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RPG]내 조국에 소련은 없다 - 01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작성시간23.04.15|조회수601 목록 댓글 1,053

 


 

01. 역사를 바꾼 일주일

 

1916년 말부터 급속히 고양되었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파업운동은 1917년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결국 1917년 2월 23일 국제여성의 날을 계기로 대중혁명으로 폭발했습니다. 이날 아침 페트로그라드 비보르그 구의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공장 집회를 열어 파업을 결의한 후 거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시위대의 주된 구호는 “빵”이었고, 전쟁 때문에 고통 받던 다른 주민들이 동조하면서 그 규모는 점점 커져만 캈죠. 2월 25일이 되자 시위는 무려 30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총파업으로 바뀌었습니다. 넵스키 대로를 가득 메운 노동자들은 "전쟁 즉각 중지", "차르 전제정 타도"와 같은 '정치적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파악한 국가두마의 '진보 블록(10월당 좌파, 진보당, 입헌민주당, 트루도비키 등)'은 나름의 대책을 제시했습니다. 전선 보급에 치중된 식량배급을 일부 후방보급용으로 돌리고, 내각이 자진 총사퇴하여 인민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총사령부에서 병력을 지휘하던 차르는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 세르게이 하발로프에게 상황보고를 일임했고, 보수적 군인이었던 하발로프는 이 사태가 오직 "식량 부족"에 근거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말았습니다. 내각에는 우선 소요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하발로프는 즉각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한 근위연대 병력을 동원해 곳곳에서 무력진압을 이어나갔죠.

무력진압은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2월 25일 새벽동안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검거되었고, 거리의 노동자들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고 흩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이에 정부 내에서는 강경노선이 우위를 점했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에 계엄령 선포, 국가두마 해산, 식량배급업무 이전조치 취소 등 몹시 강경한 조치들이 차르의 재가를 위해 사령부로 보내졌고, 차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를 승인했습니다. 경악한 진보블록 의원들은 급한대로 '정당대표 임시회의'를 구성해 대책을 논의했고, 잠시 후퇴했던 노동자들과 일부 탈영한 병사들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두마 의장 로잔코와 진보블록 우파(10월당, 진보당) 지도자들은 바쁘게 뛰어다녔습니다. 발포를 명령한 하발로프 중장에게는 살수차 등 비살상진압으로 수위를 낮출 것을 요구(물론 날씨를 고려하면 살수차 역시 충분히 치명적이긴 했습니다만)했고, 총리대신 니콜라이 골리친 공에게 노동자들의 소요를 진정시킬 방책을 주문했으며, 총사령부의 차르 니콜라이에게는 사태의 심각성을 시사하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차르스코예셀로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고, 골리친 총리 이하 내각과 하발로프 중장은 로잔코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26일 밤, 로잔코는 국가두마의 기능을 정지하고 수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전문을 받아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날, 2월 27일이 밝았습니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제3근위보병사단 볼히니야 근위연대는 이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명령을 받았고, 볼히니야 연대 예하 교육중대의 선임하사관 빅토르 이바노비치 세레브랴코프 소위보 역시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중대장이 당직사관실 문을 걸어잠그고 덜덜 떠는 추태를 보여주는 상황에서 병사들은 "이런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빅토르에게 애원하기 시작했고, 세레브랴코프 소위보는 우선 영내대기를 지시했습니다.

 

한편 구 볼셰비키, 현 사회혁명당 소속의 쿠반 카자크 출신 직업혁명가 알렉산드르 스테파노비치 체슬라프는 우연히 볼히니야 연대의 주둔지 앞을 지나가다 무언가 결의를 다지는 교육중대원과 세레브랴코프 소위보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체슬라프가 이끌던 수십명 정도의 노동자들은 군인들을 보고 도망치려 했지만, 체슬라프는 잠시 기다려보자는 수신호를 전달했죠. 노동자들을 인지한 교육중대원들이 급하게 총기를 다시 잡으려 할 때, 세레브랴코프 소위보와 혁명가 체슬라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습니다.

 

아직 무력봉기가 본격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체슬라프와 세레브랴코프는 서로 피아를 식별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대들은 인민의 편인가, 폭군의 편인가!” 체슬라프가 외쳤고, 세레브랴코프는 “그대들은 차르의 노동자인가, 아니면 러시아의 노동자인가!”라고 반문했죠. 이 문답은 두 사람이 혁명동지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들의 가치관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둘의 대립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반대편 골목 어귀에서 1개 소대 규모의 자전거 보병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체슬라프 및 노동자들과 교전했고, 세레브랴코프는 잠깐의 고민 끝에 혁명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대봉기가 일어나고 있다면 필시 어디엔가 본부 비슷한 장소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 세레브랴코프는 큰길에서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가 이끄는 제1근위사단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병력을 조우해 그들의 인도를 따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차려진 타브리드 궁으로 향했습니다.

