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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시즌2]죽고 싶지만 공화국은 하고 싶어 - 02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1.26|조회수535 목록 댓글 1,332

 

 


 

 

20. 혁명의 오른쪽 날개

 

1918년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전년도 봄 경덕제 이준의 장례식 때까지만 해도 구심점 없이 표류하던 국내 공화주의 반체제 세력은 '민혁(정부)'과 '조혁(당)', '혁명군(군)', '독립노총(대중조직)'이라는 4대 요소를 갖추며 성장했습니다. 동시베리아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민혁과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인민공화국이 다시 극동 영토를 되찾았고, 이들과의 양해각서로 아무르 강 서안 북만주 영역을 해외 거점으로 유지할 수 있었죠. 민혁이라는 이름이 한국 국내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몇몇 사회단체와 정치단체들이 제휴를 요청해왔습니다.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勤友會), 백정 인권운동단체인 형평사(衡平社) 등이 조혁 하부단체로 가맹했죠.

 

북만주 본부에 다시 모인 일행들은 그간 밀린 안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임시당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동휘 의장과 김구 부의장이 개회를 선포했죠. 첫 안건은 '어딘가'에서 보내온 제휴 제안이었습니다. '녹의사', '족청' 등으로도 불리는 부여민족청년단에서 민혁의 "공화주의적 사회변혁"에 동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족청은 1916년 김좌진이 창설한 우익 성향의 청년조직인데, 일반적인 우익 조직과 달리 정부 타도와 국가 전복을 지향한다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여 프롤레타리아 민족"을 대표하는 전위 혁명가들이 전 민중을 혁명전사화하여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법복귀족들(즉 현재 정부)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좌우익을 막론한 모든 혁명지사들의 대동단결을 당론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동휘 등 정통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김구와 같은 인민주의자들마저 약간의 난색을 표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할 경우의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고, 정부가 이들을 용병 삼아 혁명세력에 대한 총공세에 나설 경우 민혁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족청이 원래 박용만의 황국단체와 그 청년조직에서 발원했고, 황국단체는 사실상 국민당의 하부조직이며, 국민당은 현재 입헌자유당 보수파들과 연대 중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가능성은 상당히 현실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침 족청의 ‘청년 트로이카(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중 하나인 조병옥이 조혁의 임시당대회에 파견된 상태였기에, 논의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족청과 연대하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반대의견이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 유효하지 못한 손패이더라도 적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아주 곤란해질테니, 적당히 묶어두자는 의견도 많이 나왔죠. 무엇보다, 이들은 행동강령만 가졌을 뿐 사상적인 완성도가 너무 떨어졌습니다. 한 마디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심지어 군 내부 극우파와의 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품에 마구 끌어안기도 어렵고 멀리 하기도 어려운, 말하자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존재였죠. 따라서 의장단 및 부장단 이하 지도부는 족청을 민혁에 받아들여 조혁과의 연립정부를 형성케 하고, 서서히 사상적 동화를 도모하는 방안에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당원투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세를 뒤집었습니다. 족청단장 김좌진을 조혁 부의장에 추대하되 족청단원을 개인 자격으로 받아들여 손발을 잘라버리자는, 급진적인 제안이 채택되었죠. 우익 세계(?)에서 버림받아 단체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던 족청은 이 급진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입당한 족청계 당원들은 꽤 도움이 되는 뉴스를 물고 왔습니다. 첫째, 몽골에서 세묘노프 군벌과 돤치루이의 북양 안휘군벌이 곧 격돌한다는 정보였습니다. 러시아의 개입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세묘노프나 돤치루이가 몽골을 차지한다는 것은 한국 혁명세력에게 상당한 악조건이었죠. 둘째 정보는 이완용 내각이 곧 위수법을 발동해 동북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독립노총에 대한 총공세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아무리 잘 조직된 군사적 노동조합이라고 한들 ‘진짜 군대’에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죠.

