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에메로드]]나르실리온-태양과달의노래#127

작성자エメロ-ド♡|작성시간08.10.21|조회수101 목록 댓글 26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아앗-!"

-크악!


촤아악―.

아무리 괴물 화 된 몸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에 가까운 키메라들을 베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달려든 키메라들을 베어낼 때 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옛날의 나였다면 이들을 주저하지 않고 베었겠지. 나는 겉으론 항상 모두를 위해 상냥하게 대하는 척 하지만 실제론 나밖에 모르는 가식적인 신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달라졌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인간과 악마족, 천족 모두가 좋아. 서로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각자의 생명을 갖고, 각자의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어. 뭐 아직까지 천족은 본 적이 없지만 그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러나 그것을 쓰레기라 비하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밟는 라곤, 그의 방식은 잘못 됐어! 만약 그의 방식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나의 목숨을 주었을 거야. 그의 복수를 향한 마음은 정당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의 방식이 올바르지 않은 이상 나는, …… 그를 베어야만 해.


"몇 층 째죠?!"

"까먹었습니다."

"……."


검을 거두고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묻던 나는 아리스의 대답에 순간 휘청거릴 뻔했다. 아, 아니, 아리스라면 왠지 '잊어버렸습니다.' 라던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까, 까먹었다니. 뭔가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이 탑은 라곤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이 2층짜리 탑이었다 하더라도 안은 100층짜리일 수도 있죠."

"100?!"


마찬가지로 검을 거두던 시아의 말에 나는 경악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100층이라니! 층마다 키메라 다섯 마리씩 있다 하더라도 500마리잖아?! 오, 제발.

그런데 내가 놀라든 말든 시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아주 부드러운, 데카와 비슷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라곤은 우리를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라곤이 준비한 것 치곤 방비가 허술하다고나 할까요. 아마 그의 참모인 아이린이란 여자가 급하게 준비해둔 몬스터, 및 키메라겠죠. 그렇다는 건 그는 지금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느라 이쪽엔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단 겁니다."

"!"


시아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경직했다.

설마 슈렌과 루이엘이 라곤과 싸우고 있는 건가……? 물론 아닐 수도 있어. 대륙에 키메라를 보내느라 바쁜 걸 수도 있지. 하지만 왜 여태까지 슈렌과 루이엘이 보이지 않는 거지? 분명 그들도 아이린의 방해를 받아 속도가 느려져 분명 우리와 만날 때도 됐는데 왜 만나지 않고 있는 거야.


"…… 그들이 이겨주면 고맙겠지만 아무튼, 라곤이 이쪽을 신경 쓰기 전에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네."


나의 마음을 읽은 걸까. 나는 시아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층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시아인데도 왠지 데카의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둘은 원래 하나. 그렇기에 서로 이어져 있어서 일까. 그래, 데카가 시아를 보낸 것은 어쩌면 자신도 우리를 도와 자신도 싸우고 싶다는 심정에서였을 지도 모른다.


"?!"

"로실리아씨!"


그 때였다. 무색의 기운에 의해 내 몸이 갑자기 허공에 붕 뜨는 듯하더니 내가 어떻게 저항도 해보기도 전, 나는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힌 듯한 자세로 이상한 곳에 빨려 들어갔다.


"큭, 이번엔 또 뭐야?!"


그리고 이상한 공간에 빨려 들어온 직후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나는 뒤를 톡톡 털며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 봤다. 온통 캄캄하고 아무것도 없는 기분 나쁜 공간. 이곳은 분명 라곤의 부하 헬의 '헬 스페이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신성력이 존재할 수 없는 이 공간에 들어오자 룬-크리스는 어느새 목걸이로 얌전히 변해 있었다. 크, 골치 아픈데.

나는 왼손에 데카가 줬던 무기를 들고 오른손에 고유 바람의 마력을 이용해 소드를 생성했다.


