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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동아에서 혁명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 04 : 얻을 것은 전 세계일지니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02.22|조회수647 목록 댓글 2,071

 

 

 

 

동아에서 혁명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Chapter 4. 얻을 것은 전 세계일지니

 

 

 

06. 이룡치수(以龍治水)

 

1938년 12월 11일, 계계군벌의 바이충시가 광저우 정부의 광서군 사령관 리쭝런 원수를 연금하고 장제스 군대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양광 지방에 구축해놓은 광저우 정부의 방어선을 와해시켰으며, 중원대전의 한 축인 남부전선이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왕징웨이, 마오쩌둥, 쑹칭링 등 광저우 정부 요인들은 소수 방어병력과 함께 주장강 삼각주 인근만을 겨우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되었고, 범아연합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해 이 사안의 해결을 꾀했습니다.

 

다행히도 구 프랑스령 광주만을 반환받은 일 등으로 왕징웨이 정권의 지지세가 강해 북부 군벌들이 이탈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난징 정부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력을 투입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했죠. 군 내 전문가들은 "무조건 개전 2개월 이내에 모든 해안 주요거점을 탈환하고 광동 일대를 탈환하며 화북평야를 장악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현실적으로 (북부 군벌들의 병력 질을 감안했을 때) 후방의 민심안정을 병행하려면 이는 매우 까다로운 목표였습니다. 당장 범아연합 측이 동원 가능한 병력은 약 180만명, 그 중 소련과의 국경을 방위할 병력을 제외하면 130-140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총동원령을 선포한다면 훨씬 많은 병력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 점은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중국과의 전면전을 오래 끌어 소모전 양상으로 만들 수도, 무조건 속전속결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도, 그리고 사태를 관망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묘책은 그간 쌓아올린 광저우 정부의 정통성, 그리고 인민의 지지를 이용하는 것 외에 없었습니다. 황하나 회수를 경계로 완충지대를 만들고 끝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 경우 3-400만명의 병력을 최소 7-10년간 상시주둔해야 한다는 아찔한 분석이 제시되자 아무도 그 의견을 쉽게 주장하지 못했죠. 오히려 화북분리공작을 가장 먼저 주장했던 김상덕 원수가 적극적으로 입장을 수정해 난징 정부 영역 내 대규모 민심이반을 유발해보자는 아이디어를 지원사격했습니다.

 

만주 안전기획부, 그리고 범아 보안위원회 라인으로 장제스를 매국노로 폄훼하고, 위폐를 살포하며, 난징 정부 고관들에게 뇌물을 돌리고 결정적으로 장제스의 주변 측근들에 대한 이간공작을 펼치는 작전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미 친-장제스 군벌들이 범아연합 측의 각종 제재로 경제적 곤란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이는 절묘하게 들어맞았고, 민심이 들끓어 장제스의 퇴진을 외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다이리, 두웨셩, 쿵샹시, 천궈푸 등 자신의 측근들이 왕징웨이 측과 내통한다는 '증거'를 수집했고, 의심이 극한까지 깊어져 내부에서 숙청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범아 문화선전위원회에서 대규모 선전공작을 벌이자, 더 이상 장제스 정부는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1939년 3월 27일, 후스를 임시주석으로 하는 신 난징정부가 장제스를 쿠데타로 실각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어졌죠. 범아연합군은 화북으로, 각 해안도시로, 그리고 난징으로 향했습니다. 사실상 일방적인 진격이 이어진 뒤 시작된 평화협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합의되었습니다.

 

1. 국민당의 지도부를 일신하며, 중앙위원 인사를 난징-광저우 정부 각각 동수로 하여 재선출한다. 캐스팅 보트는 쑹칭링 주석이 행사한다.
2. 국민당, 공산당, 치공당, 농공민주당, 그 외 직능단체 및 소수정당을 합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을 재설치한다.
3. 정협에서 과도정부를 선출하며, 이후 신헌법을 제정한다.
4. 중화민국은 범아시아연합에 준회원으로 가맹하며, 정식 가맹까지 10년간의 유예를 둔다. 유예기간동안 중화민국은 공수동맹을 비롯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그 외 의무에 구속되지 않으며 권리 또한 향유하지 않는다.
5. 중화민국은 신장사회주의공화국, 티베트국, 만주협동공화국, 포르모사민주공화국의 독립을 보장하며 몽골인민공화국의 내몽골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한다.
6. 중화민국은 열하성의 만주협동공화국 편입을 인정한다.
7. 범아시아연합은 중화민국에게 일체의 배상금을 요구하지 아니한다.

