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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서울, 1962년 겨울 - 04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08.29|조회수549 목록 댓글 125

 

 

10.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일제의 조선 지배가 너무도 갑작스러운 계기로 사실상 종말을 맞았습니다. 만주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반일정권 가담을 선언하고 몽강이 산산조각나며 일본의 지나방면군 80만 병력이 대대적 철수작전을 준비하는 가운데, 경성을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실권을 잡은 ‘대조선국 군사혁명위원회’는 건국동맹 및 공화국군에 집요하게 귀의를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일행들은 “대구 소비에트에 무궁한 영광을!”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한 대형 음식점에 모여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우선 모든 이들은 이 비열한 기회주의자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고,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독립된 조국에는 이런 자들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군사혁명위원회는 필연적으로 정당성이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제 치하에서 승승장구하며 뻗대던 이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피와 폭력에 의거한 극단적 강경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인 부유층에 대한 탄압, 군부대 내 일본인 장교들에 대한 린치, 구금, 추방, 살인 등을 일으키며 민중들을 선동해댔죠. 그들이 방패막이로 사용하던 왕실은 어떠한 실권도 가지지 못하며 허수아비로 전락할 뿐이었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위원장은 채병덕, 부위원장은 백선엽이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채병덕을 위시한 온건파와 백선엽이 이끄는 강경파의 입장이 사뭇 달랐습니다. 사실상 정변은 강경파가 주도한 것으로,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수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열세에 있던 공화국군과 건국동맹이었습니다. 이대로면 소련에 당장 맞설 수 있는 대항마를 찾던 미국조차 경성 정부를 지원할 판이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재앙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건국동맹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남부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미국의 ‘연락책’들과 접선을 시도했습니다. 그렇게, CIA의 현지 연락책 중 하나인 캐서린 글렌(가네다 후미코)이 아지트를 찾아왔죠. 그녀의 외관은 동양계였으나, 내면은... 아주 솔직했습니다. 남부 레드넥의 가치관이 뼛속까지 배어있던 그녀는 미합중국이 “소련 XX들과 치고박는 와중에 뒤에서 칼빵을 넣지 않을” 친구를 찾고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미국은 ‘경성 정부’를 지원하는 안을 진지하게 생각 중이며, 단지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의심스러워 ‘대구 정부’의 의견 역시 청취하러 왔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미국의 전략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군사혁명위가 소련과 손을 잡은 공산주의자라는 위조된 증거를 내밀며, 캐서린에게 그 점을 관철시킨 것입니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욕설을 내뱉고서, 캐서린은 지원을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소련 영사관을 폭파시킨 놈들이니, 반공주의와 작전능력은 검증된 것이 아니냐”면서요...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북상 전략을 짜려던 와중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호남 지역에서 ‘대한제국 복고’를 지지하는 대규모 민란이 발생해 빠르게 지역을 접수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호남은 상대적으로 평지의 비중이 높고 조선인 및 일본인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지배하던 곳이기에 그간 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으나, 일본군이 빠진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힘의 공백지가 된 곳이었습니다. 바로 아고라, 즉 최교수가 지역 최고 유지 중 하나인 최창숙 선생에게 연통을 넣어 선동한 것이었죠.

 

그러나 이 ‘민란’은 최교수의 기획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첫째, 이들은 유학에 근거한 엘리트 관료정 같은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둘째, 최교수가 기대한 지역 유지(즉, 지주계층) 위주의 항일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일제에 소극적, 적극적으로 부역하던 이들이었으므로, 혁명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죠. 혁명은 농민 무산계급 위주로 전개되었으며, 그 지역 유지들은 처참한 조리돌림을 당하며 모든 땅 문서들은 불쏘시개가 되고 있었습니다. 대외적 명분으로 삼은 ‘이우 공을 황제로 하는 대한제국의 복원’ 역시 정치적 슬로건으로 쓰일 뿐, 혁명의 주도자들은 제국이고 공화국이고 그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행들은 격노했습니다.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일을 친 것은 둘째치고, 구시대의 유물인 이왕가를 불러왔다는 점이 특히 많은 동지들의 분노를 샀죠. 심지어 건축가마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물론 이우 공이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왕족인 건 맞았지만, 그는 거의 20년째 외국을 전전하며 일본 당국의 감시 속에 살았던 ‘잊혀진 권력자’일 뿐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이우 공이 ‘포항을 통해’ 귀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호남이 아니라 대구의 공화국 정부를 먼저 만날 계획이었다는 거죠.

