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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동아에서 혁명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 06 :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完)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03.03|조회수1,626 목록 댓글 181

 

 

 

 

10. The New Order

 

1943년 9월 19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휴양지 얄타에서 미국, 소련, 범아연합 3국 간의 전후처리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며 야심차게 기획한 미군의 마켓-가든 작전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독일군에게 역공을 허용해 파리를 다시 내준 뒤였고, 남프랑스에 상륙했던 자유프랑스군 역시 지속적인 소모를 감당할 수 없어 다시 코르시카로 철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회담이었죠. 반면 동부전선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소련군의 우세로 매듭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황에서 미국은 어떻게든 소련이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막아야 했고, 또한 브리튼 섬에 대한 독점적 처리권한, 더 나아가 중부유럽의 장악 또는 완충지대화를 얻어내야 했습니다. 그 밑작업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의 연방정부 합류는 전적으로 루즈벨트 행정부의 '정치적 결단'으로서 이루어진 일이었죠.

 

반면 소련은 급할 것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유럽 전체를 장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했고, 그렇다면 최대한 상대를 궁지에 몰아서 이득을 챙기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었죠. 이대로라면 붉은 군대가 베를린을 해방하고 독일 처리에 관한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독일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역시 소련의 이익에는 합치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독일을 그냥 내버려두어 두고두고 후환을 만드는 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이렇듯 독일에 대한 3국의 의사가 좀체 합의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1) 독일은 영구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로 한다, 2) 이중제국은 해체한다, 3)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분리한다, 4) 신독일의 영토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넘지 아니한다는 기본적인 전제조건만을 합의하고 타 지역에 대한 지점만을 논의하자는 신사협약이 맺어졌습니다.

 

첫 번째로 동유럽에 관해 논의하고 있을 무렵, 미국 쪽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폴란드의 소련 가입 여부를 논의하던 중 범아연합 측의 고위급대표 리하초브나와 열띤 논쟁을 벌이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내다 졸도해버린 것입니다. 갑작스런 국가원수의 유고사태에 미국 대표단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회의는 급격히 소련과 범아연합의 입맛대로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슈체친, 슐레지엔, 포젠,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 그리고 폴란드 전역이 사실상 소련에 편입되었고, 유고슬라비아는 바나트, 북슬로베니아(남외스터라이히), '도브루자를 포함한' 불가리아를 합병, 터키의 영토는 그리스와 소련에 의해 양분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스웨덴은 덴마크의 국왕을 퇴위시키고 스칸디나비아 연방을 결성하기로 합의되었고, 노르웨이가 중립국으로 남는 대신 나르비크 이북 영토마저 할양받을 수 있었죠. 물론 독일을 기준으로 그 이서지역은 전적으로 미국의 관리영역이 될 터였지만(그리고 메갈리 이데아를 달성한 대그리스 역시 공산화와는 거리가 멀 터였지만), 당초의 예상에 비하면 미국의 실패로 끝난 회담이었습니다.

 

 

그 외에 국제연합(UN)의 창설, 전범 재판, 범아연합의 물자 및 제해권-제공권 유지협조 등 사항이 합의되었고, 범아연합 대표단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총동원체제의 부분적 해제, 군축 범위의 재조정과 같은 안건을 논의했습니다. 평시 징병연한을 넘어서까지 복무하고 있던 장병을 순차적으로 전역시키고, 장교 및 하사관을 구조조정하되 연합 보훈부가 그들의 재취업을 최우선적으로 알선하는 등의 개혁이 이어졌죠. 가장 말이 많았던 해군 역시 나가토급 이전 함급의 퇴역 및 항모전력 위주의 '소수정예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유럽이 마지막으로 불타고 있을 때, 아시아는 그들만의 '출구전략'을 착실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1. Endgame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3년 12월, 붉은 군대는 베를린을 수복하고 라인란트로 도주한 독일 군사정부 잔당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프랑스와 이베리아를 정리하는 데 성공한 연합국 역시 독일 영내로의 진군을 서두르고 있었죠. 무엇보다 발칸에서부터 진격한 유고-소련군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쓸어버리고 뮌헨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 사실상 판도를 결정내버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의 패망은 기정사실이었으나, 나치당의 꼭두각시들을 소련군에게 '던져주고' 서부의 도르트문트에 틀어박힌 루드비히 베트 원수의 군사임시정부는 아직도 미국과 연합해 소련에 맞선 공투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죠.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환상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1943년 12월 25일 오전 7시 55분, 더블린으로부터 도르트문트 상공으로 발진한 범아연합의 Ki-42 4발폭격기가 군사정부의 머리 바로 위에 버섯구름을 만들었습니다. 이 가공할 위력의 폭탄은 군사정부 자체를 무(無)로 승화시켜 버렸고, 독일에는 그 어떤 권위있는 정부도 남지 않게 되었죠. 남은 것은 이 공백의 땅을 가능한 빨리 차지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1944년 5월 6일, 누산타라 협동주의 공화국 연방 '가자 마다 특구', 즉 '싱가포르'에서 최종적 전후처리에 관한 회담이 열렸습니다. 얄타 때와는 달리 모든 승전국이 한 데 모인 '총괄적 전후처리조약'이었죠. 우선 각 패전국으로부터 접수한 항복문서를 교환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이루어졌고, 이전 회담에서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전범국의 전후처리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면 독일 땅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헨리 월리스 신임 대통령은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전략을 시전했습니다. 