 

시위가 혁명으로 변하고 있을 오전 11시 무렵, 페트로그라드 제국대학 법과대 건물의 한 대형 강의실에 청년 백수십명이 모여있습니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화주의자 학생동맹'이라는 운동권 조직의 일원들로, 며칠 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심상찮은 정황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기 위해 급히 모인 상황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총성과 함성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25일과 26일 양일에 걸친 무력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잦아들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학생동맹의 회장이자 졸업예정자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바레츠노프는 이 상황이 '혁명'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학생동맹은 주로 차르 전제정에 불만이 많은 상류층 및 중산층 출신의 학생들로 구성되었으며, 중등학교(현재로 치면 고등학교) 학생들마저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국가두마 의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2세 역시 형들 틈바구니에 껴서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있었죠.

 

그때, 바레츠노프는 학생동지들로부터 국가두마 해산 및 소비에트 설립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빠르게 행동한 그는 즉각 인쇄소로 향해 문학에 재능이 있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한 뒤 열기구 등을 이용해 살포했습니다. 이 의기 넘치는 학생들은 큰 뿌듯함을 느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누군가 외치자 수많은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합류하자는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리고 로잔코 의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는 몇몇 이들의 의견 등.... 결국 바레츠노프는 로잔코의 ‘임시두마’로 향하기로 결정, 동지들과 함께 대로를 행진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 학생들을 막으려 들지 않았죠.

 

곳곳에 선전문이 붙으면서 봉기세력이 더더욱 불어나고 진압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우후죽순처럼 항명을 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무사히 로잔코 의장이 위치해있다는 겨울궁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각기 타당한 이유로 분노한 의원들이 로잔코 의장에게 마구잡이로 의견들을 쏟아내고 있었죠. 10월당의 구치코프, 진보당의 코노발로프,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 그리고 사회민주노동당(멘셰비키)의 치헤이제 등으로 구성된 소위 ‘정당대표회의’는 각 대표들이 세력의 영향력을 위해 의원들을 동원하면서 사실상 ‘제2의 두마’가 되었습니다.

 

이미 부대 작전참모 트리안다필로프 대위에게 지휘권을 이양하고 '군대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 제1대대장 스뱌토폴크 야코블레비치 크라피엘 중령, 그리고 로잔코 의장의 정치적 동지이자 10월당 의원 루슬란 이사예비치 탈라노프는 곳곳에서 나오는 주의주장들을 들으며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습니다. 이미 100명에 가까운 의원 및 대표들이 모여 매우 협소해진 홀 구석,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인파에 밀린 탈라노프와 크라피엘은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습니다. 우선 탈라노프는 의원들의 얼굴을 재빨리 훑어본 뒤 대강의 정치지형을 파악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0월당과 진보당, 입헌민주당 등 우익 및 자유주의 정당의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확실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대로라면 인민대중의 의사와 정권의 성향이 괴리되어 혁명이 점점 급진화될 우려가 충분했죠.

 

탈라노프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크라피엘은 과감히 로잔코에게 다가가 직접 무언가를 조언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군 병력을 동원해 “국가두마가 상황을 해결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해보자는 의견이었죠.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동원할 병력 자체가 전무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애초에 그가 지휘하던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병력도 트리안다필로프 대위와 함께 소비에트에 합류한 상황이었으니까요. 크라피엘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잠깐 비쳤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던 의원들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조용히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작금의 사태가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모르십니까? 이 모습이 인민들에게 전해진다면 두마는 그들에게 시정잡배보다 못한 집단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크라피엘의 외침이 효과가 있긴 했던지, 의원들은 그제서야 의사봉을 힘껏 두드려대며 질서를 잡으려는 로잔코 의장의 모습을 눈치챘습니다. 발언의 순서와 방법이 정해진 뒤 이번에는 탈라노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언권을 채갔습니다. 앞서 “두마가 혁명대중에 대한 지지선언을 발표하자”던 케렌스키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우익정당인 10월당의 의원이 사회주의자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자 좌중은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로잔코 의장이 급하게 “우리는 여전히 황제 폐하의 신민”이라는 논거를 들이밀며 명망가 게으르기 르보프 공을 새 수반으로 선출해 차르의 승인을 구하자는 대체안을 내놓았지만, 이미 기세를 잡은 케렌스키는 아예 제헌의회를 선언하자며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더욱이 제국 최고학부의 인재들을 이끌던 바레츠노프가 회의장에 난입해 “니콜라이 로마노프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고 외치자, 로잔코의 주장은 사실상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아차 싶었던 탈라노프가 “수백년간 차르의 전제통치를 받은 러시아에서 갑자기 차르가 없어진다면 법과 권위가 어디서 나오겠냐”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군대 대표 자격의 크라피엘마저 니콜라이를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확인사살을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회의장에 도착한 르보프 공마저 (차르의 동생)미하일 대공에게 자유총선과 민주제도 도입을 조건으로 황위를 제안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그렇게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폐위되었습니다. 국가두마 의장 로잔코는 자신의 정치인생이 마지막을 맞이했다는 점을 자각하고, 마지막 소임을 다하기 위해 (어느새 차르스코예 셀로로 향한) 차르를 찾아가 그가 두마임시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폐위되었음을 통보했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니콜라이는 예상대로 "황태자 알렉세이는 차르로서의 업무를 진행할 수 없는 건강상태"라는 점을 시사하고,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죠.

