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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리얼 다큐! 금쪽같은 내 조선! - 02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1.01|조회수598 목록 댓글 1,450

 


 

05. 거대한 체스판

 

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일행들을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양의 업무들이었습니다. 귀국 직후부터 각종 관직에 등용되어 밤낮없이 갈리던 이들의 눈에서는 시커먼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신묘년(1891년) 8월, 일행들은 놀라운 소식을 접수했습니다. 제주도에 아라사 군선 4척이 무단 입항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막아내지 못한 것이야 조선 해군이 워낙 미약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사건을 일본 공사관에서 먼저 알려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국태공 이하응은 몹시 격노하여 즉각 대책 마련을 지시했습니다.

 

곧바로 어전 회의가 열렸습니다. 호머 헐버트에게 서양식 교습을 받은 젊은 군주 이준은 굳은 표정으로 대신들을 하나둘씩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러시아 군선에 맞서 신민을 보호할 방책은 무엇이오?” 가장 먼저 제시된 것은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과 접촉해보자”는 박태양의 의견이었습니다. 반면 이현 등은 “가능하면 자력으로 해결할 방책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군부대신 조희연을 비롯한 보국당의 보수파들 역시 이현의 제안에 찬동했습니다. 농상공부대신 김옥균은 그에 맞서 박태양을 두둔하며 이이제이의 방책을 제시했죠. 그러자 듣고만 있던 이하응이 나섰습니다. 김한립이 “러시아의 의도를 면밀히 알아보는 것이 먼저 아니냐”고 말한 것을 그대로 잡아챈 것입니다.

 

러시아의 의도는 영국의 거문도 철수를 이끌어내기 위한 무력시위였습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은 동양 삼국(특히 청)을 체스말로 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를 타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준은 즉각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초치했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베베르가 도착했습니다. 능숙한 외교관이자 친조선파 인사인 베베르는 모두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러시아 극동 총독 미하일 리하초프 공작이 황제의 허가를 받아 이 무력시위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리하초프 공작은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 등 극동 강경파들을 다량 기용해 만주 등에서 매우 공세적인 대전략을 기획하고 있었고, 영국 함대를 치우는 것은 그들의 당면 목표였던 것이죠.

 

따라서 베베르는 “영국, 러시아, 조선이 삼자회담을 통해 상호 철수를 약속하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평화로운 상호 철수가 실패한다면 조선 문제의 전권을 부여받은 베베르는 실각할 것이며, 그 후임자로는 리하초프 계열의 강경파가 올 것이라는 전언도 함께였죠. 그러나 독일에서 법학을 심도있게 공부한 김한립은 베베르의 주장의 허점을 간파해낼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거문도 조차계약은 적법한 것이었고, 따라서 러시아와 영국이 공동 철수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천 또한 “영국이 거절하면 우리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준은 내부협판 최신우와 외부협판 김영천에게 영국 및 프랑스 공사를 만나 그들의 의중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러시아와 최근 동맹협상을 논의 중인 프랑스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영국 역시 유럽의 세력균형이 크게 변동하는 지금 극동에서 큰 분란을 감당하기를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즉 러시아가 영국과의 공동 철수를 주장한다면 영국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죠. 아주 순조롭고 평화롭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수상했습니다. 경무청장으로 부임 중이던 이유하는 청국 및 일본군의 동향을 관찰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논의를 뒤집어놓았죠.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들, 그리고 청국 공사관의 경비병들이 거의 전쟁 직전과 같은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몹시 놀란 각료들은 즉각 그 이유를 알아보았고, 그 결과 영국의 철수가 청-일 양국의 충돌을 부를 확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문도의 영국 함대는 그 규모를 떠나 “세계 최고 열강 영국의 함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양 삼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누름돌 역할을 하고 있었고, 나가사키 수병 사건 등으로 청일관계가 극히 악화된 현 상황에서 함대가 빠진다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청과 일본이 결전을 벌인다면 그 장소는 중간에 끼인 조선이 될 것이었고, 따라서 조선은 어느 편을 들던 반강제적으로 참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의도와 영국의 현실이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상황에서 거문도에 영국 함대를 유지시킬 명분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하응은 “피를 흘리지 않는 방책이란 없다”는 말을 되뇌이며 각료들에게 ‘더욱 과감한 책략’을 내놓을 것을 주문했습니다. 첫 번째 책략은 김영천의 것으로, “양측의 함대를 인수하여 몸집을 불리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멸치보다는 송사리가, 졸보다는 캐스팅 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포가 더 낫지 않느냐는 말이었죠.