"흐응, 또 그 무기 그대로인가?"

"누구누구 덕분에 신성력을 쓸 수가 없거든."


낮고도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 나는 투정부리듯 비아냥거리며 뒤를 돌아서서 어느새 나의 뒤로 걸어온, 어깨너머까지 흘러내려 핏물처럼 찰랑이는 투명한 선홍빛 머리카락의 여자, 헬에게 말했다.


"미안, 미안~ 이 공간이 좀 그렇잖……."

"닥쳐, 슈로이젤."


헬은 투명하게 곱실거리는 물빛 머리카락의 남자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 하아- 저 커플도 여전 하구나. 왜 레아, 이안 커플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걸까. 뭐 이쪽은 저 슈로이젤이란 남자의 짝사랑 같기도 하지만.


"오늘은 방해꾼도 없으니 끝을 내주지."

"'바라던 바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난 정말 별로 안 바라거든, 그냥 보내주면 안 돼?"

"닥쳐."


나의 말을 거칠게 끊은 그녀가 전에 봤던, 피를 응고시켜 만든 듯한 붉은빛의 거대한 도끼를 한 손에 소환하자 나는 그 위용에 침을 꼴깍 삼키며 일단 바람의 마력으로 형성된 검을 흩뿌리듯 사라지게 한 뒤 이 공간의 공기를 압축해 투명한 검을 만들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공간의 일그러짐으로 인해 검의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어느 정도 그녀의 집중력을 흐릴 수 있을 것이다.


"우와, 우와 검이 보이지 않아! 신기하네~."

"……."


슈로이젤이 손뼉을 치며 정말 신기하단 듯 눈까지 동그랗게 뜬 것에 비해 헬은 예의 그 핏빛의 도끼를 들고 자세를 낮추며 흥미롭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아마 저 여자는 내가 전에 상대했을 때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때는 페릴의 기억도 찾지 못했을 당시의 나니까. 그 땐 정말 처참하게 당할 뻔했지. 세뉴렌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었을지도.

크, 이 상황을 빨리 끝나고 슈렌, 루이엘과 만나고 그 빌어먹을 아이린에게 세뉴렌에 대해 물어야 돼. 죽였다면… 그 여자, 바로 죽여 버리겠어. 일단 저 여자가 나의 능력을 파악하기 전 빠르게 끝을 내자.


"!"


나는 주위의 바람을 나에게 두르고는 그대로 미끄러지듯 그녀의 뒤로 이동했고 그녀는 내가 내리치는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크게 뜨여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 기세를 몰아 그녀에게 맹공을 계속했다. ―그녀의 무기는 경악할 정도로 크다. 아무리 그것을 한 손으로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다 하더라도 상대가 가까이에 있으면 그만큼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 나는 그것을 이용해 그녀에게 가까이 붙어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검인지라 그녀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져 있는 듯,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붙지 말고 꺼져!"

"우악!"


그리고 계속 연이은 나의 공격을 피하던 그녀는 결국 화가 났는지 나를 향해 주먹을 날렸고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주먹에 엄청난 양의 기가 몰려 있었다.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못 일어날지도?! 아, 아니 못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야, 그냥 즉사일지도 모르겠어! 제길 뭐 저렇게 우악스러운 여자가 다 있어! 그리고 내가 조금 멀어진 사이, 그녀는 씨익 웃으며 거대한 도끼로 나를 내리쳤다.


"힉."


나는 왼 손을 내려 바람으로 땅을 강하게 내리치며 그 반동으로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달려오는 헬을 다시금 바람의 반동을 이용해 피하며 그대로 오른 손을 앞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매직 애로우!"


위력은 약하지만 빠른 공격이 가능한 마법. 나의 외침에 곧 압축된 공기가 그대로 화살처럼 그녀를 향해 날아갔고 그녀는 그것을 도끼를 들지 않은 왼 주먹을 내질러 그 공기를 그대로 흩어버렸다.

