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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동아에서 혁명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 Epilogue (5) '68 반동'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03.06|조회수384 목록 댓글 88

 

'68반동'의 사회학: 전방위적이고 맹렬하며 범사회적인 후퇴

 

"나는 그 시절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 때의 행적에 대한 지금의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그러한 경험이 결론적으로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퍼즐이 되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후회는 없다."

-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자크 시라크, 1996년 대통령 선거 승리 후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봄​

도르트문트 원폭 투하와 1944년 '가자 마다 조약' 이후 완전히 전쟁이 종결된 서유럽은 곧바로 재건에 몰두해야 했다. 약 5년간의 격렬한 세계대전은 전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서유럽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사회통합을 위해 온건개혁주의자들, 테크노크라트, 카톨릭 세력, 심지어 기업형 범죄조직(마피아)들의 힘을 빌려 조국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미군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 대규모로 주둔하던 1940년대 중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 동안 서유럽에서는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한때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아 사실상 탄압을 당하던 기독교계 중도세력 등이 급격하게 다시 세를 불렸고, 이른바 '유럽의 봄'이라 불리는 몇 년간의 시기가 막을 올렸다.

1956년 프랑스에서 대중공화운동(PRM)의 조르주 오귀스탱 비도 정권이 출범해 언론통제를 해제하고 복수노조제도를 재허용하는 등의 사회개혁정책을 실시할 때까지만 해도, 전세계의 지식인들은 "유럽이 다시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는 평을 내놓곤 했다. 스페인의 토르쿠아토 페르난데스 미란다 정권, 그리고 1958년 이탈리아 국가파시스트당 대회에서 제3대 두체로 선출된 알도 모로 역시 이러한 훈풍을 제대로 타며 '새 시대의 여명'을 실감케 했다.

 

1959년, 베오그라드에서 유고슬라비아 제국의 포포비치 외무장관(中)을 접견 중인 조르주 비도(左) 대통령.

개혁의 위기와 '하얀 손' 작전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1960년대의 막이 오를 무렵, 이 '자유화' 움직임은 서서히 역효과를 불러오기 시작했다. 퇴역군인의 재취업, 상이군인 복지, 실업자 구제 등을 담당하던 각국의 보훈협동조합들이 "인민탄압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해산되자 더 이상 이들을 보살펴줄 사회기관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급격하게 해제된 언론-집회 통제조치 또한 범사회적인 혼란을 부추겼다. 당시 벌어졌던 크고작은 정책실수(또는 '혼란')들은 체제개혁의 과정에서 으레 나타날 수 있는 시행착오와 같은 것들이었으나, 갑자기 재갈이 풀린 언론과 사회단체들은 자국의 개혁주의 정권을 맹렬하게 물어뜯었다.

이에 서유럽 3국의 개혁정권들은 유럽공동체(EC) 차원에서 문제를 공동해결하고 난국 타개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대대적인 협력을 천명했다. 그들이 야심차게 기획한 첫 계획은 '하얀 손' 작전으로 불리는 정/재계 내 부패척결 프로젝트였는데, 이는 각종 언론사들을 배후조종해 개혁정권의 권력기반을 끊임없이 흔들어댔던 마피아들을 정면으로 겨냥한 작전이었다. 물론, 마피아들은 순순히 당해주지 않았다. 1961년 스페인의 엔리케 델 리노 판사가 일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사건을 시작으로 수없는 흑색테러가 빈발했고, 이듬해에는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공동체 본부 건물에서 급조폭발물 테러로 34명이 사망하는 사건마저 벌어졌다. 1962년 11월 28일에는 급기야 개혁을 주도하던 알도 모로 두체가 - 아마 마피아 조직(그리고 그 배후의 보수파)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 강하게 의심되는 - 극좌 무장집단 '붉은 여단'에게 납치 및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1962년 11월 28일, 이탈리아 개혁주의의 상징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의 테러로 암살당했다.