 

두 번째 책략은 이유하에게서 나왔습니다. 아예 본격적으로 베베르를 실각시키고 러시아 강경파들을 조선에 들여 러시아의 군병들을 주둔시키자는 안이었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으면서 그 누구보다 그러한 시도를 경계했던 그는 급격한 군비확장의 부작용을 이야기하면서 러시아에 의탁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의견은 일거 파장을 불러왔고, 각료들은 “저 제안을 진짜 실행하느니 차라리 (미덥지는 않지만) 김영천의 의견을 채택하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1891년 9월 1일 영국 전권공사 오코너와 러시아 전권공사 베베르 간의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하응 내각은 영국과 러시아에게 각각 함선 구매계약을 타전했습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영국에서 2400톤급 방호순양함 “채리엇(HMS Chariott)”을, 러시아에서 코르벳함 4척을 구매하는 안이 확정되었습니다. 상당히 큰 금액을 투자한 데다 경의선과 경부선 부설권을 영국에게 넘긴 조선이었지만, 각료들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이 미루어진 것입니다. 이로써 조선은 귀중한 시간을 벌었고, 일전에 나서기 전에 내부 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06. 의(義)로써 금수(禽獸) 국적(國賊)을 처단하리

 

조선 수군이 근대적 해군으로 정식 창설되는 데에는 만만찮은 대가가 수반되었습니다. 정부는 비용을 벌충하기 위해 애국공채를 발행했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수많은 농민들이 관아의 육모방망이에 애국심이 주입되어 ‘자발적’으로 국채를 구매했죠. 가뜩이나 경장 이후 저곡가정책과 (서구제 공산품 유입으로 인한)물가상승에 시달리던 향촌사회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고, 원망은 곧 원한이 되었습니다. 임진년(1882)년 봄 보은에서 열린 동학도들의 집회는 그 예고편이었습니다. 부총리대신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 대책 마련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은 일단 물러갔으나, 그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죠.

 

임진년(1892년) 8월, 이유하의 후임으로 경무청장에 보임된 장석주는 지방에서 짤막한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군의 '난병'들이 충청도 감영을 습격해 관찰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천안군수와 제천군수를 살해하고 그곳 감영의 병사들 역시 해쳤습니다. 경무청장의 보고를 받은 내부대신 김옥균은 자연스레 이를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동학도들의 소동'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내부대신 김옥균과 협판 김한립 등이 대책을 고심하던 그 때, 궁내부 대신 김가진이 조선국왕 이준의 윤허를 얻어 '누군가 성상께 보낸 밀서'를 공개했습니다. 밀서는 다름아닌 충청도의 향반이자 여러 차례의 척화 상소운동에 참여했던 유인석이 보낸 것이었죠. 유인석은 자신이 충청도 관찰사를 비롯한 '부패 지방관'들을 처단했으며 그 이유는 애국공채 발행 과정에서 재물을 착복하고 서양 오랑캐들에게 조선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이하응 정권을 조선의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지목하며 국왕이 친히 이들을 몰아내어 법도를 바로 세우기 전까지 '의병'활동을 지속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충청도 각지에서 지방관들이 연이어 암살되는 사건이 터지자, '거의 바로' 한 통의 포고문이 날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보은에서 집회를 벌였던 동학당 북접이 혼란을 틈타 관아를 습격하고 공주에서 궐기를 선포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이들을 진압하려다 실패한 감영 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은 물경 1만명이 넘는 인원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는 유인석이 이끄는 소위 '창의군'을 합친 규모이며, 놀랍게도 이들은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렇듯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자, 이하응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부총리대신 어윤중은 통제권한을 내부에서 육군부로 이관하고 육군대신 조희연을 평난사로 임명해 사태를 진압하게 했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본 결과, 조희연과 일행들은 다음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1. 창의군과 동학 북접이 협력하고 있는 것은 '일단' 사실이나, 그 '협력'이라는 것은 높게 쳐야 일시적 협력, 냉정하게는 공동의 적인 이하응 정권을 타도하기 전까지 서로 불가침을 맹약한 것에 불과함.