 

우선 몽골 사태에 대한 개입여부는 군 통수권을 담당하는 조혁 중앙위원회에서 사실상의 만장일치로 확정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러시아군 및 몽골 적군과 접촉하여 적극 개입, ‘반동주의 몽골’의 탄생을 막는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정보인 노총 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매우 엇갈렸습니다. 총파업, 파괴공작, 암살 등 강대강으로 맞서자는 의견, 정부와 협상하자는 의견, 심지어는 투쟁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노총을 해산하고 지하조직화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죠. 조합주의(생디칼리슴) 세력의 팽창을 경계하던 마르크스주의자(중도공산주의)들은 표면적으로 정부와의 협상을 주장하면서도 내심 세 번째 옵션(노총 해산)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 그룹은 좌파공산주의 그룹 및 온건파 그룹을 배후에서 설득, “아무도 택하지 않을 것 같던” 노총 해산 옵션을 가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종합적으로, 민혁은 몽골 사태에 개입하여 러시아 및 몽골 적군과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최대한 신중론적인 입장을 취해 독립노총을 와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의 충돌을 피해는 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민혁 내에 대단한 논란을 몰고 왔습니다. 조합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완승이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21-1. 적과 동지

 

부여민족청년단(족청)과 독립노총의 해산 결정은 서로 길항작용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족청이 “공산주의 단체(...)” 민혁에 완전히 가담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정부는 좌익세력의 급격한 팽창을 경계해 작업을 서두르려 했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독립노총마저 갑자기 해산되면서 타겟이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물론 족청의 해산으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부, 군, 각종 사회단체 내 네트워크가 대부분 소실되는 피해가 있긴 했지만,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할 수 있었죠.

 

일행들은 노총 해산의 뒷수습 및 지하단체 조직을 위해 연길선을 타고 나진항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모여있던 구 독립노총 위원장 윤덕병과 노동자들은 격앙된 표정으로 임원들의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노총 해산 이후 기댈 데가 없어진 노동자들의 불안감은 매우 심해졌고, 사용자들에 의한 무차별 해고 및 사적제재로 인해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증언도 들려왔죠. 무엇보다도, 정부가 한국노총을 움직여 구 독립노총원들을 다시 흡수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행들은 일단 노동자들을 안심시켜 이들의 한국노총 재합류를 일단 중지시키고 지하조직 구성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랬어야 했죠.

 

조혁 내 조합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 김한립 전 내각수상의 딸이던 김혜정이 최가이를 고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조합주의의 갈등은 부장단 내에서도 매우 첨예하게 드러났죠. “전위당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마르크스주의자”, “인민의 배신자 최가이” 등 살벌한 선동이 이어졌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횡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던 박영화 역시 ‘날조된’ 회의록을 통해 조혁의 비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의사결정을 문제삼았습니다. 내용이 급진적이고 파격적일 뿐 의사결정 과정 자체는 민주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명백한 거짓이었죠.

 

노동자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곧바로 마르크스주의-온건파 연합의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노총 해산은 “피바람을 막기 위한 시급한 고육지책”이었으며, 그 모든 과정은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득이 이루어졌죠. 영윤과 공유남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한 덕에, 분위기는 다시 이들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이 민혁 자체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위조된 문서까지 동원해 동지를 물어뜯는 중상모략 집단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독립노총 출신 노동자들이 한국노총에 재가담했습니다. 물론 이는 이후 한국노총의 급격한 좌경화를 불러오게 되지만, 당장은 민혁에게 상당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정을 청취한 북만주 본부에서는 곧바로 김혜정과 박영화를 보직해임하고 사안의 일차적 해결을 부장단에게 맡겼습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부장단은 “김혜정 추방, 박영화 강등”이라는 결론을 의장단에 송부했습니다. 추방당한 김혜정을 살려둘 수 없었던 지도부는 내부 밀정감시조직인 한인애족단에게 김혜정의 암살을 지시했죠. 애족단원 김정파(사실은 그녀도 김한립의 사생아였습니다.)는 김혜정을 사살(사실은 자살에 가까웠죠.)한 뒤 모종의 사실을 알게 되어 괴로워했다고 전해집니다.