 

"...어떻게 분할하든, 저와 미합중국은 독일과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영구히 전쟁을 획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치안유지용 15만명을 제외한 무력의 일체 보유금지, 제조업 금지, 전 공장설비의 해체, 해군 및 공군 해체, 모든 주요항의 국제항화 및 기타 해상출구의 해체, 모든 공항의 해체 및 역내 항공사 취역 금지, 중앙은행 영구 폐지를 말합니다만... 이의 있으십니까?""

 

월리스의 폭탄 발언에 회담장의 모든 관심이 독일에 쏠렸습니다. 거의 상대를 죽일 듯이 고성을 지르는 범아연합의 육군장관 김상덕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월리스 대통령은 로마와 카르타고를 예시로 들면서까지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4국의 거세'를 밀어붙였습니다. 마치 문틈에 발을 걸치고, 대화주제를 뺏어온 뒤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는 협상수법이나 다름없었죠. 어이가 없어진 소련과 범아연합 측, 그리고 당장 저 자를 죽여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며 협상장을 떠난 김상덕 원수였지만, 아무튼 회의를 이대로 끝내는 것도 그리 좋은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브리튼 섬 역시 같은 조건을 적용받는 조건, 그리고 '4개 전범국 이동 동유럽 영역'에 대한 소련의 주권적 권리를 미국이 사실상 공인하는 조건으로 처리안이 타결되었습니다.

 

1) 석탄, 철강 등 전쟁에 직접 관련된 주요물자의 채굴과 통제를 독립적인 위원회에 맡긴다.

2) 공식적으로 군대를 보유할 수 없으며, 오로지 인구비례 1푼을 넘지 않는 선의 치안병력만을 보유할 수 있다.

3) 경공업의 경우 3할, 중공업의 경우 5할, 그 중 군수공업의 경우 일체를 해체해 승전국에게 균분한다.

4) 핵무기, 생물무기, 화학무기, 로켓병기의 개발을 금한다.

5) 합성석유 및 합성고무산업의 보유를 금한다.

6) 현존하는 모든 현지 무장단체의 잔여 무기는 승전국으로 이관하며, 치안유지병력의 경우 무장을 수입 및 신규생산에 맡긴다.

7) 이상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4국은 국제적 교전권을 인정받지 아니한다. 이들은 UN에 의해 모든 독립적 주권을 보장받으며, 영세 중립국으로서 어떠한 국가 또는 세력도 상설 군사기지를 보유할 수 없다.

 

회의가 잠시 휴회된 사이, 범아연합 대표단 내 분위기가 심상찮았습니다. 으레 열을 내고서는 다시 돌아와 조금 더 차분한 어조로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던 김상덕 원수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혁명수호청 의장 호소카와 마사다케에게 "김상덕이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암살공작과 함께 유럽 전선의 재개를 노린다"는 믿기 힘든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만주협동공화국의 전 혁명위원장이자 현 범아연합 육군장관 김상덕의 개인 경호병력으로 편성된 6인의 부하들은 마적단 시절부터 그녀와 함께했던 이들이었기에, 만약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인다면 그 여파는 재앙적인 수준이었죠.

 

마사다케가 이끄는 혁명수호청은 월리스의 죽음 자체는 '이용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움직였습니다. 다만 일이 벌어진다면 김상덕 원수 역시 사망해야 했기에, 마사다케는 조심스레 기동타격대(사쿠라, 렌교)를 준비했습니다. 주 누산타라 대사로부터 위험을 공지받은 아나스타샤가 대피하던 와중, 역시 수상한 낌새를 느낀 부숙경이 김상덕에게 독대를 청했습니다. "무슨 일을 꾸미는 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되었든 당신의 미래를 위해 그만두라"는 설득을 하기 위해서였죠. 김상덕은 고민했습니다. 그녀는 마치 멈출 줄을 모르는 불도저처럼 혁명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왔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혁명을 처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꾀하려는 일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고, 상덕 역시 누군가 자신을 멈추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부숙경의 계책으로 이 일은 김상덕과 아나스타샤 간의 개인적 다툼으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으로 종결되었고, 혁명수호청의 기동타격대 역시 철수했습니다.