 

핀란드 근위연대 병력이 내각 대신들 및 알렉세예프 총참모장이 위치한 마린스키 궁을 급습해 그들을 체포할 무렵인 2월 28일 아침 8시, 르보프 공과 몇몇 의원들은 '피의 구원 성당'에서 기도 중이던 미하일 대공에게 상술한 조건을 제시하며 황제로 즉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미하일 대공은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붙이며 제안을 거절했고, 라스푸틴 살해에 동참했던 자유주의자(이자 니콜라이의 사촌) 드미트리 대공 역시 즉위제안을 무시하면서 러시아는 노브고로드 이후 최초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3월 1일, 르보프 공을 수반으로 하는 두마임시위원회는 공화주의에 근거한 신정부를 구성하기로 최종 결의했습니다. 임시위원회의 임시지도부(임시의 임시)격인 '정당대표회의'는 좌익에게 힘이 실린 현실을 증명하듯 1당 1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0월당의 구치코프, 진보당의 코노발로프,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 사회혁명당의 케렌스키, 사회민주노동당의 치헤이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반 르보프. 이들은 스몰니 회관으로 거처를 옮긴 소비에트를 찾아가 협력방식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이미 앞선 2월 28일 “소비에트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해 소비에트의 허가를 받지 않은 모든 군사행동이 불법임을 선포한 이들은 군의 명령체계를 실시간으로 훼손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혼란을 막으려면 조율과정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원내정당의 지도부이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부에 속하기도 했던 케렌스키는 이번에도 주도권을 유감없이 행사했습니다. 두마 임시위원회에 소비에트 추천 인사 3명을 추가해 서로 절반씩 ‘임시정부’ 각료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자는 제안이었죠. 또한 동맹국 세력과의 종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조항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최초로 출범한 임시정부는 자유주의 우파 세력이 절반, 그리고 온건 사회주의 세력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국가두마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하던 비중이 10% 이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엄청난 전환이었죠. 물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좌파(국제파), 사회혁명당 좌파 등은 아직 정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02. 명예로운 평화

 

제정이 폐지된 것도 모자라 아예 ‘좌경 정부’가 들어서자 군부, 교회, 그리고 지주들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들의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군부가 지금 당장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이 점은 보수적 군 지휘권들이 임시정부를 ‘매국노’라고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천인공노할 작태’에 분노한 정교회 교단에서도 강경보수파 ‘티혼’ 야로슬라블 주교를 전러시아 총대주교에 옹립, 즉각 임시정부를 규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임시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범 사면령과 사형 금지령 등을 발표하며 기세를 이어나갔죠.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등에 속한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속속들이 복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기세좋게 개혁정책을 발표하던 임시정부는 유독 종전 문제에 있어서만은 신중론을 견지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선 지휘관 대부분이 사실상 반란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죠. 입씨름이 한창이던 (구력)3월 20일, 참다못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원(멘셰비키 국제파)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전세계 인민들에게 고함”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1915년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맺은 ‘콘스탄티노플 조약’의 내용이 일부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좌익 혁명가들이 정부 문서에 접근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밀조약의 내용까지 폭로될 수 있었던 것이었죠.

 

“러시아가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단독강화를 맺지 않는 조건으로, 협상국 일동은 러시아에게 전후 보스포루스 해협 일대와 서아르메니아를 할양한다”

 

이 선언은 러시아 인민들로 하여금 임시정부가 “팽창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야욕을 버리지 못해 종전을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독일과의 종전을 안 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르보프 내각은 인원들을 끌어모아 대책 강구에 나섰습니다. 복귀한 옛 스승 이오시프 스탈린을 따라 볼셰비키당에 복당한 체슬라프가 “아예 전선 반란을 상수로 두고 그들의 공격을 분쇄할 방법부터 논의하자”는 급진적인 의견을 내는 동안, 입헌민주당에 가담한 바레츠노프와 전쟁차관에 임명된 탈라노프는 “그래도 아나톨리아 전선에서는 승리하고 있으니 오스만 제국을 향한 마지막 공세를 가해 협상조건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만들자”는 조정안을 제시했습니다.

 

