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J.Roa]]눈(雪) - 3

작성자J.Roa|작성시간08.08.10|조회수22 목록 댓글 5

첨부파일 공16-lastscud.wav

 

 

 

 "요즘 들어서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 얼굴색도 창백해 보여. 선생님도 집에서 진료받는 것 보단 직접 정원에 와서 진료를 받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씀 하셨으니까 한 번 갔다 와."

 말을 마치자마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청년을 보지 않기 위해서 찻잔 속을 들여다 보았다. 방금 한 말은 청년을 떼어놓으려는 의도가 아닌 정말 청년의 몸 상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몇 시간 전에 이 방에 찾아 온 이유도 며칠 전에 청년이 일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기에 상태라도 확인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청년은 우리 집에 온 지는 막 2년이 된 신참이지만 건강한 것으로는 현재 최고참인 이주 아저씨를 앞 설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고 게다가 이주 아저씨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청년은 우리 집에서만은 '건강남'이라고 불려졌다.

 그런 청년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청소를 담당하던 여성들이 간병을 하겠다며 아버지에게 직접 찾아가 호소했고ㅡ심지어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셨다ㅡ, 이주 아저씨는 나흘 동안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인 채 집 안을 배회했다. 항상 정원에 모습을 보이던 두 정원사도 청년이 쓰러지자 다음 날부터 여성들과 함께 청년의 간병을 맡았다.

 아, 참고로 우리 집 식구 수는 마흔 세 명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여성들은 열 일곱 명 중 여덟. 그리고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청년의 상태를 넌지시 물어보는 이들의 수가 스물 내외였다. 이 사건 만으로도 나는 청년이 우리 집 사람들에게 꽤나 호감을 얻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년의 망언ㅡ쿠키 발언 같은 종류ㅡ을 들을 때마다 그에 대한 호감이 머릿 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는 것은 그들도 공감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보다 아가씨, 우선 손부터 깨끗이 하시는 게……."
 아직도 손에 쿠키 가루가 묻어있는 것을 보았는지 청년은 자기 몸 상태보다는 내 손의 청결도에 신경쓰고 있었다. 녹차에 대고 맹세하건데 내가 죽기 전까지 이 청년의 망언증을 필히 고쳐놓고 만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우리 집에 보다 제대로(?) 된 평화가 찾아 오겠지만, 그 전에 내가 청년 때문에 미쳐버리지나 않을까 걱정 된다.

 청년이 무슨 말을 하든 항상 그래왔듯이 손가락에 묻은 쿠키 가루들을 핥아ㅡ이 대목에서 청년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ㅡ낸 뒤에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펴고 정말 청년이 쓰러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옮기자 정말 바닥에 쓰러져있는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마치 총 맞은 군인 마냥 쓰러져 있는 모습에 절로 손이 올라가 검지로 볼을 긁적이고 말았다.

 "……깨워야 되나."
 평소 같았으면 군청색 정장을 입고 있었겠지만, 청년은 어디까지나 '환자'였기 때문에 지금은 평상복을 입은 상태였다. 개인 취향인지, 아니면 간병인들의 취향인지 알 수 없는 캐릭터 티셔츠와 자색 반바지를 입은 청년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환자'라기 보다는 '손님' 같은 행색 같았다. 내버려둬도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고, 청년을 깨우는 대신에 바깥 공기를 쐬기로 결정하고는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창을 투과해 비치는 햇살이 얼굴에 닿자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 앞에 다가설 즈음에는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손을 들어 약하게 밀자 창이 천천히 열리며 꽃 향기를 머금은 따스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씩 내딛을 때마다 꽃 향기가 진해졌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오묘한 향을 들이 마시며 창을 활짝 열었다.

 눈부신 햇살에 아주 잠깐 어두워졌던 시야가 돌아오면서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등색으로 페인트 칠이 된 다수의 건물들, 그 옆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 그것들의 사이사이를 가르고 지나가는 연회색의 선과 선 위를 뛰노는 다양한 색의 광대들, 캔버스에 그려보았던 것과 흡사한 색을 띈 하늘, 먹이를 찾거나 짝을 찾아 비행하고 있는 수많은 새들, 바로 눈 앞을 힘겹게 날갯짓하며 지나가는 붉은 나비.

