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타]공산당 없으면 유고 연방도 없다?! - Prelude(4)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2.11.07|조회수578 목록 댓글 144


공산당 없으면 유고 연방도 없다?!


§ 본 연재는 차후 진행될 RPG, “공산당 없으면 유고 연방도 없다?!“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프리퀄입니다.

§ 본작의 연재예상일은 빠르면 11월 말, 늦어도 12월 중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 프리퀄의 연재빈도는 부정기이며, 연재예정일보다 프리퀄 완결이 늦어지더라도 본작 연재를 우선시합니다.



12. 아프리카의 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압제를 물리치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영도 아래 아프리카의 중심으로 올라선 에티오피아 제국은 1970년대 들어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부터 무려 십수년을 끌었던 북부 지방의 가뭄, 여러 차례의 크고작은 유가 파동들, 서아프리카 대전쟁의 여파로 급증한 난민 등은 제국을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만들었죠. 1973년부터 이듬해인 1974년까지 이어진 경제붕괴 국면에서는 전 신민의 존경을 받‘던’ 셀라시에 황제 역시 버틸 수 없었고, 결국 이는 아만 미카엘 안돔 장군이 이끄는 임시군사행정위원회(데르그)의 쿠데타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왕가를 포함한) 대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몰수해 분배하고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를 입안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죠.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됐다면 좋았겠으나, 한 국가의 혼란은 이웃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는 법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동부 오가덴 지역의 소말리인들을 자국의 품으로 끌어오고 싶었던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 정권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내부 부족갈등과 여러 경제적 어려움들을 대소말리주의적 열망으로 억누르던 바레 대통령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만요.

 

하일레 마리암 멩기스투의 극좌 쿠데타가 소련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로 돌아간 1976년 봄,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아프리카의 뿔 지역은 지중해-인도양 수운을 틀어막을 절호의 요충지였고, 자기들끼리 마르크스주의니 개발우선주의니 왕정복고니 하며 유치한 병정놀이나 하던 에티오피아보다는 적어도 강군을 키워낼만한 저력을 가진 소말리아가 적절한 체스말로 보였을 터입니다. 소련,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보낸 지원군이 속속들이 도착했고, 소말리아는 오가덴 지역을 넘어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의 지척까지 군사를 밀어넣으며 안돔 장군에게 항복을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76년 9월 4일,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5개월만에 소말리아는 오가덴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획득할 수 있었죠.

소말리아-에티오피아 간 카타니아 조약은 아프리카에서 ‘국경선 신성의 원칙’이란 휴짓조각에 불과하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서아프리카 대전쟁 이후 UN과 강대국들의 주도로 대륙 서편의 국경선이 완전히 재편된 상황에서, 그러한 일이 ‘특수한 예외’라는 전제가 무너져내린 것이었죠. 아프리카 곳곳에서 “대아프리카주의” 내지는 “민족발흥주의“가 완벽하게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근현대‘는 너무나 압축된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3. 페르세폴리스


1978년 11월 9일, 주이란 미국 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전문에는 꽤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른바 ‘백색혁명’을 주도하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항암치료 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사실상 국정을 방기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정권이 곧 ‘끝장날’ 것이라는 이야기였죠. 주이란대사 윌리엄 설리번은 팔라비의 신변을 안전하게 인도받기 위해 주요 반대파인 시아 신정주의자 ‘전투적 성직자회’와 접근, 출구전략을 고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국무장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그리고 백악관 부수석 리처드 ‘딕’ 체니는 즉각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이란의 수상은 샤푸르 바크티아르라는 인물로, 국무부와 백악관은 그를 ‘지나치게 성급한 인물’, ‘미국의 방향성에 맞지 않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악관은 국왕에게 안전한 망명을 조건으로 퇴위를 종용하고, 군부를 이용해 바크티아르 수상을 실각시킴과 동시에 군부, 전문관료, 온건파 성직자로 구성된 친미 거국행정내각을 구성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물론 호메이니의 경우 마치 인도의 간디와 같은 ‘정신적 지도자’로 세운다는 조건도 함께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계획은 ‘일단’ 멋지게 먹혀들었습니다. 소련이 좌익 투데(Tudeh)당을 통해 이런저런 공작을 시도하는 동안 미국은 테헤란에 특사를 파견해 호메이니의 측근 모하마드 베헤슈티와 사항을 조율했습니다. 또한 바크티아르를 내쫓고 친미 성향의 외무장관이던 카림 산자비를 새 총리로 세우는 데에도 성공했죠. 프랑스에 체류하던 호메이니의 귀국을 은밀하게 방해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데까지 멋지게 성공한 미 국무부와 CIA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프랑스도, 심지어 소련마저도 한 인간의 정서적 불안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퇴위 조건으로 바크티아르의 수상직 유지를 내걸었던 팔라비는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사데그 총리를 끌어내렸을 때처럼, 자신의 비밀경찰(SAVAK)과 군부 내 최측근들을 이용해 ‘거국행정내각’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이었죠. 작은 차이가 있다면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해 그 어떤 외부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정서불안에 시달리던 샤에게 그건 사소한 불편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이 고집쟁이 국왕을 가택연금하고 그의 아들을 강제로 옹립해 계획을 속행시키는 플랜-B를 만지작거리던 1979년 2월, 프랑스 내무부는 ”더 이상 호메이니를 붙잡아둘 명분이 없다“면서 그의 여권과 출국비자를 발급해주었습니다. 이로써 호메이니가 도착하기 전에 판을 깔아두어 그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려는 계획은 크게 틀어지게 되었죠. 더 큰 문제는 팔라비 국왕이 심복들을 동원해 백주대낮에 호메이니를 귀국장에서 암살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물론 팔라비 본인도 군부의 손에 암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거국행정내각은 그날로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란은 내전의 불길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내전은 소련이 후원하는 투데당 좌익반군, 미국이 후원하는 이란 제국 구국군사위원회, 이슬람 혁명군의 삼파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남동부의 발루치스탄 해방전선, 북서부의 쿠르드 해방군, 그리고 투데당의 주력이자 사실상 소련의 직속병력이나 다름없는 아제리인 ‘민병대’의 존재까지 덧붙여져 이란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죠. 유가는 폭등하고, 세계 경제는 전후 최악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기초체력이 부족한 국가들이 그 타격을 온몸으로 껴안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죠..