때마침 엔(Aisne) 지역에서 영불연합군이 로베르 니벨 원수의 지휘 하에 총 115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한 총공세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독일의 동부 방면 공세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내각진들은 급하게 탈라노프 등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라피엘은 무의미한 희생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라며 반대했지만, 케렌스키 전쟁장관은 그와 세레브랴코프를 캅카스 전선사령부에 배속시켜 마지막 공세를 담당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드빈스크에서 평화를 위한 회담이 개최되는 동시에 트빌리시의 전선사령부에서는 일명 ‘케렌스키 공세’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협상국의 ‘니벨 공세’가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독일의 협상력이 제고되는 불리한 상황이 닥치고 말았죠. 동맹국 대표단이 우방국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의 멸국을 사실상 방관하고 독일이 세운 괴뢰국인 폴란드와 쿠를란트-리투아니아 정부를 인정하라는 조건을 제시하자 밀류코프 외무장관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나마 희망이라고 여겼던 백색 평화의 가능성이 멀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야심차게 기획한 ‘케렌스키 공세’마저 유데니치 장군의 캅카스방면군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는 결과로 끝나자 러시아 대표단은 더욱 불리한 위치에 놓였습니다. 결국 독일은 주독 터키대사까지 불러와 ‘러시아-터키의 영토 원상회복’이라는 조건을 추가했고, 대표단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스만 술탄에게 대량학살을 당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였기에 탈라노프 차관은 “또 한 번의 추가공세를 가하자”거나 “반란의 조짐을 보이는 지휘관들을 몽땅 아나톨리아에 밀어넣어버리자”는 과격한 제안을 남발했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그의 정치적 자산을 앗아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와의 휴전(사실상 종전)조약인 드빈스크 조약 및 오스만 제국과의 종전조약인 카르스 조약이 차례차례 체결되며 러시아는 폴란드와 남부 발트를 할양하고 동부 아나톨리아의 점령지를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1주일 뒤 흑해함대사령관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의 반란을 시작으로 ‘좌경 매국주의자 임시정부 타도’를 기치로 한 각급 지휘관들의 ‘반란’이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협상국들은 러시아의 ‘배신’을 강하게 규탄하며 모든 형태의 지원을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니벨 공세의 처참한 실패로 인해 이들이 반란군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일본 제국이 ‘극동 러시아의 불령선인들을 토벌한다’는 명분 아래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미국이 협상군 편으로 대전쟁에 참전하며 이탈리아군이 제10차 이손초 전투에서 패배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던 때, 독일제국 정부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안정이 동부전선의 재개를 방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판단해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일부 혁명가들의 러시아 ‘특송’을 중단했습니다. 레닌과 지노비예프, 율리 마르토프, 이네사 아르망,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등이 슈트랄준트 항에서 억류되어 발이 묶인 사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사회민주노동당의 재통합에 합의했습니다. 애시당초 당론 자체의 차이도 크지 않았고, 특히 전쟁이 빠르게 종결된 시점에서는 서로를 찬전파와 반전파로 분류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죠.

 


 

03. 위기에 빠진 자유 조국

 

발트, 벨라루스, 남러시아, 캅카스, 시베리아에서 들고 일어난 반란군들이 서류상 30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에 총부리를 겨누자, (애초에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던) 게오르기 르보프 공은 사태의 책임을 진다는 명목 하에 내각수상직을 사임했습니다. 새로이 수상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사회혁명당의 전설적인 무장투쟁가 보리스 사빈코프를 후임 전쟁장관에 임명했고, 그는 정부군에 합류하기로 한 몇 안 되는 장성 및 영관급 장교들을 섭외했습니다. 또한 사빈코프 장관은 “국난 상황에서 임시정부와 각지 소비에트를 모두 대표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며 전시임시기구 ‘자유-조국 방위위원회(Комитет Защиты Свободы и Родины)’를 설치하는 한편 각지에서 의용군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자유-조국 방위위원회, 통칭 ‘국방위’의 설치는 좌익세력의 영향력을 더더욱 제고했습니다. 본래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1:1로 균형을 맞추던 정치지형은 중도우파 빅텐트 ‘민주당’, 사회혁명당, 그리고 사회민주혁명당이 각각 3대 축을 형성하는 1:1:1 구도로 바뀌었습니다. 국방위가 소집되고 내각이 재구성되며 전선에서 친-임시정부 성향 지휘관들이 하나둘씩 합류하는 와중에도 적들은 차츰차츰 자유 조국의 목을 조여왔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정말 "300만명의 정예 군사들이 합을 맞추어" 진격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죠.

 

