가 핵탄두로 불타든 말든 상관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정원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세계가 불탈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중국 측의 터무니없는 블러핑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나마 김시형과 이하준은 위기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중 이하준은 중국의 의도를 극히 불신했다는 점이 비극으로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4인방 중 김시형만이 정말로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한 셈이었습니다. 정부 요인들이 정말로 중국과의 협상을 무위로 돌리고 북진을 선택하려 하자 이하준은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홍보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정부는 반미-반소-반중이라는 엄청난 관념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결국 김시형과 이하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뒤집을 수 없었고,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을 무시하고 50만 병력의 총진격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베이징의 왕밍 주석은 한국과의 협상이 “한미동맹 유지와 핵개발 묵인이라는 대가를 제공했음에도 무산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고, 이미 관계가 파탄난 소련에게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소련과 미국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 참전한다는 두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중국은 결국 후자를 택했고, 더 이상 재래식 전력으로 승리할 수 없는데다 미-중 동맹이 기어이 자신들을 끝장내려 한다고 판단한 모스크바는 전세계에 불벼락을 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국군이 평양 주석궁에 태극기를 꽂고 조국의 재통일을 선포한 날, 지구 상공에는 1만개가 넘는 핵미사일이 거의 동시에 날아올랐다가 수 킬로미터 크기의 화구와 버섯구름을 형성하며 내리꽂혔습니다. 모든 것은 불과 45분만에 이루어졌죠. 총 36억에 달하는 세계 인구 중 1년 뒤에도 살아있을 이는 전체의 약 10%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인류 문명은 찬란한 불빛과 함께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11.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역을 실효지배하는 진정한 ‘유일 합법정부’로 등극하던 날, 누군가는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간 동료들을 저주하며 스스로 생을 끝냈습니다. 누군가는 마지막을 앞두고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고백했으며, 누군가는 이제는 고백해봐야 의미도 없을 자신의 왜곡된 사상을 설파하며 ‘책임’을 지겠답시고 권총을 들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오로지 본인의 숙원사업이던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다 바로 그 핵무기가 자신의 집무실 인근에서 폭발해 모든 것을 끝내는 광경을 지켜보았죠. 이들이 그리도 염원하던 목표는 달성되었고, 그 지속기간은 14시간 8분 49초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전면 핵전쟁이 모든 인류를 한꺼번에 살해하지는 못했기에, 역사(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은 차치하고)는 계속되었습니다. 핵전쟁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정부요인들도, 민족의 미래가 자신들을 현인신으로 숭배하는 신정체제에 있다고 믿던 빨치산의 지도부도, 세계를 불태울 거대한 불꽃놀이의 약실에 24년만에 드디어 불을 붙힌 양대 열강의 지도자들도 모두 열핵병기의 화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보통 사람들, 소위 권력자들이 한 치의 땅, 한 자리의 의회 의석, 한 주의 주식을 위해 세계를 불태우는 동안 철저하게 객체로만 남았던, 매일매일을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며칠, 몇 달, 몇 년을 거쳐 몇 개의 세대가 흘러갔습니다. 모터사이클 탄 ‘위대한 칸’이 지배하는 루스 카간국, 예수 그리스도를 국가원수로 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헌법으로 삼은 뉴 가나안 신정공화국, 황제와 환관들이 천명을 통해 다스리는 대명제국 등 옛 제국이 있던 땅에 세워진 새로운 제국들도 결국 아들의 아들의 아들에게까지는 자신들의 권세를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옛 상고시절 핀인들과 세계를 양분했다고 주장하던 반도의 권력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죠.

 

또 다시 수 세기가 흐르고 나서, 전세계를 아우를 만한 ‘문명’이라는 것이 재건되었습니다. 과거 ‘서울’이라 불리던 옛 도시의 폐허에서도 ‘국가’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재건되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향유하는 문명은 과거 선조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물론 그것은 ‘중국어’ 또는 ‘만다린’이라 불리던, ‘멸망 이전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사용했다는 언어와도 달랐고, 그렇다고 ‘러시아어’나 ‘영어’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그들은 살아갑니다. 과거 선조들이 어떠한 실수를 저질렀는 지는 알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시리즈 최초의 몰살, 핵전쟁 엔딩이네요(...)

 

저는 아마 여름 전까지 적어도 진행자로는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즘 날씨 보면 벌써 여름인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참가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특히 점점 바빠져서 충분히 신경 못써드린 점에 대해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사실 계속 따라와주신 것 자체가 저에게 너무 과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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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작성시간 23.06.09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이거 어떻게 만드셨어요?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09 돈이 곧 진리 Bing Image creator라고 좋은 게 있더라고요.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09 5.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소련 장교.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작성시간 23.06.09 E.E.샤츠슈나이더 그림으로 보는 소확행이 나왔으니 이제 차트로 보는 내중문없이 나올 차롄가...(?)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09 약속의 땅)

    암만 폭격(…)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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