크, 뭐 저런! 나는 다시 반동을 이용해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생각 같아선 검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아낸 후 그대로 공격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공격이 너무나도 묵직하고 강했기에 받아냈다간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 같았다. 전에도 그랬으니. 그렇다면 시야를 흐리게 만들어서!


"다크 미스트!"


나는 다시금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곧 주변에 검고 자욱한 안개가 소환되어 나와 그녀를 감쌌고 그녀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니 공기의 흐름만으로 나의 움직임을 읽으려는 건가? …… 지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간 그대로 두 동강 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변의 공기로 나의 기척을 최대한 지우며 가만히 손을 그녀가 있는 쪽으로 뻗었다.


"폭발!"


콰아앙―!!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의 근처를 제외한, 이 검은 안개가 덮고 있던 공간이 통째로 날아갈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몸을 빼 슈로이젤을 경계했다. 그는 헬이 있던 곳을 보며 뭐라 소리치고 있었으나 그 소리는 큰 폭발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이런 귀여운 폭발로 나를 물리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인데."

"!!"


잠시 후, 폭발로 인한 연기가 거두어지자 그곳을 힐끔 보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도의 폭발이라면 적어도 화상은 입어야 할 텐데 그녀의 몸은 멀쩡했다. 다만 아까와 바뀐 게 있다면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풀러져 있는 것,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선홍빛의 커다란 날개―라지만 그냥 형상이 날개처럼 생긴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던 것. 저 오른쪽 눈, 무슨 힘을 숨기고 있던 거지? 왼쪽 눈이 머리색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깊은 푸른빛인데 비해 그녀의 숨기고 있던 오른쪽 눈은 그녀의 머리색과 딱 어울리는 붉은 핏빛이었다. 이상하게도 아까까지 헤실 거리고 있던 슈로이젤은 씁쓸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라고는 말했지만 굉장한 폭발이네."

"!"

"너를 너무 얕봤어. 미안! 아아, 떨려. 드디어 나를 재밌게 해 줄 사람이 나타난 건가? 라곤님 다음으로 오랜만이야, 이런 느낌!"


저 여자, 라곤과 싸운 적이 있었던 건가?


"재미있어. 하하핫! 아, 네 이름이 뭐였지?"

"로실리아. …… 나 진짜 바쁜 사람인데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

"미안하네~."


짤막한 말을 마친 헬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이건, 아까처럼 피할 수도 없어!!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간신히 그 공격을 피했으나 그녀는 도끼를 내리치던 중 방향을 틀었다.


"힉!"


제길! 나는 그 짧은 시간 최대한 공기를 압축하여 대순대로 굵고 큰 소드를 만들어 그 도끼를 막았다.


"보이지 않기에 어느 정도 인가했더니, 꽤나 굵은 검이었네."

"크, 큭."


나는 헬의 힘에 밀리지 않도록 두 손은 검을 잡은 채 뒤는 뒤의 공기로 받쳐 간신히 버텼으나 헬의 괴력이 그대로 전해져 머리가 띵했다. 도대체가 겉보기엔 저렇게 가늘고 약해보이는 여자에게서 어떻게 이런 괴력이 튀어나오는 거야? 기를 마치 자기 수족처럼 다루고 있는 건가.


"보기보다 힘세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큭."


'제길 난 힘이 센 게 아니라니까!!'


그녀는 정말 즐겁다는 표정으로 도끼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녀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더욱 활짝 펼쳐졌다. 이를 악 물고 있던 나는 슬슬 한계를 느껴 양 옆의 공기로 나와 헬을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거칠게 밀었다. 물론 나는 그대로 옆으로 밀렸으나 역시나 밀리지 않은 헬은 그대로 날개를 퍼덕여 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하앗!"


