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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헌 (康純)

훈구파[勳舊派]

작성자康大熙|작성시간09.11.08|조회수40 목록 댓글 0

 

 

 

 

                                                   훈구파[勳舊派]

 

 

 

조선 전기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찬위(簒位 : 임금의 자리를 빼앗음)를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

 

〔연원과 형성 과정〕

 

훈구파라는 명칭은 원래 훈구공신(勳舊功臣)·훈구대신(勳舊大臣) 등 오랫동안 신종(臣從 : 임금 곁에서 관리로 지냄)하면서 공로를 많이 세웠다는 의미를 지닌 일반 용어였으나, 세조대 이래 기성 집권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특히, 성종대 후반 이후 대두한 신진 정치세력인 이른바 사림파(士林派)와 대비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쓰였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 총신(寵臣)들로서 세조대 이후 왕의 교체와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걸쳐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정치 실권을 독점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공신전(功臣田)과 과전(科田), 농장(農莊) 등을 통해 대규모의 사회경제적 기반도 소유하였다.

즉,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홍윤성(洪允成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조석문(曺錫文정창손(鄭昌孫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구치관(具致寬) 등으로 대표되는 부류가 이에 속한다.

이 중에는 집현전을 거쳐 성장해 ≪경국대전≫·≪동국통감≫·≪동문선≫·≪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관찬사업에 참여, 왕조의 통치이념을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 주류는 대개 세조대 이래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집권 정치세력들이었다.

세조는 선양(禪讓)의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 집권이 성리학적 명분과는 크게 어긋났으므로 사육신의 단종복위 음모 사건, 금성대군(錦城大君) 역모 사건 등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때문에 세조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그 결과 세조는 소수의 측근공신들에게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후 세조의 전제적 왕권 강화와 부국강병 정책의 추진 과정에 협조한 핵심 측근공신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집단적 정치세력인 훈구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어갔다.

 

〔훈구파의 정치적 위상 변화〕

 

세조대 이후 훈구파의 정치적 위상은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세조대 초반에는 집권과 즉위에 수반된 논공행상으로 1453년(단종 1) 정난공신 (靖難功臣)과 1455년(세조 1)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된 훈구계열은 공신전을 분급받았고, 이후 의정부 정승과 이조·병조의 판서 등 요직을 독점, 인사권과 병권(兵權)을 장악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강화된 왕권 아래 지지세력에게 베풀어진 지위 보장은 잠재적으로 진행되어온 집권 훈구계열의 권귀화(權貴化) 추세를 촉진, 가문세습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훈구계열의 정치적 지위는 세조대 후반에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즉, 세조의 전제적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발해 1467년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한명회·신숙주·김국광·노사신(盧思愼) 등 일부 훈구대신들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으로 이들은 난의 수습 과정에 적극 참여할 수 없었고, 난 직후에 내려진 적개공신(敵愾功臣)에서도 제외되었다.

반면, 이시애 난의 진압 과정에서 공로가 컸던 남이(南怡) 등 신진세력이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태종의 외손으로서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던 남이 등 신진세력의 비판과 도전으로 훈구계열의 정치적 지위는 다소 동요를 보였다.

더욱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지 1년도 못 되어 세조가 죽고 어린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죽음으로 초래된 커다란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모색하면서 훈구계열에게 규제와 압력이 가해졌다. 그 과정에서 남이 등 신진세력이 예종의 왕권강화 시책에 적극 호응하게 되어 이들간의 정치적 대립과 알력은 본격적으로 노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세조 말년 이래 다소 약화되었던 훈구대신들의 정치적 지위는 남이가 한명회·노사신·김국광 등 훈구대신들의 제거를 모의한다는 유자광(柳子光)의 고발로 남이 등 신진세력이 제거되면서 다시 만회되었다. 그 결과 이시애의 난으로 정치적 실권이 잠시 약화되었던 세조 측근을 중심으로 한 훈구계열은 정치 전면에 재등장하였다.

이들은 남이옥사가 일단락되자, 1468년(예종 즉위년)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크게 강화되었다. 더욱이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어린 성종이 즉위해 세조비의 섭정이 이루어지게 되자, 훈구대신들을 견제할 세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들의 정권독점 현상은 크게 심화되었다.