당장 각지에서 대규모 탈영병들이 정부군에 투항해 이들을 지휘할 새 장교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고, 적들이 점령한 영역에서 각종 가혹행위와 학살, 드물게는 인종청소 행위가 벌어진다는 보고가 잇따랐습니다. 특히 러시아 내부의 자치정부로 시작해 임시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던 미하일로 흐루솁스키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가 내전 발발을 틈타 파블로 스코로파즈키의 친독 군벌에 의해 전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내각진들의 표정은 어두워졌습니다. 우크라이나 신정부의 국방상 시몬 페틀류라의 주도로 유대인에 대한 핍박행위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볼가강 중류에 밀집해있는 볼가 독일인 민족집단 역시 (도적떼나 다름없는) 현지 의용대에게 각종 약탈행위를 경험해 포크롭스크 일대에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을 설립해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1917년 5월 25일 국방위 회의의 첫 의제는 단연 '반역자들'의 공세에 맞설 새로운 군대의 창설이었습니다. 가칭 '전러시아 인민의 군대(VNA)', 일명 '인민군'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될 새 군대의 총사령관은 일찌감치 브루실로프 원수로 결정되었고, 총참모장으로는 전 북부전선사령관 니콜라이 루즈키 대장, 총참모장 대리로 미하일 무라비요프 중장의 이름이 호명되었습니다. 각지에 파견될 군단들의 야전사령관으로 유쿰스 바체티스, 스뱌토폴크 크라피엘, 이반 스워지니치니, 세르게이 카메네프, 게오르기 폴코브니코프 등이 임명되면서 인민군의 뼈대는 빠르게 구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국방위 내에서는 인민군 창설을 두고 두 가지 이론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명 '총력전' 전략으로, 주로 사회혁명당 주류와 일부 멘셰비키에 의해 지지받는 안이었습니다. 총 400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수의 인민을 징집하여 대군을 만들고 전시징발, 파업금지, 산업 및 철도 국유화, 각종 파업, 태업, 사보타주 등 행위에 대해 강제노역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전략이었죠. 전쟁장관 사빈코프 역시 이 의안을 지지했는데, 지지자들은 자유 혁명조국의 방위뿐 아니라 러시아 인민군이 인민을 억압하는 전세계 국가들에 맞선 '자유의 보루(bastion of freedom)'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정예군' 전략으로 불렸습니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우파 세력, 그리고 사회민주노동당 일반에 의해 지지되는 전략이었습니다. 총 180만명의 '고도로 군기잡힌' 군사를 유지하며 적성세력을 차례차례 격파, 조국의 당면 위기를 해결하는 데 역점을 두자는 것이 이들 논리의 핵심이었죠. 사회민주노동당의 실질적 사령탑인 레프 트로츠키는 이 전략이 '반동주의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정예한 방패'로서의 인민군을 벼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멘셰비키 국제파와 볼셰비키의 사고방식이 주로 '전문 혁명가 집단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예군 전략을 지지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제1군단장 크라피엘은 카메네프, 트로츠키 등 사회주의자들과 밀류코프 등 자유주의자들에게 검수받은 '정예군' 안을 사빈코프의 '총력전' 안의 대항마로서 내놓았습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더 이상 인민들에게 총력전의 부담을 안겨줄 수는 없습니다. 적병의 사기는 낮고, 규모는 점감하고 있으며, 그들이 인민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시간이 갈 수록 무뎌질 그들의 공세를 1차적으로 방어하고 반역자들의 거점을 하나씩 접수하는 전문직업군 전략이 작금의 위기를 해소할 가장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스워지니치니를 비롯한 일부 군단장 임명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내심 사회민주노동당의 당론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체슬라프는 그와 의견이 비슷한 여러 평당원들을 모아 어떻게든 당 지도부를 설득해내고자 했죠. 총참모부 보급감 세레브랴코프가 “도대체 400만명의 대병력에게 어떻게 보급을 하냐”며 사빈코프의 주장을 반박하려 하자 사회혁명당의 야코프 블룸킨은 “혁명을 분쇄하려 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400만이 아니라 1000만명의 병력도 유지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며 국방국가화 전력을 역설했습니다.

 

체슬라프의 설득으로 사회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총력전 전략의 일부 요소를 차용하는 것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탈라노프와 바레츠노프는 어떻게든 총력전안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막으려 애썼고, 세레브랴코프는 “징병인원을 180만명으로 유지하되 총력전안에 명시된 전시 특수조치를 실행해 국난에 대처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사회민주노동당의 군사위원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내무장관이자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 그리고 기타 위원들에 의해 즉석에서 "국가비상사태법(PGChP)"의 초안이 만들어졌습니다.

 

총 180만명을 징병목표로 삼되 그 중 일부는 반역 지휘관들의 부대로부터 탈영한 인원으로 보충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영내 가혹행위를 엄금하되 적전 무단탈영에 대해서는 지휘관에게 즉결처분권을 인정하며, 모든 7인 이상 사업체에 국방위에서 추천한 지역 소비에트 감찰위원이 파견되게끔 하고, 내전기간 동안 생산량을 국방위에서 총괄하는 방안이었습니다. 또한 지주, 반역 군인, 기타 반공화국 인사들에게 강제노역형을 부과할 수 있게끔 하는 법적 근거 역시 마련되었습니다.

 

혁명의 급진화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었던 탈라노프는 ‘무제한 연설’을 진행하며 어떻게든 법안 통과를 지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체슬라프와 사회민주노동당원들은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속한 대의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국가비상사태법에 대한 동의를 받았습니다. 물론 소비에트 대회의 의사가 정부를 구속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탈라노프의 훼방을 어떻게든 저지하고 싶었던 케렌스키 수상이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를 러시아의 입법부로 공인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헌법도 제정된 바 없었던 러시아에서 수상의 이 선언은 사실상의 선례구속성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고, 사회혁명당-사회민주노동당 등 좌익 일색인 소비에트가 입법부로 인정되자 러시아의 정치적 지형은 좌익이 압도적 우세를 점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었습니다.

 

인민군 창설 및 전시체제에 관한 안건이 케렌스키의 거대한 실책에 힘입어 좌익의 노히터급 완봉승으로 끝난 다음날, 이번에는 각지의 민족운동과 교회에 관한 안건이 테이블에 올라왔습니다. 기세등등해진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의 대의원들(당연히 대부분 좌익인)은 시작부터 ‘국가무신론 도입’을 거론하며 급진론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양대 좌익정당은 민족운동에 대해서만은 온건론을 채택한 지 오래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자치정부를 인정하되 현재의 ‘극우 반유대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고, 볼가 독일인들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민족학살에 맞선 굳건한 연대”를 선포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핀란드 독립에 대해서도 섣불리 건드렸다가 전선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죠.

