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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공산당 없으면 유고 연방도 없다?! - Prelude(3)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10.30|조회수275 목록 댓글 10

 



공산당 없으면 유고 연방도 없다?!


§ 본 연재는 차후 진행될 RPG, “공산당 없으면 유고 연방도 없다?!“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프리퀄입니다.

§ 본작의 연재예상일은 빠르면 11월 말, 늦어도 12월 중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 프리퀄의 연재빈도는 부정기이며, 연재예정일보다 프리퀄 완결이 늦어지더라도 본작 연재를 우선시합니다.



9. 단일하되 단일하지 못한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6개의 공화국과 2개(보이보디나, 코소보)의 자치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입니다. 이 사실은 파시스트에 맞서던 파르티잔 임시정부 시절부터 변하지 않았고, ‘국부’ 요시프 브로즈 티토 또한 범유고슬라비아 민족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자주관리제도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는 구조조정(국가 주도이든, 민간 주도이든)이 매우 어려워 세계 경기변화에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60년대의 고속성장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되었죠.


특히, 북부의 부유한 공화국들(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과 남부의 ‘가난한’ 공화국들(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간의 격차가 점점 벌어진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세르비아인들은 연방의 최대 민족임에도 언제나 크로아트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에게 권리를 양보해야 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크로아트인 및 슬로베니아인들도 그 나름대로 세르비아계의 주도권 행사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죠.


결국 1964년부터 1965년까지 통과된 여러 개혁안들과 헌법 개정안은 각 공화국들의 권한을 늘려줌과 동시에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의 ‘경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입안되었습니다. 의회 역시 1개의 일반의회와 4개의 ’기능별 의회‘로 구성된 “5원제”로 재편되었죠. 즉 연방정부가 경제 및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 것입니다. 당연히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남부는 반발,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한 북부는 환호했죠. 심지어 변화에 고무된 크로아티아인들이 소위 “크로아티아의 봄”이라 불리는 개혁운동을 진행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기겁한 세르비아계 정치인들은 티토 주석에게 조속한 처리를 요구했지만, 티토는 연방에 더 이상의 혼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KJ, 이하 ’공산당‘) 내 개혁파 및 크로아티아파를 대표하던 사브카 다브체비치쿠차르(Savka Dabčević-Kučar)는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내 기업들이 벌어온 외화가 상당부분 연방정부에 귀속되는 문제를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크로아티아의 고유 문화가 연방정부에 의해 탄압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자그레브 등 크로아티아의 수많은 도시에서 청년 지식인들의 행진이 이어졌죠. 프라뇨 투지만(Franjo Tudman)을 비롯한 사회운동가들 역시 적극 가담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크로아티아 내 소수자였던 ‘크로아티아 거주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공포에 밀어넣었습니다. 크로아티아 문화의 적극적 팽창은 우스타샤의 공포를 되살리기에 충분했죠.


다브체비치쿠차르, 트리팔로 등 크로아트-개혁파가 부추기는 이러한 움직임들을 참을 수 없었던 세르비아-보수파는 즉각 대응했습니다. 당 기관지인 <투쟁Borba>에 “발작적 민족분파주의“를 규탄하는 글을 실은 것이 그 시작이었죠. 개입 각을 보고 있던 티토는 이때다 싶어 갑자기 보수파를 비판하고 자그레브로 향해 시위대 앞에서 “당신들의 ‘심정’에 깊이 동감한다”는 연설을 장황하게 하더니,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새로운 개혁안을 논의했습니다. 트리팔로를 연방총리로, 다브체비치쿠차르를 부주석으로 임명하는 등 기본적으로 개혁파를 옹호하는 것 같았지만, 크로아티아를 기반으로 하는 이들 정치인들을 베오그라드에 묶어두어 더 이상 ‘설치지 못하도록’ 한다는 도쿠가와 뺨치는 심모원려가 담겨 있었죠. 투지만 등 민간에서 운동을 직접 주도하던 이들은 어김없이 구속되어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헌법 역시 1974년에 다시 개정되었습니다. 연방정부는 외교, 국방, 대외무역, 통화, 관세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각 공화국 정부에게 이관했고, ‘상하원 모두 공화국별 동수의 의원으로 구성된‘ 기이한 형태의 양원제 의회, 무엇보다 각 공화국의 국가원수가 1년씩 돌아가면서 연방주석을 역임하는 “주석단” 시스템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순환주석제는 종신 주석으로 추대된 티토가 사망하는 순간부터 가동될 터였죠.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분쟁 및 지역분쟁은 이렇게 잠시 ‘유예’되었습니다. 그 대가로 연방은 사실상 국가연합과 비슷한 수준으로 느슨해졌고, 각 공화국에서 민족주의가 재발흥했을 때 그것을 막을 방법은 더욱 제한적이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좋아보였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티토라는 거인의 정치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셈이지요..



10. 그린 라이트? Nope!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Nothing happened, nothing changed)

-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장관, 1972년 8월 10일 베이징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소련이 신경제정책의 부활을 부르짖으며 스탈린주의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이, 중국은 악명높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겪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망명을 허락한 소비에트 연방을 연일 비난해댔고, 1967년부터는 모스크바를 “붉은 완장 찬 부르주아 자본주의자들의 소굴”이라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중소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습니다. 중국이 소련의 종주권을 부정하면서 소련은 모든 고문단을 철수시켰고, 그렇게 중소밀월은 그 끝을 고했습니다. 물론 국경선에서 양측 군대가 국지전을 벌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현실화되지 않았기에, 마오쩌둥 이하 지도부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죠.