특히, 성종대 초반인 1471년(성종 2) 이루어진 좌리공신(佐理功臣)의 책봉 과정에서는 과거의 공신 피봉자가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부자·형제·숙질·인척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됨에 따라, 결국 훈구파를 확대 재생산하게되면서 그 정치적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아울러 훈구파는 1467년 이래 승정원 원상제(院相制)를 통해 특정한 직사(職事)를 가지지 않고도 정치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갔다. 성종이 매사를 원상인 한명회·정인지·신숙주·정창손·홍윤성 등 훈구대신들의 자문에 의해 처결하게 되자, 이들은 성종 초반까지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권신세력으로의 변질〕

 

이러한 정치적 특권과 함께 통혼 관계 등을 통해 그 기반을 다져갔던 훈구파 가문들은 이후 명족의식(名族意識)을 지니면서 세습적 지위를 확보해갔다. 특히 한확(韓確)은 성종의 생부인 덕종(德宗)과, 한명회는 예종·성종과, 한백륜(韓伯倫)은 예종, 그리고 윤호(尹壕)는 성종과 각각 국혼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일부 세력은 왕실과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서의 지위도 확보, 왕권과 밀착하면서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훈구파로 대표되는 일부 특권적 집권가문들은 결국 권귀화하게 되었고 이로써 관료제의 운영에서 신분적 특권이 발휘되면서 정치 권력의 비대화·집중화를 가져왔다.

훈구파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15세기 후반 이후의 정국은 왕조 개창 후 약 1세기만에 관료사회에 특권적 부류를 양출, 과전과 공신전으로 기반을 다진 세습적 관료 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형세로 변화해갔다. 이러한 정치 체제는 훈구파의 권귀화와 척신계(戚臣系)의 새로운 등장으로 정국이 응고되는 추세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지배 체제의 한계성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집권 훈구파가 권력을 바탕으로 사리(私利)를 추구하면서 권귀화·보수화의 추세는 심화되었다. 이에 관료제 운영은 변칙이 심해져 권력이 훈구파 계열 중앙권신들에게 집중되는 형세로 발전해갔다. 아울러 이들과 연고가 있는 지방에 대한 경제적 사익추구 과정에서 경재소(京在所)·수령·유향소(留鄕所) 등으로 연결된 비리 기반이 형성되면서 지방 사회 통제 방식도 크게 취약되어갔다.

 

〔사림파의 등장과 대립〕

 

향촌구성원들에 대한 수탈이 심화되면서 초래된 향촌 사회의 동요는 국가 기반은 물론, 향촌지주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크게 위협하였다. 이러한 추이 속에서 소수 대귀족에 의한 권력 독점과 특권층의 사리추구를 배제하는 것을 학문의 본령으로 하면서 고려 말 대귀족·대지주 중심 체제를 극복하는 실천 논리로 주목되었던 성리학적 공도론(公道論)이 재인식되었다.

그 주체는 향촌 사회에서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성장하던 재지품관층(在地品官層) 가운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즉 이들이 흔히 훈구파와 대비해 이른바 사림파로 불리는 세력이다. 이들은 같은 양반 신분이면서도 주로 과전과 공신전 등을 통해 경제 기반을 확대해갔던 훈구계열과는 사회경제적 이해 관계와 이에 따른 정치적 견해도 크게 달랐다.

한편, 성종의 왕권강화 과정에서 훈구파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약화되면서 사림파는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림파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의 확립을 추구하여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정착시키는 등 향촌 사회 내부 구성원의 안정과 향촌지주로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문에 훈척계(勳戚系)의 구조적 비리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관철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집권 훈구파는 사림파라는 새로운 세력의 대두와 함께 견제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써 야기된 두 정치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은 결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이후 수차에 걸친 사화를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鄭杜熙, 一潮閣, 1983)
≪참고문헌≫ 朝鮮初期 社會經濟硏究(韓永愚, 乙酉文化社, 1983)
≪참고문헌≫ 韓國社會史硏究(李泰鎭, 知識産業社, 1986)
≪참고문헌≫ 韓國儒敎社會史論(李泰鎭, 知識産業社, 1989)
≪참고문헌≫ 15世紀 後半期의 鉅族과 名族意識(李泰鎭, 韓國史論 3, 1976)
≪참고문헌≫ 院相制의 成立과 그 機能(金甲周, 東國史學 12,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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