 

이우 공의 뜻은 명백했습니다. 자신은 왕좌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공화국 시민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최교수는 아연실색했지만, 나머지 이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남은 것은 수습이었는데, 이는 건동 조직부장인 건축가가 “토지개혁 역시 넓게 보면 조직활동에 포괄된다”는 기적의 논리를 개발해냄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신이 난 드빌은 곧바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안을 발표했고, 호남 여론은 빠르게 공화국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이들 혁명군이 공화국군에 합류하면서 이 사태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삼남지방은 공화국의 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최교수의 독단적 행동은 공식적인 처벌을 받아야 할 정도였지만, 표면적으로는 영남 일부지역에 고립되어 있던 공화국의 세력이 남부 전체로 확장될 수 있게끔 한 신의 한 수로 알려졌기에 상부에 보고하기도 난감했습니다. 결국 이 일은 사실상 불문에 부쳐지게 되었고, 공화국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일본군의 철수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나며 사실상 일본 제국은 해체수순을 밟았습니다. 본국에서는 아사누마 총리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살해당하고, 육군의 쿠데타가 일어나며 무토 아키라가 내각총리대신에 오르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나날들이 이어졌죠. 또한 몽강과 만주가 완전히 소련의 영향권에 들며 붉은 공포가 스멀스멀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끝이 눈 앞에 와있습니다.

 

 

11.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1963년 2월, 일본 제국은 실시간으로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만주 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이, 내몽골은 소련 병합을 앞두고 있었으며, 보국군에 포로로 잡힌 50만명의 일본군 병력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무토 아키라 육군원수는 해군, 국내의 반대파들, 조선의 ‘두 정부’, 소련, 심지어는 일본을 손봐줄 기회만 벼르고 있던 미국까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일본 제국의 파멸이 곧 공화국의 안녕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군산-대전-영주 선 이북은 여전히 군사혁명위원회의 통제 하에 있었고, 부산에는 여전히 일본군 본토사단 약 4만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군사혁명위에 대한 수적 열세는 어찌 극복한다 치더라도, 후방에 일본군 사단들을 그대로 남기면서도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방도는 없어보입니다. 심지어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는 사이 북쪽에서 공화국군 유격대들을 정리하고 내려온 군사혁명위 병력이 공화국 영역을 유린할 수도 있었죠.

 

서울로, 그리고 더 북쪽으로 진격하려면 일단 후방의 일본군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기에, 건국동맹 측은 모든 가능성을 강구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즉 해당 사단들의 자진 철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죠. 때마침 부산 기지의 총사령관이자 군단장인 미노베 타다시 중장 역시 무언가를 합의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공화국군 참모차장 이현상과 일본군 후산(부산)집단군 사령관 미노베 타다시를 협상대표로 하여 양측 경계인 창원 일대에서 일본군의 철수를 의논하는 협상이 열렸습니다.

 

저들이 내건 조건은 약 3개월간의 철수준비기간 및 그 기간동안 공화국군의 부산 주둔 허용이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퇴각하며 그 과정을 공화국군의 감독 하에 둔다는 것은 얼핏 보면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나, 문제는 ‘일본군과의 공존’이 일반 민중들에게 ‘야합’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민심이 정말로 그 기회주의자들에게 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죠. 그러던 그 때, 방책을 논의하던 협상단에게 놀라운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울산시 근교의 한 산지에 일본군의 최고등급 보안시설이 있는데, 그곳은 핵미사일이 24기나 저장되어 있는 사일로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일본군이 시간을 끄는 것은 그 핵미사일들을 반출해가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결국 협상은 공화국측에 매우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철수기간은 대폭 줄어 14일이 되었고, 호신용 소(小)화기를 제외한 모든 군수물자 및 재래식 무기(즉, 전차와 항공기를 포함)를 잔류시키는 조건이었죠. 모든 것을 핵탄두 반출을 위해 포기한 것입니다. 심지어 14일이라는 짧은 기간 탓에 미사일과 핵 폐기물은 그대로 놔두고 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다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일본군이 쫓겨나듯 떠나고 나자, 민심은 빠른 속도로 개선됐습니다. 오히려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물리친 유능한 집단” 이미지가 덧씌워진 건 좋은 일이었죠. 사기는 충천, 군사의 질 역시 우위를 점했습니다. 드빌과 소피아는 지체하지 않고 선전선동에 나섰습니다. 공화국군 합동참모총장 이홍립(백악관)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삐라가 일본군 수송기에서 대량으로 뿌려졌고, 군사혁명위원회는 정당성과 힘 모두 부족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죠. 이홍립의 군제개혁으로 공화국군이 정규군으로 거듭난 것 역시 한몫 했습니다. 각지의 공화국군 병력들은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고, 왕국군(군혁위) 병력의 항복 역시 체계적으로 받아 자신들의 세력을 증식해 나갔습니다.

