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과 3.1독립운동

작성자녹림처사|작성시간23.03.01|조회수643 목록 댓글 2

▲ 1897년 건립당시 독립문 ~~ 

 

♣ 독립문(獨立門)과 3.1독립운동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을 아시나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던 영은문과 모화관.

이는 조선시대 초중기때는 명나라 사신을

그리고 말기때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커다란 문(門)이 있었어요

그리고 근처에는 사신들을 영접하는 숙소로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지요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지요

 

중국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극심한 사대주의 즉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마치 중국의 한족(漢族)은 우월한 민족이고

우리민족은 변방에 있는 하찮은 소수민족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뒤

노골적으로 형제의 관계에서 군신(君臣)의 관계를 종용하였고

과도한 조공과 책봉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우리의 영토를 2번씩이나 침탈하였지요

그러자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를 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명나라를 그리워 했어요

주자학파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죽으면서 까지 명나라를 신봉하는 유언을 남김으로

그를 따르는 전국의 유림들은 멸망하여 없어진 중국 명나라의 왕(의종)을 추모하며

제사지내는 웃지 못할일도 있었지요

그것이 이른바 속리산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만동묘(萬東廟) 이지요

이처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어요

 

1637년 음력 1월30일

청태종은 9층의 계단으로 된 수항단 장막과 일산(日傘)을 펼쳐놓고

용상(龍床)위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지요

단상아래 인조(仁祖)는 청태종을 행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는 예를 올리며 항복 하였지요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면

만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지 않고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일아나지 않을수도 있었으며

어진 백성들은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가지도 않았을 꺼에요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하지요

힘없고 어리석은 무능한 인조 ...

그 무능함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만 고스란히 피눈물나는 고초(苦楚)를 겪었지요

 

이 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겪었으며

10명중 1명꼴로 청나라에 노예처럼 끌려가 수많은 학대와 멸시 겁탈을 당했으며

이때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지요

그것이 변음되어 지금은 "화냥년"이 되었어요

이때의 수모를 우리민족은 절대로 잊을수도 잊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중국의 명나라도 과도한 조공과 책봉을 요구 했지만 청나라의 만행은 더욱 극심했어요

청나라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세자를 볼모로 잡아가는등

그 패악이 극에 달하자 청나라에 대한 반감(反感)이 불꽃처럼 일어 났으며

그 반감은 조선말기 19세기까지 이어졌지요

 

그런 와중에 청나라는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였고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도 서서히 음흉한 흉계를 드러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던 러시아도 믿을 족속이 못 되었지요

 

그러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어요

이때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

그러면서 1895년부터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독립문 설계를 위해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인 '세레딘사바틴'을 영입해 왔어요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하자고 하였지요

그러자 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는 독립문 건립에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고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금으로 충당했어요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 11월에 완공 되었지요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897년10월에는 역사적인 "대한제국"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지요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어요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장식되었지요

앞쪽의 기둥 두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 남은 부분이지요

독립문의 준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高宗)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눈물을 흘리며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요

 

당시 독립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홀로 독(獨) 설 립(立)의 뜻으로

독립문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로서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며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첫번째 상징물이 되었어요

때문에 "최초로 우리나라 태극기가 새겨진 곳"이 독립문이지요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의 공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이지요

당시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태극기를 잘 몰랐어요

3.1운동 당시 민중들은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 경성 사람들은

독립문에 가서 거기 있는 태극기를 보고 그려서 사용하였지요

 

이처럼 독립문은 우리에게 자주독립정신을 불어 넣어 주었어요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은 헐려지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독립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기에는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도 포함되는 독립이었으며

이런의미로 고종황제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지요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누구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대국"이라고 치켜세우고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지칭하면서 중국몽(中國夢)을 함께 하겠다고 했어요

중국몽(中國夢)이 무엇인가요?

중국몽은 한마디로 봉건왕조 시기 조공질서를 통해 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전통 중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황당한 야심이 들어가 있는것이지요

 

또 어느작자는 주중대사 신임장 제정식에서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공창미래(共創未來)’라고 썼어요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黃河)는 만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東)으로 간다'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충신의 절개를 가리키고

조선에선 중국 황제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뜻하는 말이지요

 

사대(事大)라는 말은 『맹자孟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을 의미하지요

바로 이 사대의 자세를 조선은 중국 왕조에 대해 500여년 동안

지독하고도 철저하게 유지해 왔어요

그러나 이 처참한 사대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말기에 와서

독립문을 세우고 자주독립을 주창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독립문이 세워지고 126년이 지난 지금

그 치욕적인 사대주의 사상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지요

겉으로는 자주를 외치면서 중국에는 사대주의를 표방하고 있어요

정말 개탄(慨歎)스런 일이 아닐수 없어요

 

이제 역사적인 3.1독립운동 104주년을 맞아

독립문이 세워진 의미와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본뜻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숭고한 선열들의 위대한 업적을 잊지말아야 하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一松) *-

 

▲ 독립문과, 헐린 영은문   ...

▲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에 게재한 자신의 논평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필요성을 시사했어요 ...

▲ 독립문 준공식 초정장, "1897년11월 14일자" ...

▲ 1907년경의 독립문 안쪽 전경과 우표 ...

▲ 현재의 독립문 모습 ...

▲ '독립문' 글씨옆에 태극기가 있고 밑에 대한제국의 문양인 오얏나무가 있음 ...

▲ 영은문은 헐리고 남은 영은문 주초(주춧돌) ...

▲ 중국 사신들이 묵었던 모화관(慕華館) ...

▲ 조선의 세자가 중국 사신을 모화관에서 영접하는 모습 ...

▲ 지금은 모화관이 독립관이 되었지요...

▲ 송재 서재필 동상과 독립문 ...

▲ 우리나라 독립문의 모델이 되었던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

▲ 숭고한 3.1 독립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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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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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페로 | 작성시간 23.03.01 감사 드리며 공부 잘
    하고 들어갑니다.
    3월 한달은 따뜻한장과
    사랑을 나누며 건강하고
    보람 가득한 3월 되시길
    바람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녹림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3.03 그래요 고마워요
    3.1운동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야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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