 

한편 혼란에 빠진 우파에서는 블라디미르 르보프 종무장관이 "교회를 설득할 수 있다"며 소비에트 대의원들의 과격한 주장에 태클을 걸고 나섰습니다. 현재의 총대주교 티혼은 매우 반동적이고 비협조적인 인사지만, 그를 총대주교좌에 앉힌 것은 정교회 신성종무회의에서 갑작스런 혁명과 제정 폐지조치에 반발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며 내부에서 협력자를 만들어 티혼을 끌어내리는 선에서 협력하자는 온건한 제안이었습니다. 또한 민족문제에 있어서는 우파가 오히려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무단 독립세력'으로 인식했던 우파는 극우정권이 출범한 틈을 타 이들을 반역도당의 협력자로 규정해 자치권을 무효로 돌리자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또한 핀란드 독립 역시 불승인하여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러시아'를 관철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다만 볼가 독일인들과의 연대를 선포하자는 좌익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를 표했습니다.

 

사회민주노동당의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세옌코가 이른바 ‘혁명교회’를 만들어 인민들에게 적절한 신앙을 제공하자는 의견을 내자, 완전히 우익진영 내 검은 양으로 찍혀있던 탈라노프는 안건에 적극적으로 찬동했습니다. 또한 국가무신론이 공식적으로 채택되는 재앙적 결과만이라도 방지하기를 바랬던 민주당 중진들도 혁명교회 창설안에 동조했습니다. 문제는 종무장관 블라디미르 르보프가 사실상 사이비 종교에 가까운 혁명교회 가안을 내놓았다는 것이었죠. ‘러시아판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포장된 이 안건은 어떻게든 교세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 성서의 해석에 과학을 개입시키는, 유사과학적인 주장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나마 중도를 지키던 세레브랴코프를 등돌리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회의가 파행될 위기에 놓이자, 압박감을 느꼈던 케렌스키는 ‘교회 문제를 미완으로 두더라도 민족 문제부터 먼저 논의해 통과시키자’고 주장하며 의장 직권으로 의제의 우선순위를 뒤바꾸었습니다. 사회혁명당 지도부는 우파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핀란드의 자치권을 인정하되 페트로그라드 정부에 적극 협력하는 안, 우크라이나 자치정부의 자치권을 지방행정 정도로 축소하여 인정하는 안 등을 내세웠습니다. 블라디미르 르보프 종무장관은 "어차피 사회주의자 당신들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종교가 사이비이니, 혁명에 찬동하는 사이비 하나 더 만든다 한들 큰 차이 없는 게 아니냐"며 일갈했지만, 이 모든 소란은 케렌스키의 줏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 모든 상황에 환멸을 느낀 르보프 종무장관과 밀류코프 외무장관을 비롯한 민주당 중진들은 원래 자신들이 제기했던 의안인 ‘티혼 총대주교 축출 전략’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일각에서 “이럴 바에는 정교회 자체가 필요없는 게 아니냐”는 의견까지 대두되자, 이들은 “소비에트 대회에 종교 문제를 일임한다”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917년 5월 22일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세속국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은 교회의 재산을 정부가 '제한 없이' 몰수할 수 있게 규정하였고, 교회 토지에 대해서는 해당 토지를 실사용하고 있는 '실질 소유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게끔 안배했습니다. 또한 이 법은 "국가는 성직자와 종교 교단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에, 반역자들과 접촉하는 모든 종교인들에 대해 국가반역죄를 적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나마 소비에트의 사회주의자들은 나라를 다시 한번 두쪽내고 싶지 않았기에, "종교를 믿는 것이 불법"이라는 문구까지는 넣지 않았으나, 이는 다시 말해 "종교를 믿는 것은 자유이나 교회를 세우는 것은 불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민족문제 타협안, 이른바 "러시아 내 제민족들의 자치에 관한 포고령"은 순조롭게 통과되어 반포되었습니다. 핀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포고령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동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반대하지도 않았고, 자치정부령에 따라 이번 내전에 '의용병 사단'을 파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볼가 독일인들은 정부의 조치에 큰 환영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독일인 자유여단'을 결성해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극우정부는 즉각 반란군에 합류했습니다. 네스토르 마흐노 및 여러 투쟁가들이 이끄는 아나키스트 자유지대들은 대부분 우선 극우주의자들을 몰아내자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아나키스트들과 정부의 일시적 협력관계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전기간 중 큰 문제가 터지지는 않을 것이었죠. 마지막으로, 부하라와 히바에서는 자치론자들이 "차르가 승인한 군주"들을 몰아내고 각자 자치공화국을 세워 중앙아시아 반군에 대항하기로 했습니다. 나름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지요.

 