 

이 '해프닝' 이후의 회담은 상대적으로 일사천리였습니다. 프랑스와 유고가 각각 '거부권 없는 상임이사국', 즉 사실상 '준상임이사국'으로 선정되었고, 박해받던 유럽의 유대인들 역시 소련의 유대인자치공화국, 만주, 미주 등으로의 이주를 보장받았습니다. 중립화된 구 전범 4개국은 우선 중립국위원회의 감시, 그리고 차후 창설될 UN 신탁통치이사회의 자문을 받으며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죠. 그 과정에서 종전에 약속되었던 가혹한 제한안은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겠지만, 당장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범아혁명은 완수되었고, 식민과 피식민으로 나누어진 질서는 이제 '역사'의 편린이 되었습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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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3.04 뤼순 사태 이후 급하게 군사정권 수립을 막겠다며 병력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음에도 말이 군사혁명정부지 실상은 치안과 국방분야와 최종 승인권한등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정책 분야는 각료나 전문가들에게 일임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나마 가장 크게 개입한게 헌법 개정과 친소노선이었는데 이마저도 전자는 영구집권 시도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색체를 강하게 칠하는 수준이었으며(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주요 공기업 국영화등) 후자는 이후 친서방 노선이 실패했다는것이 드러나며 이후 선견지명이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물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본인은 동시기 히틀러,스탈린등과 달리 가능하면 최대한으로 이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조언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자 혁명위원회마저 해체하고 연방 총사령관직을 맡았다지만 정치,외교분야에서 완전히 손을 떼버리고 순수 군인으로 복귀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아예 군부마저 떠나 다시는 국정에 개입하지 않은체 사회사업과 목장생활로 여생을 지냈다.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3.04 931117 이시점에서 그녀에 대한 별명은 아시아의 잔 다르크(서양),아시아의 화목란(동양)이었다고 한다.(다만 본인은 살아서 들은 칭찬에 가까운 별명을 별로 안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행적은 독재자라고 하기엔 상당히 민주적이었고.

    민주주의를 우선시 한다고 하기엔 애초에 쿠데타를 벌여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만주의 실권을 장악했다.

    전쟁광이라고 하기엔 신사적인 행동과 점령지에서 민심을 우선시해 피점령지 주민들이 그녀에게 환호했으며(루머에 따르면 버마,인도등 그녀가 거틴곳에서 만약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김상덕이 은퇴하는 순간 강제로 끌고가 정부 수반으로 삼으려 들었을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참군인이라고 하기엔 전쟁을 주도하고 과격한 언행과 행동을 보이며 광적인 모습을 보였다.(다만 아프리카쪽으로의 확전은 끝까지 반대했다)

    권력욕이 있었다고 하기엔 전쟁이 끝나갈 조짐이 보일때부터 민정 이양과 정계 완전 불개입까지 하였고.

    권력욕이 없었다고 하기엔 민정 이양 이후에도 연방 육군 총사령관에 오르며 연방관련 업무에 개입했다.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3.04 931117 이념적으로는 태생적으로 빈농의 자식이며 부모를 조기에 잃은 이후에 만주 각지를 전전하며 지낸탓인지 그에 따른 반사작용으로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에 호감을 품었기에 소련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초기 연방을 이끈 7인중 가장 극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민족적 정체성을 평가하자면.그는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그것이 곧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자신을 만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조선독립전쟁에서 잠깐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갈등한것으로 보이나 이후 윤치호 살해 사건이 불러온 조선내 공산세력 탄압을 보고 조선 독립 세력과 초기 만주 정부에 대한 반감과 실망이 그러한 갈등을 끝낸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녀의 행보와 그녀의 발언등을 보면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조선인도 만주인도 아닌 아시아인으로 생각했던것으로 보인다.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3.04 931117 그녀는 자신보단 자신을 믿고 따라준 사람들을,그런 사람들보다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그리고 평등과 번영을 중시했던 사람이었고 이후 행보에도 영향을 준다.

    이는 그녀의 인생사가 큰 영향을 주었던걸로 보인다.

    상반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아시아에서 여전히 그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강한 이유는 그러한 모순된 모습에서도 결국 자세히 보면 자신이 꿈꾼 목표와 이상.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움직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덕분인지 그녀가 죽을때 측근과 빚을 진 사람들이 함께 했으며.

    연방에서 공식적으로 국장을 거행했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 생각나는데로 써봤는데 영 아닌듯 하긴 하네요.ㅎㅎ.
  •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3.09.13 재미있는 것을 하나 올려보았습니다 ㅎㅎ...
    https://m.cafe.daum.net/Europa/LPSd/7611?svc=cafe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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