나는 나에게 바람의 마력을 둘러 나 역시 빠르게 날아 헬을 피하며 소드를 채찍처럼 늘려 헬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는 도끼를 휘둘러 채찍을 받아쳤다. 크, 저 여자와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언제까지 도망칠 셈이냐!"


그런데 그 때, 그녀의 외마디 외침이 들리는 듯하더니 곧 그녀는 날개 짓을 멈추고 착지하더니 땅을 가를 기세로―뭐 여기엔 땅과 천장의 경계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도끼를 내리쳤고 나는 보이지 않는 기운에 발목을 잡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야야…."


그 보이지 않는 기운은 계속해서 나의 발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자 헬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그대로 나를 찍을 기세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 남길 말은 없나?"

"찍을 수 있다면 찍어 봐."


그녀의 말에 나는 나 역시 데카의 무기를 들어 그녀를 겨냥하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비웃듯 피식 웃더니 그대로 도끼를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 움직이지 못할 테지.


"뭐, 뭐야?"

"이 공간은 생각해보니 공기로만 가득 찬 공간이잖아. 당신이 신성력을 통제한 것처럼 나 역시 이곳의 공기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고. 물론 당신이 방심할 때만 가능하겠지만."

"크큭, 이 놈!!"

"자, 이제 날 이곳에서 내보내 주실까? 아, 그리고 슈로이젤씨, 당신도 움직이시지 않는 게 좋을 거 에요. 이거, 마력을 조금만 넣어 주면 바로 발사되거든요."

"크!"


나의 말에 슈로이젤은 표정을 찌푸리며 헬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뭘 망설이는 거야! 당장 공격해!"

"하지만!"


저런, 저런. 역시 슈로이젤의 짝사랑이었던가. 헬의 말이 정말이지 내 일도 아닌데 그녀의 말이 참으로 무심하게 들린다. 그런데 그 때였다. 갑자기 헬이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뜸과 동시에 어두컴컴한 이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강제로 이 공간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크, 크윽! 누구냐!!"

"헬!"


나는 이 공간의 공기의 흐름이 허물어지자 헬을 속박하고 있던 공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이 공간을 파괴시키려는 누군가의 마력에 대항하려다가 결국 밀려 힘없이 주저앉았고 슈로이젤은 얼른 달려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정말 저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이런, 이런. 이런 곳에 숨어 계셨습니까? 헬. 여전하시군요.”


순식간에 공간이 깨지듯 부서져 내리며 장소가 아까 우리가 있었던 탑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나는 헬에게 은빛 검을 겨눈 시아를 올려다봤다.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저 말투, 왠지 데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녀는 강제로 마력이 깨진 것이 분한지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별의 투시자……?”

“시아입니다만- 지금은 형의 의지입니다."

"그런가. 별의 투시자까지 온 건가."


시아의 말에 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시아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라곤과 함께 나간 겁니까?"

"…… 당신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를, 사모하셨습니까."

"!"


시아, 아니 데카의 물음에 헬은 쓸쓸히 표정을 굳혔고 그와 동시에 헬을 부축하고 있던 슈로이젤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는 알고 있었겠지. 역시 짝사랑이었던 건가……. 그러나 곧 시아가 조용히 일어나 검을 들자 슈로이젤이 일어나 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여태껏 보였던 가벼운 목소리가 아닌 무겁고도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헬에게 아마테라스를 나오자고 말했습니다. 부디, 별의 투시자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무슨 바보 같은 말……."

"부탁드립니다. 헬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헬이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슈로이젤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크게 말했다. 헬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이지, 슈로이젤이 자신을 좋아한단 거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건가? 둔하긴!


"그럼 엘나론 족의 슈로이젤이여. 그대에게 벌을 내리겠습니다."
"어떤 처분이든 받겠습니다."


그러자 시아는 짐짓 차가운 표정으로 슈로이젤을 내려다보며 말했고 슈로이젤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손으론 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대로 아마테라스에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평생 죄인, 헬을 그대가 감시하도록 하세요. 그게 제가 내리는 벌입니다."

