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2차창작][소.확.행] 가지 않은 길 - 01 - : 표트르 페트로비치 체호프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1.11.24|조회수166 목록 댓글 11

 


 

 

1940년 8월 19일,

멕시코 합중국 수도 멕시코시티 코요아칸 구.

 

"동무, 그... 여자랑은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겁니까?"

 

정돈되지 않은 수염의 건장한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의 체격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우 건장한 편이었고, 팔뚝은 거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듯 자잘한 흉터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름대로 좋은 품질의 린넨 천으로 만든 셔츠를 늠름하게 걷어올리고 있는 이 남자는 덥다는 듯 페도라를 벗어 부채질을 하며, 옆에 서있던 백색 양장의 노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 여자? 누구를 말하는 건가, 페챠(주: 표트르의 애칭). 나와 친한 사이인 여성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일자 눈썹에 수염 난 여자 있잖습니까. 그림 그린다는..."

 

"아, 프리다 칼로를 말하는 거였군! 그녀는 언제나 내게 영감을 주는 존재라네. 이를테면, 일종의 '뮤즈'라고나 할까?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혁명과 예술은 종이 한장 차이라네.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억압받는 인민에게 길을 제시하는 일은 붓과 팔레트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지. 자네도 알다시피 일찍이 조르주 소렐은 이런 말을 했었네. 인민..."

 

"듣자하니 그 사람 유부녀던데 말입니다. 레프, 샷건 들고 쫓아오는 내연녀 남편은 저도 못 막아줍니다?"

 

중년 남성, 아니, 표트르 페트로비치 체호프가 익숙하다는 듯 늙은 혁명가의 일장 연설을 불과 20초 안에 끊어냈다.

 

"남편이라! 디에고 리베라 동무가 과연 나에게 화를 낼 처지나 될련지 모르겠군. 우리의 관계는 철저히 플라토닉하면서도 건전하다네. 여기저기서 염문을 뿌려대는 디에고 동무와는 질적으로 다르지. 페챠, 자네는 나를 뭘로 보는건가?"

 

트로츠키가 불편하다는 듯 안경을 치켜올리며 인상을 찌푸리자, 표트르 역시 고개를 돌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프 트로츠키. 거대한 붉은 제국의 2인자였으며, 위대한 혁명가 레닌이 사망한 뒤 그 후임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던 인물. 러시아, 아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세계혁명의 맥동하는 심장. 붉은 도살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혁명도, 우정도 배반당해 세계 공산주의 혁명이 가야 할 길을 끊임없이 설파하는 공상가. 그리고... 멕시코의 늙은 망명객.

 

10월 혁명 직후 치안유지능력을 상실한 페트로그라드에서 부랑자에게 습격당할 뻔한 트로츠키를 구해준 이후 그와 늘 동행했던 표트르는 이 늙은 혁명가의 활짝 웃는 표정에서도 늘 고독과 애수의 뉘앙스를 읽어낼 수 있었다. 트로츠키가 중국에서 "비좌익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주장했다가 장개석의 초공 작전으로 인해 실각했을 때도, 부하린을 위시한 '당내 우파'가 스탈린의 사악한 흉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를 축출하는 데 몰두했을 때도, 체카의 요원들이 그의 집을 급습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수용소로 끌고 가려 했을 때도, 그리고 계속되는 신변위협에 견디다 못한 트로츠키가 망명을 택했을 때도, 표트르 체호프는 언제나 옆자리를 지켜왔다. 애초에 체호프라는 성조차 "항상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며 선의를 잃지 않는" 모습에 영감을 얻은 트로츠키가 지어준 게 아닌가.

 

"오늘은 그 칼럼 작가가 오는 날이죠? 스페인 사람 말입니다."

 

"내 평전을 쓰고 싶다는데, 여간 귀찮게 해야 말이지. 물론 혁명을 배신한 붉은 학살범들에게 실시간으로 고통받는 인민들에게 내 의견이 조금이라도 가뭄의 단비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더 귀찮고 고된 대가도 치를 생각이네만."

 

"그 양반, 눈빛이 좋지 않아요. 살기를 띈 눈. 스파르타쿠스단 반란을 지원하러 갔을 때 술과 마약에 취해 로자 동무를 때려죽였던 자유군단 놈들과 같은 인상을 하고 있다니까요?"

 

"하하! 자네, 어디 중국에라도 갔다온 건가? 거긴 관상학이라는 게 있다지? 또 가게 되거든 카튜셰프, 아니... 진란 동지에게 안부 좀 전해주게나!"