 

이미 전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건국동맹은 마지막으로 ‘공정한 재판’을 조건으로 한 항복제안을 날려보기로 했습니다. 건축가, 아니, 조선인 작가 ‘김해경’이 그 타자로 나섰죠. 내용은 대충, “너네는 나쁜놈이지만 그래도 기회를 한번 줘보겠다”였습니다. 그러나 군사혁명위원회 강경파는 이미 온건파를 숙청해버린 뒤였습니다. 정말로 소련의 손을 잡고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채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이들은 관대한 항복제안을 걷어차버렸죠. 더 이상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일방적인 소탕전, 아니,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심판 뿐이었습니다.

 

공화국군이 전 국토를 휩쓸었고, 군사혁명위원회는 용산 기지의 벙커에 틀어박혀 죽을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비정규작전을 수행하던 이철수, 즉 창경원은 소수 병력을 데리고 기지에 잠입해 주요인사들을 죄다 학살해버렸고... 그렇게 이 거대한 촌극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조선에 남은 것은 하나의 정부, 하나의 군대 뿐이었죠. 즉, 돌고 돌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제대로 된 통치를 선물할 때였습니다.

 

12. 자유와 번영의 날개

 

1963년 봄, 조선방송국 전파납치 방송으로 인해 촉발된 4월 항쟁이 일어난 지 꼭 2년이 될 무렵, 조선은 일본 제국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총독부도, 군사혁명위원회도,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던 총독의 칙허도, 탐욕스러운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도, 민족 말살통치도, 창씨개명도, 궁성 요배도, 신사 참배도 이제는 과거의 기억일 뿐입니다. 일본 제국은 인지부조화에 빠져 방일한 미국의 존 F. 케네디마저 암살하려 시도하는 무모한 행위를 저지르다 자멸했습니다. 육군 내각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로 인해 해군 내각으로 대체되었고, 새 총리로 취임한 해군 출신의 쿠도 슌사쿠는 엔화 평가절하, 국가특혜보조금 제도의 근절(이는 자이바츠(재벌)의 사실상 해체를 의미했습니다), 핵 동결, 대만과 사할린, 쿠릴을 제외한 모든 식민지의 독립 인정, 남양군도 신탁통치 수임국 지정 해제, 자발적 육군 감축, 미일연합사령부 창설 및 핵무기 통제권 이양 등 내정간섭에 한없이 가까운 조건을 모두 수락했습니다.

 

