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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서울, 1962년 겨울 : Epilogue (3)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09.03|조회수541 목록 댓글 567




30년간의 유예

“오랜 길을 돌아왔습니다. 30년간의 유예 끝에 두 이웃은 마침내 화해의 첫 걸음을 떼었습니다. 우리 조선인들은 당신들을 용서하나, 절대 잊지는 않겠습니다.”
- 이회창 국무장관, 1995년 조일공동선언 발표문.


조선과 일본이 수교한 것은 1995년으로, 조선이 독립한 지 32년 뒤의 일이다. 그 이전에도 약 7차례에 걸친 수교협상이 있었으나, 예의 이철수 피살사건 이래 조선 정부가 협상 불가 방침을 확정하면서 17년간 회담이 전면 중단된 바 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일본 측의 협상 스탠스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회자되는 ‘역청구권’ 주장이 그 예시다. 1967년 제3차 회담에서 일본 측 차석대표 다하라 요시카즈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조선 측이 청구하는 배상금보다 일본이 상실한 적산재산이 3배 가량 더 많으니, 오히려 조선이 이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회의를 파행시킨 바 있다.

조일국교정상화 협상 가능성이 다시 불붙은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쇼와 덴노 사망 이후 ‘대투쟁’의 물결이 열도 전체를 헤집으면서 전국민이 ‘어느 편’인지 그 소속을 추궁받는 상황에 이르자 혁신파의 중핵인 ‘범사회공투연합(범공투)’을 중심으로 조선과의 접근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커져갔다. 당시 김영삼 행정부는 구 사민당 사무총장이자 문화예술부 장관을 역임했던 정예림을 특사로 보내 범공투의 시이 가즈오 의장과 세부사항을 논의케 했다. 사회운동가이자 조일혼혈인 그녀는 혁신파 인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협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은 엄연히 식민주의와 독립전쟁의 피해자였고, 당연히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조선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25년 전의 역청구권 주장을 답습한다는 오해를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우익의 기세가 아직 강한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사죄발언을 공식 발표할 경우 민심이 떠나 조일간 관계정상화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향후 조치할 것”을 조건으로 선제 지원을 하는 안은 조선 국내여론의 승인을 받지 못할 터였다.

고민하던 정예림은 일본 내 조선인 커뮤니티를 적극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재일’에 대한 오랜 억압과 사회적 질시로 인해 일본 내 조선인들은 대부분 혁신파를 지지했고, 시게미츠 다케오(조선어명 신격호)의 롯데그룹 역시 혁신파와 범공투를 물밑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최윤정(일본어명 쇼다 미치코)롯데그룹 부회장과의 개인적인 연줄을 이용, 민간 루트를 통해 공작금 등을 지원한 정예림은 ‘계약금’으로서 범공투 명의의 ‘일본인권선언’을 발표하게끔 요구했다. 인권선언에 ‘조선’, ‘식민피해 배상’이라는 단어는 들어가있지 않았으나, 제국주의의 참상을 기억하고 책임과 화합의 정신을 견지한다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었다.

1993년 4월 6일 이와테 원자력발전소 노심융해사건이 일어나자 김영삼 행정부는 재차 정예림을 위시한 ‘민간특사단’을 파견했다. 좌익도, 우익도 지원할 수 없었던 미국의 입장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미국 측은 여전히 범공투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논의를 평행선으로 만들었으나, 이와테 원전을 방치할 경우의 피해는 그야말로 겉잡을 수 없었다. 급기야 소련 측에서 지원안을 들고오기에 이르자 미국은 “유일하게 사태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혁신파 범공투를 지원한다는 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선-미국을 필두로 한 지원단은 “오퍼레이션 토모다찌”라는 이름으로 원전사고 수습을 총괄했으며, 대량의 방사능 유출과 수많은 사망자 및 피폭자의 속출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일련의 흐름은 일본 인민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급격히 제고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4년 9월 10일 시이 가즈오 의장은 일본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헌법에 “제국주의 반성 및 부정” 및 “역사적 책임의식을 전제로 한 우호선린”을 명기하였다. 신임 이회창 행정부는 김윤환 외무장관을 대표로 한 협상단을 보내 국교정상화를 의논했고, 이내 “불가역적인 책임인정”을 전제로 한 피해보상 및 위로자금 조성이 합의되었다. 1995년 2월 양국 의회에서 기본조약, 어업 및 해양경계협정, 청구권협정 등 조약안이 비준됨으로써 두 국가는 다시금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초대 주일대사로 임명된 정예림은 1999년 퇴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저에게는 일본인의 피가 흐릅니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지만 단 한번도 맹목적 적대주의를 추구한 바 없습니다. 저는 정예림이고, 사토 아키라입니다.”



옐로 피버(Yellow Fever)


“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최민기를 친구로 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국무장관 감이 됩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국무장관 후보 아니겠습니까?”
- 노무현 당시 사민당 의원, 2000년 유세 중.