 그리고, 붉은 나비 너머 보이는 양과 음의 경계선.

 살아가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나누는 무형의 벽.

 한 발짝만 내딛어도 넘을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하게 하는 모순 된 장소.

 그것의 모습을 보는 것과 동시에 온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소름끼칠 듯이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추위에 질려 몸이 떨기 시작했다. 다리부터 시작한 떨림은 순식간에 온 몸을 뒤덮었다. 온기가 나를 뒤덮었듯이.

 "아아……."

 알 수 없는 탄성만이 흘러나왔다. 분명히 밖은 따뜻할 터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기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대로 얼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방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추위에 떨며 따뜻한 밖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등색 건물들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나무들도, 연회색의 선과 선의 광대들도 건물들처럼 하얗게 질렸다.

 마치 모든 풍경이 자신의 색깔을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모두 얼어붙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별은 남성, 지금 방 안에 쓰러져있을 청년과 비슷한 나이 대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풍경은 이제 제 색을 모두 잃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도 하얗게 변한지 오래였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태양이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색을 잃은 태양이 시야에 잡혔다.

 풍경이 색을 잃어가는 것을 바라 볼 새도 없이, 남성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잃었다. 색을, 감정을, 몸을.

 헛 된 외침을 몇 번이나 하였다.

 헛 된 달음을 몇 번이나 하였다.

 되찾으려 했지만 그리 할 수 없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이해 할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미친 사람이나 할 법한 이야기 같았다.

 

 색을 잃은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색을 잃은 나는 살아있지 않다.

 색을 앗아가는 이는 살아있지 않다.

 너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지 않다.

 지금 두려워하고 있을 네개 권한다.

 무색의 차가움을 맛보아라.

 

 이제 모든 풍경이 색을 잃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흰색. 그 흰색마저 마치 목소리가 말하는 '무색'과 같이 보였다. 무색의 차가움이 무슨 말인지 생각 할 겨를도 없었다. 다음 순간에 내 어깨를 잡아끄는 강한 힘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없던 풍경에 다시 색이 자리를 잡았다. 등색, 갈색, 녹색, 회색, 적색, 청색…….

 그리고 지금까지 듣던 남성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미묘한 높낮이를 가진 목소리. 아, 세익 언니의 목소리다. 억센 듯 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 몸이 저절로 이끌려가며 무언가에 받쳐졌다. 풍경의 잔상이 남아 흐릿하던 시야가 되돌아오면서 세익 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이 가득한 것이 역력한 표정을 보며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방금 전의 한기 때문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언, 니. 신…연 언니…를 불러, 주세…요."
 말을 마치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던 두뇌도 제 상태를 되찾은 것인지 순식간에 상황 정리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 정리보다는 잠깐의 휴식이 더 필요했다. 그 휴식으로는 수면이 최선의 방법이다. 내 말을 세익 언니가 행동으로 옮길 것은 확실하니 우선은 수면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결정이 나자 순식간에 눈꺼풀이 내려왔다. 세익 언니는 황급히 내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숨을 확인한 후에 내가 수면을 취하려한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나를 가로로 안아들었다. 사람의 품에 안기자 더 빠르게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방을 나가는 것인지 다수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집 안 사람들이겠지.

 방에서 나와 십여 초 정도를 걸었을 무렵, 세익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아가씨께서 보고 들으신 모든 것,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거의 잠에 들 무렵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의 끄덕임이 멈춤과 동시에 온 몸을 잠에 맡겼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산스]風〃엘 | 작성시간 08.08.11 궁서체로 써 진 글, 심오하군요. 세익이란 사람이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여자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건가요?
  • 작성자[하칸]미나에 | 작성시간 08.08.11 잘 읽었습니다. 호오, 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걸까요.
  • 작성자エメロ-ド♡ | 작성시간 08.08.13 잘읽었습니다; 다른사람한테 말하면 어찌되나염(쌩뚱..) 아무튼간; 심오하군요 ㅠ;
  • 작성자[부지기]네드발백작 | 작성시간 08.08.13 세익이라는 인물. 뭔가를 알고 있다! 이제 서서히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인가. 잘 봤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J.Ro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8.14 이야기가 시작 되기는 커녕 이대로 묻힐 것 같습니다만 […]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