 

협상이 타결되고 중화민국 신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체가 막 발족하던 4월 15일,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부장관 르네 벨랭이 방문해 공수동맹과 인도차이나 반환 조항 공표를 제안했습니다. 퐁디셰리의 경우 국제연맹에 자유시 지정 안건을 올려 (물론 부결되었지만) 국제여론전을 시도했고, 이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연합은 이제,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대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07. War in Our Time

 

한편 유럽에서도 상황은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39년 2월 스페인 팔랑헤군이 내전을 종결시키고 협동공화국을 수립한 데 이어, 4월에는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묵인 속에 바나트와 북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로부터 강탈했습니다. 또한 6월에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해 공산정부를 수립하고 발트 3국을 강제편입하는 사건마저 발생했습니다. 세계 전체의 긴장도가 극한까지 올라간 상황에서 쥐트티롤 문제가 또 다시 대두되었고, 이제는 전쟁 이외의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모두가 아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은 한 차례의 숙청작업을 거친 뒤 '실력주의'를 빙자한 공포정치의 무대가 되어 있었고,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원수급 장교인 투하체프스키를 주도로 기동군단들을 하나둘씩 창설했습니다. 독일의 경우 지난 대전쟁의 실패가 제병합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전개된 무리한 공세와 그로 인한 막심한 인력-자원소모때문이었다고 판단한 군부에 의해 화력상 우세를 적극 활용하는 교리가 채택되었습니다. 범아 혁명수호청은 스탈린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가 장기적으로 연합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한 견제계획을 재보강했고, 만주에서는 유대인 난민 개방정책을 시작했으며, 외교부 및 문화선전부는 미국과 중국시장 진출 문제를 의논하고 랜드리스계약을 맺었습니다. 또한 개전에 앞서 버마, 말레이, 인도의 현지 호응세력과 접선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나쓰메 박사를 중심으로 한 '핵분열 무기'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39년 10월 18일 현지시각으로 새벽 3시 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티롤 지역의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기습하면서 두 번째 대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오스트리아는 독일을 끌어들었고, 독일은 영국을, 프랑스는 범아연합을 끌어들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네덜란드의 근왕내각을 부추겨 벨기에 렉스당 잔당의 테러를 빌미로 친불 협동주의 벨기에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범아연합은 즉각 영국, 독일 등에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태국에 접근했습니다. 1932년의 사태 이후 친소 집산주의 추종자로 전향한 태국의 쁠랙 피분송크람 장군은 범아연합에게 기술 및 경제원조와 동남아시아 맹주 자리를 약속받으며 참전했고, 남방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남방 작전은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홍콩은 즉각 함락되었고, 개전 2개월만에 북보르네오와 아라칸산맥 이동 버마를 접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한 1940년 5월에는 싱가폴을 점령, 호주 해군을 사실상 저항불가의 상태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죠. 정보당국의 공작으로 영국 해군은 범아연합군이 뉴기니에 상륙해 호주를 직접 노릴 것이라는 가짜 첩보를 입수했고, 인도로 철수한 동양함대를 다시 말라카 해협 동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때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야마모토 후네스키 제독의 연합함대가 말레이 해역에서 리펄스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격침시키는 등 동양함대에 완승을 거두면서, 인도 상륙 역시 진행되었습니다. 1940년 말의 시점에서 캘커타와 실론, 인도 아대륙 남단, 그리고 중부 거점이 범아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고, 뉴기니의 포트모르즈비 항 역시 접수되면서 아시아 전역은 사실상 결론이 나고 있었습니다.

 

한편 유럽에서는 초반 프랑스군이 과감하게 마지노선으로부터 전진을 택해 남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만하임, 칼스루에를 점령하고 몰타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몰타를 접수, 북아프리카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듯 했으나, 이내 진격은 돈좌되고 영국이 동아프리카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속전속결의 이점을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1940년 4월에는 이탈리아의 알프스 방어선마저 뚫리면서 포 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모습까지 나타났죠.

 

그러던 1940년 7월, 소련과 폴란드 간 회담이 결렬되면서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폴란드는 울며 겨자먹기로 독일과 연합,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4면포위를 이기지 못하고 단기간에 항복해 뵈멘-메렌 보호령으로 전락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가 달마티아 영유권을 포기하면서까지 끌어들인 유고슬라비아는 오스트리아군과 불가리아군 등의 맹공을 받으며 불리한 상황에 몰렸고, 함께 프랑스 측으로 참전한 그리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참전한 지 불과 3달만에 바르샤바와 앙카라에 다다르고 (어느새 영국 측으로 넘어간) 시리아를 직접 위협하는 위치에 이르렀고, 베사라비아를 탈환했습니다. 이란에서도 혁명을 사주하여 북부에 괴뢰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죠.

 

유럽이 활활 불타는 동안, 아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범아연합이 영국의 전력분산을 십분 활용하며 이점을 얻어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결정은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세기의 귀추가 주목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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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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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2.25 그래도 친일파 인증 글보다는 댓글이 많네요. ㅋㅋ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2.02.25 E.E.샤츠슈나이더 아..........
  • 답댓글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22.02.25 렌지파일 와 근데 잠깐.. 갑자기 현타오네요 진짜 곧 10주년 되겠네. 내 10년..
    그만 얘기해야지(..)
  • 답댓글 작성자카라멜 마끼아또 | 작성시간 22.02.25 최종 댓글 수 2070개. 이걸로 끝!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2.25 카라멜 마끼아또 저도 잘 모르겠고 예전에 그런 게시판이 있었어요.

    참고로 전 셀림님이 히틀러 연대기 하고 있을때쯤 보고 가입한.

    그땐 고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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