2000년 6월 2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3당(사회민주당, 자유당, 열린참여당) 합동 국무장관후보 경선에서, 사민당의 노무현 후보는 그의 동지 최민기를 끝까지 옹호하며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사민당 좌익의 이인제 후보가 “최민기같은 약탈적 다국적자본의 총아, 일본 귀족의 아들을 측근으로 둔 저 사람이 진정 정부수반 자격이 있느냐”고 공격해오자, 노무현 후보는 “연좌제적 발상 때문에 동지를 버리라고 종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자 딱지를 붙이고 다니냐”고 응수했다.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노무현 선거운동본부는 사민당의 일개 당수 선본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였다. 당장 최측근이던 최민기는 자유당 소속이었고, 노 의원은 ‘친노’정당 열린참여당 소속조차 아니었다. 당시 본부장이었던 문재인 변호사에 따르면 선거운동본부는 “본부도 아니고, 단합된 운동을 펼치지도 않았으며, 딱히 선거를 준비하는 곳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독특한 특징이 ‘아무런 기반도 없던’ 노무현을 정부수반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밑바탕이 되었다.

IT 기술의 발달은 초연결 시대, 인터넷 시대를 불러옴과 동시에 금융부문의 비대화 역시 야기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보획득에 용이한 상위계층의 경제적 독점을 부추겼으며, 협동조합 및 노동조합과 수십년간 강하게 결착된 좌파정당들 역시 그 ‘야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뿌리깊은 엘리트주의, 부정부패, 금권정치를 타파하겠다며 호기롭게 나선 노무현은 다선의원들의 지역구에만 출마를 선언하며 세 차례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사실상 정계은퇴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당을 불문하고 최민기, 유시민, 홍준표와 같은 ‘이단아적 정치인’들을 불러모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중 최민기는 자신 몫의 롯데그룹 주식을 전액 현금화한 뒤 자신이 지지하는 ‘시대의 아이콘’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저명한 인권운동가 정예림의 지원사격을 유치해냈다. 물론 금권정치 타파를 내세운 정치인이 다국적 기업 임원의 자식에게 후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곧바로 터진 공화민주당 이회창 국무장관의 대규모 뇌물수수 스캔들이 일어나며 논란은 유야무야되었다. (2003년 검찰이 밝혀낸 바에 따르더라도 최민기가 지원한 것은 주로 금품이 아닌 인력이었으며, 그의 선거법 및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되었다.)

인터넷 정치인, 좌우합작의 정치인, 대중의 정치인으로 불리며 호기롭게 ‘참여연립정부’를 구성한 노무현 국무장관은 연립행정부 내 잡음, 사민당 및 자유당 당권파의 노골적인 비토, 동유럽발 경제불황 등의 요인으로 인해 몇년 되지 않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노 정권 붕괴 이후 자유당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최민기와 홍준표는 그대로 자유당 진보파와 함께 탈당, 진보 자유주의 정당인 ‘한나라당’을 만들어 공화민주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는 급속도로 진행된 자유당의 우경화와 함께 공화민주당의 중도화를 추동했고, 이후 손학규-유승민 행정부의 중도적, 실용적, 온정적 정책노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각각 현임 유 행정부의 행정안전부, 법무부 장관을 맡고 있는 최민기와 홍준표는 공동교섭단체 “더불어사는 국민의 힘”의 차기 통합대표 후보이다. 현대사를 조망하는 본서에서 조선의 향후 정치지형을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으나, 혁신가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닐까 한다.



에필로그 세 편이 모두 끝났군요..! 사실 마지막 3편이 가장 쓰기 어려웠습니다(…) 현대 정치와도 안 엮일 수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도 나름 중립성을 갖추려 노력했습니다. ㅋㅋ

아무튼 그동안 부족한 진행 따라와주신 모든 분들, 진행 봐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일에 조금 집중하다가, 또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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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9.10 E.E.샤츠슈나이더 아 그냥 어제 디어님이랑 얘기한거요.

    어제일 맞잖아요?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9.10 931117 아… 무슨 일 있으신줄…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2.09.10 E.E.샤츠슈나이더 저도 무슨 심각한 일 있으셨던줄... 예전처럼 글이 올라왔다거나 하는...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9.10 E.E.샤츠슈나이더 그나마 진정되서 게시판 남기긴 하는데...ㅎㅎ...

    지도 만들던것도 멈출 정도로 지금 의욕이 뚝떨어 졌어요.ㅎㅎ

    뭐 뭔일 있었음 제가 이번엔 일이 있다 뭐다 했겠죠.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09.10 dear0904 아마 전 이제 안중에도 없어 보이긴 합니다.ㅋㅋㅋㅋㅋ

    + 어제 일있어서 우울할 사람이 전쟁 뉴스 보고 야구 보겠습니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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