 

1919년 2월 2일, 김한립 전 내각수상의 영애 김혜정이 공화혁명의 영웅으로 순교했다는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한성 정계, 노동현장, 대중 여론 모두를 크게 뒤흔듭니다. 성명문에 의하면 김혜정은 ‘정부 또는 이를 추종하는 반동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조선 및 남만주 민중혁명위원회의 핵심 간부였죠. 이 소식은 일본에 있는 김한립, 그리고 한일 양국 정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대한제국 검찰은 전 내각수상 김한립에 대한 심층조사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일본제국 정부에 소환을 요청했고, 한국의 정국 안정을 원하는 일본 정부는 이 요청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김한립이 이에 순순히 따라줄 리가 없었죠. 한국 정부와 혁명세력 모두에게 적의를 품은 그는 독일로 망명해 한국 그 자체에 대한 복수계획에 돌입하기 이릅니다.

 


 

21-2. 적의 적은 곧 동지?

 

독립노총 사태가 민혁의 국내 조직영향력 대거 상실 및 조혁 내 조합주의 세력 소멸로 마무리된 1919년 3월, 족청 문제가 다시금 테이블 위로 떠올랐습니다. 기존 민혁/조혁 구성원의 3할이 넘는 세력을 대체 어떻게 융화시킬 지가 문제였죠. 심지어 족청계의 이데올로그로 여겨지던 김약수는 이유하의 초기 사상을 변용, 무차별 폭력혁명과 테러행위를 통한 혁명 가속을 주장하는 미치광이 아나키스트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걸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싸며 고민했습니다.

 

그 때, ‘이레귤러’ 윤야리가 나섰습니다. 사상 따위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그는 “사나이답게 해결하고 오겠다”며 술 한 궤짝을 들고 방을 나섰죠. 이는 마법의 시작이었습니다. 김좌진과 술자리를 가진 윤야리는 그와 의형제를 맺었고, 김좌진의 고민을 들어줬습니다.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내가 직접 키운 부하들을 저버려도 되는가?” 그러나 김좌진은 (윤야리가 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답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민을 위한 혁명이라면 그 형태를 문제삼을 수 없으며, 혁명에 투신하기로 했다면 그 위치를 문제삼을 수 없었습니다.

 

족청단이 대규모 연회 몇 차례 이후 완전히 동화되는 장면을 목격한 최가이(이진하)는 그 동안 믿어왔던 상식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래 나름의 사상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던 그녀는 모든 기획안을 화롯불에 던져버렸죠. 대신 족청 출신 당원들에게 지나친 노선대립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이들에게 온건 아나키스트들의 저작을 소개해주는 선에서 끝냈습니다. 이에 따라 족청계는 베카БК회(바쿠닌-크로포트킨 연구회)라는 아나키스트 계파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세력은 여전히 최대계파 자리를 유지했으나, 베카회의 등장은 좌파공산주의 세력에게 엄청난 무게추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자유지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치고 단합이 잘 되는 이는 없다시피했지만 말입니다...

 


 

22. 타타르의 멍에

 

1919년 9월, 안휘 군벌의 2인자 쉬수정(서수쟁)은 약 22,000명의 병력을 대동하고 몽골 출병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맞서 복드 칸의 병사 4,000명과 세묘노프의 젤레나우크라이나 기사단 병력 12,000명이 일전을 각오했습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자유사회주의 코뮌 연맹(러시아)에서도 개입을 결정하고 민혁과의 제휴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극동문제특별위원 유하 리(이유하)의 대표단, 담딘 수흐바타르의 몽골 적군, 그리고 극동군과 부랴트 자유지역 민병대가 당도했죠. 이상하게도 군 측 대표는 극동군 장교가 아닌 아나키스트 민병대의 사령관 “네스토르 칼란다리쉬빌리”였습니다.