이 상황에서, 마오에게 후계자로 지명받았지만 점점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던 린뱌오는 “마오 주석과 영원히 작별하고자 하는 소련과의 모든 친선을 단절, 미국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다시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으려 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장칭 이하 4인방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으나, 저우언라이의 동의와 마오쩌둥의 묵인으로 인준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미국에게도 전해졌고, 격론 끝에 ”한번 만나는 보자“는 결론이 도출되었죠. 그렇게 1972년 7월 28일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장관 일행은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이 둘이 합의에 이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견제한다는 구상은 일견 매력적이었지만 유진 매카시 대통령의 입장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가’와 손잡고 ‘그나마 덜 나쁜 국가’를 견제한다는 발상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한 불과 2년 전 매카시 독트린을 선포해 동맹국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한 행정부가 ‘그 동맹국’ 중 하나인 대만을 버릴 경우의 신뢰비용도 막대했죠. 무엇보다 베트남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긴 직후 중국과 손잡는다는 것은 진보 정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였습니다. 중국 역시 매카시 대통령의 “남북한 동시철군 및 유엔 중립국감시단 단독관리“ 제안을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에게 남한은 여러 동맹국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중국에게 북한은 둘도 없는 혈맹이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회담은 파토나고, 린뱌오는 마지막 발악으로 광저우로 이동해 반란을 꾀하려다 체포되어 반혁명죄로 총살당했습니다. “미국과의 연합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역까지 획책한 극우분자 린뱌오”라는 이미지는 4인방의 소위 ‘비림비공(린뱌오, 공자를 비판한다)운동’에 대단한 위세를 불어넣어 주었고, ”린뱌오는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주장하던 덩샤오핑 등은 재차 하방되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중국의 미래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겠지요..



11. 내 중국에 반동따위 필요없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습니다. 당연히 후계자 문제를 빼놓을 수 없었죠. 린뱌오가 몰락하면서 붕 떴던 후계자 자리는 잠시 4인방의 얼굴마담 왕훙원에게 갔다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무능‘하다는 걸 깨달은 마오에 의해 화궈펑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화궈펑은 마오의 동향 후배로, 조용하고 부지런한 관료 타입의 인물이었습니다. 세력이라 할 것도 없었죠. 그나마 우더, 왕둥싱 등 보수파 정치인들과 저우언라이가 붙여준 군 내 실력자인 후종밍, 그리고 화궈펑의 오랜 심복 위안차이나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이 두 차례 하방의 후유증으로 사실상 외부활동이 어려워지고 천윈, 리셴넨 등의 중도파 역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진 상태에서, 화궈펑과 그 측근들은 4인방의 횡포를 견뎌야 했습니다. 책사 위안차이나와 군부 실력자 후종밍은 과감하게 선수를 치자는 의견을 냈고, 그 의견은 주석에게 받아들여져 4인방에 대한 대대적 체포작전이 이루어졌죠. 그리고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고, 그들을 따르던 극좌 인사들 역시 비슷한 말로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중앙위 전체회의(중전회)와 당대회에서 화궈펑은 “양개범시론“을 내세우며 ”마오 주석께서 하신 일은 모두 옳다“는 입장을 공식 당론으로 채택했습니다. 즉 반우파투쟁 이전의 백화제방 정책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의미였죠. 다시 말해 화궈펑과 그 측근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어떤 정책이든 실용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에 반대하는 이들은 마오 주석의 의지를 거역하는 이들이므로 반당분자에 해당한다는 소리였습니다.

소위 ‘신 4인방’이라 불리게 된 우더, 왕둥싱, 위안차이나, 후종밍은 화궈펑 주석의 그늘 아래에서 야심찬 경제재건 계획을 밀어붙이면서 미국 및 소련과의 관계 역시 개선하고자 합니다.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부토 사회주의 정권과 강하게 연대해 인도를 견제하고, 동시에 유고 및 아랍연합과의 연대 역시 느슨하게나마 유지해 활로를 열 계획이겠지요. 그러나 이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곧,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한끗차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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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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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10.30 E.E.샤츠슈나이더 그런데 "책사 위안차이나와 군부 실력자 화궈펑은 과감하게 선수를 치자는 의견을 냈고, 그 의견은 주석에게 받아들여져 4인방에 대한 대대적 체포작전이 이루어졌죠." 이 부분에서 후종밍을 화궈펑으로 잘못 쓰신 것 같아요.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0.30 돈이 곧 진리 잘못 건드리면 서식 또 날아가는데… 일단 확인했습니다. 그거 말고도 오타도 몇개 있는데 카카오 놈들때문에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ㄷㄷ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10.30 E.E.샤츠슈나이더 카카오 이놈들아! 초콜릿으로 만들기 전에 어서 시스템을 정비해라!
  •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22.10.31 중국 붕괴 ㄷㄷ;
    멀쩡한 국가가 없네요 ㄷㄷㄷ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10.31 그래야 좀 재밌지 않겠습니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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