14. 경제 재앙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은 전임 민주당 매카시 행정부의 경제 실패와 외교 실패를 강력히 비판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집권했습니다. 특히 1973년의 금태환 정지선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미국이 동맹국들의 불신을 받게 된 사건에 대해서는 “경제적 재앙”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죠. 그러나 이란 내전으로 촉발된 유례없는 고유가 상황은 세계 경제에 불을 질러놓기 충분했습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오는 율례없는 상황 속에서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 정적들의 공격이 이어졌죠.

 

레이건에게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중동발 경제위기의 타격을 가장 심하게 받은 쪽이 다름아닌 동구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심지어 유고슬라비아까지 서구권과의 차관거래로 시장사회주의 산업개발에 힘쓰고 있는 상황에서 불경기가 닥치자 투자은행과 펀드들은 일제히 만기연장을 거부했고, 이는 그대로 동구권 국가들을 빚더미에앉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거대한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어느정도 버티는 모양새였으나, 그들 역시 사정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레이건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는 곧바로 재무장관에 통화주의자 돈 리건을 임명하고 고강도 긴축에 나서는 한편 어떻게든 경제위기의 파장을 동구권으로 떠넘기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공동체(EC)와 일본에게 환율조정을 종용하여 무역수지 개선을 꾀했고, 소위 ‘대항군 전략’을 채택해 소련에게 반하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방책을 취했죠. 그 수혜자는 이스라엘국의 이르군 반군부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과의 유착관계가 강하게 의심되는)아프리카의 대짐바브웨 연방 정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습니다.

소련의 포드고르니 총서기 역시 바보는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이 상황에 대응하고자 했습니다. 2차 신경제정책 10년의 성과는 빈말이 아니기도 했고, 동구권은 어쨌든간에 소련이 먹여살려야 할 ‘식구’였으니 말입니다. 다만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포드고르니-코시긴-키릴렌코의 트로이카는 고령으로 인해 정력적인 활동이 어려웠고,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 등 중앙위원회의 다른 주요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점을 인식한 고위간부들은 그리고리 로마노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니콜라이 리즈코프, 빅토르 체브리코프, 예고르 리가초프 등 젊은 정치인들을 대거 등용해 서로 경쟁케 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추구하는 대내외 노선은 꽤나 차이가 있기에, 불과 얼마 뒤로 예정된 당대회에서 누가 후계자로 인정받게 될지가 앞으로의 행보를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은 자명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대준동, 아랍민족주의의 성공, ’가지지 못한 자들의 연대‘ 움직임 등은 제3세계 운동에 무한한 잠재력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외부적 충격은 동서 양 진영으로 하여금 ’자기 나와바리‘만을 챙기게 만들었고, 그 사이에서 ’편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편을 확실히 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지, 아니면 인고의 시간을 견뎌 화려한 부상을 노릴지는 그들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 Prelude, Fin.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11.11 돈이 곧 진리 위치상 아닌듯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11 돈이 곧 진리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펠릭스 우부에푸아니 등이 주요 지도자로 있는 친프랑스 국가독점자본주의(즉 반공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아래 아프리카 소련(…)이 은크루마 등의 유지를 이은 진퉁 공산국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11.11 E.E.샤츠슈나이더 샹카라라고 보기엔 위치상으로 보이는 국호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샹카라라면 사회주의 성향일텐데 아래에 버젓이 공산국가가 따로 있으니 아닐거라 봤는데 역시나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2.11.11 E.E.샤츠슈나이더 부르키나파소가 있어서 상카라 각하께서 여기서도 꿈을 이루신 줄 알았더니...
  • 답댓글 작성자931117 | 작성시간 22.11.11 돈이 곧 진리 만약 상카라였다면 굳이 아래에 따로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을리가 없었으니까요.

    따로 있다는건 둘이 서로 다른 이념이라는 뜻이니까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