 

조혁 및 민혁 군무부장으로서 파견된 윤야리는 자신의 협상 파트너인 영윤 재정부장이 노총 사건의 뒤처리를 하다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차였습니다. 자신감에 가득찬 윤야리는 수흐바타르와 칼란다리쉬빌리에게 “자신은 북만주의 군벌과 다름없는 몸이니, 몽골에게 보호비 명목의 자금을 받는 조건으로 전쟁을 조력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던졌습니다. 수흐바타르는 이를 큰 모욕으로 여겼으나 일단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죠. 그러나 캅카스의 도살자이자 악한이었던 칼란다리쉬빌리는 곧바로 권총을 꺼내들었고.. 윤야리는 재빨리 총을 뽑아 그를 쏘았습니다.

 

마침 범죄자 조직이나 다름없었던 부랴트 민병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러시아군은 기다렸다는 듯 우두머리를 잃은 민병대를 진압하고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이유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윤야리를 조곤조곤 설득했고, 더 이상 강경하게 나와봤자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 윤야리는 본부에서 ‘더 권한있는 이들’을 불러오는 데 동의했습니다. 본부에서 파견된 의장단은 러시아군 및 몽골 적군과 교섭해 ‘참전비용’을 지급받는 대가로 이들을 원조하는 데 합의할 수 있었죠.

 

마침 안휘군벌에게 대승을 거두고 그들의 정예병력을 몰살시킨 세묘노프의 기사단은 곧바로 연합적군의 공세를 맞았습니다. 기껏해야 비정규군에 불과했던 기사단은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적군의 공세를 이겨낼 수 없었죠. 세묘노프의 세력은 일소되었습니다. 복드 칸은 수흐바타르와 처이발상의 종용으로 퇴위를 선언했습니다. ‘톰페티 잠발 코칸다’라는, 제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가초의 시종이 제9대 젭툰담바 후툭투이자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고, 사실상의 사회주의 국가 몽골이 탄생했습니다.

 

몽골 전역에 참가하고 돌아온 민혁은 새로운 문제를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지급한 ‘참전비용’은 사실상 민혁이 사용 가능한 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는 민혁의 자금줄이 매우 위태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국내 조직력의 쇠퇴가 불러온 결과였죠.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는 선택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의장단은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23. 오아시스?

 

독립노총의 해산 및 조직 와해, 비밀 후원자 김한립의 망명, 위험을 느낀 다른 '후원자'들의 잠적, 김영천의 사재 고갈... 민혁의 규모와 인력은 날이 갈 수록 불어나지만 금고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혁명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자금 부족으로 다시 조직규모를 축소개편해야 할 지경이었죠. 높은 이상에 비해 처절하기 그지없는, 강도 귀족 자본주의를 깨는 데도 결국 돈이 필요한 이 더러운 현실. 당원대표들과 임원진들은 대책을 강구해보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혁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이 '국제당'에 가입한다면 혁명자금을 전폭 후원할 생각이 있다는 제안이었죠. 당장 돈에 쪼들리는 민혁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20년 4월, 세계 정세는 다시 한번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미-영-일-독 4개국 해군군축조약과 “중국 정치경제에 관한 8개국 조약”, “태평양 연안지역에 관한 4개국 조약”이 차례로 체결되며 한영일 삼각조약이 해체되고 이들의 국민정부 비호 또한 사라졌습니다. 대신 공련의 손을 잡은 국민정부는 자유지상적 사회주의 성향 고문단의 영향을 받아 급격히 좌경화의 길을 걸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사회주의 코뮌 연맹 최고소비에트는 유대인 노동총연맹(분트) 총서기이자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IWUSP) 제2서기이며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인 미하일 리베르를 보내 한국 내 혁명세력과의 연계를 꾀했습니다.