 

표트르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말했으나, 트로츠키는 그 걱정을 떨쳐버리려 안간힘을 쓰듯 무리한 유머로 대화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애초에 그를 향한 암살 시도는 한두번이 아니었다. 언제든 그 명석한 두뇌를 산산조각낼 납탄이 날아올 가능성을 염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먹거리를 사러 시장에 갈 때도, 강가에서 카누를 탈 때도, 서재에서 저술활동을 할 때도 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늘 조심하라는 겁니다."

 

"여부가 있겠나."

 

 


 

 

"...씨발!"

 

"페챠! 어디 있나! 나 좀 도와주게!"

 

우당탕- 하는 소리, 그리고 유리창인지 찬장의 장식물인지가 깨지는 청량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표트르는 서재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빙벽등반용 피켈을 들고 피흘리는 노인을 코너로 몰아세우는 한 남자가 보였다. 개같은 새끼. 표트르는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표범처럼 달려들었다.

 

"억!"

 

고작 말단 공작원이자 열성당원에 불과했던 라몬 메르카데르가 표트르 체호프의 막강한 완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선반에 강하게 부딪혔고, 암살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괜찮습니까? 피가..."

 

"...멍청한 자식이 첫 방은 빚맞췄더군. 살짝 긁혔을 뿐이야. 물론 자네가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그 다음 방은 내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놓았겠지만 말일세."

 

"지금 이런 상황에도 입을 놀릴 생각이 나십니까?"

 

"이봐, 페챠."

 

"예."

 

떨리는 손으로 자켓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흐르는 피를 닦던 트로츠키가 표트르를 불렀다.

 

"...고맙네. 이번에도, 그리고 자네와 있었던 일 모두."

 

"....에휴. 제 팔자 제가 꼬은 거 아니겠습니까. 고맙다는 말은 됐고, 거처를 옮기던지 하십쇼. 당장 앞길에서 작정하고 총질하면 바로 이 서재에 총알이 분무기처럼 날아오잖아요?"

 

표트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고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를 자객 쪽을 쳐다봤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단지 자신과 같은 신세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볼셰비키 혁명에 투신해 이 한 몸을 아낌없이 바쳤는데. 돌아오는 것은 이딴 어설픈 자객의 난봉꾼 짓인가?

 

다시 트로츠키 쪽을 응시한다. 늙은 혁명가의 눈에서는 오전에 보았던 그 외로움과 애수어린 눈빛이 아닌, 분노와 열정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트로츠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트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인민을 매몰차게 배신한 이들의 죄는 그 어느 것보다 무거웠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원래 기획했던 외전이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계속 아이디어를 묵혀두고 있다가 이번에 렌지파일님이 소설을 쓰시면서 저도 나름의 용기(?)를 얻어 올려봅니다.

 

바로 아셨겠지만 이 외전은 "만약 RP에서와 같이 7월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면?"을 기본 가정으로 깔고 갑니다. 즉 솔제니친, 표트르, 마르텔은 7월 시위 때 과감한 행동을 미루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다가, 원역사의 흐름을 타게 된 거죠. 즉 멤버 6인이 확실히 부각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결국 스탈린이 집권, 대숙청이 벌어진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1편은 표트르(여기서는 '한니발'이 아니라 '체호프'지만)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담을 생각입니다. 누가 될 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확실한 건 일단 6인 모두 살아는 있을 겁니다.

 

그럼 2편에서 뵙겠습니다! ㅎㅎ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라멜 마끼아또 | 작성시간 21.11.24 상상도 못한 외전...

    + 그럼 전 대숙청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한 상태인가요?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카라멜 마끼아또 | 작성시간 21.11.24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예. 그런데 누구신지...?"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쑹린이라고 합니다."

    "아, 그 유명하신 쑹 대표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 제 부인인 위안라이입니다."

    "부인 분이셨군요. 부인이 아주 미인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원장님의 부인께서도 미인이시군요."

    (중략)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겠지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떠나고)

    "흐음... 흐으음...?"

    "저우팡. 왜 그래?"

    "아니, 쑹 대표 말이야.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그래."

    "그러고보니... 나도 쑹 부인을 보니 어딘가 익숙하더라고."

    "뭐? 지금 다른 여자 생각한거야?"(옆구리를 꼬집으며)

    "아야야... 아파라... 앞으론 안그럴게... 그런데... 당신도 다른 남자 생각했잖아!"

    (입을 삐죽 내밀며)"그... 그건..."

    "내 사랑이 부족했나? 오늘 밤에 다시 잔뜩 사랑을 전해줘야겠네?"

    [처음 본 사람 같지가 않아]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4 그런 셈이죠. 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4 근데 쑹린이 누군가요? 검색해도 안나오던데…
  • 답댓글 작성자카라멜 마끼아또 | 작성시간 21.11.24 아... ㅎㅎ... 사실 중드 등장인물입니다. 사실 제가 중드를 즐겨보는지라 거기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넣은거에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