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 미신에서 과학으로

작성자녹림처사|작성시간23.08.03|조회수587 목록 댓글 0

 일기예보 미신에서 과학으로 

 

지난 달 계속된 폭우로 날씨에 대한 우려가 커졌어요

태풍이나 물난리는 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피해가 급증하면서

기상 예보는 더욱 중요해졌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19세기까지 기상 예보는 미신으로 여겼었어요

날씨는 신의 영역이었고, 기껏 달무리나 동물에게 의존하는 것이 전부였지요

1854년 영국 의회에서는 일기예보가 가능하다는 주장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는 일까지 있었어요

과학자들은 날씨 예측이 점성술이라며 꺼렸지요

그렇지만 기상 예보가 과학이 된 것은 어느 선장 덕분이었다고 하지요

 

19세기 해군력이 중요했던 영국은 전 세계로 군함을 파견해

해도(海道)를 작성해 나갔어요

지도 없이 떠나는 이 작업은 매우 위험했고

선원들은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어요

1828년에는 해군 함정 비글호(HMS Beagle)의 선장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마침 인근에 있던 23세 귀족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가

급히 선장으로 임명되어 비글호를 귀항시켰어요

1831년 다시 출항 명령을 받은 피츠로이는

선임자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래 과학자를 동승시켜

같이 자연을 연구하기로 하고,

케임브리지를 갓 졸업한 찰스 다윈을 선택했지요

1836년까지 계속된 탐험에서 다윈은 생명을 연구했고,

피츠로이는 기상 정보를 모았어요

이 항해에서 피츠로이는 기압과 날씨의 밀접한 관계를 알게 됐지요

 

이후 전신(電信)이 등장하자,

피츠로이는 날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한 지역의 날씨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전보는 날씨 이동보다 빨랐지요

여러 지역의 실시간 정보를 종합하면 날씨를 미리 알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기상 전문가로 주목받은 피츠로이는

1854년 설립된 영국 기상청의 초대 청장으로 임명됐어요

하지만 날씨를 단순히 기록하는 업무에 제한되었지요

당시 의회의 조롱에서 보듯이, 예보는 비과학적이라며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는 조용히 예보 시스템 구축에 나섰지요

자신이 개발한 기압계를 배치하고, 전신망으로 연결했어요

 

그런데 1859년 영국의 증기선 로열 차터(Royal Charter)호 사고로

상황이 급변했지요

폭풍에 휩쓸려 탑승자 500명 중 41명만 겨우 살아남는

대형 참사가 발생한 것이지요

감당할 수 없는 기상 재난에 영국 정부는 피츠로이에게

폭풍 예보를 우선 허락 했어요

일상적 날씨 예보는 계속 금지되었지만,

1860년 시작된 폭풍 경보는 재난 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였고,

피츠로이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지요

특히 미신이라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과학자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자신감을 얻은 피츠로이는 반대를 무릅쓰고

1861년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일상 날씨를 예보하기 시작했지요

이것이 바로 일기 예보의 시작이었어요

반응은 엄청났지요

비가 올지 안 올지, 기온이 얼마나 오르고 내릴지

매일 신문에 실리자, 사람들은 열광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불만도 만만치 않았지요

여기서 피츠로이는 처음으로 ‘forecast(예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예언이나 예측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지요

예보는 가능성이고,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였어요

하지만 자연법칙이 미래를 결정하고,

그 법칙이 과학이라 믿던 주류 학계는 이런 확률적 접근을 비판했지요

피츠로이는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며,

사재를 털어 예보 정확도를 올리려 애썼지만 지쳐갔어요

 

한편, 피츠로이가 이끈 비글호 탐험으로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지요

종의기원은 동물의 변이와 유전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때 까지만 해도 이것은 신의 영역으로 알았어요

급기야 학회에서 이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지요

찬반 양측이 고함을 치며 아수라장이 된 순간,

갑자기 노신사 하나가 성경을 손에 들고 벌떡 일어서

‘신을 믿어라!’라고 외쳤어요

폭풍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러 학회에 참석한 피츠로이였지요

폭풍 예보로 존경받던 피츠로이였지만 청중이 강제로 끌어 앉혔어요

종교적 신념이 강했던 피츠로이는 영국 사회가 분열에 빠지자,

다윈을 도왔다는 자책감에 빠졌지요

여기에 일기예보 비난이 더해지며 가산까지 탕진한 그는

1865년 결국 자살했어요

비글호 선장의 두 번째 자살이었지요

 

피츠로이의 사망으로 예보는 한동안 중단되었어요

그 사이 영국 정부는 피츠로이의 예보 체계에 대한 대대적 점검에 나섰지요

탄탄한 과학으로 기상청을 재정비해 1879년 기상 예보가 재개되었고,

현재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예보 시스템을 자랑하고 있어요

 

19세기 말 발전한 대기 과학의 성과는 1922년 영국의 수학자

리처드슨의 수치 기법에 반영되었지요

이러한 리처드슨의 기상 방정식 풀이법을 바탕으로

1950년대 부터 컴퓨터를 이용한 예보가 시작되었어요

1960년 미국이 발사한 기상 위성은 예보의 신뢰도를 더욱 높였지요

이제 누구도 기상 예보를 미신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피츠로이가 도입한 ‘forecast(예보)’라는 단어는 회사의 매출이나

기술 전망과 같이 미래를 대비하는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지요

 

우리나라는 2019년 자체 기상 위성을 도입했고,

수퍼 컴퓨터를 이용한 한국형 수치 모델은 2020년 시작했으니,

선진국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지요

이를 고려해도 기상 예보에 대한 실망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여기서 선진국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2008년 초특급 허리케인이 다가오자,

미국 기상청의 경고에 따라 무려 400만명이 대피했지만,

곧 열대저기압이 되어 피해는 크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당국은 미국 기상청에 신뢰를 표시했어요

그래야 있을지 모를 피해에 더 과감히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2009년 미국 정부는 기상 예보에 지출한 58억달러(약 7조4000억원)의

6배 효과를 얻었다고 분석했어요

그 뒤부터 기상예보는 약간의 과장이 더해 진다고 하지요

사실 날씨는 비선형 복잡계이기에 인공위성과 수퍼 컴퓨터로도

정확한 예측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요

 

더욱이 요즘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엘리뇨와 라니냐 현상이

심해지고 있어요

2-5년마다 상대적으로 낮았던 열대 동태평양과 중태평양의

해수면온도가 평상시보다 높은 상태로 수개월이상 지속되는

현상이 나타는데 이를 엘니뇨라 하지요

라니냐는 엘니뇨의 반대 현상으로 중동태평양의 해수면온도가

평상시보다 낮아지고 무역풍이 평소보다 강해지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이런 현상으로 인해 극한 폭우가 내리고 있지요

더욱이 요즘은 예측할수 없는 국지성 극한호우가 내릴때도 많아요

 

아무튼 피츠로이가 굳이 ‘예보(forecast)’라는 단어로

미신과 구별한 이유는 예측보다 대비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렇게 기상 예보는 미신에서 과학이 되었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一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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