1917년 5월의 국방위 제1차 회기는 그야말로 기존 우익의 종말을 불러왔습니다. 이대로면 총선을 치루어도 가망이 없었던 민주당 내에서는 밀류코프, 네크라소프, 르보프 등의 ‘온건론’에 대한 비토가 줄을 이었죠. 단순히 혁명의 감속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히 혁명을 추구하되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세워야 했습니다. 온건론자들을 대신해 당권을 거머쥔 것은 한때 두마임시위원회에서 가장 우파적 입장을 내세웠던 구 민족주의자당 좌파 바실리 슐긴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우파의 미래는 민족주의에 있다”며 민주당을 ‘누구보다 조국 러시아를 생각하는 정당’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슐긴 신임당수는 또한 “소비에트는 좌익 사회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며 민주당원들이 적극적으로 지역 대중정치에 참여할 것을 주문했고, 실제로도 소비에트의 급진적인 분위기에 반감을 가지던 많은 대의원들이 민주당 당적을 가진 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결정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곳곳에서 푸른 완장을 찬 ’정부군‘들이 교회를 습격해 성직자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서 토지대장을 펼쳐 땅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신부가 미리 토지대장을 불태웠고, 또 어떤 곳에서는 교회에서 먼저 혁명 지지선언을 하는 사례가 나왔습니다만… 아무튼 대세는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눈이 뒤집힌 티혼 총대주교 예하 종무회의는 임시정부를 적그리스도로 선포, 아예 반군에 합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만네르헤임 등 지휘관들은 “우리는 신정국가가 필요없다”며 싸늘한 반응만을 보였고, 몇몇의 우려대로 반군들이 교회를 구심점으로 단일전선을 꾸린다는 괴담은 말 그대로 괴담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미 엎어진 물이지만요.

 

마지막으로,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 버림받은 루슬란 탈라노프 전쟁차관은 임시정부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 반란군에 투항한다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차관이 반군에 귀순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민주당의 변화를 더욱 부추기는 동안, 임시정부는 탈라노프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세바스토폴에서 암살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탈라노프의 저격범은 바로 그의 친딸인 ’해리엇 데이비슨‘, 러시아어 이름으로는 비토미라 루슬라노브나 탈라노바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로서도, 혁명가로서도 실격이었던 탈라노프는 그렇게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04. Novus Ordo Seclorum

 

어느덧 러시아도 혁명 이후 첫 여름을 맞았습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하늘은 2월의 우중충함을 완전히 버린 채 화창했고, 따가운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꽂혔습니다. 늦봄부터 한여름까지 정예 인민군은 베르몬트 남작의 카자크인 기병들을 분쇄했고, 동벨라루스의 철도 거점 모길료프를 탈환하는 한편 키이우를 수복해 미하일로 흐루솁스키를 수반으로 한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 정부를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남쪽에서도 드니프로 강 양안에서 반동 콜차크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몰아냈고, 아조프해 연안지역의 절반을 수복하며 잔악무도한 카자크들로부터 인민을 지켜냈습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시베리아 반군에 의해 단절된 철도 반대쪽 끝에 있는 극동소비에트공화국의 동지들이 일본군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지만, 언젠가 그들을 구원하러 갈 기회가 있을테죠.

 

반역도당들의 주력이 큰 타격을 입고 움츠러든 시점에서, 인민군과 임시정부, 소비에트는 중세와 근대가 혼재하는 광활한 러시아 땅에 새 질서를 세워야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업은 대부분 모스크바나 페트로그라드와 같은 대도시 지역의 실정에 맞춘 일이었으나, 지금부터 혁명동지들이 맡아야 할 과업은 때늦은 중세를 살아가고 있던 인민들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봉건제의 억압에서 빠져나온 자유 인민들에게는 어떤 조치가 내려질 것이며, 옛 억압자들에게는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할지, 그 향방이 이제 막 정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현지에서 남부전선사령부에 합류한 데이비슨과 사회민주노동당에서 위원으로 파견한 체슬라프는 돈-쿠반 카자크에 대한 처분방식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오랜 기간 특유의 호전성과 전투력으로 초원 일대를 지배했던 카자크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독특한 집단농업을 시행하고 있었고, 이는 농업 집산화를 지지하던 사회민주노동당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만 그 집단농업이라는 것은 상층민인 카자크들이 하층민인 외지인(이노고로드니예)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형태였기에, 사민당은 급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카자크 문화를 일소시킨 상태에서 집단농업 시범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사회혁명당이 사회민주노동당의 강경한 반-카자크 정책에 제동을 걸 무렵, 체슬라프는 자신의 본래 출신이기도 한 카자크인들의 자치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같은 사회민주노동당의 데이비슨마저 반역에 가담한 상층 카자크인들을 배제하는 선에서 현행 제도를 유지, 국가체제 내에 지역의 전통을 흡수시키자는 제안을 건넸죠. 이에 민주당 민족주의파 위원 게오르기 아다모비치는 체슬라프와 데이비슨, 그리고 사회혁명당원 이사크 스테인베르크 등의 의견을 모두 수합해 잠정안을 만들었습니다. 카자크인 다수거주지역에 자치공화국을 설립하고 근대적 사법체계를 정비한 뒤 집단농업의 단위인 라다(Rada)를 일종의 소비에트와 같은 형태로 전환한다는 안이었습니다. 카자크 대의원과 노동자-농민(외지인)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중앙 라다는 농지의 관리와 운영을 총괄하게 되었죠.

