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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비공식] 동아에서 혁명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 Epilogue (3)

작성자렌지파일|작성시간22.03.05|조회수284 목록 댓글 64
"저는 지난 30년을 무기를 개발하는 데 힘써 왔지만, 이제는 더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 나쓰메 유키오, 1973년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직후의 사하로프 박사

변절, 혹은 시대 최후의 양심
20세기 중반기 이후 최고의 핵물리학자 2인을 뽑는다면 반드시 뽑히는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범아연방의 나쓰메 유키오는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국제 평화주의 운동의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사하로프 박사가 1960년대 '사형제의 폐지'를 선전하던 소련이 정신병원을 정치범을 불법적으로 수감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폭로를 하며 소련의 친정부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바를람 샬라모프와 논쟁을 벌이며 유명세를 얻는 사이, 나쓰메 박사는 범아연방의 일본 혁명수호청이 과학기술 개발에 무리하게 개입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하려 한다며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0년의 도쿄 찌르기 사건 이후 '가네다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에서 여러 과학자들이 대부분은 미국, 일부는 소련으로 망명한 사건을 두고 나쓰메 박사는 '호소카와 청장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 '관료주의가 협동주의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혁명수호청을 크게 비판하였으며, 핵개발의 영웅인 나쓰메 박사가 반체제인사가 되어가는 것에 범아연방 측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밤새 회의를 이어가며 대처방법을 고심했다고 전해진다.
사하로프와 소련 지도부간의 갈등, 나쓰메와 범아연방 지도부간의 갈등이 점점 강해지던 70년대, 두 사람이 반핵운동과 세계 평화운동에 기여한 점으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두 사람은 소련과 범아연방 양국의 계륵이 되었다. 사하로프 박사를 가택연금시킨 소련과는 달리 범아연방 측에서는 나쓰메 박사가 핵기술을 유출하지 않는 것을 댓가로 스위스로 망명하는 것을 허가해주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1974년 나쓰메 박사가 68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이는 엄청난 역풍으로 이어졌으며, 사실상의 운둔 상태에 있던 ARICA의 범아연방 지부인 '적군파'와 그 수장인 시게노부 후사코 및 김평일이 활동을 재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적군파는 이후 한동안 항공기 납치와 중동지역의 친 아시아 바트당 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악명을 떨쳤다.
 

조선인민공화국 5대 국무총리 박상희

배후의 조종자, 혹은 최악의 비선실세
흔히 조선인민공화국의 장기집권기, 혹은 멸칭으로 '공산정권기'라고 불리는 1956년부터 1973년까지의 박상희 총리 집권기의 가장 큰 배후권력을 말한다면 박상희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우군이었던 조민그룹 회장 김필중과 박상희의 사위였던 김종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대구와 경북 지방을 정치적 중심으로 삼은 박상희 국무총리와 조봉암, 박상철 대통령의 조선공산당 정권은 '한국식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 중앙주도식 집중개발정책을 수행하였으며, 국수주의적인 선전과 권위주의적 국가운영으로 대표되는 암과 빛나는 경제성장의 성과라는 명으로 극명하게 그 성과가 갈려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한 박상희 정권에서 1960년 해체된 조민그룹을 반독점법에 위배되지 않는 기업집단으로 개편한 김필중은 의주-부산 고속도로 건설사업, 흥남공단 확장사업, 광양제철소 건설사업 등을 박태준, 정주영 등과 전두지휘하며 전형적인 '적색 개발주의'의 대표주자로써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김필중은 '안정적인 하청을 받는' 국가주도적 사회주의 체계에서 가장 큰 이익과 혜택을 본 기업인으로 남았으며, 반독점법에 의해 경영권을 자식에게 세습하지 못하고 막대한 지분을 헌납했음에도 불구하고 구 조민그룹의 기업집단 내에서 김필중의 일가는 아직까지도 많은 지분을 보유한 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를 언급할 때면 항상 '경제발전'과 '부패'가 같이 언급되며, 이는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음에도 ARICA와 아나코-코뮤니스트, 친소 유화주의자들을 극렬히 탄압한 박상희 정권의 부패상과 과속이나 다름없는 당시 조선의 경제발전을 비판하는 의도로 같이 언급되고는 한다.
 