그 사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간판을 바꿔단 건국동맹은 신국가 건설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수많은 정치단체가 난립했지만, 적절한 교통정리가 이루어져 4개의 주요정당 체제가 수립되었죠. 이행규(이소성)와 이철수가 소속된 조선공산당, 정예림이 원내총무로 있는 사회민주당, 영강이 부총재로 있는 자유당, 그리고 이홍립 총재와 최교수 정책총장을 필두로 한 공화민주당이 그것이었습니다. 김해경, 즉 건축가는 야인으로 돌아가 사회운동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새로 선출된 제헌의회는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미국식 제도를 일부 이식한 양원 의원내각제를 채택했습니다. 정부수반은 ‘장관들 중 최선임자’를 일컫는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으로 명명됐죠. 사방이 가상적국 또는 적대국으로 둘러싼 안보환경을 고려하여 양성 2년 징병제가 채택되었고 문민통제의 원칙이 천명되었으며 중앙인사원과 공직기강위원회가 각각 공무원의 선발과 감찰을 담당해 정부의 전횡을 견제케 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헌법은 노동자의 이익균점권과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농지의 분배 등을 규정하는 등 사회주의적 요소가 짙게 포함되었습니다. 이홍립 등 소수를 제외한 우파 정치인들마저 동의한 부분이었죠. 국가의 기틀은 느리지만 확실히 잡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8월 31일, 미국 정부의 특사로 임명된 전직 상원의원이자 주일미국대사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 Jr.)가 협상단을 이끌고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조미상호방위조약, 조미미사일지침, 조미원자력협정이라는 세 개의 협정문을 들고 왔는데, 이는 조선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깊숙이 끌어들임과 동시에 조선의 ‘공세적’ 대외정책 집행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미국의 제안에 따르면 조선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농축우라늄, 플로토늄, 토륨 등을 생산할 수 없으며 미사일 역시 사거리 220km, 탄두중량 500kg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협상장에 들어선 ‘일행’들은 미국과의 친선을 고려하면서도, 생각 외로 ‘빡빡한’ 조건을 수정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90만에 달하는 병력을 유지하면서도 경제발전을 수행하기 위해 원조를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로지와 미국 대표단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제3세계에 대한 원조방침을 몇 년 전에 바꾸었으며, 이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자제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즉 원조를 받으려면 정부의 투명성과 경제정책의 가시성을 보여야 하며 그것을 입증하기 어려울 경우 경제대표부(또는 투자청)를 설치해 거시경제정책에 있어 미국의 ‘감독’을 받으라는 것이었죠. 조선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갓 벗어난 국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조건은 절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조선 측 인사들로부터 탄식과 한숨이 빗발쳤죠. 이쪽 역시 양보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결국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미사일 지침을 받아들이되, 조선 비핵화에 일본과 중국의 비핵화를 연계시키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또한 원조에 대해서는 조미 공동지분으로 설립하여 양측 동수의 이사회가 의결권을 행사하는 조미투자은행이 조선국토개발유한공사(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51% 지분을 가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개발 측면에서 조선이 10-20년동안 미국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적어도 경제, 금융, 무역정책 전반에서의 자율성은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예림 사민당 원내총무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은 여전히 깊은 아쉬움을 표출했으나, 아직은 조선이 ‘갑’으로 행세할 환경이 아니었던 셈이죠.

 

미국과의 협정 체결이 완료되고 나서 몇 달 뒤, 제2대 총선이자 실질적인 초대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4개 주요정당들은 각기 유권자들을 설득했고, 그 결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의석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좌우익은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고, 그 중 제1당 지위를 차지한 자유당에서 조선공산당 등의 ‘5-10년 거국내각론’을 받아들여 전진한 총재를 국무장관으로 하는 거국내각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독립의 주역들인 일행들은 각기 전문분야의 각료가 되었고, 이제 어렵게 얻은 소중한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조선 민족의 오롯한 몫이 될 것이고, 실패는 결국 미래의 성공을 낳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Fin.

 

 


 

 

 

 

그동안 참여해주신 분들, 지켜봐주신 분들에게 모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에필로그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See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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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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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08.30 이번에도 슈퍼이벤트 써봤는데 좀 약빤(?) 슈퍼이벤트들 같네요. ㅎ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08.30 <조선의 독립>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 이용구

    [올바른 길로 돌아오다]

    시로사키 리츠(시장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아이즈원의 피에스타

    <조선의 독립>

    좋든 싫든 간에.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는 여러분을 묻어버릴 것이다.
    - 니키타 흐루쇼프

    [드디어 묻어버렸군]

    이소성(신공산주의(공산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f(x)의 4 walls

    <조선의 독립>

    일본과 한국의 교의는 서로를 잘 아는 것에 있다.
    - 안중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정예림(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AKB48의 하이텐션

    <조선의 독립>

    우리는 풍요로운 예속보다 빈곤한 독립을 원한다!
    - 세쿠 투레

    [자유여 영원하리]

    영강(국민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프로듀스 101의 나야 나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08.30 <조선의 독립>

    심판은 신이 할 일이며 신께 보내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다.
    - 블라디미르 푸틴

    [당당하고 위용차게]

    이철수(게바라주의(사회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NCT 127의 영웅

    <조선의 독립>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일 것이니]

    이홍립(자유보수주의(보수민주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방탄소년단의 피 땀 눈물

    <조선의 독립>

    옳은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비겁이다.
    - 공자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다]

    최교수(가부장적 보수주의(보수민주주의) 루트로 엔딩시 발생

    나오는 음악은 원어스의 월하미인
  • 답댓글 작성자로콘 | 작성시간 22.08.30 돈이 곧 진리 이홍립이 권위민주주의요? 이홍립은 자유보수주의인데...

    +이홍립은 군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문민' 정치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08.30 로콘 캐릭터의 정치성향을 정확히 몰라가지고 걍 찍은거에요.

    +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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