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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oa]]눈(雪) - 5

작성자J.Roa|작성시간08.09.02|조회수33 목록 댓글 10

첫 번째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 격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남은 키워드는 둘.

다른 키워드를 찾기 위해서 항상 고민에 고민을 거듭, 하는 걸까요.

 

 

 

 

 

 

 집에서 내쫓겠다는 말에 여성은 순간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이제 돌아가겠지, 라는 생각에 속으로 한 숨을 내쉬고는 여성의 다음 행동을 지켜봤다. 하지만 예상 외로 여성은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처음의 그 차분한 눈빛을 띄었다. 그리고, 단순히 내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순간 여성의 눈이 결의에 찬 눈이 된 것만 같았다.

 그, 뭐랄까. 마치 중대한 발표를 앞둔 사람의 것과 같은 눈이었다.

 "아가씨, 지금부터 제 말을 듣고 부디 놀라지 말아주세요."
 '부디 놀라지 말아주세요'라니, 누가 들어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만한 발언이 나올 듯 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내 예상은 멋지게 적중한 것 같았다. 여성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키는 듯한 행동을 보였고, 그 광경을 멀뚱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심호흡이 끝난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마자 기절 해 버렸다.

 "아가씨는… 그, 서리병에 걸리신 상태입니다만. 그, 그, 주치의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발병하지는 않았다고 하셨으니까……."

 풀썩,

 "아, 아,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여성의 폭탄선언을 듣고 기절했던 내가 깨어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어둑한 천장을 보는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머리맡에 있을 손목시계ㅡ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내 머리맡에 놓여져 있었다ㅡ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어들어 시간을 보니 벌써 짧은 시곗바늘이 9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아홉 시, 시간 관념이 철저한 곳이 우리 집이었기에 지금와서 저녁식사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요구하는 배의 호소를 들으며 깊은 한 숨을 내쉬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아홉 시면 구성원들이 모두 교대로 야간 순시ㅡ대부분이 남자들에게 맡겨진다ㅡ를 하거나 수면을 취하고 있을 시간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몸의 이상을 확인하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는 시작하기도 전에 시도는 끝이 나 버렸다.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소름끼칠 듯한 한기에 저절로 오른팔에 서리병이 발병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정말이지 평생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원망스럽게도 이 세계는 나에게 서리병을 안겨주었다. 지식 한도 내에서 생각 해 본 결과, 내 증상은 이제 막 초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치료만 잘 받는다면 충분히 완치 될 것이고, 이후에는 그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의 일이다. 지금은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오른팔 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내 정신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나의 뇌는 끊임없이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보내고 있었다.

 뇌가 명령을 보낸다고 해도 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나다.

 한낱 중요 장기에 속할 뿐인 뇌가 이 몸을 완전하게 제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단 시간만에 내 의지대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시야에 오른팔의 모습이 천천히 들어왔다.

 어깨 언저리까지는 내가 기절한 후에 갈아 입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연녹색 옷의 소매가 보였지만 그 아래부터는 확연하게 다른 풍경이 보였다. 다른 세계들 중에서도 오로지 삼계(三界)에만 존재하는 계절인 겨울에만 볼 수 있다는 서리와 비슷한 것이 육안으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팔뚝에 생겨 난 상태였다.

 아니, 실제로 그것은 서리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입자들의 군집이었다.

 서리병이 오른손까지 마수를 뻗친 것은 아닌지 서리는 손목 아래로 약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거리까지만 생겨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겠지만, 이 상태로 보아서 내 증세는 초기가 아닌 중기에 막 접어든 상태인 것 같았다. 중기라면 분명 신체의 대부분을 잠식했을 터인데 아직 팔조차도 잠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약간 미심쩍었지만 증세가 심각하다는 것만은 부정 할 수 없었다.

 본래 서리병이 타 질병들과는 달리 악화되는 속도가 수 배 이상 빠르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서리병에 걸린 지 단 하루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증세가 중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제 살 수 있는 확률은 대략 반반. 높은 확률이기는 하지만 치료를 받기 전에 증세가 말기까지 악화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 세계에서 의사라는 직업이 상당히 귀하기 때문에 한 번 의사를 부르려면 적어도 나흘 이상은 걸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상태로 간다면 내일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무심코 픽, 웃으며 읊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래 살거라고 말했는데, 이래서야……."

 

 이 말을 하자마자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아니, 실제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끝까지 살아남게 될 것이다. 말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로서 약속을 하면 그것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두려움이 엄습하는 걸까.

 덜컹, 덜컹.

 바람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 팔에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햇살이 비치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하늘은 먹구름에 가려져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위해서인지 유난히 빠르게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의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긴 침묵을 깨고, 나의 입에서 한 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어서, 흘려버린 후에 저절로 후회하고 말았다.

 "……무서워, 이런 건."
 투툭.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온다.

 그러고보니, 이 곳의 우기가 시작되는 것이 오늘이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 올랐다. 이제 몇 개월 동안 이 세계에서는 햇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 '지역'이다. 경계선 너머의 네 지역에서 사는 이들은 열 두달 중 겨우 두 세달 동안 햇빛을 볼 뿐이다. 그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이면서도, 몇 개월 동안 햇빛을 보던 사람이 갑자기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이미 십 여년이 넘게 이 곳에서 살아 온 내게는 그런 불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햇빛을 그리워한다는 어이없는 상황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햇빛이 그리워졌다.

 

 이제, 창 밖에는 짙은 회색을 띈 구름과 그것이 쏟아내는 빗방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해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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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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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부지기]네드발백작 | 작성시간 08.09.04 뭐 겉뿐만 아니라 체내도 얼어버린다면 그야말로 불치병이겠지요.
  • 작성자[하칸]미나에 | 작성시간 08.09.03 잘 읽었습니다. 어엇, 주인공이 서리병에 걸려버리다니. 어쩌다가 저리 된 걸까요. 아, 그나저나 서리병의 치료방법은… ?
  • 답댓글 작성자J.Ro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9.03 설정하지 않았고, 설정 후에도 공개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세계관 짜려고 시간을 낭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 작성자[산스]風〃엘 | 작성시간 08.09.03 몸이 얼어붙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쨍-하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 에, 해가 사라졌으면 좀 더디게 진행되지 않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J.Roa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9.03 병의 경과를 대략적으로 설명 해 드리자면, 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바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발병 원인이 된 신체부위가 먼저 잠식당하고, 개인 차에 따라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엿새 정도가 한계입니다. 엿새 전에 심장이 얼어붙게 되면 그 전에 사망 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온도는 병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영상 30도 이상에서도 걸릴 수 있는 병이기 때문이죠. 어차피 이 세계의 특성 상 그렇게 온도가 높아질리는 없습니다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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