2. 동학 남접은 이 봉기에 아직 호응하지 않고 있음. 남접을 이끄는 인물은 러시아 유학파 손병희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북접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동학의 제2대 교주'로 여겨지는' 최시형과 결별했다고 전해짐.

3. 동학 북접은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통한 이상적 목가사회 건설을, 남접은 민중 계몽을 통한 농본 대동사회 건설을 주장함. 즉, 추구하는 이념이 매우 상이함.

 

프랑스 유학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이자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이유하는 러시아에서 농본사회주의 이념을 배워온 손병희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 그리고 직감을 느꼈습니다.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차르마저 폭탄과 총으로 암살하는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들이었지만, 조선 정부에는 그러한 사정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손병희를 그저 “후학을 양성하러 초야로 돌아간 선비” 정도로 평가하던 조정은 손병희를 만나 남접의 합류를 막겠다던 이유하를 아무 말 없이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손병희는 북접과 창의군의 봉기에 참여할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구시대로의 회귀를 외치는 그들이 조선 인민의 생활 증진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유하의 ‘관선 의회 창설’ 제안은 따라서 사실상 두 반체제분자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자유당 소속의 법부 협판 서재필이 이 아이디어에 홀랑 속아넘어가며 노농계급을 대표하는 ‘계급정당’ 신민당(新民黨)이 관선 중추원의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동안 조정에 있던 관료들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동학 북접과 협상하고 유인석의 창의군을 진압하여 파장을 최소화하는 방책을 택했습니다. 최신우의 공작으로 창의군 내부에 신분차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자 양반, 평민 출신 지휘관들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이는 총대장 유인석이 무단으로 평민 지휘관 한명을 처단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동학 북접은 창의군과의 연대를 취소했고, 정부에 폐정개혁안 6조 수리를 협상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내부 협판 김한립은 탁지부의 이현, 육군부의 박태양 등과 논의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고 탐관오리와 악덕 지주를 처벌하며 노비제를 완전 폐지하고 미곡수매제, 환곡이율 상한제 도입을 통해 농촌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해주기로 했습니다. 내부대신 김옥균은 이를 실행할 방법으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감영을 경무청 휘하에 배속시키고 근대적 공소기관(즉, 검찰)을 창설해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보국당과 자유당의 타협으로 경무청이 경찰부로 독립해 대신급 기관으로 자리잡았고, 이 ‘비대한 내부무력기관’은 지방에 대한 대규모 수사를 실시했습니다. 물론 초대 경찰부 대신 이상재는 온건한 인물이었기에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유하가 했던 말처럼 “칼을 안쪽으로 겨누는 무력집단은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었습니다.

 

아무튼 동학 북접이 봉기를 멈추자 창의군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지방군인 진위대가 이들을 철저히 진압하며 조선은 또 다시 위기를 넘겼습니다. 유인석은 압송되어 총살되었고, 많은 지휘관들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죠. 조선은 외적에 대항하기 전에 천만다행으로 내부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밖으로 그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07. 동아대전

 

대청제국과 일본 제국의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모든 곳에서 전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죠. 조선에 있는 일본 공사관과 청 상무위원부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조선 조정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각각 천진 조선상무위원과 주일본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김영천과 이유하는 외부 협판 최신우와 함께 조사에 나섰습니다.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은 의외로 거리낌없이 질문들에 답변해주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예방전쟁안은 이홍장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젊은 개혁관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청류파’의 견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청의 사실상 최고권력자인 서태후는 이들의 의견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홍장은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서태후가 쥐락펴락하고 있는 대청제국은 조선의 신종(臣從)을 바라고 있었기에, 이홍장이 약속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선의 명목적 복종, 실질적 자주를 보장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이 일본과 연합했다가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이는 조선의 멸국을 의미한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습니다. 최신우는 청에 대한 불쾌감과 함께, 김영천은 한숨과 함께 천진항을 나섰습니다.