 

뜻밖의 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이 프로젝트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프로젝트의 실무총책임자 로베르 르쿠르 검찰총장은 결과를 받아들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각종 수뢰, 불법도박, 불법정치자금조성, 각종 엽색행각 등으로 가장 많이 기소된 이들은 다름아닌 개혁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실제로 더 부패했던 것인지, 아니면 범죄조직들과 긴밀히 공생하던 보수파들이 미리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혁의 당위성과 지지를 확보하고 더욱 과감한 조치에 나서기 위한 대대적인 밑작업이 개혁파들에게 재앙적인 후폭풍으로 돌아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었다. 1966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개혁주의 후보 조르주 퐁피두가 우익 급진주의 후보 피에르 푸자드(Pierre Poujade)에게 참패했으며, 스페인에서도 미란다 국가주석이 부패혐의로 탄핵당하며 역시 보수파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주석이 집권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도 모로의 후임자인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미국으로 망명, 제2대 두체 카를로 스코르차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아킬레 라우로(Achille Lauro)가 당대회에서 제5대 두체로 선출되었다. 비틀거리면서도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68년 5월의 '파리 청년총궐기'는 68반동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것은 제2의 혁명, 문화대혁명(Révolution culturelle)입니다. 우리는 이제 퇴폐적이고 부패하며 구태의연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계급협동의 푸른 깃발을 드높여야 합니다!"

- 1968년 6월 1일, 장 마리 르펜.

 

'68 반동'

10년 남짓의 개혁주의 정권이 남긴 것은 결국 성대한 자기파괴, 폭증한 물가와 실업률, 줄어든 복지혜택 뿐이었다. 이들을 끝까지 믿어주었던 전전(戰前)세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 것은 한때 사회개혁의 가장 급진적이며 열렬한 지지층이었던 청년 전후(戰後)세대들이었는데, 주로 좌파성향이 강했던 이들은 오히려 우익 급진주의의 열풍에 급격히 빠져들게 되었다. 심지어 개혁파들이 실각하고 새로 들어선 보수파 정부가 '지나치게 미온적이며 계급협동의 이상에 충실하지 못하다'며 가두 폭력시위를 전개하는 상황마저 심심찮게 벌여졌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유럽 전역의 사회발전을 최소 10년에서 20년은 늦췄다는 '청위병(Gardes bleus)'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태 초기인 1968년 쯤에는 각지 보수정권들 역시 청위병을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드골주의적 협동주의의 가치를 드높이는 활동을 보인다며 장려하기까지 했다. 대표적인 청위병단 출신 정치인인 자크 시라크 역시 정부의 묵인과 지지를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장뤽 멜랑숑 역시 개혁 야당 '민주공화당(PDR)' 당사에 동료 청위병들과 난입해 의원들과 당직자들을 심하게 폭행했음에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재판 없이 석방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의 만행이 점점 심해져 구 개혁주의 정부를 옹호했던 언론인, 지식인, 예술가 등을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자 각 정부 또한 심각성을 느끼고 뒤늦게 대처에 나섰다. 1970년 새해 첫날 장 폴 사르트르가 암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미셸 푸코, 조르지오 아감벤, 자크 데리다 등 유수의 지식인들이 테러 또는 그 위협에 시달리자, 당시 프랑스의 실권자로 복귀한 샤를 드골 국민의회 의장은 각국 국가원수들에게 즉시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요청했다.

1970년, 프랑스 국민들에게 청위병을 조력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샤를 드골 국민의회 의장.

 

여파​

이 광풍은 국가 차원의 진압으로 1972년~73년 무렵부터 사실상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이미 사회에 대해 건전한 일침을 날려줄 수 있는 비판적 지식인들, 언론인들, 예술가들은 대부분 잠적하거나 살해당하거나 영구적 장애를 입었거나 외국으로 망명한 지 오래였다. 수많은 사유와 정치사회적 함의를 던지던 찬란한 20세기 대륙철학의 계보는 산산조각났고,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 무렵 태어난 이른바 '청위병 세대'들은 두고두고 서유럽의 골칫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 운동의 여파로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사실상 단절되어 두 번 다시 이전의 수준을 복구하지 못했으며, 카톨릭계 역시 68반동의 여파로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점차 교조화-보수화 움직임을 보여 서유럽 사회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철학적 아노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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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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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2.03.07 그러고보니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어서 여기 올리자면(...) 소확행 소설을 다시 올릴 생각인데, 문화 게시판에 올릴지 여기 올릴지를 고민중입니다. 일단 [2차창작] 말머리가 있는 것은 알긴 하지만, 여기 올리면 또 도배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07 음… 일단 운영진의 의견을 구해보는 게 맞을 것 같네요. ㅋㅋ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2.03.07 E.E.샤츠슈나이더 일단 오늘거(12시 넘으면 내일이지만)는 문화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그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22.03.11 다시 읽어보니까 이 게임 샤츠슈나이더님이 쓰시는건데 왜 2차창작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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