부산급 초갑형순양함 

옛 범아연합의 두 개의 군대, 해군과 육군
범아시아 연방이 지금의 체제로 개편되기 전, 특히 2차대전 종전시까지 당시의 '연방군'은 실상은 가맹국들의 병력을 규합해 이뤄진 조직이었다. 특히 일본 제국 해군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방 해군과 만주국 육군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방 육군은 일본 제국의 육해군 갈등을 고스란히 계승하였으며, 당시 해군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후네스키 원수와 육군 사령장관이었던 김상덕 원수는 각자의 빛나는 전과와 별개로 육해군 갈등을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등의 양상을 보였다.
이로 인해 2차대전 종전 이후 두 사람이 정계에 진출하거나 각자의 군종을 세력기반으로 삼아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면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만주국의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김상덕의 은퇴와 마찬가지로 사임을 약속했던 야마모토의 퇴역으로 육해군은 우두머리 없이 붕 뜬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최소한 두 원수는 갈등 양상을 보일 지언정 그것이 사리사욕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 원수의 사임 직후 권력 공백의 상태에서 육군의 츠지 마사노부와 최덕신, 해군의 사나기 사다무와 신성모 등이 두 원수의 빈자리를 둘러싸고 노골적으로 권력투쟁을 벌여 한동안 연방군은 굉장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특히 구식 함선을 대거 퇴역시켜 범아연합 가맹국으로 이관하는 과정에서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목으로 건조된 '부산급' 초갑형순양함과 관련된 비리 사건이 폭발하고 신성모 제독이 체포되며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영국의 건함 기술을 입수한 뒤 개발된 부산급은 9인치 양용포 15문으로 무장하였고 설계는 훌륭하였으나 항공기와 유도미사일의 시대에 아즈마급은 진공관 근접신관을 장착한 3식탄을 사용하더라도 구식에 불과하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명 '연방해군 선진화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아즈마급을 12척을 건조한다고 밝혀 굉장한 논란이 일었는데, 이 와중 이 부산급의 대규모 건함계획의 뒤에 신성모 제독의 부패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1949년 손원일 제독에 의해 폭로되며 혼란은 정점에 달하였다.
결국 범아연방의 연방의회에서 '군사 안정에 대한 특별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조선 출신의 이종찬, 일본 출신의 츠노다 도모시게, 김백일(후일 사퇴) 등을 '군사복원특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하고 육해군 갈등에 관련된 인물들을, 특히 육군의 장성들을 대거 퇴역시키는 '숙군' 작업을 실시하여 육군의 영향력을 줄이고, 독립 군종으로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과 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공군과 해병대의 위상을 크게 높이고 해안경비대를 별도로 창설하며 해군의 영향력도 줄이며 육해군 갈등은 일단락되게 되었다.
한편, 김상덕 원수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이미 전역한 사람에게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은 실례다'라는 짧은 답변만을 남겼으며, 야마모토 원수는 '군함에 탈 자격이 없는 녀석들은 진작에 자르고 싶었지만, 민간정부가 실시해야 모양새가 좋았다'라는 의미심장한 답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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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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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6 E.E.샤츠슈나이더 교사입니다 교사!
    드립이 아니고, 박상희의 비극적 죽음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으니까요..
  •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22.03.06 결국 모두 죽는다..지만 어느정도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사네요 ㄷㄷ
    아나스타샤 빼고(..)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6 아나스타샤도 소련가서 공작저에서 산 건 맞습니다(...) 그 가문이 예상대로 안갔을 뿐이죠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 작성시간 22.03.06 렌지파일 리하초프도 라파예트처럼 적당히 혁명에 우호적이었던 양심적 귀족 정도로 분칠해줬을 듯 하고 말이죠.. ㅋㅋ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3.06 https://youtu.be/qQzdAsjWGPg

    누가 행복했는지 아닌지를 떠나 다들 자신들의 길을 걸어갔죠...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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