 

문제는 자치공화국의 자립성을 강조하던 체슬라프가 사법 자율성 보장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의구심을 가지던 데이비슨 역시 “자치공화국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인민군을 투입할 명분이 생겨 자신의 구상이 더 가시화된다”는 생각으로 체슬라프의 의견에 동의했죠. 법무관으로 파견된 스테인베르크가 “책임을 진다”며 끝까지 카자크 자치공화국에 남아 행정 및 법체계를 정비하는 데 힘썼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상층 카자크들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치공화국의 사회구조는 예전과 별다른 게 없었고, 외지인들이 자체적으로 자경대를 조직해 (기존 하층 카자크들이 장악한)자치공화국 치안인력과 대립하는 사태까지 나타났습니다. 외부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으나, 카자크 자치공화국은 시작부터 흔들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편 자캅카스 지역에 얽힌 민족문제 및 외교문제를 해결하러 인민군 제1군단장 크라피엘 등이 활동 중인 트빌리시의 캅카스전선사령부로 향하던 보급감 세레브랴코프, 외무장관 비서실장 겸 정부지 주필보 바레츠노프, 외무차관 아돌프 요페, 내무차관이자 민주당 민족주의파의 배후조정자 니콜라이 우스트랼로프, 인민군 참모차장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등은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더욱 진격해 파리를 목전에 두었다는 소식, 그리고 무엇보다 이탈리아가 공세를 견디다 못해 최종 항복했다는 소식이었죠. 심지어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홀로 교황청으로 도피했다가 오스트리아군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추태를 보인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점령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곳곳에서 공화정, 민족주의, 조합주의, 미래주의,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희한한 좌익’, “파시스트”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걱정을 뒤로 하고, 일행들은 트빌리시에 도착해 자캅카스 현지를 관리하는 자캅카스 위원회 주석(이자 2월 혁명 당시 멘셰비키의 지도자) 니콜라이 치헤이제를 만났습니다. 그의 보좌역을 자처한 아르메니아인 혁명가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자료를 한 장씩 넘기며 브리핑을 시작했죠. 예상과 달리 민족 문제는 자캅카스 위원회의 역량으로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해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국이 페르시아를 통해 유데니치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반군과 (마하마드 아민 라술자데라는 이가 이끄는)범투르크주의 아제리인 반군을 지우너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 반군의 경우 이미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아르메니아의 동포를 구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오스만 제국령을 향한 월경작전까지 일삼는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은 흑해를 통해 조지아의 친정부 의용대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죠.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모두가 물음표를 띄웠으나, 해야 할 일은 명확했습니다. 영국의 지원을 차단하고 민족문제를 극단화시킬 수 있는 급진 민족주의 세력을 최대한 빨리 약화시키며, 무엇보다도 자캅카스 지역의 내전을 빠르게 종결해야 했습니다. 합리적 추론 상, 영국은 서아르메니아의 전황을 고조시켜 러시아를 다시 한 번 전쟁에 끌어들이거나 적어도 좌경 임시정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반군을 지원했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독일은 서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러시아 임시정부를 지원, 동부의 안정을 유지할 유인이 있었죠.

 

일각에서는 영국의 지원을 막기 위해 아예 페르시아를 침공하자거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독일과 밀약을 맺어 오스만 제국과‘만’ 전쟁을 치루고 서아르메니아를 수복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크라피엘을 비롯한 현지의 지휘관들이 확전안을 극구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의견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죠. 결국 세레브랴코프, 크라피엘, 바레츠노프의 의견이 수용되었습니다. ‘페르시아를 공격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여론이 러시아 내에서 팽배한 것처럼 위장해 영국에게 ‘고슴도치 전략’을 보여주고 적절한 비공식 경로를 통해 영국과 독일의 캅카스 상호철수 합의를 이끌어내며, 그 사이 인민군은 특작부대를 통한 적 참수작전과 전면 공세를 병행해 빠르게 사태를 종결짓는다는 방안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도 독일이 영국의 상호철수 제안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이는 오히려 상황 해결에 호재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마치 러시아 임시정부의 동맹국인마냥 행동하며 러시아-터키 간의 외교적 조율을 적극 주선했고,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의 캅카스 이주를 위한 비용까지 일부 지불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세레브랴코프의 기획대로 유데니치를 아르메니아인 민병대의 소행으로 위장되어 제거되었고, 라술자데 역시 정치적 스캔들을 활용해 축출할 수 있었죠. 아르메니아인 민병대와 유데니치의 러시아인 반군이 서로 교전하는 사이 크라피엘의 제1군단은 총공세를 통해 세력을 일소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범투르크 민족주의 정당 ‘무사바트당’의 온건파가 임시정부 협조를 결정해 반군을 자진 해산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캅카스의 난맥상은 어떻게든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변경지역’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죠.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다면 변경민족들은 언제고 다시 분쟁과 상잔행위를 시작할 것이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일행 혁명가들이 (마치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연상시키는) “변침파(스메노베홉치)”라는 정치운동에 대한 정보를 접할 무렵, 러시아에서의 내전은 슬슬 종결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미심쩍은 부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죠. 물론 일의 최종적 성패를 거론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지만 말입니다.

 


 

장장 워드 파일로 A4용지 13쪽에 달하는 분량... 드디어 작성 완료했습니다. 후... 힘드네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4.20 새 표지입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돈이 곧 진리 작성시간 23.04.20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렌지파일 작성시간 23.04.20 오.. 노골적인 죽음암시와 적당한 암시의 차이..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dear0904 작성시간 23.04.20 오우... 정부쪽 디자이너로 일하시는건 아니죠?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E.E.샤츠슈나이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4.20 dear0904 그건 아닙니다 ㅋㅋㅋ

    + 원본은 이 포스터입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