 

일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는 주일공사 이유하와 외부 협판 최신우의 군항, 병영, 관청 순방을 직접 수행하며 조선과의 동맹을 타전했고, 조선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 상당한 대가를 제시했습니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순조로운(???) 개화정책을 고평가하여 반드시 조선을 친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 내각은 전력으로 조선을 꼬드겼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쪽에 베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전체적인 전쟁의 판세는 해군간의 함대전에서 결정될 확률이 높았고, 일본 해군이 청 북양함대에 비해 훈련도가 월등하고 내실 또한 탄탄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청과의 연합을 주장한 김영천, 그리고 “먼저 침공하는 쪽에 맞서 그 상대국과 연합하겠다고 공언하는” 중립국안을 주장한 이현이 있었으나, 중론은 일본과의 연합을 선택했습니다. 1893년 1월 21일 일본국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는 경복궁에 입궐하여 조선국왕으로부터 일본과의 연합에 대한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그로부터 5일 뒤인 26일 일본국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가 한성에 도착해 정식으로 “대조선대일본군사원조조약”을 조인했습니다. 이는 조선과 일본 간의 한시적 공수동맹을 골자로 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부산항과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조선군 역시 역량을 총동원해 일전을 준비했으며, 평양에 합동참모본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2월 17일, 압록강변의 청군이 국경무역소 10개소를 장악하고 그곳을 경비하는 조선군 진위대를 무참히 도륙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육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제1군과 오야마 이와오가 지휘하는 제2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조선군 참모들과 함께 평안도를 돌파해 오는 청군 병력 35,000명을 요격할 방도를 고심했고, ‘홈 그라운드의 이점’과 철저한 준비성을 무기로 일본군 장성들을 설득한 조선군이 일본 제1군 3사단(가쓰라 다로)과 함께 우익을 맡아 우회기동을 통한 포위섬멸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통렬한 성공으로, 청군의 선발대는 그대로 섬멸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포로 학대행위와 조선군의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우가 외신에 알려지는 일이 있었고, 청군 탈영병들 중 일부가 조선에 정착하는 소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압록강변에 다다른 육군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진격하라는 연합참모부의 지시로 대기하는 동안, 조일 연합함대는 청 북양함대를 격파할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일본 해군 총사령관 이토 스케유키는 북양함대의 주력인 전함 정원과 진원의 위력을 고평가하고 있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유리한 환경에서 함대전을 벌일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결국 방법은 돌고 돌아 육군과의 협조였는데, 문제는 일본에서 육해군 간의 긴밀한 공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육군의 독단적 진격을 유도해 여순항의 청 함대와 위해위의 함대를 각개격파한다는 방안이 채택되었고, 이는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최신우의 공작이 성공하며 조선-일본 육군은 해군의 지원 없이 압록강을 넘어 봉천과 요동 방면으로 진격했고, 이는 상당한 피해를 낳았지만 결국 성공했습니다. 이홍장이 양성한 북양군(또는 회군淮軍) 주력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여순이 일본 육군 제2군의 직접적 위협을 받자 여순항에 주둔한 북양 분함대는 위해위의 본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기다리던 조일 연합함대는 위해위 앞바다에서 본대를 만나 각개격파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해전의 역사가 다시 쓰였습니다.

 

3월 11일, 동양 최강의 함대 북양함대는 야음을 틈타 미끼용으로 접근한 조선 해군 어뢰정의 기습 한 방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800톤도 되지 않는 어뢰정은 무려 7400톤급의 기함 정원을 격침시켰고, 지휘부가 그대로 소멸한 북양함대는 일방적인 포격을 맞으며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이후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 육군 제2군이 승리하면서 여순의 분함대마저 철저히 파괴되는 결말을 맞았고, 이는 청의 육해군 주력이 모두 궤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죠.

 

1893년 4월 28일, 청 조정은 정식으로 강화를 청했습니다. “조선에 감국(監國)을 보내 사대의 예를 다하게 하고 일본을 정벌해 무릎꿇리자”던 청류파들과 그들이 후원하던 변법유신파들은 새로이 서태후의 친위군으로 떠오른 상군(湘軍)에 의해 숙청당했고, 이는 양무운동의 동력이 상실되어가는 상황에서 청국의 개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류파와 급진개혁론자들이 숙청되자 광서제는 아이신기오로 이신(공친왕 혁흔)을 총리대신으로, 이홍장을 각국통상교섭흠차대신(외무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렇게 이홍장은 패전처리투수가 되어 일본과의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되었죠.