"에?"


'우왓.'


시아―데카의 판정에 슈로이젤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시아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슈로이젤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그 벌, 감사히 받겠습니다."


역시 데카. 정말 인자한 자다. 옛날엔 악마족 하면 나쁜 이미지가 강했지만 정말 데카를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어머니, 주신 엘리아나 같은 자. 어머니 역시 인간족, 악마족, 천족 모두를 깊이 사랑하시고 돌봐주셨지. 데카 역시 같은 마음일지도. …… 내가 없었다면 라곤 역시 데카와 같은 성품을 갖게 되었을까? 그 시릴이란 여자아이에 의해. 나의 죄가 너무나도 무겁구나….


"기다려요! 저는……."


그리고 우리가 다시 층계를 오르려던 찰나 헬이 벌떡 일어나 시아에게 다가가며 뭐라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푸욱―.


"?!"


눈 깜짝할 새, 살을 뚫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붉은 선혈이 뿜어졌다. 나는 물론이고 모두는 그 소리에 눈을 크게 뜬 채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피의 비를 뒤집어 쓴 헬은 눈을 크게 뜨며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밀친 남자를 바라봤다.


"괜… 찮아? 헬…."


짧은 말. 붉게 물들어버린 물빛의 남자, 슈로이젤은 미소를 지으며 헬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긴 창 같은 날카로운 손톱이 빠지자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키메라!"


그리고 다시금 헬을 향해 날아가는 긴 손톱을 케인이 거칠게 달려가 베어버리자 천장에 붙어 있던 키메라는 괴성을 내며 땅으로 착지했다. 그러나 그 키메라는 이내 시아의 은빛 검에 의해 그대로 두 동강나버렸다. 그리고 헬은 믿을 수 없다는, 아니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듯 아까 그대로의 얼빠진 표정으로 피바다 속에 쓰러져있는 슈로이젤을 가만히 안아 올리며 중얼 거렸다.


"슈로… 이젤?"

"쿠, 쿠훅, 그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거야?"


헬의 말에 슈로이젤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상황이 되도 저 남자는 헬을 구했다는 것 하나로 웃을 수가 있는 건가……? 대체 카인도 그렇고 저 남자도 그렇고.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던 시아는 괴로운지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돌렸고 아리스 역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케인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마 카인이 떠올라서 일지도. 나 역시… 절대로 떠올리기 싫은 그 날이 떠오르려 하는걸.

슈로이젤은 현재 가슴이 완전히 꿰뚫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조차 신기한 상황이었다. 악마이기에 내 신성력을 사용하여 치료했다간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누가 죽어 가는 것을 구할 수 없는 건가……? 루이엘이 있었더라면.


"왜, 왜?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돌처럼 차갑던 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슈로이젤의 물빛 머리카락에 가만히 떨어져 흩어졌다. 그녀의 안대가 풀어진 핏빛 눈동자는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진홍빛 날개가 부드럽게 슈로이젤을 감싼 채 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러자 슈로이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잔잔한 물빛 눈동자로 헬을 바라봤다.


"헬은, 내… 달링… 이잖아. 그러니까 지키는 게 당연…… 큭."

"……!"


슈로이젤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그 때의 카인처럼 피를 토해내자 헬의 눈동자는 슬픔으로 커졌다. 그리고 그녀는 피로 물든 슈로이젤의 새하얀 손을 꼭 잡으며 소리쳤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슈로이젤.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마. 제발, 내가, 내가 잘못 했어……!! 나 때문에 네가, 네가……! 미안해, 슈로이젤……!!"


아까 싸울 때만 해도 그렇게 무섭게 보이던 여자가 한낱 가냘픈 소녀로 보였다. 슈로이젤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선 눈물이 한 방울 힘겹게 흘러내렸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것이란 걸. 카인과, 그 때와 똑같잖아, 이런 건……!!