 

리베르는 혁명자금을 지원하고 조직고문 및 군사고문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의 인터내셔널 가입, 인민민주주의 원칙 고수 및 전체주의 배격 선언, 그리고 혁명 성공 이후 공련과의 방위동맹 체결을 제시했습니다. 확실히 이 자금은 당장 목마른 민혁에게 가뭄의 단비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국내정치에 개입해 국내 영향력을 재건하는 방법도 제기되었지만, 그 역시 일단 자금이 있어야 시도할 수 있는 선택지였습니다. 그러나 부장단은 공련발 자금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이른바 ‘혁명주권론’의 대두였죠. 국내에서 무차별 폭력투쟁(즉, 은행강도)을 통해 자금을 약탈하자는 과격한 제안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회의론자들의 의심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혁명동지를 위한 순수한 열정? 별 더러운 상황을 다 겪은 지도부는 그런 꿈같은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한인사회당계와 전로공산당계를 비롯한 ‘사회주의’ 계파들이 회의론을 하나하나 반박하는 가운데, 리베르는 “전체주의 배격선언을 제외한 혁명의 세부사항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공련측의 신뢰도를 크게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었죠. 결국 일부 온건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련과의 연합 안건은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습니다. 몇 달 뒤 밝혀진 사실이지만, “모스크바에서 한국 혁명을 입맛에 맞게 조종하려 한다”는 의심은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일부 진실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중도) 파벌의 영수 블라디미르 레닌은 오히려 한국 혁명의 급진성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사빈코프, 트로츠키 등 ‘사회주의의 탈을 쓴 전제주의자들’의 전철을 밟을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죠.

 

아무튼, 민혁은 공련과 인터내셔널의 자금을 받아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불과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건전한 반동주의자들”, 즉 자유민주당을 위시한 현상유지적 대안세력의 득세를 막아야 한다는 필요가 제기되었죠. 비슷한 시기 미국발 전후불황사태로 전세계 경기가 급격한 침체를 맞으면서 민정당-국민당 내각의 승리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원내에 발판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특히 대전쟁 직전 러시아에서 리하초프 대공이 암살당하고 재무장관에 취임한 표트르 스톨리핀이 불과 1년여만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혁명세력을 약화시켰는지를 감안한다면, 더욱 유능하고 포용적이지만 동시에 반동적인 대안세력의 집권은 혁명의 대의에 그 무엇보다 해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부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의 베카회 아나키스트들을 제외한) 모든 계파가 1920년 9월 말로 예정된 총선거 개입에 찬성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방법론이었죠. 온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세력과의 인민전선 창설을, 좌파에서는 독자출마전략을, 그리고 중도파(마르크스주의)와 자코뱅(흑풍회)에서는 지하투쟁을 통한 선거 무산전략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토론을 거쳐 적대적 독자출마론, 우호적 독자출마론, 그리고 인민전선론으로 압축되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좌파에서 중도파와 자코뱅 과격파의 이론을 기각하고 나섰습니다. 당내 최대세력인 좌파가 온건파를 지지하자 표심은 인민전선론으로 쏠렸고, 그렇게 민혁은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는 ‘선거혁명’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24. House of Cards

 

1920년 5월 말, 선거를 네 달 가량 앞둔 시점. 민정당-국민당 우익연립정권은 미국발 불황을 직격으로 얻어맞아 그로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에 제1야당인 자유민주당은 기세를 타고 세력을 팽창했죠. 자민당의 이시영 총재는 ‘인식교체론’을 내세우면서 이번에야말로 압도적인 차이로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내세웠습니다. 우익연립정권의 패배가 거의 확실해지면서, 민혁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버린’ 좌익 노동자들(구 독립노총원들은 한국노총 재가입 이후 그곳을 사실상 적화시킨 상태였습니다.)에게 손을 내밀어서라도 어떻게든 혁신세력을 재규합해야 했죠.