 

불과 세 달만에 결정적 승리를 거머쥔 일본 제국은 청이 항복의사를 전달한 뒤에도 근위사단들을 보내 타이완을 점령하고 회군 잔여병력들을 토벌하는 등 비우호적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홍장에게 1) 천진, 대고, 산해관의 통제권 이양, 2) 관외 청군의 완전한 무장해제, 3) 상기 3개소의 무기 및 보급물자 관리권 이양, 4) 타이완 민주국 승인의 4개 조항이 수리된 후에야 종전협상에 나가겠다는 강짜를 부렸습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강경파들을 달래고 달랜 끝에 가고시마에서 평화협상을 협상할 수 있었고, 전쟁은 그제서야 끝났습니다.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

제2조. 청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의 주권 및 해당 지방에 있는 모든 성루, 무기 공장 및 관청이 소유한 일체의 물건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

제3조. 청은 압록강변 무역소의 불법 공격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압록강 양안의 조선인 거주지역에 있는 모든 영토와 관리 권한을 영원히 조선국에 양도한다. 또한 의주, 단동 등 황해에 인접한 영역의 경우 청의 주권을 인정하되 북안 50리에서 조선국의 관리권한을 승인한다.

제4조. 아직 획정되지 않은 백두산 이동의 청-조선 간 국경을 토문강을 기준으로 확정한다.

제5조.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3천만 파운드를 일본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6개월 이내에 1천만 파운드, 12개월 이내에 또 1천만 파운드, 잔액은 6년 동안 부세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5%로 한다.

제6조.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1천 2백만 파운드를 조선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12개월 이내에 완납하여야 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7%로 한다. 또한 청은 배상함으로 순양함 ‘건청’, ‘숭제’, 코르벳함 (생략)을 즉시 조선국에게 양도한다.

제7조. 청·일, 청·조선 양국 간의 기존의 조약들은 이번 전쟁에 의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양국의 새로운 통상 조약은 청과 서양 제국 간의 조약을 견본으로 한다.

(이하 생략)

 

그렇게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았고, 전비로 소모한 만큼을 제하고서도 기존 정부예산의 10배가 넘는 배상금을 손에 쥐었습니다. 또한 조선이 “별 볼 일 없는 땅”으로 여겨지던 간도 지역을 요구한 것은 꽤 좋은 선택으로 판명되었는데,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들이 일본의 요동 획득에 어깃장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무력하게 요동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하는 수없이 다시 청국과 협상해 청도항에 대한 조차권을 받아냈고, 이미 비준된 조약을 다시 수정하는 행위는 한족 민중들에게 엄청난 굴욕으로 여겨졌습니다.

 

일본의 여론 역시 곧이어 매우 시끄러워졌습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요동에서 쫓아낸 러시아가 곧바로 청 조정을 압박해 동청철도 및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여순항을 조차해 ‘포트 아르투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광폭 행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조선과 일본을 끌어들여 극동 삼각동맹을 체결하는 안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조선 역시 외교전략을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화파 베베르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고 극동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알렉세이 슈페이에르가 신임 공사로 부임하면서 그러한 고민은 더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4년 7월 20일 조선국왕 이준은 원구단에 제사를 올리고 조선이 황제국임을 선언했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개칭되었고, 이에 따라 이듬해 한청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한반도계 국가와 대륙계 국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역사적인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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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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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23.01.06 쓰고보니 천-하 듀오가 좀더 가슴이 웅장한 기분이네요. 하-천 듀오는 뭔가 더 유하지만 하찮은(..) 느낌이고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3.01.06 통장 사실 이유하가 개그를 좀 하고 다녔다면 분위기를 얼리는 영-하 콤비도 가능했을지도(?)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3.01.06 dear0904 한번 하긴 했죠 밖이 위험하다로(...)
  • 답댓글 작성자통장 | 작성시간 23.01.06 dear0904 ???: 그리고 여러분 중 대다수가 제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도요.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3.01.06 렌지파일 지나보니 둘 다 위험했던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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