"사랑해… 헬."

"슈로이젤!!"


입에 피가 가득 고여 제대로 말을 못하던 슈로이젤은 결국 겨우 말을 마치고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의 미소는 여전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켰다는 그 기쁨, 안도감. 그것만으로 그는 저런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인가. 미친 듯 소리치는 헬을 보며 나는 헬의 모습이 카인이 죽을 당시의 나와 케인의 모습을 닮았단 생각이 들어 괴로움에 눈을 질근 감았다.

부디, 편히 쉬시길…….


"살려드릴까요? 그 분을."

"!"


그러나 곧 이 무거운 공기를 깨며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는 키메라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의 뒤쪽에 당당한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아마 아까 그 키메라, 저 여자가 보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 저렇게 나타나 초를 치는 그녀에게 정말 화가 났지만 일단 세뉴렌에 대해 묻고자 그녀에게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헬이 슈로이젤의 피가 묻은 손으로 가만히 눈물을 닦아내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슈로이젤의 피가 묻어서인지 그녀의 선홍빛 머리카락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하나만 묻지. 방금 키메라, 당신의 소행인가?"


헬의 물음에 아이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님도 아시잖아요? '배신자'는 바로 죽일 것. 아아, 물론 슈로이젤님이 죽으신 건 안타까운 사고였어요. 전 헬님만 죽이려 했는데."


저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아이린의 아무 감정도 깃들지 않은 붉은 눈동자엔 슈로이젤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내가 거칠게 룬-크리스를 드는 순간 헬이 거대한 도끼로 나의 앞을 내리 찍어 나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녀의 뒤엔 선홍빛의 날개가 구슬프게 울듯 넓게 뻗어 떨고 있었다.


"너 따위가 살리는 슈로이젤은, 필요 없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시아, 케인, 아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올라가십시오."


파앗―.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린과 키메라들, 헬은 순식간에 무색의 기운에 감싸져 사라져버렸고 나는 직감으로 헬이 헬 스페이스로 그들을 빨아들였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시아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 슈로이젤의 이마에 손을 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훌륭했습니다, 그대는. 헬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지켜주세요."


그리고 말을 미친 그는 일어서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라갑시다."

"네."


아마 헬이라면 무사할 거다. 뭐 아까 헬 스페이스가 무력화된 덕분에 타격이 꽤나 큰 듯 했지만 그래도 아이린 정도라면 그녀 혼자서도 충분할 거야.

나는 계단 쪽으로 달리며 힐끗 슈로이젤을 돌아봤다. 기뻐 보인다, 그는. 카인도 기뻤을까? 케인에게 이스피리아를 줄 수 있었던 것을 정말 기뻐했을까? …… 편히 쉬세요, 슈로이젤. 당신은 정말 훌륭하니까. 좋아하는 여자를 끝까지 지켰잖아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치 장난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어떻게 보면 슈로이젤과 슈렌이 꽤 닮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슈렌은 결코 죽게 하지 않아!!

 

 

 

 

첨부파일 진혼가.wma

 

 

이번 화는 10페이지 분량입니다(...)

급전개 만세 만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エメロ-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0.22 항상 여자가 문제군요. (응?)
  • 작성자[오를]"soul。 | 작성시간 08.10.22 아아... 슈렌이랑 루이엘은 언제나올까요?ㅠ 빨리나왔으면 좋겟는데 말이죠...
  • 답댓글 작성자エメロ-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0.23 다음화? 아니면 다다음화? 에 나올 것 같아요 'ㅅ'! /감사합니다!
  • 작성자두르]산새 | 작성시간 08.10.23 아이린쳐죽일... 그나저나세뉴렌은 어떡해되었을까여 궁금 궁금 이번화즐감했어요^^
  • 답댓글 작성자エメロ-ド♡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0.23 으응, 곧 어떻게 됐는지 나올지도 몰라요~. 우훗,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