 

각각 한국노총 지도부와 농협 지도부가 장악한 노동당과 농민당이 민혁의 첫 타겟이었습니다. 민혁은 공련발 자금으로 ‘신한민권당(약칭 ‘신민당’)’이라는 가설정당을 세워 옛 신민당의 브랜드를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어떠한 강령도 명시적으로 공개하지 않았기에 국가보안법 역시 피해갈 수 있었죠. 물론 국보법이라는 게 원래 엿장수 마음대로인 법률인 점을 고려한다면 어떻게든 탄압이 가능했겠지만, 중정 역시 침몰하는 배에 붙어있기는 싫었는지 이 폭풍을 방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적극적인 지도부 흔들기 공작으로 농민당과 노동당을 합류시키는 데 성공한 ‘신 신민당’은 자유민주당에도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혁신세력의 급성장을 목격한 자민당 신파(조만식, 이승만 등)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오히려 민정당과의 대연정을 찬성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상태였죠. 구 민주당, 즉 자민당 구파(안창호, 이회영, 이시영 등)는 혁신세력과의 연합에 호의적이었지만 말입니다. 보통이라면 구파를 끌어들이고 신파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했겠지만, 혁명전사들의 판단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이승만이 우파 공화주의자라는 정보를 입수한 이들은 교묘하게 “민주공화제”, “대통령제”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일부러 유출시켜 이승만의 구 사민련계를 꾀어냈죠. 그렇게 자민당 신파 또한 인민전선, 소위 “제2민주주의민족전선(제2민전)”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쉽게쉽게 풀린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극좌 아나키즘부터 우익 자유주의에 이르는 ‘엄청난’ 이념 스펙트럼이 일단 문제였죠. 이들이 공화주의라는 교집합에 동의한 것부터가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경제정책, 민족정책, 사회정책 등 어디 하나 들어맞는 것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신민당 내에서도 노선을 확정짓지 못했는데, 이는 한국노총과 농협, 그리고 자유민주당 계파들에서도 의견을 최종 유보하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위기였습니다. 공화주의와 농협 구조개혁 등 최소한의 부분에서만 합의하여 선거전에 나선다면 인물론에서 압도적인 자유민주당 측이 모든 의제를 가져갈 것이 뻔했습니다. 이에 윤야리와 이진하(어느 순간부터 가명이 의미없어졌습니다.)는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당내 자코뱅들이나 주장할 법한 계획을 세우고 승인받아 실행했습니다. 이정 김영천 선생이 살해당한 것처럼, 이번에는 우남 이승만 전 수상을 암살하고 정부의 공작으로 위장하는 방안이었죠.

 

그렇게 1920년 8월 11일, 제2민전 내 최고 유명인사이자 사실상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이승만은 유세 중 괴한의 총격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까지 참여하는 야당연합의 출현은 군부 내 극우주의자들을 자극했고, 이승만이 암살당하기 며칠 전 실제로 “구국의 결단” 운운하는 소리를 해댔습니다. 심지어 일부 우익 정치인들과 결탁해 의회를 해산하고 이완용을 의정상서로 옹립하며 야당뿐 아니라 여당 일부 ‘좌익 프락치’들까지 제거하거나 체포할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죠. “현역 군인이 이승만 전 수상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자, 민혁 지도부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을 “혁명의 호기”라고 생각한 이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의아니게도) 실제 계획과 유사한 쿠데타 기획문을 대중에 살포했습니다. 이는 실제 군부 극우파에게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심어주었죠. 그렇게 8월 14일, 소속 부대마크를 검은 먹으로 칠한 의문의 군인들이 의사당 등 국가주요시설을 점거하고 군사임시정부를 선포하는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제2민전에 참여한 자유민주당 주요 요인들이 전부 죽거나(이승만) 억류된 상황에서, 절묘하게도 운신이 그나마 자유로운 것은 신민당, 즉 민혁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혁명의 때가 무르익은 것이었죠. 혁명은 과연 임박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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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3.02.01 E.E.샤츠슈나이더 ㄷㄷㄷ... 하긴, 파벌이 나뉘면 그거때문에라도 심해지죠. 근데 유로파는 공식인 뇌절을(...)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 작성시간 23.02.01 렌지파일 ... 햐... 대단하네요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 작성시간 23.02.01 E.E.샤츠슈나이더 거기다 더해 '반핵운동은 하면 안돼지!'도 있죠(......)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 작성시간 23.02.01 E.E.샤츠슈나이더 아 뜨노요? ㅋ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2.01 E.E.샤츠슈나이더 협동주의 프랑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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